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361화『남부 전쟁⑫ 후퇴전』

제361화『남부 전쟁⑫ 후퇴전』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 아래,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런 날씨에도 병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뛰어 뛰어―멈추지 마!”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부상자를 엉덩이 쪽에 태워줘라.”
 
우리는 북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행군……이라기보단 도망쳤다.
왕국군 대다수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보병은 계속해서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강행군이다.
 
“상당히 빠른 속도입니다. 그리 쉽사리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세리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얘기했다.
 
브라이언의 원호 덕분에 토르트엔트를 포위 중이던 놈들은 동이 트기 전까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기병이지. 아무리 강행군으로 지나왔다 해도 기병 입장에선 오차 수준에 불과해.”
 
실제로 병사들과 보폭을 맞추면서 가고 있는 슈바르츠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면서 암말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중이다.
 
“놈들이 진심으로 따라오면 금세 따라잡힐 거다.”
“힘든 전투가 될 것 같군요.”
 
마이라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그때, 뒤쪽에 누군가가 올라탔다.
 
“흐흥.”
 
뭔가 싶었는데 세크리트가 올라탄 듯했다.
그녀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목덜미를 핥았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는 못해.”
 
화를 내는 세리아와 마이라를 지켜보면서 세크리트는 즐겁다는 듯 쾌활한 말투로 말했다.
 
“과연 기병들의 추격만 조심해야 할까?”
“뭐라고?”
 
뒤를 돌아본 순간 그녀가 내 입술을 훔쳤다.
 
“아앗―!”
 
세리아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세크리트는 또다시 즐겁다는 듯 얘기했다.
 
“동이 튼 시점부터 우리가 탈출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졌을 거다. 기병들이 진심으로 따라올 생각이었으면 이미 아침 즈음에 따라잡았을 테지.”
 
세크리트는 여전히 기쁜 기색으로 진행 방향을 가리켰다.
 
“이대로 일직선으로 가다 보면 작은 언덕이 연이어 있는 지형에 도착하게 되지. 도로도 있어서 평소 같으면 별다른 문제가 없는 지형이다만.”
 
내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크리트.
세리아가 하면 귀여운 자세일 텐데, 뭔가 사악한 미소다.
 
“병사들이 그쪽에 방어진을 세웠다 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리고 그 순간 때마침 기병이 도착하면?”
 
그 말만 남기고 다시 자기 말로 옮겨타는 세크리트.
 
“기병 말고는 따라잡을 수 없을 텐데 매복을 할 수가……앗!”
 
세리아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 놈들은 마차에 실어서 고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부대를 갖고 있었지.
 
“과연 그렇게 손발이 척척……아니, 하지만…….”
 
마이라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혹시, 라는 가능성 정도라면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탈출한 소식을 긴급히 전달하여 곧바로 마차 부대가 움직인다.
전속력으로 우회해서 언덕까지 달려간 놈들은 그곳에 병사를 배치하고 간이 진을 설치…….
 
“가능한 얘기군.”
 
기적은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게 재빠르게 행동하기만 하면 가능한 수준이다.
게다가 남유글리아군이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언덕까지 도착했다.
 
“역시나.”
 
언덕 경사면에는 떡하니 서 있는 남유글리아 제국의 깃발과 급조로 만든 얕은 참호, 그리고 마찬가지로 조잡하게 세워진 울타리였다.
 
“전방에 적 진지……병사 수 대략 1만!”
 
나랑 레오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에 적의 기병 집단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약 2만!”
 
이것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긴 하지만 정말 완벽한 타이밍에 다가오는군.
 
“간다.”
“예.”
 
나랑 레오폴트는 그 말만 나누고 헤어졌다.
 
레오폴트는 보병을 이끌고 전방에 있는 적진을 뚫는다.
나는 기병을 이끌고 뒤쪽에 있는 적을 향해 달려든다.
 
“정석대로라면……아뇨, 정석대로 보자면 이미 진 상황이네요.”
 
마이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레오폴트를 따라갔다.
 
원래는 기병이 적진을 뚫고 보병이 적의 공격을 막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탁 트인 평원에서 추격당한 이상, 방어할 방법 자체가 없다.
미친듯이 날뛰면서 속도가 느린 보병이 전부 도망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는 이쪽이다!”
“저도입니다.”
 
이리지나가 창을 휘두르며 사기를 북돋는 중이다.
 
“레오폴트 씨가 적진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후방의 적 기병도 돌진해 옵니다!”
 
옆에 있는 세리아가 소리쳤다.
 
적은 2만, 우리 쪽 기병은 5000미만.
 
“그렇다 해도 어떻게든 해내야지.”
 
나는 장검을 치켜들고 선두에 나섰다.
 
“오오오오! 위대한 제국을 위하여!”
“경애하는 여왕님을 위하여!”
 
