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남부 전쟁⑨ 부러진 송곳니』
“후방으로 돌아갔다고!? 정찰 부대는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돌파당한 건가? 아니면 우회당한 건가?”
아군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보다 총공격이 올 걸세. 우선 그쪽을 대응해야 하네!”
“헛소리 말게, 후방에 적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싸우겠나! 장소를 바꿔야 하네!”
싸우는 소리도 들렸다.
“수만명이 후방에 배치된 이상 반대로 전방 병력은 약해졌을 거요. 반대로 공격을 시작하면…….”
“뒤쪽은 동부 군단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전혀 다른 집단으로 봐야지. 그냥 단순히 포위당했단 말이다!”
“하지만 동부 군단은 한참 멀리 있지 않았소?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우회를 했다는――.”
아군은 미친듯이 동요하며 여러가지 안건을 들먹였다.
정석적인 혼란 상태로군.
“그래서, 어쩔 겁니까?”
“흐윽……으윽……더워…….”
나는 세 번째 이불로 마이라를 감싸면서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건 총사령관인 이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
브라이언은 데이비드와 함께 10초 정도 입을 다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이들은 전면 공격을 저지해라. 뒤쪽은 신경 쓰지 마라.”
“화살을 아낄 필요는 없습니다. 전력으로 임해 주십시오.”
무언가 말하려 하는 지휘관들을 데이비드가 추가 명령으로 막아세웠다.
“그리고 하드릿 사령관, 자네는 기동력이 뛰어난 부대를 엄선해서 후방 적을 상대해 줬으면 하네.”
“제 부대만 가지고 뚫으란 겁니까?”
뒤에 있는 적은 몇만, 내 수중에 있는 기병은 궁기병과 왕국군 기병을 합쳐도 5천 정도밖에 안 된다.
“가능하다면 말이지……불가능할 것 같으면 최소한 적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파악해 줬으면 하네.”
억지로 정찰하는 느낌인 건가.
이런 전술에 대한 명칭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푸핫! 위력 정찰이군요.”
이불 밖으로 마이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살짝 땀으로 젖어서 딱 좋은 느낌으로 익었지만 안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 적이 정말로 수만명의 규모인 건지, 그게 맞다면 정말로 적의 동부군인 건지……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일세.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네.”
“알겠습니다.”
병력 차이는 크지만 딱히 사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 괜찮겠지.
일단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 문제는 없는 듯하다.
“그러면 빨리 가는 게 낫겠군. 준비해 볼까……세리아, 뭐하는 거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세리아가 어째서인지 머리 쪽부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우리는 격렬한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본대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갔다.
“적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숨을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도로 한복판을 행군 중입니다.”
적은 집단 몇 개로 나뉘어 깃발을 높이 치켜세운 채 당당히 행군 중이었다.
주변에서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온 리버티스 경기병의 모습도 보였지만 지금은 손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했다.
“적은 최소한 3만, 잘못 센 건 아닌 모양이야.”
“그래 보입니다.”
레오폴트와 대화를 나누면서 공격 명령을 내린다.
궁기병이 명령에 맞춰 달려나갔고 왕국군 기병도 검을 뽑아든 채 달려나갔다.
“적이 방어 진형을 취하려 합니다.”
적은 약간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대기병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백 보 양보해서 궁기병처럼 모든 인원이 말을 타고 있는 거라면 영 불가능한 얘기는 아닌데 말이지…….”
“보아하니 기병의 비율은 그리 많아보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2만은 보병으로 보입니다.”
적은 수많은 장창과 크로스보우를 장비한 보병과 그 뒤에선 궁병이 보조하는 형태의 병과를 갖고 있었다.
적의 방어를 뚫지 못한 아군은 돌격을 단념, 궁기병은 대응 사격을 날리면서 거리를 벌렸다.
“처음 보고 당시 정보에 있던 대량의 마차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이후는 추측성 이야기입니다만.”
“말해 봐.”
적진에서 경기병이 뛰쳐나와 왕국군 기병과 칼부림을 벌였다.
수적 열세인 아군은 금세 후퇴하기 시작했고, 전차가 원호용 거대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
“적은 수송 전임, 아마도 대량의 대형 마차로 구성된 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걸로 적의 동부 군단을 통째로 옮겼다고?”
거대 화살을 맞은 적 기병도 애초에 깊이 추격할 생각은 없었는지 금세 퇴각, 아군 진영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서 대열을 다시 고쳤다.
