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드래곤 헌터③ 거포 포효』
“세리아, 기드, 크롤. 다들 있나?”
““네!”” “마, 말은 탈 수 있습니다.”
기드는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으나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산의 민족인 이 녀석은 만신창이 상태로도 말은 탈 수 있다.
지금은 신경을 써줄만한 여유가 없다.
우리는 드워프의 동굴을 뛰쳐나온 뒤 말에 올라탔다.
슈바르츠가 미친듯이 울부짖으면서 적당히 좀 하라며 머리를 깨물기 시작했다.
드워프한테서 빌려온 전투 망치, 세리아보다 무거운 그것을 짊어지고 올라탄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참아라. 네 여자도 도시에 있을 거 아니냐.”
린트브룸은 여기서 바로 코앞에 있는 도시, 하늘을 나는 드래곤의 경우엔 진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현재 아직 도시에서 불길이 피어오른 것 같진 않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우리는 다리가 짧아 말을 탈 수는 없다. 최대한 서두르긴 하겠다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다오.”
바르바노와 다른 드워프들이 달리기 시작한 순간, 머리 위에서 귀를 틀어막고 싶어질 정도로 커다란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드래곤은 산 중턱에 자리를 잡은 채 도시와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도 준비가 된 모양이다.
“너희 드워프들은 일단 도시로 서둘러서 가라! 세리아, 너희는 민중을……어디로 대피시켜야 할지 모르겠군. 혼란에 빠지지 않게끔 잘 정리해 둬라.”
질서 유지도 없이 도시벽 밖으로 도망쳤다간 흑수가 떼지어 몰려올 게 분명하다.
우리가 드래곤을 퇴치하지 못하면 상당한 숫자의 사망자가 나오겠군.
“슈바르츠, 속도를 유지한 채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뛰어라. 저놈은 불을 뿜을 줄 아니까 적당히 피하고 말이야.”
부르르, 하고 목을 한 바탕 휘젓고서 한숨을 내쉰 슈바르츠. 잘 도망치면 얼마든지 암말을 따먹게 해줄 테니 어떻게든 해 봐.
나머지 일행이 곧바로 도시로 달려가는 것과 달리 나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네 발톱을 박살내고 이빨을 날려낸 놈은 여기 있다! 그래, 많이 아팠냐!?”
내가 생각해도 참 수준 낮은 도발이라고 생각될 정도지만 드래곤은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내게 불을 뿜으러 날아왔다.
전설의 용은 생각보다 인내심이 없군 그래.
“자, 놈이 왔다. 속도를 높여!”
갈기를 잡아당기자 슈바르츠는 구불구불 꺾던 방식을 멈추고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화염은 땅을 기듯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으나 점차 속도가 줄어들더니 끝내는 흩어졌다.
놈의 화염은 대지를 불태워버릴 정도까진 아닌 모양이다.
“못 맞췄잖잖아, 실력 한 번 더럽게 없구만!”
전투 망치로 길바닥에 널부러진 바위를 박살내고는 비웃듯이 소리쳤다.
그러자 놈은 다시 날개를 펼쳐 하늘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더 성질이 급한 놈이군. 올 거다.”
일단 하늘 높이 위로 올라간 드래곤은 속도를 늦추면서 내게 바짝 다가왔다.
스쳐지나가듯이 나를 발톱으로 찢어발길 심산이리라.
“오른쪽 대각선 뒤쪽에서 올 거다.”
알고 있다며 히힝대는 슈바르츠.
지나치기 직전에 크게 오른쪽으로 틀어 속도를 낮췄다.
놈의 발톱은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갈랐고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긁었다.
“받아라!”
덤으로 놈의 팔에 전투 망치를 때려박았다.
드워프 최고의 걸작이라던 망치가 단숨에 날이 빠져버렸다.
하지만 참격과 달리 강하게 내리친 충격은 확실히 전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크게 앞으로 튀어나온 뒤 몸을 돌린 드래곤이 한쪽 앞발을 아프다는 듯이 움직이는 중이다.
뒤이어 놈은 내 쪽으로 방향을 틀듯이 착지했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내 정면을 향해 다가왔다.
