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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35화『종언』

제35화『종언』

 
“롤랑 백작! 어디요! 어디 있소!”
 
헝클어진 머리로 큰 소리로 소리치며 저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 모습에선 더 이상 남부 귀족의 자존심, 알노드 백작으로서의 위엄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롤랑 님께선 방금 전 급한 일이 생기셨다며 소유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만…….”
 
하위 귀족 중 한 사람이 알노드의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양새에 놀라 머뭇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죽다 만 망할 할배가! 자기 혼자 도망쳤단 말이냐!!”
“그, 그런 무례한 말투를 쓰셔선 아니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알노드가 책상을 있는 힘껏 걷어차 날려버렸다.
 
“우리 군이 왕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아들이 죽었다! 병사들도 대부분이 죽거나 도망쳤단 말이다! ……네이놈! 네이놈!! 대체 무어가 왕의 장난감이더냐, 무어가 신참내기들이더냐! 이제 우리 가문은!”
 
알노드 변경백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겨 놓고서 제일 먼저 꽁무니를 빼버린 롤랑에게 욕짓거리를 퍼부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이 주동자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고 왕가한테도 뭐라 변명할 건덕지가 아예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도망친다면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명문 귀족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행상인, 혹은 농민으로 전락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저택에 모여있던 귀족들도 동요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왕의 군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들의 영지로 도망친다 한들 혼자서 왕군에 대항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결국엔 변경백한테 기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기울어가는 함선이라 할지언정…….
 
우울한 분위기 속, 문지기가 달려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왕군 쪽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귀족들은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알노드는 분노를 억누르고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곳으로 불러라.”
 
 
 
 
“폐하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알노드는 초조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고위 귀족을 상대로 한 교섭일 경우, 어느 정도 지위가 높은 사람을 사자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오직 정보만 전달할 수 있는 사자가 왔다간 이쪽과 교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강화를 바라노라.”
 
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귀족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군대가 패배한 이상, 더 이상 교전을 바라지 않는 것은 다 같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약간의 권익(権益)과 영지를 내어줘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단, 내게 반기를 든 이상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느니라. 강화 조건은 반란 수괴 알노드 변경백 및 그 수하 귀족들을 전원 처형하는 것! 작위는 전부 반환한 뒤 영지는 몰수한다! 자손은 왕도로 불러들여 안전을 보장하겠노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 “이미 대역죄랑 별반 차이 없지 않나!”
“후, 후후후……그래……이러니……평범한 사자라도 상관없다 이거로군…….”
 
알노드 백작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 모든 것을 이해했다.
왕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세금을 내지 않는 귀족들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산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 알노드 변경백……이것은 무언가 착오가 있던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왕에게 사자를 보내면…….”
“이제 됐다. 다 알았단 말이다.”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벽에 걸어둔 검을 손에 쥐었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넋이 나가있는 사이, 알노드는 검을 휘둘러 사자를 베어 죽였다.
 
“아앗!” “대체 무슨 짓을!!” “정신 나갔습니까!!”
 
귀족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왕이 보낸 사자를 베어죽인 이상 아무런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과 그 가족들의 이름이 적힌 사형 집행서에 사인한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다.
 
“어리석은 놈들,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왕은 처음부터 우리를 없앨 심산이었던 것이다! 임시 세금에 불만을 털어놓은 그때부터……그 후에 벌인 소동은 전부 우리를 자극하기 위한 도발에 불과하다. 이미 모든 게 끝났다,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럴 수가! 그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역적인 우리를 대체 누가 돕는단 말인가!”
 
귀족들은 신경질적으로 한탄하는 중이었다.
 
알노드는 이상하게 차분한 상태였다.
아예 뒤가 없는 상황이 닥치면 사람은 생각보다 차분해진다.
그리고 유일한 활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진정해라, 아직 수단은 있으니. 우리에게 들이닥친 왕군에 타격을 주고 나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구원이라 말씀하셔도 이미 우리를 도와줄 자들은…….”
“있다. 남쪽에, 우리는 아크랜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야말로 매국노, 최악의 불명예다.
 