궁기병이 화살을 쏘고 있지만 루나한테 피해를 최소화 하도록 명령을 내려 뒀기에 적의 사정거리 밖에서 공격 중이다.
당연히 거리가 벌어진 탓에 위력과 명중률 모두 떨어져서 결정타로 작용하긴 힘들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마차를 썼다 한들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번 작전 개시 이후 일주일 정도밖에 안 지났어. 동부 군단을 이렇게 단번에 데리고 올 수 있다고?”
마차라 해도 단순 기병과 비교해 보면 속도는 상당히 느려진다.
게다가 말 자체가 사용하는 물과 식량을 고려해 보면 오랫동안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궁기병의 맹렬한 사격에 압도당한 적이 점차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금세 후속 부대가 병력을 메꿨다.
그놈들이 거대 석궁을 끌고 와 발사하기 시작한 탓에 궁기병은 황급히 사정 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적의 동부군이 몰트 영지 안쪽으로 우회했을 가능성입니다.”
“흐음.”
몰트는 역병의 영향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국경 경비도 사수하지 못하는 중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이 추측으로는 결국 장거리를 한참 달려와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레오폴트는 그렇게 말하며 지도상에 위치한 『동부 군단』이라 적힌 장소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가능성, 동부 군단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뭔 소리야 그게.
“동부 군단 3만명을 직접 확인한 건 첫 전투 한번 뿐. 그 이후엔 서쪽과 남쪽 군단에 비해 진군이 확연히 느렸습니다.”
“그렇지만 리버티스도 척후병을 내보내고 있었을 거 아냐.”
레오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기병과 왕국군 기병은 거리를 벌린 채 적과 대치했다.
적은 여전히 튼튼한 대기병진을 짠 채 기어가는 듯한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척후병과 그들의 정보 분석은 극히 소수 정예로 실행됩니다. 군대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꾸미거나, 분석 과정에서 간첩의 관여가 있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거기까지는 모르지.
“동부 군단은 첫 전투를 끝마친 뒤 이미 이동하는 중이었고, 수송 부대와 합류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최종 수단으로 수중에 남겨뒀던 것이겠지요.”
레오폴트는 그렇게 말한 뒤 궁기병과 왕국병에게 공격 중지 지시를 내렸다.
눈앞에 있는 적은 이미 튼튼한 진을 몇 겹이나 완성시켰다.
돌파하는 건 불가능했다.
“뒤쪽을 뚫지 못하면 이대로 포위당하게 생겼군.”
“예, 지금부터는 승패보다도 손해를 줄이는 걸 우선시해야 합니다.”
나는 슈바르츠의 배를 걷어차 방향을 바꾸었다.
『뭐야, 도망치는 거냐』, 는 무슨.
이건 전략적 후퇴라는 거다. 말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을 테지.
“흐음…….”
세크리트가 웬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다.
또 자기 멋대로 공격에 참가했는지 가슴팍부터 위쪽이 피로 물들어 있다.
“빈틈없는 우회와 포위망……제국식 진형이거나……혹은……그렇다 치면 참 이상한 일이군.”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
“적의 숫자는 보고대로 약 3만. 어중간한 전력으로 뚫는 건 불가능……후퇴한다.”
우리는 방향을 바꿔 후퇴했다.
적은 여유롭다는 듯 양익을 펼친 채 다시 남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은 내 보고를 듣고서 눈에 띄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불쌍하긴 하지만 거기서 억지로 공격했다간 큰 손실과 함께 패주하고서 끝났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면의 공세도 막아내기 힘든 수준입니다.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데이비드도 표정에 동요심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뒤쪽에 있는 적도 저녁이 오기 전엔 다가올 겁니다. 후방에서 공격당하는 건 당연히 위협적입니다만…….”
“그보다 퇴로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적의 사기가 무너지고 말 거다.”
짐도 머리를 싸맨 채 책상에 엎어지고 말았다.
“방법이 없나?”
“으음…….”
마이라랑 세리아가 적과 아군의 배치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대항책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다.
“상황을 타파할 가능성이 있는 건 신속하게 정면의 적을 무너트리고 최소한 부대의 절반을 후방으로 동원하여 적을 요격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협공이 아니라 단순히 두 개의 정면의 있는 적과 상대하는 형태가 됩니다. 보급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호각으로 버틸 수 있을 테지요.”
