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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360화『남부 전쟁⑪ 리버티스 항복』

360화『남부 전쟁⑪ 리버티스 항복』

 

리버티스 토르트엔트

 

에이길 님, 큰일입니다!”

 

방 안에 세리아가 달려들어왔다.

 

으읍!”

 

깜짝 놀라 내 남근에 봉사 중이던 마타가 힘차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

 

마타가 큰일났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의 작은 이빨로는 내 남근을 다치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적절한 자극이 되어 정액이 나오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잠깐만, 최소한 다 쌀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까?”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싸시면서라도 지금 당장 봐주셔야 합니다.”

 

세리아는 내 하반신에 달라붙은 마타 위에 이불을 덮으면서 편지를 내밀었다.

 

그 편지는 군데군제 찢어지고 피처럼 보이는 것까지 묻어 있었다.

좋아보이진 않는군.

 

에이리히 씨가 보낸 연락입니다. 제 눈앞에서 남유글리아군으로 위장한 사자가 성문 안으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부상이 심해 금방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만…….”

 

그 녀석이 목숨까지 걸면서 가져다 준 거니까 지금 바로 보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 이거군.

 

꿀꺽꿀꺽……으으읍…….”

 

마타가 열심히 봉사하는 느낌에 정신이 팔리는 와중에도 피투성이가 된 편지를 열었다.

 

 

내용은 편지의 상태보다도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건……솔직히 큰일났군.”

저도 봐도 되겠습니까?”

, 사정이 멈췄습니다.”

 

착한 세리아는 나보다 먼저 뜯어보지 않은 모양이다.

내 옆에서 고개를 내민 채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명으로 왕국군 전 군대가 왕도로 집결……사실상 원군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라. 그럴 수가…….”

 

세리아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모습의 세리아를 보고 싶진 않기 때문에 가볍게 옆구리를 간지럽혀 줬건만 반응이 없었다.

 

다들 불러와 줘. 기드가 여자를 안고 있으면 딱 5분만 기다려 주고.”

 

세리아는 짤막하게 답을 하고 금세 뛰쳐나갔다.

 

 

한밤중, 잠옷 차림의 화이트 대통령까지 회의실에 모였다.

5분 기다리게 만든 기드를 세리아가 노려보는 와중에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르도니아 측에서 원군은 오지 않습니다.”

 

한 순간의 정적 이후, 경악과 곤혹이 뒤섞인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건 원군 시기가 늦어진다는 뜻인가?”

 

브라이언이 천천히 물었다.

야위어 보이는 건 아마 지난 패전 이후 마음 고생이 심해서 그런 것이리라.

 

아뇨, 더 이상 오지 않을 겁니다.”

 

늦어지는 거라면 에이리히는 그 기간까지 포함해서 알려줄 게 분명하다.

그게 없다는 건 원군은 절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약속과 다르지 않나!”

고르도니아 측 원군을 기대할 수 있다길래 농성전을 선택한 거였건만!”

 

내게 뭐라 해도 방도가 없다.

그리고 그 정도로 심각한 패전 이후엔 농성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텐데.

 

한동안 시끌벅적 소란이 일어났다.

세리아가 나를 감싸듯이 앞에 서 줬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불평이 날아왔다.

치유가 되니까 좋긴 하지만.

 

아무튼 원군이 없다는 걸 안 이상 전략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브라이언이 주변 인원들을 제지한 뒤 화이트 대통령에게 얘기했다.

 

다행히 시내에는 풍부한 식량, 물자가 있습니다. 성벽에 방패를 설치해 수비력을 높이고 시민에서 병사를 징용, 대규모 반격을 시도해서 적을 지치게 만들면 포위망을 파괴할 가능성은 남아있습니다.”

 

현재 적의 병력은 10만이 한참 넘는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증가 중이다.

리버티스 군은 부상자를 포함해도 3만 정도, 내 군대를 합쳐도 승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토르트엔트는 15만명 이상이 있기 때문에 몇 만 정도 임시 징병을 하면 대응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고르도니아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테지만 과연 리버티스에선 어떨지.