“생각해라. 이대로 가도 우리에게 남은 건 죽음뿐, 가문은 몰락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살아남아야 자식, 혹은 손자들이 이 설욕을 되갚아줄 기회가 찾아오지 않겠나?”
 
이미 길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건 멈추느냐, 나아가느냐 두 가지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위해, 어떤 사람은 목숨이 아까워서, 모든 귀족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했다.
 
 
“베를리드 자작,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은빛 갑옷을 입은 무사, 나이는 30정도에 뚜렷한 이목구비. 말만 하면 그 어떤 여자든지 곧장 가랑이를 벌릴법한 미남이다.
 
“자네는 우리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기에 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사람이 되고야 말았네. 미안히네만 끝까지 나를 따라와 주게.”
“네, 장인 어르신의 따님인 카트린느를 아내로 삼았을 때부터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할 마음이었습니다.”
“그래, 자네에겐 우리 가문의 기사단을 붙여 주겠네. 이미 나의 아들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공적을 세워 온다면 우리 알노드 가문의 양자로 삼아 후계로 인정하겠네.”
 
“오오, 훌륭하군요.”
“왕국 안에서도 무력으로 손꼽히는 베를리드 자작이라면 왕군을 물리치는 것도 간단한 일일 테지요.”
 
귀족들의 표정에 약간의 미소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퍼렇게 질린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
중앙군  야영지
 
중앙군은 알노드 변경백이 머무르고 있는 도시 자르를 눈앞에 두고서 야영 진지를 깔아둔 상태였다.
이제 적의 병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도시에 틀어박혀 공성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그때, 야영지에 한 가지 보고가 들려왔다.
 
“사자를 베었다고? 그래서?”
 
그게 뭔 큰일인가 싶어 에이리히한테 물어보았다.
적대 중인 상대방이 개소리를 지껄인다면야 나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당장 베어버릴 게 뻔하다.
 
“이제 저들은 왕가 그 자체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강화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소리지.”
“군이 패배한 이후 취할법한 행동이라 생각하긴 힘들군요.”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지간해선 아크랜드 쪽에 빌붙을 생각일 테지.”
 
확실히 뒤가 없는 이상 닥치는대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지리상 가장 가까운 곳은 아크랜드다.
 
“하지만 그것도 탁상공론이다. 아침해가 뜨는대로 총공격, 도시에서 공성한다 한들 버티지 못할 거다. 미친듯이 불화살을 쏴대면 도시는 요새에서 지옥도로 변할 테니.”
 
마을을 잿더미로 바꾼다 한들 승리를 얻는다는 방침엔 변함이 없다.
 
“내일이 되면 자네도 활약해야 할 테지만……한 가지 더 폐하께서 직접 명령한 비밀 임무가 있다.”
 
나와 에이리히르는 둘이서만 텐트를 빠져나와 숲 안으로 들어갔다.
세리아가 따라오려고 했으나 제지당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선 안 된다고 한다.
 
 
 
새까만 어둠 속, 잠시 기다리자 횃불이 4개 나타나더니 팔자를 그리며 점차 근처로 다가왔다.
 
“신호다.”
 
어둠 속에서 사람 형체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호위병으로 보이는 듬직한 체격의 사내, 나머지 두 사람은 비싼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귀족인 것 같다.
 
“이야, 라드할데 경. 일부러 군단장님 스스로 오시다니 수고가 정말 많으십니다.”
 
고령의 귀족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롤랑 백작, 전부 제대로 흘러간 것 같아 아주 다행입니다.”
 
롤랑 백작이란 이름에는 기억이 있다. 분명 알노드 변경백 옆에서 같이 탄원서에 서명했던 남부 귀족의 실질적 No.2다.
 
“아닙니다, 알노드 변경백은 그닥 책략에 뛰어난 분이 아니다 보니 손쉽게……소개하는 게 늦었습니다. 이쪽은 제 아들입니다. 이번 건이 정리되면 제 가업을 양보할 생각인지라…….”
 