레오폴트가 그렇게 말하자 브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도 벅차다. 2할이 넘는 전력을 빼냈다간 절대로 막아내지 못해.”
레오폴트는 그렇습니까, 하고 중얼거린 뒤 자리에 앉았다.
결국 남은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기지 못한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협공당하기 전에 지금부터 후퇴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적의 맹공을 받으면서 후퇴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협공당한 이후 후퇴하는 것보단 낫다.
“적들은 분명 지금이 기회라며 쫓아올 거다……피해가 커질 텐데.”
“어쩔 수 없지.”
짐의 의견을 단칼에 잘라냈다.
“이번에 발생할 손해를 고려해 보면 적과 아군의 병력 차이는 역전될 겁니다. 우리는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겠죠.”
“그렇지만 승리 가능성이 없어진 이상 여기서 버티고 있을 의미도 없어.”
브라이언은 한숨을 내쉬며 명령을 내렸다.
“전 부대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적과 교전하면서 손해를 최소화하고 후퇴하라!”
군사 회의는 거기서 끝났고 단숨에 사령부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잘 후퇴하면 좋으련만.”
레오폴트한테 그렇게 말하면서 마이라를 이불로 감싸려 하자 이번엔 거부당하고 말았다.
“전력의 3할 상실 정도라면 허용 범위 내일 것입니다. 토르트엔트 근처에서 태세를 가다듬으면 적도 그리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대치전인가……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군.
에이리히가 어떻게든 원군을 보내만 준다면 상황이 바뀔 수 있을 텐데.
“으음,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잊으셨다면 하드릿 경께서 떠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 건가?
어쩔 수 없이 대신 세리아를 감싸자 얌전해졌다.
“아……으음.”
마이라가 이불에 감싸인 세리아와 뭔가 시선을 주고받은 뒤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얌전히 이불에 감싸일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전황은 예상대로 단숨에 악화됐다.
병사를 조금씩 후퇴시키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또한 『버텨라』, 라는 명령이면 떨어지지 않지만 『후퇴 시작』이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급속도로 떨어지는 법이다.
후퇴란 즉 패배를 의미하고, 패배가 목숨의 위기와 직결된다는 것 정도는 일개 졸병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오히려 철수 명령과 동시에 붕괴하지 않은 걸 봐서 리버티스군은 질서를 유지 중이라고 말해도 될 수준이다.
“우익이 무너지기 직전이다. 증원을 보내라.”
“아니, 증원은 보낼 수 없네. 오히려 좌익을 뒤로 빼서 고립되지 않게 만들어야 하네.”
“중앙에 있는 장창대를 빼내서 후퇴시켜라. 저놈들은 기동력이 부족해서 앞에 놔뒀다간 고립될 거다.”
리버티스군은 한 군데에서 머무르지 않고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점차 빨라지는 후퇴 속도를 유지하면서 대열을 유지한 채 물러나는 중이다.
“적은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떤지 다 알고 있겠지. 미친듯이 몰려오는군.”
적은 뭉뚱그린 진형을 유지한 채 강행 공격을 시행하는 중이다.
우리가 반격을 노리고 있는 심산일 경우엔 상당히 위험한 공격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럴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지요. 적은 우리 쪽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상황입니다. 정보전에서 완전히 밀리고 있습니다.”
레오폴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무언가 곧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잠깐 앞으로 나가서 적을 막아보러 가볼까.”
적은 미친듯이 공세를 퍼붓고 있으니 잘만 노리면 지휘관을 몇 사람 죽이고 최소한 약간이나마 기세를 억누를 수 있을 듯하다.
슈바르츠에 올라타려 하는 내 손을 레오폴트가 움켜쥐었다.
이 녀석이 내 몸을 만지다니 별일이군. 전혀 기쁘지 않지만.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하드릿 경은 끝까지 이곳에 계셔 주십시오.”
“반격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앞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레오폴트가 다시 말했다.
“나가서는 안 됩니다.”
“……알겠다.”
예상보다 훨씬 더 완고한 레오폴트의 모습에 나는 슈바르츠의 고삐를 붙잡고 있던 손을 풀었고 분풀이 삼아 놈의 엉덩이를 때렸다.
무슨 짓이냐며 내 머리를 깨무는 슈바르츠를 떨쳐내면서 레오폴트한테서 떨어졌다.