지상전에서 확실히 깨물어 죽이려는 심산이로군.
“오른쪽으로 돌아라.”
이번엔 속도를 유지한 채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깨물기 공격을 피한다.
놈은 우리를 놓치고서 땅바닥에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한 방 더.”
스쳐지나갈 때 턱에 일격을 먹여주었다.
놈은 길길이 날뛰며 목을 비틀었으나 이미 우리는 몸통 근처 부분을 크기 돌아가는 중이다보니 깨물기 공격이 닿을만한 거리는 아니다.
듀얼 크레이터로 무기를 바꾸고서 축 늘어진 날개와 허벅지, 그리고 꼬리 끝부분을 베어주었다.
너무 단단한 비늘 탓에 깊숙이 공격이 박히진 않았으나 살짝 살점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한층 더 커다란 포효……용의 언어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놈이 감히!” “죽여주마!” 같은 느낌이려나?
놈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 진짜 고비다. 말고기 스테이크가 되고 싶지 않으면 전력으로 달리라고!”
슈바르츠는 전력 질주를 시작했고 나도 놈이 달리는 걸 방해하지 않게끔 무기를 어깨에 짊어진 채 몸을 낮췄다.
순간, 등 뒤에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놈이 몸을 비틀어 불을 뿜은 것이다.
슈바르츠의 꼬리가 또다시 그슬려 있었다.
왼쪽으로 몸을 비틀면서 화염을 토해내는 드래곤과 계속해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우리. 따라잡히면 남정네 냄새가 잔뜩 나는 스테이크 완성이다.
결국 숨을 다 내뱉은 건지 드래곤은 불길을 멈추고 가증스럽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봤다.
놈의 화염은 슈바르츠의 꼬리를 그슬린 게 끝이었다.
거룡은 하늘을 날면 빠르지만 지상에서 보이는 움직임은 느린 편이다.
날면 자기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지상에선 우리가 더 재빠르기 때문에 잡지 못한다.
종족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확연히 느껴지는 분노의 표정.
지금은 한 번 더 도발할 때로군.
“하하하, 이 추운 날씨에 딱 좋은 모닥불인데 그래.”
슈바르츠도 놈을 우습게 보는 것처럼 히힝거린 뒤 말똥을 흩뿌렸다.
우리 쪽의 도발도 종족의 벽을 뛰어넘어 놈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두 손을 치켜올려 투정 부리는 애마냥 땅바닥을 내리쳐 쓸데없이 흙먼지를 피워댔다.
하늘로 날아간 드래곤은 적당히 화염을 뿜은 뒤 우리 쪽을 흘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도시를 향해 날아갔다.
“쯧, 여기까지인가?”
어느 정도 시간은 벌긴 했는데, 과연 드워프 쪽 준비는 얼마나 됐으려나?
우리도 바로 따라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슈바르츠가 질풍처럼 달려간 결과 고작 몇분만에 우리는 린트브룸에 도착했다.
도시 쪽에서도 우리가 싸우는 모습이 보였는지 경종이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중이고 민중이 비명을 내지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길로 나가지 마라! 대장간이나 창고, 아무튼 튼튼한 건물로 들어가!”
“자리가 없는 사람은 높이가 낮은 곳으로 가서 웅크려!”
세리아와 크롤이 민중들한테 소리치는 중이지만 혼란 상황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으니.”
드래곤은 도시 위쪽을 크게 선회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습격은 시간 문제이리라.
“주인님!”
“레아, 여관 지하실에 들어가 있어. 아마 그곳이 가장 안전할 거다.”
놈의 화염은 바위까지 녹일 정도로 뜨겁다.
지하라고는 해도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으나 밖에서 나돌아다니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내가 퇴치하는 수밖에 없겠지.”
시가전에서 말은 필요하지 않다.
슈바르츠 위에서 뛰어내리고는 두 손에 무기를 쥐었다.
“부탁한다, 바르바노.”