 

화이트 대통령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국방 장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네. 하지만 그건 자네가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서도 할 수 없는 일이네.”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나를 쳐다봤다.

 

내일 저는 긴급 회의를 열겠습니다. 하드릿 사령관께서도 아무쪼록 참가해 주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리는 화이트 대통령.

 

예에…….”

 

일단 고개는 끄덕이긴 했지만 회의라니, 뭐에 관한?

 

 

――다음날.

 

회의장이라는 곳으로 안내받은 나는 대통령과 의원, 그리고 브라이언을 포함한 고위직들의 대화를 적당히 흘려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졸만한 상황은 아닌 듯하다.

 

상황이 이렇게 나쁘단 소식은 처음 듣는데!”

그냥 좀 졌다 뭐 이런 거 아니었어!?”

군대는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냐! 이 세금 도둑놈들!”

 

정말 시끄럽기 짝이없군…….”

 

회의장에 있는 의원들의 매도도 시끄럽지만 회의장 주변을 둘러싼 시민들의 포성과도 같은 목소리도 정말 시끄럽다.

 

민중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알렸기에 이러는 것입니다. 민중은 본디 어리석은 것, 진실을 감추고 행동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레오폴트도 의론 내용에 관심이 없는 건지 웬일로 내 잡소리에 끼어들었다.

 

이래서야 분명 아무것도 결정되는 게 없겠네요.”

 

세리아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호통만 치는 회의는 대개 아무것도 결정되지 못하고 끝이 나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엔 우리에 생각과 조금 달랐다.

매도가 쏟아지는 한편, 화이트 대통령이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가 말을 꺼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정숙하시길……지금부터 리버티스 시민이 직접 뽑은 의원 여러분들께 남유글리아 제국과의 평화 교섭에 관해 보고를 하겠습니다.”

평화 교섭?”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레오폴트는 무표정을 관철하며 조그맣게 고개를 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잘 보니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던 브라이언과 짐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국 사람인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국 고위직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 패전 이후, 유감스럽게도 전황은 굉장히 불리하다고 말씀 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화이트 대통령은 과장스러운 몸짓과 손짓으로 연설을 이어나갔다.

 

이 평화 조건은 우리에게 있어 굴욕적일 수 있다는 부분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어디 보자……『군대 지휘권을 일시적으로 양도』, 『외교권을 일시적으로 양도』,『세금 제도 개정』, 그렇군.

 

이건 그냥 속국이잖소!”

침략자들한테 이 정도로 양보할 수 있을 리가 없소!”

 

의원들이 소리쳤다.

브라이언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반대하고 있었다.

 

확실히 만족스러운 조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쪽도 모든 부분에서 양보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근간, 자유와 민주주의는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어디 보자……『시민 재산의 보장』,『민주제 유지, 통치 기구 온존』이라.

 

세금을 변경할 수 있는 이상 재산은 어떻게든 뜯어낼 수 있습니다. 애초에 군대를 빼앗기면 저항할 수 없게 될 테니 조건이고 뭐고 사실상 없는 거나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저항할 여력을 다 없애버린 다음에 그냥 묵살하고 때려눕히면 그만이니까.

 

그러한 조건은 받아들여선 아니 됩니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을 시작했는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신용할 가치가 없는 놈들입니다!”

 

브라이언과 군인들이 똑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화이트 대통령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군요……그럼 국방 장관, 현재 전황과 승산에 관해 가르쳐 주게나.”

 

브라이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남유글리아군은 수도를 중심으로 대략 12만 이상의 병력을 전개해 두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 쪽은 재편성 중인 병력이 약 3, 하드릿 사령관의 부대가 1 5천……합쳐서 4 5천입니다.”

 

새삼 다시 들어도 불리한 게 명백한 상황인 걸 보고 의원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야전에서 승리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절약령을 내려 장기 농성에 대비하면서 시민들로부터 병사를 징용해 군대를 증강――.”

 

절약령? 설마 시민들의 재산에 제한을 걸겠다는 건가?”

시민들로부터 병사라고!? 설마 강제로 징병하자는 얘기는 아닐 거라 믿소!”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에 반하지 않나! 군인이 입 밖에 내뱉어선 아니 될 말일세!”