레오폴트과의 말싸움에서 밀려 석연찮은 기분이 된 내 곁으로 마이라와 세크리트가 다가왔다.
“큭큭, 저 무뚝뚝한 남자한테 밀리는 네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오더군.”
재밌다는 듯이 말하는 세크리트.
반대로 마이라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레오폴트 씨가 하는 말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후퇴 명령 때문에 동요 중인 건 리버티스군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병력이 침착한 건 하드릿 경께서 멀쩡하니까 그런 거죠.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단숨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가?
나는 마이라를 보며 미소 지었고, 세크리트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프군. 젖잖아.”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평소랑 똑같으니까 병사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거겠죠.”
세리아가 내 손을 움켜쥐어 세크리트한테서 떼어놓았다.
어느새 아침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급격한 전개가 펼쳐졌다.
끝내 후방에서 적의 동방 군단이 나타나 협공 상태에 빠졌다.
브라이언은 2만 정도의 부대를 후방에 내보내 반격했고 시간을 벌면서 대각선 방향으로 후퇴를 시도했다.
동부 군단은 양익을 전개해 우리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지만 3만 정도의 병력으로는 진을 얕고 넓게 만들 수 없었다.
그 대신 정면에 있는 서부, 남부 군단이 한층 더 강렬한 공세를 퍼부었지만, 아군은 어떻게든 붕괴하지 않고 철수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비스듬하게 미끄러지는 듯한 진형을 취한 탓에 적은 포위망을 제대로 짤 수가 없는 듯했다.
전력으로 활을 쏘고 기병을 가끔씩 동원하면서 적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줄이면서 후퇴해 나갔다.
“조금만 더 나가면 협공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병력상으로는 불리합니다만 후퇴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세리아가 땀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이제 안심이로군!”
이리지나가 창을 휘두르면서 그렇게 말한 순간, 진의 동서쪽에서 새빨간 연락용 화살이 날아올랐다.
전 부대에게 비상 사태를 알리기 위한 용도다.
“동서쪽에 적의 기병 집단이 출현! 각각 1만씩 총 2만! 돌격 중입니다!”
“그래, 뭔가 잊어버린 것 같더라니.”
생각해 보니 적의 기병 2만이 행방불명이었다.
레오폴트를 바라보니 표정이 잠잠하다……분명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리라.
“말한다 한들 이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리 말해두면 나도 다른 지휘를 펼쳤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화를 낸 다음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지휘를 맡고 있는 건 레오폴트고, 다음 책략을 생각 중인 것도 이 녀석이다.
“에이길 님은 계시기만 해도 병사들의 용기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세리아가 날 도와주려 애썼지만 결국엔 내가 알든 모르든 별반 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던 리버티스 군의 진형이 좌우에서 동시에 시작된 기병 돌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후 협공에서 간신히 탈출하려던 찰나에 좌우 협공이라……이젠 정말 끝장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까지일 겁니다. 독자적인 방어진으로 이행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리버티스군과 공동으로 수비 중이던 내 진이 순식간에 움직이면서 보병을 바깥쪽으로, 궁병이 중앙으로 들어오는 정방향에 가까운 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전 방향 경계, 활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적에게만 쏘아라. 기병은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방어에 전념하라.”
“야, 주변이 다 무너졌는데……큰일난 거 아니냐?”
“사방이 다 포위당했잖아!”
“근데 하드릿 경이 당황하질 않는데. 평소처럼 여자 엉덩이나 쓰다듬고 있고.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거 아냐?”
왕국군 쪽에서도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딱히 진이 흐트러지거나 도망치는 놈은 없다.
우리가 진을 다 고쳤을 때, 리버티스군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방어하면서 어떻게든 후퇴해라! 기병을 상대할 땐 창병을 내보내!”
“창병은 이미 후퇴 중이다! 이미 진형이 늘어질대로 늘어져서 대기병진은 짤 수가 없다고!”
“연계가 엉망이야! 사령부 쪽에서도 아무런 지시가 없어. 후퇴할 건지 사수할 건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렇게 사태는 끝내 최종 국면을 맞이했다.
“각 부대는 알아서 후퇴, 부대 상관없이 전속력 후퇴다! 무거운 물건은 버려두고 일단 그냥 북쪽으로 도망쳐다!”
“후퇴! 후퇴다!”
“북쪽이 어디지!?”
“창도 버리는 건가? 에잇, 어차피 도망칠 거라면 필요없지. 버려버려라!”
