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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362화『남부 전쟁⑬ 마이 와이프』

제362화『남부 전쟁⑬ 마이 와이프』

 
――힘든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움직이지 마세요.”
 
세리아가 내 목이 조이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이면서 붕대를 갈아주었다.
불안정한 마차 위에 있는데 정말 손재주가 좋군.
 
폭발로 석회를 퍼트리는 레오폴트의 책략은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는지 더 이상 우리를 쫓아오는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말하길 지금은 한 데 서서 재편성 중이라고 한다.
 
고르도니아 영토까지의 거리를 고려해 보면 추격을 포기했다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통증은 없으신가요? 숨은 쉴 수 있으시죠?”
 
나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창 때문에 꿰뚫린 내 목은 약이 없었으면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상처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입이 아니라 목에 난 구멍으로 숨을 쉬었던 것 같기도 하다.
 
군의관이 말하길 이제 목숨에 지장이 갈 일은 없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되도록이면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약 덕분에 상처는 나았지만 말을 하려고 하면 갈라진 이상한 소리가 나는 데다가 목도 아파서 한동안은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소리도 들었다.
 
세리아는 붕대를 다 감고 옷의 목덜미 부분을 만져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감춰 주었다.
 
“일단 다 끝내긴 했지만……역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 사람의 얘기는 저 혼자서 듣고 오겠습니다.”
 
그 사람이라는 건 짐을 얘기하는 거다.
내게 할 말이 있다길래 치료를 끝마치면 갈 생각이었다.
 
“아으.”
 
나는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얘기를 듣는 것쯤이야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다.
게다가 뭔가 중요한 얘기일 거라는 예감이 있단 말이지.
 
“그럼 제가 에이길 님의 성대가 되겠습니다! 저는 에이길 님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눈을 보면 전부 알 수 있으니까요.”
 
 
“족장님!”
 
나랑 세리아가 마차 위에서 내려가자 마차에 딱 달라붙어있던 궁기병 여자가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난전 도중엔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는데 혹시 다친 곳은 없나?
 
“개……나…….”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몸을 가볍게 만지고 『다친 덴 없나?』라고 눈짓으로 물어 보았다.
 
“족장님께서……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는 눈만 봐도 알겠습니다. 물론 상관없어요.”
 
여자는 옷의 앞섬을 풀어헤치고 내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무슨 눈을 하고 있던 거지?
 
“앗, 아래쪽도 원하시나요? 물론 괜찮죠.”
 
내가 고개를 젓자 이번엔 아래쪽을 벗고 손을 가랑이 사이로 이끌었다.
주변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서 나에 대한 사랑이 한가득 느껴진다.
 
이걸 봐서는 딱히 다친 덴 없는 모양이다.
걱정 말고 짐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군.
 
그 전에 살짝 가슴만 주무르고서.
 
그리고 세리아, 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확실히 알겠지?
 
“…….”
 
왜 시선을 피하는 거야.
 
 
“오오, 와줬나! 내가 직접 갈 생각이었다만……부상자를 불러내다니 저스티스에 반하는 행위. 미안하다!”
 
짐이 커다란 목소리로 사과했다.
세리아는 시작하기에 앞서 불평부터 내뱉으려 했지만 너무나 커다란 사과에 기선제압을 당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기도 하고 사과를 받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나는 표정과 자세로 『신경 안 쓴다』고 전달했다.
 
“신경 쓰고 계시지 않습니다. 에이길 님은, 말이죠.”
 
세리아가 짐을 노려보며 말했다.
짐은 한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목에 감싸인 붕대를 보고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이미 여기는……고르도니아 국경이겠지.”
“네, 도로 주변에 있는 저 언덕을 넘어가면 국경선에 위치한 작은 천과 개척촌이 보일 겁니다.”
 
나는 몰랐는데 세리아가 대신 답했다.
 
“……그러면 이제 습격당할 걱정도 없겠군. 망명자들의 안전은 지켜졌다 봐도 되겠어.”
“적이 국경을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 말이 맞습니다.”
 
짐은 눈을 감고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유의 토지에서, 자유의 공기를 숨쉬며 살아온 자들이다. 왕정이 존재하는 고르도니아에선 이물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지. 그래도……어떻게 우리 사람을 부탁할 수 없겠나? 일생일대의 소원이다!”
 
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사과를 많이 받는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버티스의 제도는 상당히 기묘해서 그들이 고르도니아에 융화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솔직히 나도 브라이언과 짐이 마음에 들었기에 동행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부탁이다……내 저스티스의 체면을 걸고서!”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저스티스는 무슨 만능형 주문 같은 건가 싶다.
 