재빠르게 나를 찾아내고 급강하해오는 드래곤을 유인하듯이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공격 태세에 들어간 드래곤을 상대로 린트브룸의 수비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일제히 화살이 날아가고 보우건이 놈을 목표로 지정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모든 공격은 가벼운 소리와 함께 비늘에 튕겨나가고 말았다.
“쓸데없는 짓은 안 해도 된다! 화살은 안 통하니 어서 도망쳐라!”
수비병은 내 고함소리를 듣고서 도주를 시작했으나 살짝 늦은 모양이다.
드래곤은 수비대 일당을 향해 공중에서 화염을 뿌려댔다.
“끄악…….” “히익…….”
비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염을 정통으로 맞은 수비병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곧바로 건물 뒤편에 숨은 병사도 건물과 함께 통째로 녹아내렸다.
“쯧…….”
차폐물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건물들은 내 움직임을 방해하는 효과밖에 없다.
놈도 이 도시 한복판에서 접근전을 할 생각은 없을 게 분명하다.
하늘을 날면서 불이라도 뿜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천박한 복장을 한 여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부인 것 같은데 허리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다.
그때, 다시 밑으로 내려온 드래곤이 화염을 뿜으면서 다가왔다.
“이리로 와라!”
나는 여자의 손을 붙잡아 근처에 있던 낮은 지대로 던져버렸고 그 위를 내가 감쌌다.
운이 좋군. 이곳은 물가게다.
거대한 통을 박살내 부수니 단숨에 물이 넘쳐흘러 낮은 지반 쪽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순간 화염이 밀려들었다.
날뛰는 여자와 함께 물이 쌓인 곳 위에 엎드렸다.
등이 불타는 듯 느껴졌으나 뒤이어 온몸에 열기가 느껴졌다.
“아뜨뜨……순식간에 끓는 물이 됐잖아.”
몸을 일으키니 물은 거의 증발해 있었고 낮은 지대에 쌓여있던 분량만 지글지글 끓으며 남아 있었다.
물과 낮은 지대, 둘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
“저기, 전…….”
“얘기할 시간이 없어. 지금은 도망쳐라. 살아남으면 한 번 대주고.”
그 말만 남기고서 여자를 남기고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이거 시간 벌기도 힘들 것 같은데.
드워프가 준비를 다 끝마쳤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저 드래곤을 박살내기 위한 비장의 수, 그것은 거대포 [울건] 말고는 달리 없다.
드워프들이 최고의 소재와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낸 거대포, 건물 정도 되는 크기와 엄청난 무게 때문에 린트브룸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쓸모없는 건축물이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이다.
거대포가 설치된 제작소에는 수많은 민중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곳은 린트브룸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보니 수비병도 많은 곳이다. 당연히 이곳에 의지하게 되는 심정은 이해가 되긴 한다만…….
“저걸 상대로는 병사가 1만명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야.”
혼란스러워하는 민중과 병사들을 밀쳐내고 거대포에 달라붙어 있는 드워프들한테 소리쳤다.
“준비는!?”
“5분만 더!”
이 정도로 긴 5분은 달리 없으리라.
내일부터 날 깨우러 올 메이드한테 같은 말은 못하겠군.
“시간을 버는 수밖에.”
하늘을 나는 적을 상대로는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망치와 듀얼 크레이터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비웃듯이 놈은 고도를 유지한 채 숨을 들이쉬었다.
“발사―――!!”
하지만 불을 내뿜기 전에 대포가 발사됐다.
대충 쏴댄 탓에 전혀 명중하진 않았으나 발사음과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철구를 보고 놀란 건지 드래곤은 불을 뿜던 행위를 멈추고 일단 잠시 위로 물러났다.
“안 맞는 건가……다음 탄환을 준비해라!”
이곳은 군용 제작소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포도 만들어 두었다.
바로 꺼내오다니, 누구인진 모르겠다만 아주 잘 했어.
“영주님! 무사하셨습니까!”
“네가 쏜 거냐? 잘 했다.”
지휘관은 살짝 미소를 지었으나 금세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화살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만 대포라면 어쩌면 싶어서……하지만 날아다니는 상대한테 명중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눈속임입니다, 하고 지휘관은 고개를 숙였다.
