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드래곤 헌터② 동굴의 사투』
드래곤은 다시 포효를 내질렀다.
복부에 힘을 주고 있지 않다간 의식까지 날아갈 것 같은 포효다.
내가 크리스토프처럼 실신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지 드래곤은 포효를 그만두고 조금씩 다가왔다.
드디어 직접적인 수단에 나서려는 것이리라.
“리, 린트브룸……족장님……이 용은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기드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면서 울상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몇m나 되는 거대한 용을 상대로 태연함을 보이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전설의 용 운운하던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이 녀석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성이 있을 수도 있다.
일단 한 번 말은 걸어봐야지.
“자던 도중에 방해해서 미안하다. 우리는 이대로 돌아갈 테니 다시 낮잠을…….”
얘기하던 도중에 드래곤의 앞발이 옆으로 휘둘러졌다.
아슬아슬하게 뒤쪽으로 펄쩍 뛰었으나 풍압만으로도 뒤로 세 번이나 구를 지경이었다.
“……얘기는 안 통하는 모양이군. 다들 옆으로 넓게 퍼져.”
크기가 너무 다르다 보니 다섯 명이 모여도 한꺼번에 짓뭉개질 게 뻔하다.
한 사람이 공격을 피하는 사이 다른 사람이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지금 일격을 보건대 이 녀석은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니다.
크리스토프를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전부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다.
하지만 저 거구를 둘러싸고 있는 단단해 보이는 비늘을 상대로 평범한 검이 통할 것 같진 않다.
효과가 있을 것 같은 건 내 망치랑 바르바노의 도끼 정도이리라.
“너희는 공격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튼 피해라. 나랑 바르바노가 공격할 테니 빈틈이 생기면 위로 도망쳐.”
명령조로 말한 뒤에 망치를 두 손으로 치켜올렸다.
내 공격이 닿는 건 기껏해야 앞발 정도 길이까지다.
치명상은 힘들겠지만 발가락 끝부분을 때려주면 고통스러워할 가능성도 있다.
왜냐면 나도 책상에 발가락을 찧으면 버둥거리니까 말이지.
“린트브룸인지 뭔지 모르겠다만 자고 있다가 망치에 얻어맞은 것 정도로…….”
거기까지 말하다 멈췄다.
나라도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죽이려 달려 들 것 같긴 하네.
“옵니다!”
생각이 전해진 건지 드래곤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앞발을 휘둘렀다.
발톱 궤도 상에 있는 건 세리아랑 크롤이군. 잘 보고 피해.
“큭! 이런 건 안 맞습니다!”
세리아는 옆으로 펄쩍 뛰어 그대로 바닥을 구르고는 발톱을 피했다.
한편 크롤은 눈을 감고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멍청아, 피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키보다 커다란 발톱이 크롤을 정통으로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보였다!”
그 순간 크롤이 홱 눈을 치켜뜨더니 종이 한 장 차이로 발톱을 피하고는 무려 앞으로 뛰어들었다.
앞으로 내지른 검을 거목처럼 단단한 용의 팔뚝에 휘두르는 크롤. 동굴 안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진다.
“내 검이 벨 수 없는 것은 없느니.”
크롤의 말과 동시에 빛나는 칼날이 땅바닥에 꽂혔다.
“부러졌잖냐.”
“어라……?”
크롤의 검은 한가운데 부분부터 두 동강이 나 부러지고 말았다.
“무념…….”
“그러니까 공격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거 아니냐. 말 제대로 안 들으면 엉덩이를 따먹어주마!”
“벗이여, 역시 그런 것이냐.”
에잇, 바르바노 너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다음 공격이 올 거다.
드래곤은 크롤의 반격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나 헛손질을 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번엔 높게 앞발을 치켜올렸다.
“짓뭉개러 온다! 뒤쪽으로 뛰어!”
이번 표적은 기드다.
용이 내리친 팔의 속도는 방금 전보다 더 느렸다.
“어, 어떻게든……끄악!”