 

의원들이 소리쳤다.

 

얘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 이후, 그 이후에, 교전을 계속 이어가다보면 적의 포위망을 붕괴시키거나 최소한 항복이나 다를 바 없는 조건이 아니라――욕설은 그만둬 주십시오!”

 

브라이언이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의원들의 매도는 멈출 줄 몰랐다.

 

애초에 군이 실수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닌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가 발생할 줄 알고! 시민들이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선거에서 뽑히지도 못한 사람이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좌천이오, 좌천시켜야 하오!”

 

이제 정말 엉망이군.

세리아의 발이라도 쓰다듬어야겠어――이상하게 딱딱한데……레오폴트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말았다.

진짜 최악의 기분이군. 너도 좌천시켜 주랴?

 

 

의원들이 한바탕 소란을 군 걸 보고 대통령은 다시 단상 위로 돌아갔다.

 

국방 장관은 승리를 위한 최선책을 생각해 준 것일 테지. 나는 자네의 재능과 애국심을 존경하고 있네.”

 

난 그냥 네가 브라이언을 교수대 위로 올린 걸로밖에 안 보인다만.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승리를 얻는다 한들, 그건 정말 승리라 볼 수 있겠나? 시민을 죽게 만들고, 그들이 쌓아온 재를 불태우면서까지 얻은 승리에 의미는 있단 말인가?”

 

말은 멋지지만 실제로 실제로 도적에게 당한 개척촌을 보면 그런 말을 못하게 될걸.

 

따라서 이 평화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시민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에.”

 

정말로 시민의 이익이 남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건 말 그대로 국가의 운명을 정하는 결단입니다. 의원 여러분들은 심사숙고하신 뒤에――.”

 

그 뒷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리버티스 정부는 남유글리아 제국과의 평화――사실상 항복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넋이 나간 브라이언, 짐과 함께 사령부로 돌아왔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제 군 재편성 및 방어를 생각하기 위해 돌아다닐 필요가 없기 떄문이다.

 

낙담하지 마라. 원래 세상살이라는 게 잘 안 풀릴 때가 많지. 나도 소중한 사람을 데리러 갈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

 

그렇게 말을 건네 보아도 반응이 없다.

마치 장례식 같은 분위기라 나까지 어두워지는군.

 

물론, 이래서야 힘들겠지.”

 

조용한 우리와는 다르게 환호성 소리가 들린다.

 

화이트 대통령이 리버티스 시민들에게 평화 승낙 연설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맨 처음엔 정말 엄청난 혼란 때문에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시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히 받아들였다.

 

조만간 전쟁은 끝납니다. 그러면 식량도 옷도 예전처럼 똑같이 사들일 수 있게 될 테지요. 조만간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이제 훈제 고기만 먹으면서 버틸 필요는 없겠네.”

채소값도 떨어지는 거겠지?”

여친이랑 여행 계획도 세울 수 있겠어. 역시 크리스야!”

 

시민들은 강화 조건보다는 평소 생활 쪽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전쟁이 끝나면 임시로 부과 중이던 거래세도 철폐할 예정입니다.”

 

그것 때문에 수익이 줄어들어서 골치 아팠단 말이지.”

아무튼 얼른 전쟁부터 끝내. 군대에 있는 내 아들만 멀쩡히 돌아오면 뭐든 좋으니까.”

 

시민들은 마치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활기를 띄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자유는 그 무엇보다 존엄한 것인 데……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이어줘야만 하는 것인데……대체 왜 저스티스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

저는 시민들에게 조금 지나친 기대감을 품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짐과 브라이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를 떠났다.

 

시민들은 군복 차림인 우리의 모습을 보고 가볍게 욕짓거리를 내뱉다 다시 화이트 대통령의 연설에 취하기 시작했다.

 

, 원래 이런 거지.”

 

자유니 뭐니 하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자기 목숨이 최우선, 자기 재산이 두 번째다.

그건 나쁜 것도 아니고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나도 별반 차이 없다.