“내게 맡겨둬라. 이곳에 불을 붙이면 탄환이 나가는 방식이었지?”
병사한테 물어보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 착화봉을 들고 오도록.
“예……하지만 대포는 무게가 많이 나가서 6명이서 한 번에 옮기지 않는 이상……어어어어엇!?”
나는 전투 망치를 제자리에 놔두고 대포를 어깨에 짊어졌다.
바닥에 고정해둔 물건으로 빠르게 날아다니는 상대를 맞출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하면 목표를 지정해서 발사할 수 있으리라.
“대형포로……어어어어? 200kg이 넘는데……에에에에에엑!?”
얼빠진 목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는 병사들을 놔두고서 포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음을 올겼다.
으음, 하나로 하면 맞을지 어떨지 확신이 안 서는데.
“하나 더 줘봐.”
근처에 있던 대포를 하나 더 반대쪽 어깨에 짊어졌다.
두 개를 한꺼번에 쏘면 맞을 수밖에 없겠지.
병사들은 어째서인지 입을 뻐끔뻐끔 벌리며 놀라워하는 중이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다.
드래곤은 대포가 소리만 낼 뿐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 모양이다.
한 데 모여있는 병사들과 민중을 불태우기 위해 고도를 낮추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직이다……아직…….”
“히이익…….”
나는 두 어깨에 대포를 짊어지고서 놈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뒤쪽에는 착화용 불을 들고 온 병사가 반쯤 울 표정으로 준비 중이었다.
드래곤이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소리쳤다.
“지금이다!”
“히익!”
병사가 두 어깨에 달린 대포에 동시에 불을 붙이자 엄청난 굉음이 양옆에서 머리를 관통했다.
이건 진짜 힘들군. 귀마개를 하길 잘했어.
귀가 찌릿찌릿 울리는 중이다.
포탄 중 한 발은 아슬아슬하게 날개를 스쳐 지나가 빗나갔으나 다른 쪽 대포가 놈의 얼굴을 맞췄다.
철판에 망치를 때린 듯한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해냈다!” “영주님한테 걸리면 이까짓 놈쯤이야!” “우리 이제 살았어!”
병사들과 민중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포탄은 확실히 놈의 얼굴에 명중했고 오른쪽 눈이 짓뭉개진 건지 대량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죽진 않았다.
금속음이 터져나왔다는 소리는 다시 말해 포탄이 튕겨나갔다는 얘기다.
운 좋게도 우연히 눈에 맞았지만 한쪽 눈이 박살나도 생물은 죽지 않는다.
역시나 드래곤은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 보였으나 홱, 하고 왼쪽 눈을 치켜뜨며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말도 안 돼……안 죽었어.” “……이제 끝장이야.”
나는 대포를 뒤쪽으로 버린 뒤 전투 망치를 움켜쥐었다.
완전히 풀이 죽어버린 병사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한 여자는 내게 다가왔다.
“영주님, 키스해 주세요. 마지막 추억으로…….”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여자를 등 뒤에 감추고는 듀얼 크레이터와 전투 망치를 주워들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놈을 퇴치한 다음에 온몸을 핥아주마.”
“하지만 저 드래곤은 불사신이에요…….”
글쎄, 불사신일지 어떨지 한 번 더 시험해 보자고.
슬슬 5분은 지났겠지?
“이제 되나!?”
“물론이지!”
드워프들의 목소리와 함께 거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묵직한 톱니바퀴 소리와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 커다란 건물급 크기의 거대포가 포구를 드래곤 쪽으로 겨눴다.
“놈을 이대로 바로 정면까지 끌고 와다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군.”
하지만 그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다.
나는 두 손에 쥔 무기를 크게 들어올리고서 걸음을 옮겼다.
오른눈이 짓뭉개져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드래곤은 나를 뼛속까지 불태워버리기 위해 입을 벌린 채 달려들었다.
“자 오거라, 죽여주마!”
달려나가는 나, 물론 거대한 드래곤은 내 모습에 겁을 먹고 진로를 틀 리 없었다.
적의가 담긴 고함소리와 함께 내 바로 앞으로 하강했다.