하지만 엄청난 힘으로 땅바닥을 내리친 그 팔은 바위 파편을 사방으로 튀겼다.
기드는 허둥지둥 방패로 막아냈으나 온몸을 막아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 팔과 다리에 수많은 돌멩이를 얻어맞고 쓰러져버렸다.
“가자, 벗이여.”
“그래.”
하지만 다리를 내리찍는 동작 덕분에 큰 빈틈이 생겼다.
바르바노와 나는 동시에 드래곤을 향해 달려나갔다.
놈의 표적은 기드에서 바뀌지 않았다.
다음 공격이 날아가면 기드는 틀림없이 압사할 것이다.
그 전에 다리를 때리면 뒤로 물러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드래곤도 가만히 있어주진 않았다.
금세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려 오른발을 휘둘렀다.
“끄응!”
표적이 된 바르바노가 재주 좋게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공격을 피했다.
겉보기엔 느려보이는 드워프지만 이들은 결코 느리지 않다.
“받아라!”
나보다 먼저 드래곤으로 다가간 바르바노는 있는 힘껏 위로 치켜든 도끼를 놈의 발에 내리찍었다.
설령 같은 두께의 거목이라 한들 드워프제 도끼라면 간단히 두 동강 낼 수 있으리라.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무슨.”
“안 되는 건가.”
바르바노의 도끼는 손잡이 부분부터 부러지고 말았다.
공중을 맴돌고서 땅바닥으로 떨어진 칼날도 비늘 모양대로 움푹 패여있다.
드워프의 금속으로 만든 도끼도 이 녀석의 비늘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이제 제대로 된 무기를 쥐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군.
조금 뒤늦게 드래곤에 다가간 나는 망치를 위로 치켜들고 달려오던 추진력까지 합쳐서 내리찍었다.
노리는 건 일부러 발끝을 노린다.
내가 쥐고 있는 망치는 부러진 도끼와 같은 재질, 정통으로 때렸다간 아마 똑같은 결과로 끝날 것이다.
“발끝을 때려 주마!”
내가 노린대로 망치는 거대한 발톱 뿌리 부분에 명중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나간 충격 때문에 손이 저린다.
잘 보니 망치는 찌그러졌고 손잡이도 구부러졌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발톱이 날아간 것도 아니지만 맞은 순간 놈은 확실히 몸을 경련시켰다.
도망치는 바르바노와 쓰러진 기드를 무시하고서 나를 노려보는 표정은 통증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드래곤도 발끝에 피해를 입으면 아픈 모양이다.
이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도망치게 만들어야 한다.
“도망쳐라 바르바노,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그렇게 말하면서 구부러진 망치를 왼손에 고쳐 쥔 뒤 듀얼 크레이터를 오른손에 쥐었다.
“미안하군. 내가 무력한 탓에.”
바르바노도 순순히 내 말을 듣고서 기드를 짊어진 채 뒤로 물러났다.
신경 쓰지 마. 괜히 세리아랑 크롤을 걱정하며 싸우는 게 더 힘드니까.
나만 노리고 오는 게 더 마음은 편하다.
다시 울려퍼지는 엄청난 포효소리, 하지만 세 번째쯤 들으니 익숙해졌다.
“간다.”
망치와 검을 쥔 두 손을 벌리고서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우선은 오른손 횡베기.
땅바닥과 거의 닿을 높이까지 몸을 낮추고서 피했다.
이어서 왼손 내리치기.
경로를 비스듬하게 바꾸어 피한다.
이리저리 튀는 돌 중에 크기만 큰 걸 망치로 박살내고 작은 돌은 그대로 맞는다.
엄청나게 아프지만 머리에 맞지만 않으면 큰 부상은 아니다.
양손 공격까지 피하고 발밑까지 파고든 나를 상대로 어떻게 나오려나?
뒤로 물러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발가락을 얻어맞고 분노에 휩싸인 이 녀석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놈은 눈앞까지 들이닥친 나를 깨물어 죽이기 위해 크게 입을 벌리고서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이다!”
벌어진 입을 향해 망치를 있는 힘껏 던졌다.