적들이 소리치면서 달려왔다.
 
“돌격 개시. 너희가 가장 좋아하는 걸 소리치면서 돌진해라!”
 
나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슈바르츠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아!!”
 
세리아랑 이리지나도 뒤를 따랐다.
 
“에이길 니임!!”
“꼬챙이다아!!”
 
병사들도 뒤따랐다.
 
“나도 여자다아아!!”
“수우우울!”
“커다란 젖탱이이!!”
 
“나는 멋진 남자아!”
“나는 도온!”
“돈 많고 잘생긴 남자아!!”
 
욕망으로 가득 찬 절규 소리가 울려퍼졌다.
 
“술집의 에리이이!!”
“이웃집 유부녀어어어!!”
 
“나는 너다 마이켈!”
“나도 마찬가지야 그렛트!”
 
있는 힘껏 소리치면 겁에 질릴 일은 없다.
딱히 왕이나 나라 같은 부분에 고집할 필요도 없다.
 
“저놈들 반대로 이쪽으로 오고 있잖아!”
“오히려 잘 됐어. 느려터진 보병들은 어차피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먼저 기병을 박살내 버리자고.”
“저놈들 술이랑 여자 같은 소리만 지껄이면서 달려들고 있는데…….”
 
적과 아군은 옆으로 길게 퍼진 채 곧장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서로 멈출 생각도 우회할 생각도 없이 정면에서 급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쏴라!”
 
루나가 소리치자 궁기병이 깔끔하게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거의 지면과 평행선을 이루며 적에게 박혔다.
 
“끄악!”
“돌진하면서 활을…….”
“이놈들이……끄엑!”
 
완벽히 정면에서 공격을 맞은 탓에 손해는 결코 적지 않다.
1천에 가까운 적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혹은 말과 함께 쓰러졌다.
 
“한 발 더! 목표물 말!”
 
궁기병은 눈앞까지 다가온 적의 앞에서 화살을 활시위에 겨누고 한 번 더 일제사격을 날렸다.
 
그리고 활시위를 푼 다음 순간, 곧바로 활을 집어넣고 검을 뽑아든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속도다.
 
적의 말이 계속해서 죽고, 죽지 않은 말도 화살을 맞아 움직임이 이상해진 탓에 후속 부대를 방해했다.
 
“말이 당했다!”
“후속 부대가 들어가기 힘들어진다. 어서 치워!”
 
선두가 흐트러진 순간 검으로 무장을 바꾼 궁기병과 선두에 서 있는 나, 그리고 호위대 집단이 돌격을 시작했다.
 
“흡!”
 
맨 처음 일격에는 일부러 화려함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실었다.
 
장검이 선두에 있던 말의 머리째 기병의 몸통을 두 동강 낸 뒤 빠져나갔다.
써걱,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의 머리와 병사의 상반신이 공중을 맴돌았다.
 
“하나 더!”
 
휘두른 칼날의 방향을 바꿔 한번 더 휘두른다.
적의 어깨를 비스듬하게 절단내고 그대로 말의 몸통까지 두 동강 내주었다.
말은 중심에서 부러지듯 사망했고, 그 속도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엄청난 놈이 튀어나왔다!”
“방어를――끄악!”
 
말 위에서 방패를 쥐고 있던 적에게 사정없이 검을 휘둘러 방패째로 몸을 반토막 내주었다.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방어해 보시지.”
 
이번엔 방패를 휘둘러 또다른 말을 날려버렸고,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내 옆을 스쳐지나가던 적을 다리로 걷어차 낙마시켰다.
 
“튀어나왔구나, 악마 자식!”
“이놈이다, 이놈을 죽여라!”
 
적이 좌우 동시에서 창을 내질렀다.
 
왼쪽은 방패로 가볍게 튕겨내고 오른쪽에는 일부러 갑옷을 내주었다.
살짝 자세가 무너졌지만 복근에 힘을 줘서 버텨냈다.
 
“표적은 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검을 위로 치켜들어 두 적의 뒤쪽에 있던 지휘관을 향해 다가갔다.
 
“이런, 지휘관님을 지켜라!”
 
이미 늦었어.
 
내 일격은 곧바로 지휘관이 내지른 검을 부러트리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목을 날려버렸다.
살짝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시작이 순조롭군.
몸을 비틀어 뒤쪽을 훔쳐봤다.
 
“이 자식들 세다! 활만 잘 쏘는 게 아니야!”
“그래봤자 우리보다 숫자가 적잖아! 침착하게 대응해!”
 
내 뒤에서 돌진해 온 궁기병이 열심히 싸우는 중이다.
 