뭐 좋아. 여차하면 내 쓸데없이 넓은 영지 어느 곳에 놔두면 되겠지.
반란만 일어나지 않으면 민주주의든 뭐든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
 
“……에이길 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신다고 합니다.”
 
세리아가 정말로 내 눈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 주었다.
 
짐은 한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정말로.”
 
그리고 놈은 커다란 방패와 검을 들고 짐을 짊어지기 시작했다.
 
“뭘 할 셈이냐?”
 
세리아가 나 대신 물어봐 주었다.
말투까지 날 따라하는 중이다.
 
“토르트엔트에 두고 온 물건이 있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말투로 얘기하는 귀여운 세리아의 목소리라니, 흥분되는군.
그나저나 정말 내 눈만 보고 내용을 다 알아내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인 건 알고 있지. 하지만 두고 갈 수는 없다……남겨두고 온 건 내 와이프니까.”
 
한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세리아가 눈을 읽기도 전에 짐을 발로 걷어찼다.
 
“미친 거냐? 남자라면 다른 아저씨들을 내쫓아내서라도 아내를 데리고 와야지. 사람을 잘못 봤군.”
 
세리아가 살기까지 담아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하지만 영 귀여운 느낌이 안 지워지는군.
 
“그래……와이프 한 사람 지키지 못한 나는 남편 실격이다. 쓰레기지……그래도……브라이언 각하께서 맡긴 미래의 씨앗을 지키기로 결정했단 말이다.”
 
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걸은 펜턴트를 바라봤다.
 
“와이프는 최고의 여자다. 하지만 요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랑 함께 다른 이들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지……군인으로서 해야 할 책무를 잊고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해선 안 된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데.
그건 그렇고 망명자 사이에 섞여있던 수지는 요직을 갖고 있던 건가?
 
“그 멍청한 여자가 그럴 리 없죠. 크흠, 그래서 뭘 할 생각이지?”
 
세리아가 그렇게 말하자 짐은 결심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리버티스 군인으로서 자신을 버리고 자유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다. 망명자는 안전한 위치까지 도착했지.”
 
짐은 펜던트를 꾸욱 손에 쥐고 소중하다는 듯 다시 목에 걸었다.
 
그 난전 사이에서 망명자들의 피해는 0이었다.
그것은 짐과 그가 데리고 온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워 만든 결과다.
 
짐은 커다란 검과 방패를 휘두르며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
적을 걷어차고, 날려버리고, 래리어트와 두 발 날아차기까지 사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인으로서 해야 할일은 끝났다. 다음은 남편으로서 와이프를 데리러 가야지.”
 
짐은 휙 몸을 돌리고 남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물론 구출은 불가능하다.
토르트엔트에 도착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
 
“죽을 생각이냐?”
 
나는 놈의 뒷모습에 그렇게 물었다.
말을 하고 있는 건 세리아지만.
 
“죽을 생각은 없어. 죽으면 와이프를 끌어안아 줄 수가 없잖아.”
 
짐은 나를 향해 리버티스식 경례를 하고서 걸어나갔다.
말도 사용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
 
세리아와 나는 둘이서 짐을 바라봤다.
이제 절대로 돌아오지 못할 사내의 등을.
 
“흐…….”
 
나는 새어나오는 듯한 숨을 내쉬고 세리아를 바라봤다.
 
마지막 답변에 만족했다.
죽을 생각이라면 얼른 죽으러 가는 게 맞지만, 아내를 살리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는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안 됩니다.”
 
고개를 젓는 세리아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어제부터 계속 무모한 짓만 골라서 했다.
돌아가면 세리아랑 마이라, 레오폴트까지도 내게 한동안 잔소리를 퍼붓겠지.
 
“……싫습니다.”
 
그런 말 말고, 부탁할게.
 
세리아는 뺨을 부풀린 채 눈물을 글썽이며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잠깐! 이쪽으로 와라!”
 
그리고 세리아는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소리치며 짐을 불러들였다.
 
저 멀리서 멍멍이가 갸아―, 하고 우는 게 들렸다.
 
 
 
두 시간 뒤 토르트엔트 근처
 
“이, 이걸 어찌 표현해야 하나. 이걸 어떻게 말하면 되는 건지……오오, 이 무슨 엄청난 광경, 이 무슨 엄청난 저스티스.”
 
우리는 강행군으로 하루를 넘게 걸어왔던 길을 고작 두 시간만에 돌아왔다.
물론 슈바르츠를 타도 이런 속도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건 멍멍이다.
나랑 짐은 멍멍이 위에 타 바람을 갈라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이다.
 