회전하면서 날아간 엄청난 무게의 망치가 송곳니 중 하나와 부딪혔다.
어떠냐, 입 안에 비늘이 있진 않겠지?
뭐라 형용하기 힘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이빨이 하나 부러졌다.
“아야야…….”
뒤쪽에서 세리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겠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세리아가 충치를 치료한 적이 있었지.
“아직 멀었다!”
통증 때문에 움직임을 멈춘 드래곤의 코끝에 듀얼 크레이터를 내리쳤다.
놈이 반사적으로 입을 닫은 나머지 비늘 위에서 휘두르는 꼴이 되었지만 제발 부러지진 마라.
듀얼 크레이터가 부러졌다간 논나가 울면서 나한테 100번은 박치기를 먹일 테니까.
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몇 초 후 무언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해냈다!” “피를 흘리는군!”
세리아와 바르바노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듀얼 크레이터는 놈의 코끝을 찢어발기고 새빨간 피를 터트리게 만든 것이다.
“…….”
하지만 나는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듀얼 크레이터는 확실히 놈에게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사실은 코 끝부분부터 턱까지 닿을만큼 깊숙이 칼날이 박혀야 정상인 공격이었다.
“대단한 비늘이군.”
확실히 비늘 중 하나는 벗겨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듀얼 크레이터도 튕겨나가 놈의 얼굴에 깊숙한 상처를 내는 데엔 실패했다.
“이거 힘든 싸움이 되겠는걸.”
마음을 다잡고서 냉정하게 생각했다.
몸을 찢을 수 없는 이상 급소를 노릴 수밖에 없다.
드래곤의 급소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생물이라는 걸 고려해 보면 머리나 심장이리라.
목을 베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정수리나 가슴을 찔러서 관통하는 수밖에 없다.
듀얼 크레이터는 절대로 작은 검이 아니지만 상대방이 너무 크다보니 길이가 부족하다.
심지어 비늘이 덮인 부분은 내 힘으로도 깊숙이 꽂아넣기 힘든 수준이다.
“어쩌면 좋으려나…….”
그리고 나는 적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다간 벌레마냥 압사당할 게 뻔하다.
조금 많이 불공평한 전투다.
“에이길 님……웃고 계십니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던 모양이다.
추잡한 고블린을 학살하는 전투보다는 영혼이 들끓고 있나 보군.
이빨까지 부러지고 코 끝에서 피를 흘리게 된 사실에 드래곤은 길길이 미쳐 날뛰었으나 이제는 날 단순한 벌레라고 여기진 않기로 한 모양이다.
여태 펼치지 않던 날개를 펼치고 한 번 펄럭여서 크게 뒤로 물러났다.
반대로 나는 놈이 일으킨 바람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오오, 대단한 바람이군.”
“조, 족장님……린트브룸은……날 수 있습니다…….”
바르바노의 어깨 위에 짊어져 있던 기드가 필사적으로 입을 뗐다.
무리 안 해도 돼. 그리고 이미 늦었어.
놈은 한 번 공중으로 올라간 뒤 나를 향해 날아왔다.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머리를 쓰고 있다간 늦겠군.”
어떻게 피해야 할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눈을 치켜뜨고서 놈을 노려본 뒤 본능대로 몸을 비틀었다.
발톱을 피하고 송곳니를 피한 뒤 몸통에 깔리는 걸 간신히 비껴간 순간 꼬리에 얻어맞았다.
맞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엔 땅바닥을 빠르게 구르고 있었다.
“아앗! 저 돌아가겠습니다!”
“네가 돌아가 봤자 걸리적거릴 뿐이다! 위로 올라가라.”
소리치는 세리아를 바르바노가 어깨에 짊어진 채 밧줄로 돌아가는 광경이 시야 속에서 도는 중이다.
몇십 번 바닥을 구르고 나서 벽에 부딪힌 모양이다.
격통에 신음하면서 몸을 확인한다.
뼈는 부러진 데 없고, 내장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꼬리에 얻어맞았다기보단 걸린 느낌인 듯하다.