이걸 보아하니 애초에 항의문을 보내는 것부터 반란까지 전부 책략이었다는 소리로구만.
 
“그것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쓸데없는 소리는 필요치 않다며 에이리히가 재촉했다.
 
“예, 알노드 일당은 도시 안에 병사를 모아두고 어떻게든 사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외국 병사가 들어와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정대로 내일 공세로 그들의 운명도 끝을 맞이하겠군요.”
“그래서……알노드 일당이 처분된 후, 그쪽이 관리하던 토지에 관해서 폐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듣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어찌 됐건 위험한 다리를 건넜던지라…….”
 
남부 귀족을 제거한 다음 토지를 국유화하고 남은 콩고물을 롤랑 가문이 받아먹는다.
왕하고는 그런 식으로 얘기했던 것이리라. 이 할아범도 그렇지만 폐하도 상당히 머리를 잘 굴리는 책략가다.
 
에이리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에 관해선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될 겁니다. 그것보다 이번 음모, 집안 사람들한테도 일절 말씀하지 않으셨겠지요?”
 
늙은 백작은 과장스럽게 두 손을 벌렸다.
 
“그야 물론입니다! 애초에 만에 하나라도 정보가 새어나갔다간 저는 틀림없이 변경백한테 살해당할 테니까요. 알고 있던 것은 제 아들 하나뿐, 호위병들도 지금 여기서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와 에이리히는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등 뒤에 있던 듀얼 크레이터를 뽑아든 다음 호위병 두 사람을 베어버렸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호위병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쓰러졌다.
 
“무, 무슨 짓을!”
 
그 다음 위협 요소는 젊은 쪽이겠군. 몸도 삐쩍 마른 게 영 힘은 못 쓸 것 같이 생겼지만 그래도 노인보단 낫겠지.
 
“히! 히익! 어째서, 제기랄!”
 
남자는 필사적으로 검을 뽑아들려고 했으나 검집과 연결된 끈을 푸는 걸 잊어버려서 발도하지 못했다.
내 검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놈의 가슴에 깊숙이 꽂혔고 결국 남자의 몸에선 힘이 빠져나갔다.
 
“아, 아들아! 어찌하여 이런 짓을, 이야기가 다르지 않소!!”
 
에이리히는 검을 뽑아들고서 롤랑 백작한테 다가갔다.
 
“배신자는 배신으로 목숨을 잃는 법, 몇 백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오.”
 
롤랑 백작의 눈에 에이리히의 검이 꽂혔다.
불쌍한 노인은 한동안 경련하며 몸부림치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비겁한 롤랑 백작은 자신들이 불리하다 판단되자마자 아들과 함께 도망치려 했으나 밤길에 도적한테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된 거다.”
 
에이리히는 백작과 아들의 소지품 중 비싸 보이는 물건을 뒤져서 꺼낸 다음 시체를 숲 안쪽으로 던져버렸다.
만에 하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도적이 한 짓이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다.
 
“무섭군요. 책략이라는 것은.”
“나도 좋아하진 않는다만 책략 없이 정치는 굴러가지 않는 법이거든.”
 
불쌍한 시체의 옷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곤 우리 둘은 곧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네가 있으면 이런 임무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든든하군.”
 
확실히 소수 정예끼리 싸우는 살육전이라면 내가 그리 쉽게 질 것 같진 않다.
 
“저도 언젠가 이런 식으로 죽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폐하께선 너를 이 나라의 새로운 바람으로 생각하며 신뢰하시는 중이다. 그럴 일은 없어……하지만 만약 널 암살할 생각이라면 중대 1개 정도는 필요할 테니 애초에 암살이 아니게 되겠군.”
 
우리는 내일 있을 전투를 떠올리며 함께 술을 마셨고 바람을 쐴 겸 바깥 산책을 다녀왔을 뿐.
그저 그랬을 뿐이다.
 