우리 주변에 있던 리버티스군이 소규모 부대 단위로, 혹은 좀 더 작게 뿔뿔이 흩어져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리버티스군……붕괴합니다!”
마이라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보고했다.
“하아, 저렇게 뿔뿔이 흩어지면 어쩌려고.”
상대가 보병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기병을 상대할 땐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따라잡힌다.
아무리 전황이 엉망이어도 수비하면서 물러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적이 도망간다!”
“끝까지 쫓아가라! 리버티스군을 섬멸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지.
반대 입장에선 자주 있던 일인데 내가 추격당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진형을 유지한 채 후퇴해라.”
한변 우리는 진형을 유지한 채 후퇴를 시작했다.
“원래는 하드릿 경이라도 우선 돌아가 주시는 게 이상적입니다만?”
그것도 영 멋이 안 살잖아.
여자를 놔두고 도망칠 수도 없고.
“나는 여기 남을 거다. 나머지는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
적은 천천히 물러나는 우리의 양옆을 헤집듯이 움직이며 패주 중인 리버티스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물론 적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부대가 있다!”
“놈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다! 단숨에 박살을 내버려!”
적의 부대가 단숨에 다가왔다.
“준비.”
진 안쪽에 있는 궁병과 궁기병이 활을 들었다.
“오오오오오오!”
“뚫어라!”
적이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뒤 명령을 내렸다.
5천개가 넘는 화살이 일제히 공중을 날아갔다.
아군 측은 동요하지 않았고 화살은 평소처럼 정확하게 적을 덮쳤다.
하지만 적의 돌격은 방패조차 들지 않은, 수비력이 부족한 난폭한 공격이었다.
“끄악!”
“으아아아악!”
“화살이 너무 많아! 공격 중지! 중지!”
기세가 한풀 꺾인 적을 향해 궁기병은 그들의 특기인 빠르고 정확한 연속 사격을 날려주었다.
적의 공세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멈추지 마라. 싸우면서 후퇴해라.”
뒤이어 적의 기병 집단이 다가왔다.
장창대가 일제히 창을 들어 돌격을 저지하고, 그와 동시에 활과 크로스보우가 화살비를 날렸다.
“젠장! 이 자식들 왜 이렇게 튼튼해!”
“그냥 무작정 돌격하지 마라. 피해가 발생할 뿐이다!”
적이 약점을 찾으려고 거리를 벌린 찰나 레오폴트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진을 풀어라. 기병대 돌격.”
보병이 곧바로 길을 터고 2천에 가까운 기병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반격 때문에 멈춰 서 있던 적의 기병을 향해 아군의 돌격이 깔끔하게 먹혀들었고, 이 순간만큼은 적과 아군의 형세가 역전된 듯한 일방적인 전개가 펼쳐졌다.
“공격 중지, 지금 당장 후퇴하라.”
명령을 받고서 아군 기병이 진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길길이 날뛰며 쫓아온 적에게 또다시 화살비가 쏟아졌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한 훌륭한 연계다.
“대단하군.”
적은 노성을 내지르면서 우리의 진을 포위했고, 약점을 찾으려 하는 듯했다.
“남쪽에 적의 강습, 밀리는 중입니다!”
흠, 조금 일하고 와볼까?
나는 슈바르츠 위에 올라탔다.
레오폴트가 시선만 슬쩍 움직였다.
“진은 나가지 마시길.”
“너는 내 엄마냐?”
투덜거리면서 적에게 다가갔다.
진 자체는 파괴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밀린 듯했다.
“기세는 완전히 우리 거다. 한 곳이라도 뚫으면 이놈들도 붕괴할 게 뻔해!”
“피해는 신경 쓰지 마라. 그냥 밀어붙여!”
“어떻게든 밀어내! 진으로 들여선 안 된다!”
“뚫렸다간 끝장이라고!”
적과 아군이 한 데 뒤섞인 곳을 향해 말을 타고 뛰어들었다.
“너는――.”
장검으로 소리를 내지른 적 병사를 베어넘겨 반으로 만들어 주었다.
“검은――.”
칼의 방향을 되돌려 곧장 또 다른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악마.”
“말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
그 입을 틀어막듯 목구멍에 검을 쑤셔박고 곧바로 내던졌다.
“오오, 하드릿 경이다!”
“이제 질 일은 없겠어!”
아군들은 환호성을, 적은 눈에 띄게 기세가 죽었다.