충분히 바닥을 구른 덕분에 속도가 떨어져 있던 게 다행이었다.
“커헉! 크헉!”
일단 피해는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과 눈이 핑핑 돈다는 것, 그리고 위 안에 있던 내용물을 전부 다 토해냈다는 것뿐이다.
덕분에 취기도 가시겠군.
드래곤은 땅바닥을 향해 토하고 있는 나를 잠자코 기다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땅을 쿵쿵 울려대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천천히 다리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앞발로 짓밟으려는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놈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땅바닥에 계속 토하는 척을 했다.
그리고 발이 떨어지는 순간 옆으로 굴러 재빠르게 피했다.
“이건 치졸한 공격이긴 하지만……아플걸!”
일어나자마자 땅바닥에 떨어진 앞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듀얼 크레이터의 날카로운 칼날은 정확히 놈의 발톱과 발가락 사이에 푹 꽂혔다.
위협용 포효와는 다른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후후후, 아플 테지.
나도 발톱을 자를 때 실수로 나이프로 똑같은 짓을 저질렀던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로 울 뻔했다.
드래곤은 다시 날개를 펼쳐 공중을 날고는 거리를 벌렸다.
나는 재빠르게 벽 부근까지 후퇴했다.
이곳에 있으면 방금 전과 같은 급강하 이후 돌진은 불가능하다.
저 녀석도 스스로 벽에 들이받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이야.
놈은 공중을 날면서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벽을 두려워하는 건가 싶었는데 뭔가 이상한걸.
뭔가 날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 느낌이다.
“조, 족장님……린트브룸은……끄으윽…….”
기드가 만신창이 상태로 또다시 소리쳤다.
“린트브룸은……불을 뿜습니다…….”
“늦잖아!”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드래곤의 입에서 엄청난 불길이 쏟아져나왔다.
앨리스의 마법조차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는 수준의 박력, 피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뭐 그렇다 해도…….”
나는 듀얼 크레이터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때보다는 낫단 말이지.”
다드 산의 참상과 비교해 보면 이것도 결국엔 불장난 수준이다.
밀려드는 화염을 향해 나는 듀얼 크레이터를 위쪽에서 단숨에 내리쳤다.
내 눈앞에서 화염이 두 동강 나더니 벽과 좌우 공간을 화끈하게 태우기 시작했다.
직격은 면했으나 역시 뜨겁다.
“에이길 님―――!! 안 돼, 싫어어―――!!”
“나, 날뛰지 마라, 떨어지겠구나! 으윽!”
세리아가 바르바노의 손을 뿌리친 모양이다.
고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내가 베어낸 화염이 옆으로 퍼져서 내 모습을 못 보고 불에 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동굴 안쪽엔 불탈만한 무언가가 없다.
금세 주변 불길도 사그라들 테니 불타 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화염이 사라지는 짧은 시간 동안 놈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낙반처럼 들리는 굉음과 충격이 연속으로 들리다가 점차 조용해졌다.
화염이 잠잠해지고 울면서 내게 뛰어든 세리아를 끌어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놈의 모습은 없었다.
“어라? 어디 갔지?”
바르바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박쥐처럼 달라붙어……아니, 뭐야 이건!?”
동굴 천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마치 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빛줄기가 내리쬐고 있었다.
저건 햇빛인가?
“지상까지 빠져나간 건가…….”
“박치기 한 방에 구멍이 뚫리더군. 애초부터 출입구가 낙반 때문에 가로막혀있던 것뿐일 수도 있겠어.”
“그놈도 에이길 님이 불타 죽었다고 생각해서 떠난 것 같습니다.”
듀얼 크레이터가 놈의 화염을 베어내지 못했으면 예상대로 스테이크가 됐을 거다.
으음, 돌이 새빨갛게 빛나면서 녹고 있잖아.
대체 얼마나 뜨거운 화염이었던 거지?
“네가 놈을 화나게 만든 덕분에 우리는 안중에도 없긴 했다만.”