토르트엔트는 이미 문이 열려있을 거고 길가에도 적들이 우글우글대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사이를 파고 질주하는 건 슈바르츠라 한들 불가능한 일이고 심지어 지금 슈바르츠는 부상을 입었다.
 
잠입도 고려해 봤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다가 나는 잠임 자체에 어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목소리가 크고 몸집이 산만한 짐도 전혀 어울리지 않기에 이 선택지도 고를 수 없었다.
 
그래서 멍멍이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멍멍이는 장갑화된 거대 도마뱀이면서 동시에 하늘을 날 수 있기까지 하다.
덤으로 불도 뿜을 수 있다.
 
“힘내라 멍멍아, 얼마 안 남았다.”
 
멍멍이는 머리 위에 올려태운 피피의 지시를 듣고 갸아―, 울었다.
요즘 커다래진 멍멍이의 목소리는 울음소리라기보다는 포효에 가까워서 배가 울린다.
 
“설마 드래곤 위에 타게 될 줄이야……전혀 믿기질 않는군!”
 
짐은 처음으로 하늘을 날면서 살짝 착란 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기분은 이해가 되는군. 나도 지난번에 괴조한테 붙잡혔을 땐 너무 흥분해서 냉정하질 못했으니까 말이야.
 
“하늘에서 바라보는 리버티스도 참으로 아름답구나……언젠가 반드시 되찾을 테다!”
『그 결심도 좋지만 슬슬 도착할 거다. 준비해라』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커다란 목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바람소리가 너무 커서 작은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피피한테 대신 말해달라고 해야지.
 
“음, 알겠다.”
 
피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바라봤다.
 
“네 옆얼굴도 경치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
 
『아니야!』하고 호통을 칠 뻔했다.
 
짐은 표정을 지운 채 살짝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아직 피피한테는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멍멍이가 우리 쪽으로 목을 돌린 채 갸아―, 하고 울었다.
이제 도착한 모양이다.
 
“네 아내가 있는 곳은 어디쯤이냐?”
 
피피도 잘 하잖아.
방금 전엔 왜 그렇게 된 거야?
 
“도시 중심부, 살짝 서쪽에 있는 거주 구획. 시간을 알려주는 붉은 종이 딸린 탑 반대편이 내 집이다. 그곳에 와이프가 있지.”
 
종탑 바로 옆인 건 잘 됐군.
하늘 위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되도록이면 시민을 죽이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내 사정으로 시민한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아.”
 
자기 아내랑 시민 중 누가 더 중요한지를 생각하라는 듯이 짐을 노려보았다.
놈들이 항복을 지지했단 사실을 아직도 이해 못한 건가?
 
나라면 오히려 잔뜩 피해를 내주고 싶은 심정이지만……물론 여자는 별개다. 여자는 저스티스니까 말이지.
 
“둘 다 중요하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지켜내야 할 시민, 둘 모두 나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지.”
 
문답은 이 정도로 해두자고.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토르트엔트 바로 위쪽까지 도착했다.
두꺼운 도시벽도 견고한 문도 하늘을 날고 있는 우리에겐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한다.
 
“뭐, 뭐야 저게!?”
“드래……곤? 으에에에에에엑!?”
 
예상대로 토르트엔트는 이미 문을 활짝 열고 있었고 남유글리아군도 도시 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도시벽 위에서 정찰을 하는 병사가 우리를 가리키며 당황하는 중이다.
 
우리는 짐이 말한 붉은 탑을 찾아 토르트엔트 하늘 위를 돌아다녔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토르트엔트는 정말 거대해서 구분하기 쉬운 건물이 있는데도 쉽사리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뭐야 저게!? 으아아악, 이쪽으로 온다!”
“히이익, 드래곤이잖아! 도망쳐어!”
 
백주대낮에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기에 도시 안에서도 우리의 모습은 당연히 다 보인다.
 
남유글리아 병사뿐 아니라 토르트엔트 시민들도 허둥대며 도망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시계탑을 찾아 날아다니는 중이라서 말 그대로 우왕좌왕 도망치는 중이다.
 
시민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건 좋은 상황이다.
도시가 혼란에 빠지면 남유글리아군도 움직이기 힘들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민을 다치게 만들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짐도 불평하진 않을 것이다.
 
“뭘 하고 있나. 저건 분명 적의 잔당이다! 명령대로 제거해라, 놈을 떨어트리란 말이다!”
“어, 어떻게요?”
 
남유글리아 병사가 하늘 위를 향해 화살과 크로스보우를 쏘았지만 당연히 맞을 리가 없다.
아마 머리 위에 화살이 떨어진 아군이 화를 내기 시작했는지 금세 사격은 멈췄다.
 
“저거다! 저 탑 반대편이다!”
 