적은 이들을 아마 말 위에 탄 궁병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접근전에서 검을 휘두르는 궁기병도 결코 약하지 않다.
특히 서로 돌진하는 와중에 스쳐지나가듯 공격하는 그 기술은 궁기병이 가장 잘 쓰는 공격법이다.
궁기병보다 더 많은 수의 중장비병이 목에서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나의 활약이 눈부셨다.
 
“지금! 하나 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적을 앞에 두고서 활을 계속해서 쏴대는 중이다.
그러다 적이 다가오면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입에 물고 있던 검을 손에 쥐어 놈의 손목 혹은 목덜미를 베어낸다.
순식간에 활로 다섯, 검으로 둘을 처리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뭐, 뭐야 이 자식!”
“이 무슨 치사한……끄악―!!”
 
덤으로 멍멍이가 적을 튕겨날리면서 달리는 것도 보였다.
 
 
우선 첫 시작은 우리가 유리한 전개다.
하지만 그대로 남쪽으로 돌아갈 순 없기에 한 방 먹인 뒤엔 속도를 늦춰 난전으로 끌고 갈 것이다.
 
서로 한 데 서서, 혹은 조금씩 움직이면서 말 위에서 칼부림을 벌인다.
이러면 기량 자체는 뛰어나도 경장비에 창과 방패도 없는 궁기병은 숫자에 밀릴 수밖에 없다.
 
“끄악!”
“히익!”
 
활을 쏠 여유도 없기에 적의 창에 꿰뚫려 땅에 떨어지는 궁기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점차 적의 기세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다!”
 
그때 왕국군 기병대가 창을 치켜들고 참전했다.
이들은 방패와 기승창을 장비하고 있기에 접근전에서도 우위를 가질 수 있다.
 
한 데 서서 창을 내지르거나, 방패로 공격을 막거나, 말을 좀 더 접근시켜 적의 검을 빼앗은 뒤 휘두른다.
사람과 말이 한 데 뒤섞인 난전이다.
숫자로는 압도적으로 불리하지만 최소한 일시적으로 적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와 호위대도 난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1, 2, 3, 4.”
 
듀얼 크레이터로 적의 목을 꿰뚫고 뽑아내 또다시 한 놈의 목을 날린다.
목이 사라진 시체를 장검에 꽂아 내던지듯이 휘둘렀고 그 공격으로 두 놈을 한꺼번에 말에서 떨어트렸다.
 
“5, 6―흡! ……이제 얼마나 죽였는지 모르겠군.”
 
다섯 번째 적의 창을 피해 두 손을 베어버리고 여섯 번째 말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려 자빠트렸다.
주변에 있는 적이 모조리 나를 노리길래 한 박자 쉬고 장검을 한 바퀴 돌려 주변에 있던 적을 모조리 베어넘겼다.
욱신, 하고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꺄악―!”
 
비명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궁기병 여자가 적에게 걷어차여 창에 찔리기 직전이었다.
일단 본 이상 구해내고 싶긴 하지만 여기서 도와주자니 제때 도착하긴 힘들어 보였다.
 
“이런! 아무나 도우러 가라!”
“알겠습니다!”
 
적의 목구멍에서 새빨간 검이 튀어나왔다.
기드가 뒤쪽에서 적을 처리한 것이다.
 
“이 자식!!”
 
죽은 적의 동료 둘이 기드한테 달려들었다.
 
“느려!”
 
기드는 자신에게 날아온 창을 방패로 흘리고 또 한 사람의 검을 검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막아낸 검을 흘려보낸 뒤 적의 팔꿈치 관절부를 노려 베었다.
 
“끄아아아악!”
 
갑옷 틈 사이를 베인 적이 비명을 내지른 순간, 기드의 검이 놈의 목에 박혀 비명을 막았다.
 
남은 적은 노성을 내지르면서 다시 창을 내질렀다.
기드는 그 공격을 방패가 아니라 검으로 막아내고는 창의 몸통 부분을 위쪽에서 방패로 때렸다.
 
“뭣!?”
 
적은 부러진 창을 버리고 검을 뽑으려 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기드의 검이 깔끔하게 적의 목을 날려버렸다.
 
“괜찮아?”
“고, 고마워.”
 
궁기병 여자는 기드의 손을 붙잡아 재빠르게 자기 말 위에 태웠다.
 
“다음엔 실수하지 마. 살아남으면 밤에 네 방으로 갈 생각이니까.”
“물론……기다릴게.”
 
폼을 잡던 기드의 등이 텅 비어 있었다.
 
“저 멍청이, 뭐하는 거냐!”
 
그때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끄악!”
 
적의 얼굴에 창이 꽂히고 뒷머리에서 창날이 튀어나왔다.
 
“와하하하하하하하!! 꼬챙이! 꼬챙이다!!”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는 체격과 힘, 무엇보다 커다란 목소리가 이리지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좀 더 꼬챙이! 계속해서 꼬챙이다!!”
 