“괴롭히는 수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긴 했지만 말이야.”
나와 바르바노는 목숨을 건진 안도감 덕분에 농담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세리아도 활짝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달라붙었다.
이야, 잘 됐네, 잘 됐어.
“방금 전 그 드래곤, 지상으로 날아간 거 아닙니까?”
왜 그러냐 크롤. 너도 안아주랴?
“……놈이 지상으로 나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올 게 린트브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나와 크롤은 서로 마주보았다.
세리아도 내 허리춤에 엉겨붙은 채 시선을 섞었다.
“서둘러! 도시로 나가야 해!!”
그런 게 도시로 들어갔다간 피해가 나오는 수준에서 그치질 않는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레아와 클레어 일행도 있는 상황이다.
그쪽은 저항은커녕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바르바노, 제일 재질이 좋고 무거운 무기를 빌려줘!”
“그래! 우리도 다같이 도시로 나가지. 저런 게 근처에 있다간 편안히 술도 못 마실 게다.”
동굴에서 뛰쳐나간 뒤 갱도를 뚫고 나간다.
바르바노는 취한 드워프를 발로 걷어차면서 큰 소리로 동료를 모으러 갔다.
“이게 가장 좋은 물건이다. 인간이 들 수 있는 무게는 아니다만.”
모든 내용을 말하기도 전에 바르바노가 건넨 거대한 전투 망치를 왼손에 쥐고 출구로 서둘렀다.
“한손이라, 벗이여 역시 자네는…….”
에잇, 지금은 얘기를 나눌 시간도 아까워.
“하지만 에이길 님, 저 드래곤은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천장이 없는 지상에선 검이든 망치든 닿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심지어 비늘의 경도도 장난이 아니야. 화살을 쏴도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다.”
솔직히 어떻게 싸우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도시는 완전히 불타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여자들은 반드시 도망치게 만들어야 한다. 덤으로 민중들도.
“클레어 씨, 파멸할 것 같네요.”
어떻게든 해 주고 싶긴 하다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하늘을 못 나니까 말이지.
그러자 수염을 문지르면서 입을 다물고 있던 바르바노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날지만 못하게 하면 승산은 있는 건가?”
“땅바닥으로 떨어트리면 어떻게든 해 보지.”
“그렇다면 내게 생각이 있지!!”
바르바노는 어딘가 기쁜 기색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후후후, 우리가 만든 혼신의 작품이 드디어 빛을 볼 때가 왔구나!!”
재밌군. 확실히 그거라면 제아무리 튼튼한 비늘이라 해도 뚫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놈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어 보자고.
◇◇◇◇◇◇◇◇◇◇◇◇◇◇◇◇◇◇◇◇◇◇◇◇◇◇◇◇◇◇◇◇◇◇◇◇◇
백도 공방전 원군 도래 백도 궁전
“이완 갈첸코 방위 최고 사령관.”
“예!”
공방전이 계속되는 백도 궁전에서 호화로운 복장을 입은 고관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눈을 감은 채로 왕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유틀란트 2세의 모습이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갈첸코한테 집중됐다.
알벤스 함락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와중 최대한 많은 병력을 이끌고서 백도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야만스러운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리나라는 유감스럽게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예…….”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가끔씩 포성이 섞여 들어왔다.
밤낮 구분없이 성벽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항쟁이 계속되는 중이다.
“서부는 전부 놈들의 손에 함락당했고 영원한 도읍인 유틀란트그라드까지 전화의 피해를 입고 있는 중이다.”
갈첸코는 아무 말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따라서 그 책임은 최고 사령관인 귀관에게 있다 보는 바, 이의는 있는가?”
“없습니다. 군무대신 각하.”
군무대신은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처분을 알리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틀란트 2세가 가볍게 손을 들어올림으로써 제지되었다.
“갈첸코, 짐은 그대를 무능하다고도 충성심이 부족하다고도 생각지 않느니라. 모든 것이 그저 안 좋게 흘러갔을 뿐, 그뿐이노라.”
“황송한……황송한 말씀이옵나이다.”