짐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집이 많아서 착지할 수 없다. 저기 광장으로 내려간다.”
 
피피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멍멍이는 날개를 접고 바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온다!”
“반격해라! 폐하께서 계신 곳이다, 드래곤 한 마리에 굴할쏘냐!”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 챈 남유글리아 병사가 착지 예정 광장에 몰려들더니 크로스보우를 손에 쥐었다.
 
멍멍이랑 피피가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아마 이미 도망쳤는지 광장에 시민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팔을 내질러 가볍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였다――『쓸어버려』라는 뜻으로.
 
멍멍이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조준해라! 착지한 순간을――.”
 
적의 지휘관이 발사 명령을 내리기 직전, 멍멍이의 입에서 거대한 화염이 뿜어져나왔다.
 
“으그악――.”
“삐――.”
 
화염은 적 부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불태웠다, 같은 미적지근한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직격타를 맞은 적은 열기에 버둥대기도 전에 그 자리에 선 채로 잿더미가 되었고, 금속 갑옷만이 새빨간 액체로 변해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착지한다.”
 
땅이 통째로 불타오른 듯한 지옥불 속으로 멍멍이가 망설임없이 착지했다.
그 충격으로 인해 사람 모양의 잿더미가 흐트러졌고, 마치 불이 꺼진 벽난로에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공기가 뿌얘졌다.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나와 짐이 뛰어내렸다.
무게 걱정이 있었기에 내가 들고 있는 건 가벼운 듀얼 크레이터 하나뿐이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경사면 위쪽을 가리켰다.
 
내 의도를 눈치 챈 피피와 멍멍이가 특대 포효를 내지른 뒤, 경사면 위쪽을 향해 다시 불을 내뿜었다.
화염은 아무것도 불태우진 않았지만 그 광경은 마치 하늘을 불태우는 듯 보였을 게 분명하다.
 
“으아아아아악!!”
“히이이이익!!”
 
우리가 착지한 걸 보고 달려온 남유글리아 병사들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이들의 사기는 어지간해선 무너지지 않지만 거대한 비행형 화염 도마뱀은 어지간한 일과는 다를 것이다.
 
“허, 허리 힘이……풀려서……못 움직이겠어…….”
“오, 오줌 지렸어. 아무나 도와줘…….”
 
만약 광장 주변, 수평으로 화염을 내뿜었으면 사방에 지옥 불바다가 펼쳐졌으리라. 시민들의 피해도 엄청났을 게 분명하다.
짐의 아내를 데려올 때까지만 동요하고 있으면 충분하다.
 
“지금 간다! 제발 무사히 있어다오, 사랑하는 와이프여!”
 
광장을 뛰쳐나온 짐이 일직선으로 자택을 향해 달렸다.
 
“너, 너희는 대체……끄악!”
 
뒷골목에서 얼굴을 내민 남유글리아 병사를 다짜고짜 어깨부터 베어냈다.
 
“네놈, 그 군복은! 분명 항복했을 텐, 끄악!”
 
크로스보우로 짐을 노리는 적의 팔을 날려버리고 칼날을 뒤집어 곧장 목도 날려버렸다.
 
짐은 이미 아내 말고 머릿속에 든 게 없었다.
등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지금 내가 지켜줘야 했다.
 
“오오오오오오! 와이프여, 무사한가아아!!”
 
짐이 자기 문을 드롭 킥으로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지, 짐! 여보, 살아있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잘 된 모양이다.
 
“오오……마이 와이프! 아이린! 아이린!!”
“아아 짐! 사랑하는 짐! 으읍, 쪽, 쪼옥.”
 
짐과 아내가 현관문 앞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중이다.
 
 
“오오오오!”
 
칼을 휘두르는 적의 검을 튕겨내고 몸통을 세로로 찢어버렸다.
흘러넘치는 내장을 부여잡고 땅바닥에 엎어지는 적.
 
“믿고 있었어, 짐. 반드시 날 데리러 와 줄 거라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 아이린. 아아, 사랑하는 사람!”
 
 
“이 자시이이이익!!”
 
적이 내지르는 창을 장갑으로 흘려보내고 일부러 품 안으로 파고들어 심장을 찔렀다.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피를 흩날리면서 적은 힘을 잃었다.
 
“남유글리아 따위로는 우리의 러브는 막을 수 없지!”
“응, 그럼, 어떤 역경도 넘어설 수 있을 거야.”
 
 
“각오해라!”
 
한 기병이 비좁은 길을 파고들어 달려왔다.
나는 일부러 놈을 직전까지 끌어들인 다음 길 사이에 쌓인 나무 상자를 발판 삼아 높이 뛰어 말의 몸통 박치기를 피하고, 스쳐지나가듯 놈의 목을 날려주었다.
 