이리지나는 주변 적에게 계속해서 찌르기를 퍼부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반응이 늦어진 적은 목을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으악, 이게, 흐으아아아아악!”
 
재주 좋게 첫 공격을 막아낸 적조차 눈으로도 좇기 힘든 연격 끝에 결국 옆구리를 꿰뚫려 단말마를 내질렀다.
 
“흡! 흐읍흐읍! 흐아압!!”
 
방패로 창을 막아낸 적은 힘이 실린 찌르기 연타에 자세가 무너졌고, 끝내는 절규를 내지른 이리지나 혼신의 일격을 머리에 얻어맞고 졸도했다.
 
“와하하하하! 좀 더 싸우자꾸나! 아직 꼬챙이가 한참 남았다!”
 
이리지나는 창을 휘두르면서 전장을 누볐고 가는 곳마다 적이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었다.
 
“저 녀석은 즐거워 보이는군.”
 
기드뿐 아니라 중장비를 한 호위대는 난전 상황에서 한층 더 빛난다.
혼자서 여러 적을 처리하고 있는 자도 드물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군과 적의 숫자 차이가 너무 심했다.
 
적은 난전 때문에 슬슬 이골이 났는지 일부러 몇천명을 뒤쪽으로 물린 뒤 돌격하는 작전을 계속해서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멈춘 순간 적이 돌격하기 시작하면 온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손해가 커지고 기세와 속도 모두 크게 깎여나갔다.
 
두 번, 세 번 당할 때마다 점차 아군의 불리한 상황이 확연히 드러났다.
 
“슬슬 힘들군.”
“적의 손실은 우리 쪽보다 몇 배는 클 겁니다. 좀 더 혼란스러워 해도 될 텐데.”
 
세리아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부분은 남유글리아 제국과 싸우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 느끼고 있던 점이다.
이들은 사령관을 죽이거나 부대를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는 한 무너지지 않는다.
 
“사령관은……못 노리겠군.”
 
그리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령부를 후방에 배치한다.
내가 잠깐 앞으로 나가서 움직인다 한들 죽일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적의 기세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총공격이다, 밀어붙여!”
 
적이 한층 더 맹렬하게 공격에 나섰다.
 
“레오폴트는 아직 뚫지 못한 건가? 슬슬 버티기 힘든데.”
 
그렇지만 불평을 늘어놔도 달라질 건 없기에 나는 장검을 고쳐쥐고 앞으로 나섰다.
 
“준비 완료, 발사하겠습니다!”
 
갑자기 세리아가 옆에서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가랑이 쪽을 쳐다봤지만 그 얘기가 아닌 듯하다.
 
한층 더 공세를 퍼붓는 적을 향해 거대한 화살이 쏟아졌다.
물론 거대 석궁을 설치하고 있을 여유는 없기에 이 사격은 전차에서 시행된 것이다.
 
“최고의 위치에서 쏘는 중입니다. 이러면 적도 약간이나마 혼란스러워할 겁니다!”
 
살아남은 전차는 60대 하고 몇 대 더 있는 수준으로 적을 막기엔 한참 모자라다.
그렇다 해도 쾅쾅, 하고 쏟아지는 방어 불가능한 거대 화살은 적의 기세를 늦추기에 딱이다.
 
“거대 석궁!? 어디지!”
“저 이상한 마차다! 저놈을 박살내 버려!”
 
그리고 적은 전차를 노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물론 전차는 금세 도망치기 시작했고 추격하는 적의 옆을 아군이 쳤다.
 
“젠장, 귀찮은 새끼들! 그냥 항복하면 되잖아!”
“안 되겠어, 저 마차는 그냥 내버려 둬!”
 
“잘 했다, 세리아.”
“네! ……하지만 결국엔 시간벌이에 불과합니다.”
 
그건 별 수 없지.
이번 전투 자체가 보병이 적진을 뚫을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니까.
 
또다른 위치에서도 적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말이 안 되잖아! 대체 뭐냐고 이게!”
“이거 맞아? 아니 절대 아니지!”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멍멍이가 뒷발로 서서 적의 한복판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발톱으로 적을 찢어발기고 꼬리로 튕겨날린다.
적은 창과 검을 휘둘러 싸웠지만 그냥 금속 덩어리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릴뿐이다.
오, 불까지 뿜었잖아……멍멍이를 중심으로 텅 빈 지대가 생겼다.
 
역시 튼튼한 도마뱀이야.
요즘에 저 녀석이 정말 도마뱀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때 레오폴트가 공격하고 있던 방향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복부에 저릿저릿한 충격이 느껴졌다.
옆구리를 가볍게 만져보니 피가 새어나와 있었다.
 