“겁먹지 마라! 우리는 승리했단 말이다. 이건 잔당 섬멸전에 불과…….”
소리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을 지키듯이 중기병 기사처럼 보이는 놈들이 앞으로 나왔다.
“전쟁은 너희의 승리지만.”
스쳐지나가듯 한 놈의 몸통을 검으로 때려서 날려버렸다.
“그렇게 쉽게.”
두 번째 놈의 검을 장갑으로 튕겨내고 몸통 박치기로 말에서 떨어트렸다.
“죽어줄 순 없지.”
놈의 휘어진 검을 붙잡아 세 번째 놈의 살짝 벌어진 투구 틈 사이로 쑤셔넣었다.
“알아들었나?”
원래 목표물이던 지휘관을 향해 장검을 내리치자 놈의 정수리부터 가슴 부근까지 그대로 박혔다.
억지로 검을 비틀어 뽑아내니 잘 익은 과일을 짓뭉갠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깃발을 들어라!”
일제히 내 군기……검은색으로 칠해진 군기가 세워졌다.
“하여간, 이런 상황에 *열병식 같은 짓거리를 해서 뭐 어쩌려고.”
(*열병식: 정렬한 군대의 앞을 지나면서 검열하는 의식)
나도 모르게 레오폴트한테 불평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적의 반응은 달랐다.
“이, 이 깃발은……이놈들 악마의 군단이었나!”
“어쩐지 강하더니!”
“이미 승패는 결정됐다. 악마와 싸워 쓸데없이 사망자를 늘릴 필요는 없지.”
적들이 점점 술렁거리더니 마치 썰물처럼 놈들의 공세가 약해졌다.
“뭐야 이게.”
내가 장검을 내려놓자 기병이 욕설을 퍼부었다.
“악마 자식! 언젠가 반드시 토벌해 줄 테니 각오해라!”
물론 나도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다.
“시끄러워. 그럼 지금 당장 달려와라, 약해빠진 놈아.”
레오폴트가 나보고 진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말해 뒀단 말이다.
그 말을 어겼다간 또 시끄럽게 굴 테니까 너희가 오라고.
“언젠가 제도 도로 한복판에 네 목을 걸어주마, 악마 새끼야!”
다음 욕설은 여자, 심지어 상당한 미녀였다.
이건 솔직히 썩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런 말 말고 나랑 한 번 자는 거 어때? 내 건 크거든.”
“변태! 부끄러움도 없는 거냐, 이 악마야! 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크다니, 얼마나?”
시덥잖은 대화를 끝마치고 중앙으로 돌아갔다.
“하드릿 경의 정보는 좋건 나쁘건 놈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군기를 세웠다 이거냐?
“도망치는 토끼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일부러 송곳니를 드러내는 늑대를 사냥하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적은 우리를 피해 도망치는 리버티스 병사를 열심히 쫓아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리버티스 쪽 손해는 2할, 3할 수준이 아니겠는데.”
아무리 격전이 펼쳐져도 정면 전투에서 발생하는 희생자 숫자는 크지 않은 법이다.
괴멸적인 손해가 발생하는 건 승패가 결정된 이후, 지금 이러고 있는 것처럼 추격전 때 대개 일어난다.
“리버티스군 안에도 질서를 유지 중인 부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랑……저쪽에도!”
세리아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저건……짐이 이끄는 수도 방위대랑 브라이언의 직할 부대로군.
역시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놈들은 잘 빠져나간 모양이다.
저쪽도 우리를 인식한 건지 후퇴하는 와중에도 천천히 다가와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까지 붙었다.
적의 추격전은 정말 지독했지만 우리가 걸어둔 흑기 덕분인지, 혹은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병사를 사냥하는 걸 우선시한 건지, 우리처럼 질서를 유지한 채 후퇴한 부대는 간신히 궁지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도망친 병력을 회수하면서 토르트엔트로 가겠습니다.”
데이비드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
브라이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저스튀스가……어째서…….”
짐은 앞을 바라본 채 눈을 치켜뜨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한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솔직히 상당히 기분 나쁘다.
“집계는 토르트엔트로 돌아간 뒤에 시행할 예정입니다만, 굉장히……굉장히 막대한 손해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데이비드도 고개를 내리깔고 말았다.