불태운 뒤에 나를 짓밟기라도 할 셈인 건가? 어지간히도 미움을 샀나보군.
나와 드래곤은 서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끝내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을 즈음, 나는 드래곤을 향해 씨익 미소 지은 뒤 제자리에 엎어지고는 귀를 틀어막았다.
놈에게 남아있던 왼쪽 눈이 의아하다는 듯이 가늘게 좁혀지는 게 보였다.
바르바노가 소리쳤다.
“울건, 발사!!”
인공 불기둥이 뿜어져나왔다.
포를 조작 중이던 드워프들이 전부 다 떨어져나갔고 민중과 병사들은 풍압과 굉음 때문에 쓰러졌다.
코앞에 있던 재료 가게가 충격 때문에 산산조각 났고 정찰탑이 부러졌다.
땅바닥에 엎어져 있던 내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도달한 포탄.
금속음이 울려퍼진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다른 소리다.
얇은 철판을 공성추가 찢어버린 듯한 금속음이었다.
거대한, 하지만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어린아이가 울부짖는 듯한 포효가 도시 안을 가득 채웠다.
“저 건물……대, 대포였던 건가……?” “귀가…….” “지려버렸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병사들과 나, 곧바로 시선을 드래곤 쪽으로 돌렸다.
기대했던 그대로의 결과다.
울건의 거대한 포탄은 놈의 몸한가운데는 빗겨갔으나 왼쪽 팔과 몸통이 연결되는 부분 근처에 명중한 듯했다.
왼손은 완전히 싹둑 잘려나갔고 왼쪽 날개도 송두리째 썰려 있었다.
몸통도 크게 깎여서 마치 길이라도 뚫린 것마냥 비늘과 피부가 사라진 맨 근육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중이다.
당연히 더 이상 나는 건 불가능, 그대로 낙하한 놈은 성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약속대로 바르바노는 놈의 날개를 없애준 것이다.
등 뒤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나는 곧장 무기를 주워들고 돌진했다.
놈의 상처는 누가 봐도 치명상이다.
저런 상처를 입고서 생물이라는 존재가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즉사는 아니다.
팔을 잃고 날개를 잃고 몸통이 반쯤 썰려나갔다 한들, 화염 한 방에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대로 돌진해 흙먼지를 빠져나가자 놈이 잃은 팔 부분과 날개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입 안에는 이미 화염이 보였다.
“전부 다 엎드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화염이 밀려들었다.
환호성은 곧바로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한 번 해 본 거야. 못할 건 없겠지.”
나는 듀얼 크레이터를 세로로 휘둘러 화염을 베어냈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드래곤, 뒤쪽에서 민중들의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화염은 좌우로 갈라져 흩어졌고 경로상에 있던 건축물을 전부 불태웠으나 내 뒤에 있는 민중과 병사는 무사했다.
하지만 이번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인지 열기가 지난번과는 차원이 달라 내 팔이 불타기 시작했다.
두 팔 모두 큰 화상을 입었겠군……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륵그륵 토해내기는, 더러운 놈.”
더욱 더 앞으로 다가간 나는 화염의 출구, 놈의 입 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대가로 혀를 베어낸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 화염은 사라졌고 놈은 크게 몸을 뒤로 젖혔다.
여기서 끝장을 내주마.
혀에 박아넣은 듀얼 크레이터와 함께 높이 치켜올려진 나는 놈의 머리에 매달렸다.
멋진 광경이긴 하지만 여유롭게 풍경 구경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여기서 떨어졌다간 짓뭉개진 토마토처럼 변할 게 분명하다.
놈을 즉사시키기 위해 혀에서 뽑아낸 검을 놈의 정수리 쪽으로 찔렀다.
하지만 떵, 하는 촉감이 느껴졌다.
“안 되나?”
비늘은 어떻게든 뚫었으나 두개골이 너무 단단한 나머지 듀얼 크레이터도 뚫질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뼈까지 박힌 검을 지팡이 대신 왼손에 쥐고서 오른손에 쥔 전투 망치를 놈의 정수리를 향해 휘둘렀다.