 
 
 
새벽녘과 동시에 중앙군은 자르 도시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자르 도시는 변경백이 거주 중인 남부의 중심 도시지만 종종 분쟁이 일어나는 아크랜드와 가까운 지역인 탓에 상공업도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인구도 3000명 정도라 그리 큰 도시는 아니다.
 
변경백의 병사는 도시벽 위에서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며 응전했지만 궁병이 일제히 불화살을 날리자 순식간에 도시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판단이 되었는지 곧바로 적군이 성벽을 버리고 후퇴한 덕에 중앙군은 별다른 희생 없이 도시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는 공성전에선 별로 활약할 수가 없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후방에 머물러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성벽 쪽 공격은 당연한 얘기고 좁은 골목길이나 건물이 즐비해 있는 도시 안에서 기병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왕도와 달리 도시 광장과 대로변 어디에도 기병이 몰려서 달려갈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고르의 조언대로 부대를 소대 단위로 쪼갠 다음 각각 인근 부대를 원호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에이길 님, 돌아왔습니다.”
 
정찰을 하러 나갔던 세리아가 돌아왔다.
 
“각 지역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발생 중입니다만 대규모 부대는 없습니다. 대부분 소탕전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상하군요? 지난번 전투 때 타격을 줬다고는 해도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입니다. 1000, 혹은 2000 정도의 병사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만.”
 
아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나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끝났다.
 
“도망쳤군. 변경백이 얼마나 많은 상비군을 데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평소부터 몇 천명을 끌고 다닐 리는 없지. 반란인 데다가 지난번 전투에서 대패한 이상, 징병당한 농민과 용병들은 틀림없이 도망칠 거다.
 
침몰하는 함선 위에 올라타 있는 건 어디에도 도망칠 데가 없는 놈뿐이다.
연방 정규군 소속이었던 아고르는 이해하지 못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용병과 농민한테 있어선 첫 번째가 자기 목숨이고 두 번째가 보수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선 무조건 도망친다.
 
“방금 전 성벽에 있었던 병사들도 크게 저항할 기색은 없었던 것 같으니 이게 맞을 거다.”
“그렇군요. 그럼 반대로 아직까지 저항을 계속하는 병사들은…….”
“변경백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놈들이거나 이미 도망칠 데가 없는 놈들이다. 죽을 기세로 덤벼드는 병사는 상대하기 힘들지.”
 
그 예감대로 흘러간 건지 영주 저택까지 전진했던 부대가 패주했다는 전령이 날아왔다.
 
“아고르, 어차피 우리들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적측 최후의 부대라는 걸 한 번 보러 가는 게 어떻겠나?”
“대장님도 유별난 걸 좋아하는 분이시군요……함께 하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천박한 놈들! 이걸로 끝이냐!”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남자의 주변에는 중무장한 기사들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중앙군 병사들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은 현 보병대장 브루노 랜스터 기사작이었다.
 
“브루노, 무슨 일이지?”
“영주 저택까지 돌격하려 했더니 갑자기 놈이 나타났다. 이 녀석은 제법 상대하기 힘들군.”
 
지휘관처럼 보이던 사내가 큰 고함을 내질렀다.
상당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일대일 승부를 하러 덤빈 기병이 순식간에 베이더니 바닥을 굴렀다.
 
“저 녀석, 강한가?”
“베를리드 자작은 왕국 안에서도 1,2위를 자랑하는 기사로서 유명했던 남자다. 수하에 있는 부대는 아마 알노드 변경백 직속 기사단일 테지. 저 사람은 변경백의 데릴사위니까 말이야.”
 
용사가 이끄는 정예 기사단이 저택의 문지기 역할을 맡고 있다라, 확실히 성가시군.
 
“““활을 쏘면 어떨지.”””
 
나와 아고르, 브루노의 의견이 일치했다.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일부러 결투를 벌여 부하를 잃어야 할 필요는 없다.
저 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결국 평민 출신, 기사의 긍지를 지키는 것보다 편하게 이기는 게 더 중요하다.
 
비처럼 쏟아지는 궁병과 보우건 부대의 공격으로 기사단이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비겁한 놈들! 기사의 긍지는 땅에다 갖다 버렸느냐!”
 