마이라와 이리지나, 세리아도 분위기에 휩쓸려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을 유지 중인 건 레오폴트 하나뿐. 아니, 세크리트는 고개를 숙이고 있긴 하지만 아마 저건 웃음을 참고 있는 거겠지.
이미 추격을 끝마친 등 뒤의 적진에서 조금씩 소리가 새어나왔다.
“용감한 병사들이여. 우리는 또다시 승리했다.”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인데 너무 멀어서 확실치가 않다.
“리버티스의 우둔한 정부와 군대는 우리를 막아낼 수 없다. 이 전쟁은 그것을 증명해냈다. 우리야말로 가장 강하고, 가장 뛰어난 국가라는 것을!”
지진과도 같은 적의 환호성이 들렸다.
“무지몽매한 정부를 떠받드는 불쌍한 리버티스 민중을 진정한 통치 아래 배치하고 영광스러운 제국의 일부로――.”
설마 빌헬미나가 와 있는 건가?
그렇다 해도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나아가거라,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이여. 제군들이 나아가는 앞길에 적은 없나니.”
또다시 폭발음과도 같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적의 사기는 굉장히 높다.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날, 리버티스군은 총 병력의 7할을 상실했다.
――2주 후, 토르트엔트 시내.
“전항 보고서입니다―.”
수지가 연락책으로서 총사령부에서 갖고 온 보고서를 세리아가 받았다.
세리아가 문서를 받을 때 수지를 노려보았다.
“…….”
“왜 그러시나요오~?”
세리아가 하고 싶은 말은 총 세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말투, 또 하나는 새빨간 염료로 물들인 손톱과 휘황찬란한 장신구, 마지막 세 번째는 아마 『전황 보고서』를 올바르게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도 수지가 남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때려눕혔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라서 참을 수밖에 없ㅎ다.
군복을 대충 입은 탓에 슬쩍 엿보이는 가슴과 움직임에 별로 신경을 안 써서 가끔씩 속옷이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저 잠깐 나갔다 와도 되나요오~?”
“그럼.”
수지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소파에 놔뒀던 가방을 집으려고 몸을 웅크린 순간 속옷이 보였다.
오늘은 화려한 붉은색이군. 심지어 풍만한 엉덩이 살에 파묻혔다.
아마 점심 식사 겸 휴식을 취하러 가는 것이리라.
3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저 여자 대체 뭡니까! 태도만 불량한 게 아니라 일도 전혀 못하는데요!”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세리아가 소리쳤다.
“뭐, 그런 말 말고.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지.”
그녀한테 부족한 건 의욕과 능력과 예절뿐이다.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팬티만 계속 보여주고 있고!”
“팬티만 보여준다니. 어제는 몸을 수그렸을 때 젖꼭지가 보였다고.”
세리아를 달래면서 보고서를 읽었다.
평소와 똑같은 내용이다.
현재 토르트엔트는 남유글리아군의 포위 아래 있고,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 중이다.
튼튼한 성벽과 수많은 방어 병기, 그리고 시내에 축적된 풍부한 물자 덕분에 한동안은 버틸 수 있어 보이지만 15만에 육박한 적과 달리 리버티스군에게는 반격에 나설 여력이 없다.
“에이리히한테서 답변은 아직 안 왔나?”
“네……도착은 했을 텐데 말이죠.”
나는 토르트엔트가 포위되기 전에 고르도니아 본국에 합전에서 큰 패배를 맛봤다는 사실과 압도적 열세임을 알리고 지금 당장 대규모 원군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세리아가 작성하고 레오폴트가 확인했기에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았을 거고, 나도 왕국군 1개 병단이랑 통째로 버림받을만큼 왕에게 미움을 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몇만 정도라도 원군이 온다면 남유글리아도 느긋하게 포위망을 유지할 순 없게 될 것이다.
“뭐, 1, 2달 안에 토르트엔트가 함락될 일은 없어 보이니까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책상 밑에 감춰둔 포장지를 만졌다.
내용물은 반짝거리는 귀금속 목걸이로 수지가 좋아할 법한 물건이다.
수지는 가벼워 보이기도 하니까 잘만 구슬리면 한 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세리아가 이 사실을 눈치 챘다간 무조건 방해받을 거라는 점이다.
수지랑 세리아의 상성은 딱 보기에도 최악이니까 말이지.
“후후후…….”
“끄으응…….”
청초한 여자도 훌륭하지만 가벼운 여자도 마찬가지로 훌륭하다.
여자는 늘 최고인 법이다.