“뭐야, 저 자식 대포라도 쏜 건가?”
“대포는 갖고 있는 게 없습니다만…….”
 
세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끄덕여 주자 내게 고개를 숙인 다음 세리아가 내 머리 위에 올라타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투 때문에 땀에 젖은 가랑이 쪽 냄새가 기분이 좋군.
 
“저건……말이랑 마차가 적진으로 돌진 중입니다. 앗, 폭발했습니다! 화약을 실어서 보낸 것 같습니다!”
“미친놈.”
 
그놈도 그놈 나름대로 비장의 수단을 준비해 뒀던 모양이다.
 
레오폴트도 우리가 오랫동안 싸울 여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우리보다 많은 적을 뚫고 나가기 위해선 약간의 미친짓도 필요하다 판단한 것이리라.
 
 
폭발음은 연속으로 몇 번이나 울려퍼지다 끝내 멈췄다.
 
“적진 돌파! 돌파 성공입니다!”
 
이쪽으로 달려와 소리친 인물은 마이라였다.
전령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달려와서 얘기를 하다니.
왜 그대로 도망치지 않고……널 감싸줄 이불도 없는데.
 
“여기서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후퇴해 주십시오. 책략이 있습니다!”
 
지금 도망쳤다간 보병대는 금세 따라잡힐 거라 보는데 레오폴트가 물러나라고 한 이상 여기서 더 머무르는 게 제일 악수다.
 
“전원 후퇴한다. 등 안 베이게 조심하고.”
 
명령을 받고서 아군 측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확실히 이 상황이 힘들긴 했던 모양이다.
 
“놓치지 마라! 쫓아가!”
“이대로 놓쳤다간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란 말이다!”
 
적 기병도 눈을 시뻘겋게 뜨며 우리를 쫓아왔다.
 
하지만 서로 기병이기 때문에 한 번 도망치기 시작하면 그리 쉽사리 따라잡힐 일은 없다.
그리고 또 하나.
 
“후방 사격! 쏴라!”
 
궁기병의 배면 사격이 적을 향해 쏟아졌다.
 
궁기병은 적보다 장비도 가볍고 속도도 빠르다.
적은 결국 쫓아오지 못했고 일방적으로 화살에 얻어맞는 전개가 펼쳐졌다.
 
“으악! 이 자식들이!”
“뒤를 돌아보면서 활을 쏘다니 대체 어떻게……에잇, 못 쫓아가겠군. 일단 정지!”
 
적의 속도가 느려졌다.
일단 이대로 도망칠 수 있겠군.
 
“꺄악!”
 
하지만 그때 한 가지 작은 불행이 일어났다.
최후미에서 활을 쏘고 있던 한 사람이 속도를 너무 늦춘 탓에 적의 창에 얻어맞고 만 것이다.
 
다행히 창은 그녀의 몸을 스친 게 끝이었지만 그 충격으로 낙마하고 말았다.
 
“저 녀석은…….”
 
땅바닥을 구르며 슬프다는 듯 나를 바라본 여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내가 최근에 처녀를 따먹었던 그 궁기병 여자애였다.
 
당연히 일반적으로는 내가 가선 안 된다.
사령관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다.
하지만 사령관으로서의 책임과 처녀를 가져간 남자로서의 책임을 저울에 올려보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먼저 가라!”
 
“에이길 님!? 안 됩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세리아랑 마이라가 제지하는 걸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슈바르츠도 이번 전투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비켜라아!”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적진 한복판으로 뛰쳐들었다.
 
슈바르츠의 몸통 박치기로 말 두 마리 쓰러졌고 내가 방패를 휘둘러 또 한 마리를 쓰러트렸다.
 
“족장님, 어째서――!”
“타라.”
 
여자를 붙잡아 말 위로 끌어올렸다.
 
곧바로 도망치려 했지만 적도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
홀로 남겨진 우리는 이미 주위에 포위당한 상태였다.
적의 대응력을 너무 얕잡아 봤군.
 
“고개를 낮춘 다음 웅크리고 있어.”
 
여자한테 그렇게 말한 다음 장검과 듀얼 크레이터를 손에 쥐었다.
 
“이제 도망칠 생각은 버려라. 순순히 항복하면――.”
 
찢어진 목이 『포로로』――같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날아갔다.
 
“쫑알쫑알대지 말고 덤벼라.”
 
눈에 살기를 담았다.
 
적도 그 말을 듣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악마다, 사람이라 여기지 마라. 결단코 비겁하지 않다는 걸 머리에 새겨두고……다같이 간다.”
“““예!”””
 
적이 일제히 덤볐다.
 
동시에 덤비는 건 넷, 그것 말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단창이 두 자루 있었다.
 
“죄송합니다, 족장님.”
 
눈물을 글썽이며 허리에 엉겨붙는 여자가 내게 힘을 주었다.
 