방금 전 네가 천박한 놈들이라 했잖아.
애초에 저런 식으로 정직하게 문앞에 줄을 서듯이 대열을 짠 놈은 지휘관으로선 삼류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사도 이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지경이 되었으나 베를리드 자작은 운 좋게도 화살을 맞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네놈들 중 가장 용감한 자와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다! 자, 덤벼오거라!”
 
나와 브루노는 얼굴을 마주보곤 실소했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전투에서 일대일 대결을 희망하다니 정말 군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어서 쏴죽이라고 브루노가 보우건 부대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그 전에 아고르가 앞으로 나섰다.
 
“놈은 군인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도 겁먹지 않았습니다. 용감한 전사에겐 그에 걸맞은 최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주의인지라…….”
“네가 결투를 받아들일 생각인가?”
“예!”
 
아고르는 확실히 강하지만 놈의 개인 기량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고르보다 몇 수 더 강하다.
우수한 부관을 여기서 잃어버릴 수는 없다.
나도 어쩌면 군인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나간다. 브루노, 괜찮겠나?”
“이봐……제정신인가……?”
 
일대일 결투라, 오랜만이군.
어리석은 짓이란 건 알고 있지만 고양감이 솟구친다.
 
“나의 이름은 에이길 하드릿, 네놈을 저승으로 보내주지.”
 
슈바르츠 위에 올라탄 뒤 앞으로 나왔다.
베를리드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사실 저 사람도 내심 화살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천박한 것들 사이에 두기엔 아까운 남자구나! 자, 덤벼라!”
 
우리는 서로 돌격하지 않고 각자의 말을 근처로 붙여 창을 휘둘러 싸우기 시작했다.
놈의 무기는 쓸데없는 장식이 붙어있는 화려한 무기였지만 공격이 제법 묵직하고 움직임도 날카롭다.
 
내 공격을 흘려보내고 재빠르게 반격에 나서는 그 기량은 확실히 왕국에서 제일 가는 기사라는 명성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질 생각도 없다.
탐색전도 끝났겠다, 전력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1합, 2합, 3합. 주고받을 때마다 점차 놈의 자세가 무너지더니 4합째에 결국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으극! ……아직 끝나기엔 이르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창을 겨누는 기사.
나도 슈바르츠 위에서 내려 창을 뽑아든 다음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천천히 거리를 좁힌 다음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순간 강렬한 찌르기를 날린다.
놈은 자기가 입고 있던 갑옷의 틈새,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온 공격이라 예상하여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그것은 실책이다.
나는 놈의 중심, 가장 튼튼한 부위에 둘러싸인 가슴 갑주를 향해 찌르기를 내질렀다.
당연히 뚫어버릴 수는 없었지만 엄청난 무게가 담긴 일격은 놈을 날려버리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놈의 목덜미를 칼날이 꿰뚫었다.
뿜어져나오는 피분수가 싸움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승전고를 울려라!!”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브루노가 그렇게 소리치자 브루노의 대대와 이쪽을 도와주러 온 나의 부대 중 일부가 승리를 기뻐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지휘관을 잃은 기사단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이후 영주 저택 쪽에선 승전고가 울린 소리를 듣고 도시쪽에 남아있던 적측 부대도 저항을 포기.
이리하여 반란 귀족의 거점, 자르 도시는 완전히 함락당했다.
 
◇◇◇◇◇◇◇◇◇◇◇◇◇◇◇◇◇◇◇◇◇◇◇◇
이름: 에이길 하드릿   19살  초여름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기사작  왕국군 제1기병 중대장
연봉 금화 80닢
재산: 금화 257닢(은화 이하 제외)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대형 버디슈(창) 
방어구: 고품질 강철 플레이트 아머 검은 망토 (저주받음)
동료: 논나 멜리사 마리아 카라
하인: 미티 알마 크롤
부하: 세리아 아고르(부관) 크리스토프 칼 슈바르츠(말)
경험 인수: 2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