갈첸코는 풀썩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조국을 지키지 못하고 민중은 살해당했으며 왕도조차 전장으로 변했다.
무인된 자로서 이보다 심한 굴욕은 달리 없었다.
오르가 연방을 통솔하는 최고 권력자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의 입장에서도 이번 사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나 신상필벌은 무관의 숙명, 책임은 져야만 하는 법이니라.”
그 말만 남기고서 왕은 군무대신에게 계속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완 갈첸코, 귀관을 오늘부로 최고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 또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재판을……내일 아침부터 개시하겠다.”
갈첸코는 아무 말없이 몸을 일으키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귀관이 지금까지 세운 공로로 보아 도망을 칠 거라 생각지는 않느니라. 내일 아침 자택에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전까지는 자유롭게 있도록. 하사받은 사령관 인장을 반납하라.”
마지막으로 다시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갈첸코는 알현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소리쳤다.
“갈첸코! ……작별이니라.”
“폐하, 만수무강하시길. 오르가 연방에게 승리를!”
50이 넘은 장군은 완벽한 경례와 함께 자리를 뒤로 했다.
왕은 20년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신하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새겨두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내일 재판이 열리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다.
해임 이후 재판까지 일부러 하루 동안의 유예를 준 것은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첫 전투에서 일어난 해양 함대의 전멸부터 시작하여 갈첸코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 패배는 시작되었다.
그런 그의 명예가 더 이상 욕보여지는 일 없게끔 유틀란트 2세가 직접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폐하, 이어서 신 방위 최고 사령관 임명을 해주시옵소서.”
“스테세리가 북부에서 봉쇄를 뚫고 왔다 하였지……. 그래, 얼른 시작하자꾸나.”
왕은 붉어진 눈을 누르면서 표정을 다시 고쳤다.
◇◇◇◇◇◇◇◇◇◇◇◇◇◇◇◇◇◇◇◇◇◇◇◇◇◇◇◇◇◇◇◇◇◇◇◇◇
임명 후 백도 사령부
“마틴 스테세리다. 오늘부로 방위 최고사령관 임무를 맡게 됐다.”
사령부 전원이 차렷 자세와 함께 경례했다.
한편 이들의 눈에는 약간의 불안감도 남아있었다.
그것은 갈첸코 다음으로 취임한 최고 사령관이 3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남성이었기에 생기는 불안감인 듯했다.
남자는 평시였으면 무대에서 주연을 연기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을만큼 훤칠하게 생긴 미남이었으나 전장에서는 그 빈약한 패기 때문에 반대로 불안감이 느껴졌다.
새로운 부하들의 불안해하는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서 남자는 짧게 자른 금발과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사령부 전원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다들 눈이 충혈됐군. 며칠 못 잤지?”
모든 이들이 제각각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쨌거나 제국 놈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해오는 상황인지라…….”
“잠잠한 시간에 새우잠을 자는 것 정도 말고는…….”
“며칠동안 못 잤지? 질문에 답해라.”
“사흘입니다!” “저는 5일입니다!”
허둥지둥 대답을 한 부하를 둘러보고 마틴은 표정을 풀고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명령이다. 지금부터 너희는 내일 아침까지 푹 자둬라. 내가 부르러 가지 않는 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어날 필요는 없다. 밥도 잔뜩 먹어두고.”
갑작스러운 명령에 부하들은 당황했으나 마틴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적이 병력을 찔끔찔끔 내보내는 건 마땅히 공격할 데가 없어서 그런 거다. 마지막 총공격은 사흘 전, 재편성까지는 앞으로 나흘은 걸릴 테지.”
“하지만 적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잠을 자기엔…….”
아직도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부하의 말을 가로막고 마틴은 말을 이었다.
“네가 적의 사령관이라 쳐 보지.”
느릿느릿하지만 당당한 목소리가 살기로 가득찬 사령부에 울려퍼졌다.
“전자는 눈이 붉어질 정도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못 먹은 남자.”
그렇게 말하고서 부하의 이마를 가볍게 찔렀다.