내 여자가 내 목숨보다 위에 있을 뿐이다.

 

짐한테는 미안하지만 『자유를 지킨다』같은 발상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결국엔 자기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타인을 위해 지키고 있는 시점에서 자신과 타인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자유를 지킬지 지키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 또한 자유의 일부이기에……끄으응.

 

에이길 님, 왜 그러십니까? , 열이 나고 있습니다!”

 

세리아가 내 이마에 손을 짚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부터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 어려운 생각을 하고 계셨죠? 에이길 님의 머리는 그런 거랑 안 어울리니까 너무 도를 지나치면 열이 나고 말 겁니다.”

 

세리아는 늘 상냥하다니까.

 

아무튼 나는 딱히 자유로운 국가와 제도를 사랑하고 있지 않기도 하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저스티스가……나의 나라가…….”

그래도 나는 무슨 짓을 해서든, 후대를 위해 이상을 남겨두겠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분함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 짐과 브라이언을 조금 도와주고 싶다는 것뿐이다.

 

 

사흘 후, 리버티스는 강화를 승낙하는 내용의 서문을 정식으로 남유글리아 쪽에게 보냈다.

 

정식적으로 항복……아니, 강화 조약이 발표됨에 따라 우리는 무장을 해제해야 하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정식 발표가 있을 때까진 평소처럼 경계 임무를 계속 서줬으면 하는군.”

 

브라이언의 지시에 사령관들은 짤막하게 답했다.

이제 사기고 뭐고 남아있을 게 없을 테지만 이제 와서 따져봤자 의미가 없다.

 

남유글리아 측은 고르도니아의 원군을 상대로도 무장 해제한 이후 사령부로 출두하도록 요구하는 중이네.”

 

알겠습니다.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임마.”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레오폴트가 먼저 답해버렸다.

 

……그럼 잘 부탁하지. 정말 미안하네.”

 

브라이언은 슬프다는 듯 웃으며 떠나버렸다.

 

임마, 왜 네가 멋대로 말하는 건데.”

 

애초에 리버티스가 항복한다고 해서 우리까지 투항할 필요는 없을 거 아냐.

은근슬쩍 도망치면 될 텐데.

 

당연히 항복은 하지 않습니다. 붙잡히면 어떠한 이유를 들이대서 처형, 최소한 라펜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레오폴트는 주변의 시선을 경계하면서 말을 덧분ㅌ였다.

 

항복 승낙을 전달한 지금 이 순간이 적의 경계심이 가장 누그러집니다. 오늘 한밤중에 안쪽에서 문을 열고 강행돌파, 고르도니아 영토까지 돌아갈 것입니다.”

어제 이미 전투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마이라도 당찬 표정으로 말했다.

 

브라이언한테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됐군.”

 

우리가 살아돌아가는 게 최우선입니다. 물론 거짓말도 하진 않았습니다만.”

항복하는 것을『이해하고』, 탈출 『준비를 한다』라는 거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좋아.

나도 얌전히 붙잡힐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은 이미 토르트엔트를 완전히 포위했고 리버티스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병력만 가지고 뚫을 수 있겠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언했군.

 

적의 방심에만 기대는 작전이 아닙니다. 시야가 트이지 않는 밤중엔 강행돌파를 시도한 게 오로지 우리 부대 하나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됩니다.”

 

, 그렇겠지.

 

적의 사령관은 리버티스의 모든 부대가 항복 승낙을 철회하고 기습 공격을 시도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엔 토르트엔트 전 방위를 경계해야만 하고, 섣불리 포위망을 무너트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적의 격퇴가 아니라 돌파하는 것뿐이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돌파하는 것만 보자면 어떻게든 된다 이건가.

하지만 그랬다간 우리가 억지로 뚫고 나간 다음엔 한바탕 큰일이 벌어지겠군.

 

그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르지요. 성문을 뚫고 나가는 것이니 순식간에 토르트엔트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일에 관하여……라고 레오폴트는 덧붙였ㅎ다.

 

제 알 바는 아닙니다. 제게 있어 최우선 사항은 저의 목숨, 다음으로는 하드릿 경의 목숨입니다.”