아무리 머리가 단단하다 한들 망치로 얻어맞으면 아프겠지.
내가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드래곤은 나를 떨어트리기 위해 날뛰어댔다.
듀얼 크레이터를 붙잡아 견뎌내면서 미친듯이 전투 망치를 휘두르자 마치 공사라도 하는 듯한 땅땅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놈의 비늘은 깨지지 않는다.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전투 망치가 점점 깨져서 작아지는 중이다.
하지만 놈도 조금씩 발길이 휘청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전혀 효과가 없는 것 같진 않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몸이 흔들렸다.
“오오!”
놈이 한층 더 크게 몸을 흔들자 듀얼 크레이터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추락사할 순 없지!”
떨어지는 와중에도 듀얼 크레이터를 비늘이 잔뜩 박힌 목덜미에 꽂아넣어 속도를 죽이면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도시의 최상부보다 높은 위치에서 낙하한 충격은 전부 다 없앨 수 없었는지 땅바닥에 격돌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갈비뼈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2~3개는 부러졌겠군.
“끄윽…….”
입가에 피가 묻어나왔다.
내장까지 찔린 모양이다.
하지만 놈도 방금 그 움직임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눈도 초점이 맞질 않는 건지 바로 아래 있는 내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끝이다.”
놈에게 달려간 나는 혼신의 힘으로 드래곤의 가슴팍에 듀얼 크레이터를 꽂아넣었다.
힘을 너무 준 탓에 다시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그래도 지금이 승부처, 죽을 생각으로 덤벼드는 수밖에 없다.
도신의 절반 이상이 박혀들어가자 뿜어져나온 새빨간 피가 내 온몸을 적셨다.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아직이다!”
놈의 크기로 보아 「내 온몸을 적실 정도의 출혈」로는 절대 심장에 닿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피를 토하면서 전력으로 밀어넣어도 더 이상 듀얼 크레이터는 박히지 않았다.
“제발 부러지지 마라…….”
논나의 박치기는 사양이다.
나는 듀얼 크레이터를 놈의 몸에 남겨둔 채 박살이 나 너덜너덜해진 전투 망치를 두 손으로 쥐었다.
“으오오오오오오오오!!”
전투 망치를 손에 쥔 채 회전, 속도를 붙인 뒤 혼신의 힘을 담아 듀얼 크레이터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아주 약간, 하지만 확실하게 듀얼 크레이터가 드래곤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순간 찾아온 정적, 그 직후 방둑이 무너진 것처럼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나왔다.
이번에야말로 놈의 심장을 찢은 것이다.
쏟아지는 피의 양이 너무 많아서 숨을 못 쉬겠군. 이게 진짜 피바다라 할 수 있겠어.
우웩, 입 안에 들어갔잖아.
이거 자칫하다 정말 익사하겠는데?
단말마는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가녀리고 기다란 비명이 지나간 뒤, 드래곤은 천천히 옆으로 쓰러져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나는 흰자위를 드러낸 드래곤을 확인하고 듀얼 크레이터를 가슴팍에서 뽑아냈다.
역시 전설의 보검. 부러지지도 휘지도 않았다.
몸을 가볍게 확인해 보았다.
이제 힘을 줘도 피를 토하진 않았다.
“끝났다.”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믿기질 않아! 저 거대한 용을 혼자서 쓰러트렸어!” “우리는 이야기에나 등장할 법한 영웅을 보고 있는 건가!?”
“음유시인들한테서도 이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꾼으로 전직해도 먹고 살 수 있겠는데!”
칭찬해주는 건 고맙다만 얼른 도시를 정리해야지.
그리고 전직은 참아라, 수비병 숫자가 줄어들면 곤란하거든.
바르바노가 소리쳤다.
“봤느냐 인간이여! 우리 울건과 우리의 벗은 용을 쓰러트릴 수 있도다!”
“오오오오오――!” “술이다, 축하주를 잔뜩 마시자꾸나!” “봄이 될 때까지 마구 부어라!”
이번엔 울건이 없었으면 정말 손쓸 방법도 없었다.