“푹 자고 먹을 것도 잔뜩 챙겨먹은 든든한 남자. 둘 중 누구를 더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건 명령이거든, 하고 농담하듯이 말했다.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살짝 느슨해졌다.
“긴장해야 할 국면과 긴장을 풀 국면을 구분해라. 계속 팽팽하게 당기다간 끊어진다는 걸 명심하고.”
그렇게 말하고서 마틴은 한 사람씩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너무 말랐군. 고기 좀 먹어, 고기.”
“하하, 면목 없습니다.”
“너는 냄새가 나는군. 목욕 좀 한 뒤에 자라. 하지만 욕탕 안에선 안 돼. 전쟁을 앞에 두고 익사하면 안 되니까.”
“풋, 알겠습니다.”
“너는 여자를 원하는 것 같은데. 영업 중인 창관이 있으면 다녀와라.”
“저, 저는 동정인지라…….”
“너는 눈그늘이 새까맣군 그래.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 됐어. 얼른 자라.”
“예! 하루 온종일 자겠습니다!”
전원에게 한 마디씩 건넨 뒤 마틴은 다시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걱정 마라, 우리는 이길 거니까. 끝내주는 원군을 데리고 왔으니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창문을 열어젖히는 마틴.
원군, 그것은 다들 그토록 바라던 단어였다.
모든 이들이 떼지어 창문으로 달려갔다.
“어디에 원군이……?”
하지만 그곳에 그들이 바란 원군의 모습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마틴과 함께 봉쇄를 돌파하고서 백도로 들어온 북부 병단 2만뿐이었다.
그 사실은 이미 사령부 전원이 알고 있던 사실이고 고작 2만 정도의 원군으로 국면이 바뀔 건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마틴은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머리가 둔해졌군! 자―알 봐라. 땅이 아니라, 하늘을 보는 거다!”
그 말대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들. 이들의 표정이 경악에서 환희로 바뀌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하얀 무언가.
그것은 창문과 그곳을 통해 밖을 들여다보는 사내들의 얼굴과 맞닿자마자 조용히 녹아 물로 변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눈, 드디어 겨울이 온 것이다.
“제군들. 눈이다, 겨울이 온다! 연방의 겨울이 오고 있단 말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제국군이 연방 최심부까지 진격해 온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 이들은 진정한 연방의 겨울, 지옥과도 같은 추위를 모른다.
강철 갑옷은 있어도 모피는 갖고 오지 않았다.
전노병의 경우엔 반라라 해도 손색없을 복장이다.
“제군들, 먹어라! 자라! 언젠가 찾아올 반격의 때를 위해서.”
사령부 장군들은 돌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달려나갔고 굶주린 배를 가득 채울 정도로 밥을 쑤셔넣은 뒤 침대로 들어갔다.
눈은 두 군대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쏟아져내렸고 이윽고 험난한 겨울이 찾아왔다.
◇◇◇◇◇◇◇◇◇◇◇◇◇◇◇◇◇◇◇◇◇◇◇◇◇◇◇◇◇◇◇◇◇◇◇◇◇
연방 VS 제국 전쟁 병력 비교 (현재+손해 = 동원 한계치입니다. 부족한 경우엔 아직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오르가 연방
병사 숫자 현재 60만 동원 한계치 255만 기존 피해 117만 민간 희생 94만
가랜드 제국
병사 숫자 현재 211만 동원 한계치 310만 기존 피해 99만만(전노병은 포함 안 함)
'왕국에 이르는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국에 이르는 길 제234화『영웅의 난행』 (1) | 2024.11.12 |
---|---|
왕국에 이르는 길 제233화『드래곤 헌터③ 거포 포효』 (2) | 2024.11.11 |
왕국에 이르는 길 제231화『드래곤 헌터① 시작의 포효』 (3) | 2024.11.09 |
왕국에 이르는 길 제230화『여자의 고민』 (0) | 2024.11.08 |
왕국에 이르는 길 제229화『싸움이 끝나고』 (2) | 2024.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