“아이린, 오늘밤은 하늘을 불태울만큼 뜨겁게 타올라 보자고!”
“물론이지 짐. 하루 종일 사랑을 나눠도 좋아!”
 
 
나는 쾅, 하고 발을 굴렀다.
 
““헉!””
 
짐이랑 아내가 자기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모양이다.
 
꽁냥대는 건 나도 좋아하지만 때랑 장소를 고려해 줬으면 한다.
……그렇군, 맨날 마이라가 말하던 게 이거였구나.
 
“아이린, 나랑 같이 오도록 해.”
“물론이지. 어디든지 따라갈게!”
 
짐은 아이린을 지키면서 전 방향을 경계하듯 달려다.
갈 때랑은 다르게 이번엔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멍멍이가 기다리고 있을 광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불탄 찌꺼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쯧…….”
 
이를 악물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쏴라! 마구 쏘란 말이다!”
“여왕 폐하님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 없지. 설령 상대가 드래곤이라 한들!”
 
대포 여러 대가 굉음과 함께 불을 뿜었다.
수많은 거대 석궁이 아군 오사도 감수한 채 하늘을 향해 마구 쏴대고 있었다.
 
피피랑 멍멍이는 이 집중 포화 탓에 광장에 남을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대포 직격탄을 맞으면 제아무리 장갑 도마뱀이라 한들 멀쩡할 순 없다.
 
“저 포화 속에선 힘들겠군…….”
 
짐이 중얼거렸다.
 
멍멍이가 어떻게든 착지 가능한 위치를 찾으려 하는 모양인데 포화의 기세가 한층 더 늘어난 탓에 점차 속도도 고도도 높아지는 중이다.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밖으로 나가면 우리를 주워담듯 데리고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나랑 짐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가까운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여기저기 적의 모습이 보였지만 지리를 잘 아는 짐의 뒤를 따라 복잡한 골목길을 나아가는 중이기에 그리 쉽사리 들킬 염려는 없을 듯했다.
아이린도 롱 스커트를 살짝 찢어 거친 움직임에도 용이하게 만든 뒤 계속 달리고 있었다.
 
 
도중에 나는 가만 두고 볼 수 없는 광경과 맞닥뜨렸다.
 
“정숙, 정숙! 영광스러운 우리 군대가 저런 괴물은 금세 도륙을 낼 거다. 다들 조용히 해!”
 
남유글리아의 지휘관처럼 보이는 사내가 병사 몇 사람을 데리고 토르트엔트 시민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중이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주목해라. 이놈들은 제군들의 혈세를 빨아먹으면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리버티스의 비효율적인 정치 체제와 무능한 통치자로 인한 부분이 크고――.”
 
죄인처럼 단상 위에 배치되어 있는 건 아마 리버티스 군인들이리라.
아니, 그것도 별로 상관없는 얘기다.
 
“따라서 제군들은 지금 여기서 이들의 무능함과 타락함을 규탄해야만 한다. 그리고 위대한 남유글리아 제국과 빌헬미나 폐하의 지도 아래――.”
 
그 중 한 명,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건……예전에 알게 됐던 솔라나였다.
 
얼굴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토르트엔트에 있었던 건가.
 
“저렇게 규탄함으로써 시민과 군대, 그리고 정부를 처단할 셈인가……더욱 편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짐이 분하다는 듯 얘기했지만 내 입장에선 그것도 별로 상관없는 얘기다.
 
“우리는 시민을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애초에 네놈들처럼 비겁한 약탈자들이――.”
“시끄럽다! 패배자가 시끄럽게 굴지 마라!”
 
지휘관은 반론한 군인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자들에게도 침을 뱉었다.
솔라나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더러운 침이 묻었다.
 
“……크윽.”
 
솔라나는 울 것 같은……아니, 이미 눈물을 흘리면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얼굴에 침을 맞아서 그런 것보다는 지금 상황이 한심해서, 괴로워서 눈물을 터트린 것이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시민들 사이를 헤집고 곧장 정면 위로 올라갔다.
 
“뭐냐 너는.”
 
갑주 차림의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지휘관 사내. 나는 그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으겍.”
 
코가 으스러지고 광대뼈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오?”
 
갑작스러운 일에 주변 병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 나는 버둥대는 지휘관의 소매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무슨 논리를 대든 여자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게 무슨 정의라는 거냐』
『항복해서 저항할 수 없는 놈들한테 거드름을 피우며 연설이나 하다니, 너희는 쓰레기다』
 
여러모로 생각하는 바는 많았지만 싸우고 뛰는 걸 반복하다 보니 또다시 목의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다.
흘러나오는 건 희미한 소리뿐이다.
 