술 정도는 마음껏 마시게 해줘야지.
하지만 봄이 될 때까지 퍼마셨다간 고르도니아에 있는 술이 전부 다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여자들이 말했다.
“화염을 가르고 우리를 지켜내다니…….” “저 용을 혼자서 쓰러트리는 영웅.” “어쩜 이리도 강한 건지…….”
여자들의 불타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이봐,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그곳이 서버린다고.
“안기고 싶어, 저 분한테 안기고 싶어.” “저런 대단한 남자한테 안긴다니, 생각만 해도 젖을 것 같아.”
“나……저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어. 유부녀이긴 하지만…….”
으음, 도시 정리는 병사들한테 맡겨두고 나는 여자들을 달래는 역할을 맡도록 할까?
하지만 우선 내 여자들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
“주인님~.” “에이길 님!”
세리아와 레아가 내게 달려왔다.
뒤쪽에는 클레어 일행의 모습도 보였다.
다행이다, 무사했던 모양이군.
“뭐라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에이길 님은 이후 몇백년 넘게 이야기에 남을 영웅이 되신 겁니다!”
“겁니다!”
내게 딱 달라붙는 두 여자, 이 둘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고 눈도 촉촉해져 있었다.
온몸이 드래곤의 피 때문에 새빨개진 내 모습을 보고도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다.
“다시 반했나?”
““물론이죠!””
그래, 오늘밤은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구나.
일단 명령은 내려놔야지.
“우선 불을 끄고 민중들을 구해내라. 부상자는 구출한 뒤 바로 치료를 받게 해라. 약값은 전부 내가 댈 테니 있는 걸 전부 쓰라고 의사한테 말하도록. ……특히 여자를 우선시해라.”
병사들은 깔끔한 경례와 함께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훨씬 순종적으로 변했군 그래.
린트브룸에는 목제로 된 집은 없으니까 그렇게 오래 불길이 번지진 않을 테고 평소부터 광산 사고도 종종 일어나는 곳이니 부상자 대처에는 익숙한 편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에이길 님이 용살의 영웅……멋져요.”
“주인님은 나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영웅이 된 거구나.”
옳지 옳지, 귀여운 녀석들.
“포탄까지 튕겨내는 드래곤의 비늘……뼈……가죽……돈…….”
클레어도 드래곤을 보고 동요한 모양이다.
생각한 내용이 전부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중이라고.
내 시선을 눈치 챈 클레어가 휙 메모를 집어넣고 팔에 엉겨붙으며 가슴을 딱 붙였다.
“우후후, 저도 변경백님께 다시 반했답니다. 강한 남자를 보고 끌리지 않는 여자는 없죠, 본능이 바라는 법이에요.”
그래, 그럼 좋아.
밤엔 잘 부탁한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군.
기드는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으나 지인 중에 중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일단은 합격점…….
그런데 뭔가 잊은 느낌이다.
“으음, 뭐 잊은 거 없나?”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리아가 의외라는 듯이 얘기했다.
“으음, 뭔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세리아가 모르는 걸 보아 정말로 기분 탓일 수도 있긴 하겠다만.
“그것보다 어서 몸을 씻으시죠. 부상이 없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두 팔과 얼굴에 입은 화상이 보이질 않는다.
꽤 심한 화상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부러졌다고 생각한 갈비뼈도 지금 만져보니 아무렇지 않다.
확실히 우득,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말이지.
뭐, 다친 게 내 착각이었다면 좋아해야 할 일이다.
몸을 씻은 뒤에 마구 여자를 안아야겠어.
용을 퇴치한 여운이 가시지 않은 지금이라면 도시에 있는 여자라면 모조리 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프가 여관으로 돌아온 건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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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3살 늦은 가을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용살의 영웅
영주민: 171950명 중요 도시 라펜: 24000명 린트브룸: 4950명 반드레아 특별 도시: 9000명
세리아(반함) 레아(반함) 클레어(반함\) 롤리(반함) 기드(부상) 크리스토프()
슈바르츠(발정)
재산: 금화 1840닢 임시 약값(600)
경험인수: 234명 자식: 54명+555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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