◇◇◇◇◇◇◇◇◇◇◇◇◇◇◇◇◇◇◇◇◇◇◇◇◇◇◇◇◇◇◇◇◇◇◇◇◇◇◇◇◇◇◇◇◇◇◇◇
같은 시각 왕도 고르도니아
어두컴컴한 지하실 방 안에서 남자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앉았다.
그때 군복을 입은 남자가 또 하나 나타났다.
“오오, 클라프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클라프 경께서는 요직을 맡으신 분 아닙니까.”
클라프라 불린 남자는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 자리에 앉고서 말했다.
“군무총감과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말이지요……남부 전황이 썩 좋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가 원군을 보낸 리버티스가 큰 패배를 겪었다던데……그 하드릿 경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원군을 요청 중입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 경악 섞인 비명이 터져나왔다.
“남유글리아 제국이 그 정도로 강대하단 말입니까!”
“으음, 리버티스가 멸망하면 우리나라와 그 국가의 국경이 맞닿게 될 거요. 가만 두고 볼 수는 없겠소.”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군무총감께서는 곧바로 대규모 원군을 내보내실 심산인 듯 보이나…….”
클라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요양을 떠나신 지금 멋대로 원군을 보낼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 어떠한 일이 생겨도 방해하지 말라는 어명이 떨어진 이상……돌아오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일동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 여행을 떠나다니……제정신이 아닌 것 같소!”
“요새 너무 지나친 태도도 그렇고 폐하께서는 정신이 이상해진 것으로 보이오. 도저히 국가를 사랑한다고는 보이지 않소!”
왕을 비난하는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금세 그 목소리도 사라졌다.
“아니, 폐하께서 자기 대에 왕국의 판도를 넓힌 거물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네.”
“그렇지요, 오늘날의 강대한 고르도니아가 있는 것은 총명하신 폐하 덕분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달리 있소.”
그리고 모든 이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 여자…….”
“맞습니다. 로사리오라고 하는 그 가증스러운 여자가 폐하를 기만하고 있는 겁니다.”
남자들은 하나둘씩 입에 담기도 힘든 말로 로사리오를 모욕했다.
“그년을 어떻게 처리할 수 없나……?”
“맞소, 그년만 사라지면 폐하도 지난날의 총명함을 되찾으실 수 있을 거요.”
벌떡 일어난 사람들, 하지만 정작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하나 우리 국수파(国粹派)는 애국심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하나…….”
“국정에 영향을 갖고 있는 자들은 거의 없고……폐하의 은총을 받고 있는 자들도 없소.”
이들은 국수파를 자칭하며 매일밤 지하실에 모여 천하와 국가에 대해 의론을 나누고는 있긴 했으나, 실상은 하급 귀족의 아들이나 기사, 혹은 중견 관료 등 국정을 움직일만한 힘을 가진 자은 없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요.”
허무감으로 가득찬 그때, 한 젊은 남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딜리스 공……당신은 왕도에서 영향력이 제법 되는 징수관이긴 하지만……그렇다 해도 폐하께 의견을 피력할만한 힘은…….”
왕은 방구석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오오!”
“이, 이건!”
상자 안에는 수많은 금화가 잔뜩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쪽도 봐주시지요.”
남자가 펼친 문서에는 왕과 로사리오의 여행 일정과 경비 상황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내 아버지 소속의 위병대까지 상세히 적혀 있군. 병 때문에 한 명 결원이 발생한 부분까지 정확하잖아.”
“이 정도로 엄청난 자금과 정보를 대체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이른 아침 국수파에게 보내는 우편으로 제 방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 중입니다.”
딜리스가 모든 이들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말했다.
“이것은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진, 우리와 같은 뜻을 지닌 대귀족, 혹은 대영주가 우리에게 건네준 것이라고!”
오오, 하는 환호성과 함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보와 자금이 있으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겠소.”
“그 창녀를 배제하는 계획이라……우리의 힘이 부족하여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사내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계획서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계획이라는 이름만 뒤집어 쓴, 아주 얄팍하고 조잡한 작전서였다.
“그 여자를 없애버리면 분명 폐하께서도 눈을 뜨실 거요.”
“맞소! 우리가 로사리오를 죽여서 고르도니아의 구세주가 되는 것이오!”
한껏 달아오른 일동은 지하실을 빠져나와 각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 중 한 명이 뒷골목에서 누군가에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넸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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