단창 한 자루는 듀얼 크레이터를 쥐고 있는 왼손 장갑으로 흘려보내고, 또 한 자루는 몸을 뒤쪽으로 비틀어 피했다.
 
“오오오오오!”
 
크게 자세가 무너진 순간 적이 달려들었다.
 
“어이.”
 
그에 답하듯 슈바르츠가 몸을 앞으로 흔들었고 뒤쪽으로 기울어 있던 내 무게중심이 돌아왔다.
 
“잘 했어.”
 
아래쪽에서 장검을 치켜올리듯 휘둘러 한 놈의 몸통을 베어냈다.
두 번째 놈의 검은 듀얼 크레이터의 칼등 부분으로 강하게 튕겨내 자세를 무너트렸다.
세 번째 놈은 검을 내지르기 전에 슈바르츠가 몸통박치기를 먹여 쓰러트렸다.
네 번째 놈한테는 듀얼 크레이터를 박아넣었다.
적의 검은 내 어깨에 맞았고 내 검은 적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받아라.”
 
마지막으로 휘청대는 두 번째 놈의 머리 위에 장검을 내리꽂아 숨통을 끊었다.
 
“겁먹지 마라! 상대는 악마다, 처음부터 50명은 죽을 각오로 덤벼라!”
“숨 쉴 틈도 주지 마라!”
 
적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창과 검을 치켜들고 계속해서 내게 덤벼들었다.
이러면 슈바르츠가 달릴 틈도 없기에 한 자리에 서서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다.
 
내게 무기를 휘두른 적을 향해 일부러 듀얼 크레이터를 쥐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바로 뒤에서 달려오던 두 번째 놈을 베어넘겼다.
 
창을 찌르려고 달려드는 적은 장검으로 막아냈다.
애초에 이 장검이 창보다 길기 때문에 적이 나보다 먼저 찔린다.
 
“왼쪽은 네가 처리해라.”
 
슈바르츠가 히힝거리며 몸통박치기로 옆에 서 있던 적의 말을 넘어트렸다.
 
“오오오오!”
 
달려드는 적, 그 뒤쪽에서 단창을 던지려고 하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맡겨두마. 잘 갖고 있으라고.”
 
나는 내게 달려들던 적의 몸통 한가운데에 장검을 꽂아넣고 던진 다음 방패를 고쳐쥔 뒤 내게 날아오는 단창을 막아냈다.
 
“고맙다.”
 
곧장 방패를 내려놓고 적의 몸에서 장검을 뽑아낸 뒤 발로 걷어찼다.
 
“족장님, 뒤쪽입니다!”
 
여자가 소리치자 답하는 것 대신 듀얼 크레이터를 뒤쪽으로 내질렀다.
듀얼 크레이터는 깔끔하게 적의 이마를 꿰뚫었고 놈은 움찔, 하고 떤 뒤 그대로 낙마했다.
 
“비켜라아아아아!!”
 
말을 탄 적 셋이 창을 내지른 채 달려왔다.
곧바로 장검을 휘둘러 단번에 동강냈지만 쓰러진 말이 그 속도 그대로 내게 부딪쳤다.
 
“……쯧.”
 
슈바르츠는 곧바로 자세를 고쳤지만 방금 건 복부에 정면으로 박혔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분명 상당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가라, 놈이 쓰러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마라!”
 
뒤이어 세 자루의 단창이 날아왔다.
 
장검과 듀얼 크레이터를 이용해 두 자루는 떨어트렸지만 한 자루가 등에 박혔다.
갑옷을 뚫지는 못했지만 화살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느껴진다.
 
“끄윽…….”
 
나도 모르게 신음하자 등 뒤에 있던 여자가 날 끌어안았다.
 
“제가 갑옷이 되겠습니다! 죽어도 놓지 않겠……흐극.”
 
한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꾹 눌러 엎드리게 만든 뒤, 뒤쪽에서 다가오던 적의 목을 날려버렸다.
 
“일부러 너를 구하러 온 건데 죽으면 안 되지. 그것보다 내가 죽인 적의 숫자라도 세고 있도록 해.”
“네, 네……방금 그걸로 14입니다.”
 
아직 14밖에 안 되나.
 
장검을 휘둘러 듀얼 크레이터로 찢어발기고 방패로 때려부수고, 박치기와 다리까지 써서 적과 계속해서 싸운다.
 
“25……27……29입니다, 족장님.”
 
어떻게든 도망칠 구석을 찾고 있는데 적이 전혀 겁을 먹지 않아서 빈틈이 없다.
 
“족장님, 모든 방향에서 옵니다!”
“알겠다!”
 
양손으로 장검을 들고 전력으로 회전시켰다.
 