 

자연스럽게 자기를 우선시하고 있군.

 

저는 에이길 님이 최우선입니다!”

 

옳지옳지, 세리아가 그렇게 말해주는 건 기쁘긴 하지만 너는 네 목숨을 우선시 하거라.

나를 감싸다 세리아가 죽었다간 그 충격으로 심장이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흐음…….”

 

리버티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브라이언이랑 짐한테는 미안할 따름이군.

 

그럼 포기하고 남유글리아에 투항하시겠습니까?”

아니, 해야지.”

 

브라이언과 짐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웬만하면 도와주고는 싶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세리아랑 마이라까지 함께 포로로 붙잡히는 건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남유글리아가 우리를 체포한 뒤 가만 둘 가능성은 없다.

최우선 순위를 잘못 둬선 안 된다.

 

문제는 동이 튼 뒤, 상황을 파악하고 쫓아올 것으로 보이는 적의 기병 집단입니다. 우리 쪽에 보병이 있는 이상 추격을 떨쳐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힘든 전투가 될 것입니다.”

 

내 사군은 전부 말을 타고 있지만 왕국군은 대부분이 보병이다.

 

최악의 경우엔 그쪽 병력을 전부 유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뒤가 없을 때까지 그 짓은 하지 마라.”

 

부하를 두고 가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아군을 버리고 도망치면 그 다음부터 병사는 아무도 따라오려 하지 않는다.

에이리히도 나를 신용할 수 없게 되리라.

 

그걸 허락하는 건 내 여자의 목숨이 위험할 때 하나뿐이야.”

알겠습니다.”

 

최우선 순위를 잘못 둬선 안 된다.

 

 

그렇게 한밤중, 우리는 북문 앞에서 준비를 갖춘 뒤 횃불을 끄고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들였다.

 

다행히도 리버티스 병사는 순찰을 돌지 않는 중이다.

이미 경계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 졸고 있는 것이리라.

평소에는 문 앞에 있던 병사도 없기에 지금이라면 간단히 열 수 있었다.

 

반대로 도시벽 위에는 과할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불이 피어올라 있었다.

성실한 남유글리아 병사들이 졸지도 않고 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가자.”

 

내가 손을 치켜들려던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들켰군.”

 

그 인물은 브라이언이었다.

귀찮은 일이 됐군.

안 그래도 힘들 것 같은 탈출극 전에 아군끼리 싸워야 한다니.

 

걱정하지 말게. 방해하러 온 건 아닐세.”

 

그렇게 말하고 브라이언이 작게 신호를 주었다.

 

그 신호에 맞춰 나타난 건 몇 안 되는 병력과 딱 보기에도 군인이 아닌 자들이었다.

오오, 수지도 있잖아?

 

이들은 항복을 좋게 여기지 않는 자들로 오른쪽부터――아니, 시간이 없네. 관두지.”

 

브라이언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들을 부디 도망치게 해줬으면 하네. 만약 리버티스가 사라지더라도 이들이 있는 한 자유의 싹은 다시 자랄 것일세. , 자네도 잘 부탁하네.”

역시 국방 장관님도 함께…….”

 

브라이언의 눈을 본 짐은 말을 끊고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망명자들의 호위역은 짐이 맡는 모양이다.

 

, 떠나게나. 우리도 최대한 도와주도록 하지.”

항복하는 거 아니었나?”

 

브라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강화는 실행되지 않았네. 그리고 자네가 생각할 일도 아닐 거고.”

 

각오를 다진 눈이다.

더 이상 물어볼 필요는 없다.

 

성문을 열어라. 동시에 횃불에 물을 뿌려라.”

 

성문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한밤중에는 이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테니 적도 이변을 눈치챌 것이다.

조용히 도망치는 게 아니라 강행돌파 작전이다.

 

 

돌격한다. 뛰어라.”

오오오오오오오!!”

 

고함을 내지르면서 선두에 나와 호위대, 그리고 기병, 보병순으로 뒤따랐다.

 

야습이다――!”

말도 안 돼, 놈들은 항복했잖아!”