“코―……호―……코―……호―…….”
“너, 너는 대체…….”
 
소리가 들리도록 얼굴을 들이댔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몰라, 신경 쓰고 있을 시간도 아깝군.
 
“끄억! 큭! 그만!”
“코―……호―…….”
 
지휘관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어올렸다.
 
“끄……억…….”
“코―……호―…….”
 
목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지휘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것도 약한 놈을 괴롭히는 거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여자 얼굴에 침을 뱉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 뭐야 저게…….”
“한 마디도 안 하잖아……설마 사람이 아닌 건가!?”
 
시민들에게서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지, 지휘관님! 뭣들하고 있나, 죽여라!”
 
제정신을 차린 적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코―……호―…….”
 
나는 그 검을 피하고 카운터로 주먹을 때려박았다.
방금 전과 달리 전력이 실린 일격은 적의 얼굴을 완전히 으깨고 경추를 부러트렸다.
 
“코―……호―…….”
 
또다른 적은 갑주 위에서 팔과 허리를 붙잡아 들어올리고 머리부터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우득,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적 병사는 허리춤에서 굽어져선 안 될 방향으로 부러져 목숨을 잃었다.
 
“저 자식 이상해……역시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해…….”
“새까만 망토, 사람이라 보기 힘든 괴력……그리고 지옥에서 들끓는 듯한 바람소리……악마인 게 틀림없구나!”
“혼을 빼앗길 거다! 도망쳐라아아!”
 
아니 그냥 목 상태가 조금 나쁜 것뿐인데.
 
“이제 충분하잖나, 어서 가자!”
 
짐의 목소리를 듣고 제정신을 차린 나는 리버티스 군인들을 바라봤다.
 
“아니, 됐네. 여기서 도망치면 정말로 시민들에게 할말이 없어지니까.”
 
하긴, 그것도 그럴 수 있겠군.
 
“하드릿 경!? 하, 하지만 저도…….”
 
나는 솔라나의 손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상관 없지만 그녀만큼은 여기에 놔두고 갈 순 없다.
 
“에에에에에엑!!”
 
버둥대는 솔라나를 잡아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뒷골목에서 문으로 이어지는 길로 뛰어든 그때였다.
 
“우왓!”
 
짐이 무심코 비명을 내지르며 다시 골목길로 돌아왔다.
 
“……큭.”
 
나도 괴롭다는 듯이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낯익은 물체……대포가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포병은 이미 우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 장전하기 전에 달라붙기도 힘들어 보인다.
 
“……여길 지나가지 못하면 문으로 갈 수 없다.”
 
돌아가거나 빈틈을 엿보는 수밖에 없나…….
 
“홍보 부대를 처리한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다! 반드시 찾아내서 박살을 내버려라!”
 
둘 다 불가능해 보인다.
10, 20은 가뿐히 넘는 듯한 발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코―……짐, 솔라나를 좀 지켜줘. 만약 다치게 만들면 네 아내를 따먹을 줄 알아.”
 
오, 이제야 목소리가 나오는군.
 
“어쩔 셈이냐! 멍청아, 그만둬!”
 
나는 답하지 않고 듀얼 크레이터를 두 손에 쥔 채 천천히 뒷골목을 빠져나와 대포 앞에 섰다.
 
“튀어나왔구나! 이 거리에서 빗맞췄다간 끝장일 줄 알아라!”
 
그렇게 쉽사리 빗맞출만한 거리는 아니다.
심지어 이쪽은 양옆에 있는 민가 때문에 대포의 경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준―!”
 
이미 대포탄이 들어있는 대포가 내게 조준점을 맞췄다.
포수가 조준점을 지정하고 지휘관이 손을 치켜올렸다.
 
나는 두 다리를 크게 벌린 채 서서 듀얼 크레이터를 위쪽으로 치켜들었다.
 
“발사――!”
 
지휘관의 손이 떨어졌다.
아직, 지휘관이 명령을 내려도 탄은 발사되지 않는다.
 
숨을 멈추고 눈에 힘을 준 채 포병을 응시했다.
 
지휘관의 명령을 받고서 대포 꽁무니에 불이 붙었다.
아직, 조금 더.
 
뜨겁게 달궈진 화약이 한 순간 흰 연기를 내뿜으며, 다음 순간 폭발했다.
 
“지금이다!”
 
대포가 불을 뿜는 모습이 느리게 보인다.
나도 이미 치켜든 듀얼 크레이터를 아래로 내려쳤다.
 
천천히 움직이는 연기와 적, 그리고 내 신체.
그 안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속도로 대포의 탄환이 날아온다.
 