미친듯이 찢겨나가는 적 병사들.
방패와 갑옷도 무시하고 모든 걸 박살낸다.
경악으로 물든 적의 목이 계속해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마지막 한 놈을 두 동강낸 순간,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끄윽…….”
 
통증 때문에 근육이 반사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힘이 빠져나갔다.
장검은 마지막 적에게 닿기 직전 속도를 잃었다.
 
 
그리고 적이 내지른 창이 내 목에 박혔다.
 
“어?”
 
여자가 믿기지 않는 걸 본 것마냥 굳어버렸다.
 
창을 내지른 적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멈춰 있었다.
목에서 피가 넘쳐흐르며 몸 앞부분을 물들였다.
 
“아……아…….”
 
동요 중인 여자한테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애초에 숨도 안 쉬어진다.
 
“해, 해치운 건가?”
“잠깐, 진짜 죽기 전까진 섣불리 다가가지 마라.”
 
적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숨도 못 쉬겠고 의식이 점차 멀어져 가며 움직일 수가 없다.
 
적이 단숨에 창을 겨눴다.
큰일 났군.
 
“악마를 섬멸한다.”
“제국과 여왕 폐하님께 영광 있으리!”
 
여자가 살며시 내 등을 끌어안았다.
 
“함께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니 바라지도 않던 영광입니다. 여한이 있다면 저 때문에 위대한 족장님이 죽게 되신다는 점――.”
 
눈이 뜨였다.
내가 죽으면 이 여자도 죽는다.
그리고 세리아와 마이라, 저택에 남겨두고 온 여자들도 슬퍼할 것이다.
 
나는 목에 꽂힌 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낸다.
세리아가 다른 남자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광경, 논나의 초거유에 다른 남자가 얼굴을 파묻는 광경이 떠오른다.
 
힘을 줘서 창을 천천히 뽑아냈다.
 
그러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을 것이다.
카라와 마리아 위에서 본 적도 없는 남자가 신음하며 씨를 뿌리고 그녀들을 임신시킨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꼴은 못 보지.
그 여자들을 안고 임신시킬 수 있는 건 바로 나뿐이다.
 
“크으으윽…….”
 
목에 박혀 있던 창을 억지로 뽑아낸다.
 
엄청난 양의 피가 목에서 새어나왔지만 그와 동시에 공기도 흘러들어왔다.
의식이 각성하면서 눈이 적의 모습을 확인하고 손발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크아아아아아아!!”
 
내게 달려드는 적을 향해 뽑아낸 창을 내질렀다.
 
“악마가――.”
 
적의 눈에 창을 끝까지 밀어넣어 비틀었다.
 
“되살――.”
 
내게 내지른 창을 붙잡아 적을 하늘 위로 내던졌다.
 
“역시 이놈은 인간이 아니야!”
 
내 얼굴을 노린 일격이 명중했다.
적의 얼굴에 한 순간 희색이 떠올랐지만 금세 공포로 물들었다.
 
놈이 내지른 창은 내 입, 정확히 말하자면 이빨 사이에 맞물려 멈춰 있었다.
 
나는 그 적에게 주먹을 휘둘러 얼굴을 박살냈고, 놈의 창을 빼앗아 휘둘렀다.
 
손잡이로 때리고, 창날을 억지로 쑤셔박는다.
창은 순식간에 망가졌지만 그냥 곤봉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러다 소란이 이어지더니 호위대 인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저 가라고 말했는데 돌아온 건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역시 목소리가 안 나온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슈바르츠의 속도를 높였다.
……역시 달리는 모양새가 이상하군. 어딘가 다친 게 틀림없어.
 
적은 무어라 소리치며 말 위에서 크로스보우를 조준했다.
이거 등 쪽에 몇 발 맞게 생겼군.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여자를 앞쪽에 앉혀두고 그냥 속도를 높였다.
 
“조준……아니, 잠깐!”
“이 몸 참전――!”
 
날 조준하고 있던 기병에게 한 호위대 인원이 뛰어들었다.
크리스토프다.
 
“젠장, 그 중장기병이잖아! 센 놈이다!”
 
적도 호위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체격이 좋은 크리스토프가 용감하게 소리치며 돌진하면 무시할 순 없다.
 
나는 그 틈에 호위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세리아는 목덜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잔뜩 묻은 날 보며 깜짝 놀랐지만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조금 얌전해졌다.
 
이제 크리스토프한테 잘 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 봤냐, 어제부터 계속 상태가 끝내준다고!”
 
크리스토프는 내가 도망친 걸 보고 다시 방향을 돌렸다.
당연히 처음부터 돌진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눈속임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잘 했다, 크리스토프!”
“지리는데, 크리스토프!”
“오늘은 너의 날이다, 크리스토프!”
 