원군인가!? 아니면 기습인가?”

 

궁기병이 적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어둠에 눈을 적응시켜 두었던 궁기병의 화살은 정확하게 적을 꿰뚫었다.

 

황급히 반격을 시작한 적의 화살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일단 야습 경계를 하고는 있던 모양인데 반대로 평소보다 훤히 밝게 빛나던 횃불을 계속 보고 있던 눈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익숙해지기 힘들다.

고작 몇 분 정도 차이일 테지만, 지금 우리에겐 귀중한 시간이다.

 

뚫어라!”

 

나는 3m가 한참 넘는 창을 말 위에서 휘두르며 최전선에 서 있는 적을 꿰뚫었다.

 

어차피 무장 해제 예정인 리버티스의 장창부대에서 갖고 온 무기다.

긴 사거리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갖고 왔다.

 

꺼헉!”

 

슈바르츠의 가속도가 실린 창은 적의 몸통 부분을 힘차게 꿰뚫었다.

뒤이어 끝부분에 사람이 박힌 채 마구잡이로 휘둘러 주변의 적진을 흐트러트렸다.

 

제기랄, 괴물 자식. 쫓아가라, 절대로 놓쳐선――끄악!”

 

나를 쫓아오려던 기병 무리에 궁기병이 들이닥치더니 놈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아버렸다.

 

아무튼 우리는 돌파를 최우선사항으로 두고 일직선으로 뚫고 나간다.

 

곧바로 또 한 사람을 꿰뚫고 휘두르려 한 그때, 가벼운 소리와 함께 창이 부러졌다.

 

에잇, 왜 이렇게 잘 부서져.”

 

장검을 뽑아들고 날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적 병사를 베어넘겼다.

 

머리를 쪼개 숨이 끊어진 적을 일부러 슈바르츠의 몸통 박치기로 튕겨 날려 좌우로 날려버렸다.

 

적을 몇 명 죽이든 의미는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더 커다란 돌파구를 뚫는 것이다.

 

그때 적의 진영 전체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왓!”

토르트엔트 전 부대에서 불화살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저놈들 항복한다더니 거짓말이었나!”

 

토르트엔트 시내에서 사방을 향해 활을 미친 듯 쏘고 있었다.

 

노리는 위치는 부정확하지만 아예 무시할 순 없다.

우리를 쫓아가려던 적들은 이후 이어질 습격에 대비해 멈춰섰다.

 

브라이언인가.”

 

나랑 다르게 브라이언은 이 나라 사람이다.

그런 짓을 했다간 책임은 피할 수 없을 텐데.

 

 

하지만 그건 브라이언의 결심이기에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다.

망명자를 데리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면 그의 비원도 이뤄진다.

 

 

궁기병은 정면에 있는 적을 뚫고 나가면서 좌우로 활을 마구 쏴대 적진의 혼란을 부추겼다.

 

전차도 거대 석궁을 마구잡이로 쏴댔다. 바퀴에 달린 칼날은 어둠에선 쉽사리 보이지 않기에 적에게 필요 이상의 거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궁병들도 달리면서 미친듯이 활을 쏴댔다.

아군은 앞쪽이랑 뒤쪽밖에 없기 때문에 아군 오사 위험성은 얼마 안 된다. 맞으면 그냥 운이 없는 거다.

 

마지막으로 보병대가 혼란스러워하는 적을 방패랑 검으로 두들겨 패면서 울분을 풀었다.

 

자유의 불씨를 잃어선 안 된다! 저스티스 진형을 짜라!”

 

짐이 이끄는 몇 안 되는 망명자들도 단단히 수비 중이다.

 

사기와 숙련도가 높은 자들을 모아온 모양이다.

결코 약하지 않은 남유글리아 병사를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희 같은 잡것들에게 저스티스가 굴할쏘냐!”

 

짐의 전투 방식도 훌륭하다.

대검과 대방패를 각각 한손에 쥐고서 적을 걷어차거나 때리거나 박치기를 먹이는 둥 열심히 날뛰는 중이다.

오오, 래리어트까지 나왔군.