간신히 보이긴 하지만 이미 검의 궤도는 수정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대로 힘을 빼지 않고 내리치는 것뿐이다.
 
 
엄청난 충격과 검을 떨어트릴만큼 강렬한 저림, 그리고 두 뺨에 뜨거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흑!”
 
잠시 후, 뒤쪽 건물에서 파괴음이 들렸다.
소리는 둘, 오른쪽과 왼쪽.
솔직히 자신은 없었는데 잘 된 모양이다.
 
“어?” “오?” “힉?”
 
솔라나가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뒤이어 짐도 잇따라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대포를 쏜 적이 한층 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간다.”
 
나는 저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검을 다시 주워들고 나아갔다.
놈들도 탄을 재장전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대포 탄환을……베어낸……건가?”
 
짐은 몸 자체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입은 여전히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아내랑 솔라나도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저 둘은 좀 야하군.
 
“마, 말도 안 돼.”
“아니, 그럴 리가…….”
“흐……윽…….”
 
포병의 옆을 지나쳤는데도 재장전할 기미, 백병전을 벌일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한 데 멈춰선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꽤 대단했나 보지?”
 
한 마디 건네주었다.
직감만으로 승부한 거였는데 솔직히 굉장히 이기기 힘든 도박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아마 여기서밖에 못 볼 거다.
 
지휘관 사내는 팔을 내리친 자세 그대로 굳어버려서 꼴사나운 동상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옆을 빠져나와 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닫혀 있군…….”
“여기까지 왔건만…….”
 
남유글리아군은 끝까지 철저한 모양이다.
습격과 동시에 모든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성문은 기계식이다……도시벽 위에서 조작하기 전까진 열리지 않아.”
 
지금부터 도시벽 위를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머리를 싸맨 그 순간, 도시벽 위에 있던 적들이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
 
“오, 온다! 놈이 온다!”
“쏴라 쏴! 거대 석궁도 안 통해! 대포를 쏘란 말이다!”
“아……으아아아아악!”
 
무언가 절규 같은 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방금 전 포성이 장난감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파괴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도시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커다란 구멍 주변에 있던 도시벽이 후두둑 무너지며 적이 도시 안팎으로 떨어졌다.
벽의 붕괴와 동시에 함께 피어난 흙먼지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나는 곧바로 망토를 이용해 솔라나를 파편에서 지켜냈다.
짐도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를 몸으로 지켜낸 모양이다.
 
흙먼지 속에서 들리는 낯익은 갸아―하는 울음소리와 피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착지할 곳이 없어서 들이받았다!”
 
아무래도 멍멍이가 속도를 높인 채 도시벽에 들이받은 모양이다.
강철 덩어리보다 단단한 강도를 지닌 멍멍이가 속도를 높인 채 들이받으니 도시벽에 큰 구멍이 뚫린 모양이다.
 
피피는 먼지가 잔뜩 묻은 얼굴로 기쁘다는 듯 손짓했지만 멍멍이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많이 아팠나 보군……돌아가면 소를 몇 마리 통째로 먹여줘야겠어.
 
“자, 타라. 흙먼지가 걷히기 전에 도망가자고.”
 
상당히 위험한 줄다리기였지만 어떻게 잘 해결했다.
리버티스에선 계속 이런 식으로만 싸우는군.
좀 더 편하게 이기고 싶은데 말이야.
 
“남은 건……크리스토프는 못 찾아냈군.”
 
여유가 있으면 그 녀석도 찾아줄 생각이었는데 역시 무리였군.
 
“살아 있어라. 살아있으면 십인……아니, 삼인대장 정도는 시켜줄 테니까.”
“앗!”
 
갑자기 피피가 소리쳤다.
솔라나랑 아이린 때문에 무게가 늘어난만큼 멍멍이가 휘청거린 모양이다.
 
옛 리버티스 대통령부……지금은 남유글리아의 깃발이 나부끼는 그곳에 멍멍이의 꼬리가 맞닿았다.
 
강철 꼬리로 대통령부의 지붕이 무너지더니 그 위에 걸려있던 남유글리아의 삼색 깃발이 살랑살랑 떨어졌다.
 
“하하, 별 거 아니긴 하지만 마음은 좀 편해지는군.”
 
짐이 비꼬듯이 얘기하며 웃었다.
 
“으음, 지금 뭔가 보인 것 같은데.”
 
대통령부를 지나치는 그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발코니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멍멍이의 속도가 빠른 탓에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뭐 알 바 아니지.”
 
이리하여 우리의 리버티스 전투는 전부 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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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심문실  크리스토프
 
습도가 가득한 지하실 한켠에 크리스토프가 묶여 있었다.
 