호위대에서 끊임없이 크리스토프를 칭찬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놈은 가슴을 펴고 돌아오려다――――말에서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앗, 크리스토프가 당했다!”
“저 돌 때문이야! 말이 돌부리에 걸렸어!”
“딴짓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땅바닥에 엎어진 크리스토프, 박정하게도 놈의 말은 그대로 이쪽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적은 순식간에 크리스토프를 포위했다.
 
“이제……힘들겠네요.”
 
마이라가 중얼거렸다.
 
도와주고 싶지만 목에 구멍이 뚫린 탓에 이제 나도 한계다.
 
“크리스토프, 에이길 님을 구해내다니 잘했습니다.”
 
세리아는 크리스토프에게 경례한 뒤 내 목을 천으로 감쌌다.
호위대도 경례한 뒤 나를 둘러싸듯 움직이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젠장, 놓치게 생겼군!”
“지금 당장 추격전을 시작한다. 악마 때문에 전체 추격 속도도 늦어졌다.”
“이놈은 아무래도 고위 기사인 모양이군. 죽이지 말고 포로로 삼아서 심문한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아무래도 죽지는 않는 모양이다.
 
빚이 생긴 이상 이대로 네가 죽으면 영 찝찝해질 거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우리는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고 만신창이에겐 오르기 버거운 오르막을 힘겹게 올랐다.
 
“적의 추격이 시작됐습니다!”
 
빠르군…….
 
이 상태로는 보병대가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레오폴트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러자 언덕을 타고 오른 우리의 눈앞에 마차 몇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좀 의아했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그리고 우리를 쫓아온 적이 언덕에 도착한 순간……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렇군……돌파할 때랑 똑같은 방법으로 적을…….”
“그것만 이용하는 건 아닌 것 같군.”
 
어느새 세크리트가 내 옆에 와 있었다.
전혀 모습을 안 보이던데 어디로 갔던 거지?
 
그녀는 내 목을 보고 눈을 날카롭게 떴지만, 슬쩍 상처를 매만지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폭발이라면 선두에 있는 놈이 날아가고 끝일 테지만 이 녀석한테는 조금 더 장치가 있더군.”
 
잘 보니 폭발 이후에도 연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대량의 연기가 계속 남아 있었다.
 
“저건……무슨 가루 같은 건가요?”
“석회 가루다. 폭발은 저걸 흐트러트리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지……레오폴트라고 했나? 그놈은 제법 재밌더군.”
 
적 기병은 석회 연기를 빠져나왔지만 금세 발을 멈추고 말았다.
병사와 말이 심한 기침을 내뱉기 시작해서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석회 안으로 들어가면 기침도 심해지고 눈도 따갑지. 저 위치에서 터트리면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 적의 상당수가 휩쓸릴 거다.
 
확실히 말의 시야와 호흡을 빼앗으면 추격하는 건 어려워진다.
100, 200명을 화약으로 날려버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전투 때문에 발생한 손실도 크고 고르도니아 국경도 조만간이다. 나라면 여기서 더 이상 쫓진 않을 테지.”
 
세크리트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한 번 더 내 상처를 확인했다.
 
“약을 쓰면 죽진 않을 거다. 여자라도 따먹으면서 쉬도록 해라. 따먹는 여자는 나라도 상관없고 말이야.”
 
그래, 하고 세크리트가 말을 이었다.
 
“그 리버티스의 답답한 멍청이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더군.”
“치료가 먼저입니다. 그런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다.”
 
세리아가 내 목에 붕대를 감으면서 말했다.
마이라는 어째서인지 나를 이불로 감쌌다.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이야기는 할 수가 없는데……일단 들어주기라도 해볼까.
 
◇◇◇◇◇◇◇◇◇◇◇◇◇◇◇◇◇◇◇◇◇◇◇◇◇◇◇◇◇◇◇◇◇◇◇◇◇
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4살 겨울 전시
리버티스 구원군 (실패)
휘하 부대
 
고르도니아 왕국군 제7병단
보병 4100명
궁병 900명
기병 700명
 
하드릿 사군
궁기병 2400기
호위대 150기
전차 45대
 
부하: 레오폴트(참모) 세리아(걱정) 마이라(걱정) 이리지나(트리거 해피) 루나(지휘관)
기드(호위대) 피피(장갑화 도마뱀 기병) 멍멍이(장갑 도마뱀) 세크리트(임시 대원)
수지(망명 중) 마타(걱정) 이름도 없는 궁기병(홀딱 반함)
 
현재 지점: 고르도니아 국경
 
전과: 요새 포위군 격파, 메리스버크 방어 완수, 마법 부대 격파, 토르트엔트 포위망 돌파
기병 집단+동부 군단 일부 격파
 
재산: 금화 2050닢
경험 인수: 585명 자식: 68명+565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