 

나도 가만 있을 순 없지.”

 

정면에서 대방패를 쥐고 있는 적을 장검으로 주워담듯이 휘둘러 튕겨날렸다.

 

오른쪽에서 슈바르츠의 다리를 노리고 들어온 창병의 목을 날리고, 왼쪽 적은 슈바르츠가 직접 몸통박치기를 먹여 날려버렸다.

 

또 악마가 튀어나온 거냐! 쏴라, 쏴죽여라!”

 

크로스보우 병사가 일제히 이쪽을 노렸다.

 

발사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봐서 방패를 내밀어 볼트를 튕겨냈다.

볼트 자체를 떨어트리는 건 어렵지만 발사 전에 알아내기만 하면 생각보다 가볍게 막아낼――.

 

크윽.”

 

, 하고 반대쪽 옆구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내 등 뒤도 누군가 노리고 있었는지 깔끔하게 갑옷 틈 사이에 볼트가 박혀 있었다.

 

.”

 

다행히 근육에 막힌 걸 보고 재빨리 뽑아내 버려두었다.

 

세리아는 싸우는 와중에도 정기적으로 내 쪽을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눈치는 채지 못한 듯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들다 세리아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다행이군.

 

얼마 안 남았다. 뚫을 수 있어!”

오오오오오오오오!!”

 

돌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앗, 크리스토프가!”

저 멍청한 놈.”

 

여기서 멈출 순 없다. 당하면 이제 못 도와준다.

 

안 당했다!”

 

나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장창에 밀려 떨어질 뻔했던 크리스토프는 마치 곡예사처럼 몸을 비틀어 창을 피했다.

표정을 보건대 의도한 게 아니라 우연의 산물인 모야양이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잖아!”

네가 활약하는 거 처음 봤다!”

 

호위대가 싸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크리스토프를 칭찬했다.

 

나도 농담 한 마디 덧붙이려던 그때 옆구리가 욱신, 하고 통증을 호소했다.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군.

 

 

브라이언의 원호와 아군이 열심히 싸운 덕에 우리는 토르트엔트의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짜 힘든 건 지금부터다.

고르도니아 영토에 도달하려면 한참 더 가야하고 적의 기병 집단이 쫓아오지 않을 리도 없다.

 

 

 

 

떠났군.”

, 떠났군요.”

 

브라이언은 데이비드에게 미소 지은 뒤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공격 중지다. 지금 당장 백기를 세워라. 사자를 내보내라. 내용은――.”

 

『공격은 폭주한 반역자의 독단일 뿐 리버티스 정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음. 우리에게 항복 철회 의지 없음. 귀국과 함께 당사자에 대한 처벌을 시행할 것을 약속하겠음』

 

국방 장관님…….”

 

브라이언은 꿋꿋하게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조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이 또한 당연한 업보 아니겠나. 게다가 미래를 위한 씨를 남겨두었네. 내가 가증스러운 배신자로 전락하는 것쯤이야 한참 값싸다 할 수 있지.”

……확실히 값쌀 수도 있겠습니다. 최소한 저도 같이 따라가지 않으면 계산이 맞질 않겠군요.”

 

브라이언과 데이비드는 미소를 지으면서 황급히 달려온 헌병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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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4살 겨울 전시

리버티스 구원군 총사령관

휘하 부대

 

고르도니아 왕국군 제7병단

보병 6200

궁병 1200

기병 1400

 

하드릿 사군

궁기병 3300

호위대 160

전차 65

(경상 복귀 중상 귀국)

 

부하: 레오폴트(참모) 세리아(부관) 마이라(지휘관) 이리지나(지휘관) 루나(지휘관)

기드(호위대) 피피(도마뱀 기병) 멍멍이(도마뱀) 마타(포로) 키스(병단장) 세크리트(임시 대원)

수지(망명 중) 마타(시종)

 

현재 지점: 토르트엔트 북쪽

 

전과: 요새 포위군 격파, 메리스버크 방어 완수, 마법 부대 격파, 토르트엔트 포위망 돌파

 

재산: 금화 2050

경험 인수: 585명 자식: 68+565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