“각오는 됐겠지? 몸은 좋아보이는데, 내 심문을 버텨낸 놈은 없어.”
 
그 앞에 서 있는 건 한 여자였다.
표정도 없고 손에는 피로 물든 섬뜩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후, 내 입은 조개보다 단단하다고.”
 
옆방에서 엄청난 절규 소리가 들렸다.
여긴 남유글리아가 설계한 심문――고문을 위한 방이었다.
 
여자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기구를 움직여 크리스토프의 눈앞에서 기분 나쁜 소리를 들려주었다.
 
“우선은 손톱을 빼내주마. 다음엔 이를 뽑아내고 혀를 잘라주지. 그 다음엔 몸 곳곳에 침을 박고 손발을 하나씩 없앨 거다.”
“켁, 무시무시하구만. 음침한 너희 나라한테는 딱 잘 맞네.”
 
크리스토프가 허세를 부리자 여자는 분노로 표정을 물들이며 따귀를 몇 대 쳤다.
 
“조국과 폐하를 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구나. 네놈의 입을 반드시 열게 만들어 주마――응?”
 
여자의 표정이 이번엔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도 그럴만한 게 방금 전까지 허세를 부리던 크리스토프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제, 제발……때리지 마! 아픈 거랑 괴로운 거랑 간지러운 거랑 뜨거운 거랑 배고픈 건 못 참는단 말이야.”
“…….”
 
여자는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 남자의 따귀를 때렸다.
 
“하지 마아! 뭐든 답할 테니까!”
 
여자는 고문 기구를 버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냐?”
“그래……젠장, 한심하기 짝이없군. 고문에 굴하다니 대장을 볼 면목이 없어.”
 
고문관은 시시하다는 듯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두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너만큼 겉보기랑 다른 남자는 처음 봤어. 열살 아이라도 너보단 좀 더 고집을 부릴 텐데.”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크리스토프에게서 얻은 정보를 난로로 던져넣었다.
 
“엥?”
“이런 시덥잖은 게 정보가 될 리 있나. 전혀 쓸데가 없어.”
 
고문관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너는 대영주 하드릿이 지위를 얻기 전부터 가장 오래 알고 지낸 벗이자, 제일 첫 번째로 들어간 부하이기도 하다. 틀림없나?”
“그럼, 물론이지!”
 
이제 아픈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크리스토프가 명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개인적인 관계도 깊고, 술집이나 창관 같은 곳도 같이 드나드는 사이기도 하단 말이지.”
“그럼!”
 
고문관은 불쌍하다는 듯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봤다.
 
“그런데 영지는 하나도 없고.”
“으극.”
 
크리스토프가 엎어졌다.
어차피 필요 없을 거라며 이미 포박은 풀려 있었다.
 
“계급은 일개 졸병.”
“하극!”
 
추격타가 들어왔다.
 
“하, 하지만 호위대라는 건 근위대처럼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라…….”
“그런 건 당연히 온정 때문에 넣어준 거지.”
 
크리스토프가 바닥에 엎어졌다.
그때 머리를 부딪힌 건지 정말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이 녀석 어쩔 거야? 쓸모없으니까 죽일래?”
 
비명도 호통소리도 들리지 않길래 수상쩍게 여기고 다가온 다른 여자가 물었다.
 
“아니, 하드릿의 지인이라면 달리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감옥에 놔둘래.”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고문관이 씨익 웃었다.
 
“게다가 겉보기만 그런 거지만 일단 몸은 좋으니까……얼굴도 내 취향이고……후후후후후후.”
 
죄수 크리스토프의 위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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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4살 겨울
 
휘하 부대
 
고르도니아 왕국군 제7병단
보병 4100명
궁병 900명
기병 700명
 
하드릿 사군
궁기병 2400기
호위대 150기
전차 45대
 
부하: 레오폴트(참모) 세리아(걱정) 마이라(걱정) 이리지나(트리거 해피) 루나(지휘관)
기드(호위대) 피피(비행형 중장갑 고화력 초대형 도마뱀 기병) 멍멍이(장갑 도마뱀) 세크리트(임시 대원)
수지(망명 중) 마타(걱정) 이름도 없는 궁기병(홀딱 반함) 솔라나(구출)
크리스토프(고문 중)
 
현재 지점: 고르도니아 귀환
 
전과: 요새 포위군 격파, 메리스버크 방어 완수, 마법 부대 격파, 토르트엔트 포위망 돌파 짐 와이프 탈환
기병 집단+동부 군단 일부 격파
 
재산: 금화 2050닢
경험 인수: 585명 자식: 68명+565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