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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67화『오랑캐 제압 전쟁② 가라앉은 기병』

67화『오랑캐 제압 전쟁② 가라앉은 기병』

 

서로를 노려보는 두 군대 사이에 이상한 정적이 흐르는 중이다.

 

우리 앞에는 천이 넘는 오랑캐가 모여 있었다.

대열을 짜지 않고 한데 뭉뚱그려 모여 있다 보니 정확히는 셀 수 없지만.

전원이 기병인 걸 보아 마음만 먹으면 3분 안에 여기까지 돌진해 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만한 숫자가 모여 있으니 적이라 해도 새삼 장관처럼 느껴진다.

 

살짝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에 진을 치고 있는 내 군대는 대략 2000. 숫자만 보면 2배에 가깝지만 방어 시설도 없는 탁 트인 장소에서 1000기 이상의 기병을 상대해야 한다는 걸 고려해 보면 우리가 우세하다고 보긴 힘들다.

게다가 내가 바라는 건 완승이다.

놈들을 여기서 완벽하게 무너트리고, 더 나아가 놈들의 영역까지 쫓아가서 철저하게 섬멸해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일단 정공법으로 가볼까.

. 장창 부대, 기병 방어진. 궁병 부대는 내부로!

 

대기병 전투의 정석, 장창 부대로 벽을 세우고 그 뒷편에 궁병 부대와 보우건 부대를 배치한다.

적 기병 입장에선 꼬챙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속도를 나줓고서 창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 활을 쏜다. 규모 10명의 용병단 대장조차 알고 있는 상식이다.

 

장창 부대를 선두로 내세우고 아군이 전진한다.

창과 활이 적의 발을 묶어두면 일반 보병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가 난전 상황으로 유도, 기병의 기동력을 박살내는 전략이다.

 

이걸로 해결되면 좀 시시하겠는데.

 

내 옆에 서 있는 건 평소처럼 세리아, 부사령관 레오폴트, 그리고 100명까지 규모가 늘어난 사군의 지휘관 이리지나다.

 

그렇게 되면 전투가 빨리 끝나긴 하겠습니다만, 되도록이면 이게 결정타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레오폴트가 대답했다.

 

왜 그런 거지? 일부러 준비해 둔 책략이 쓸모없어져서 그런 건가?

아닙니다. 이 상태로 적을 격파할 경우엔 대다수가 도망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기병 숫자로는 놈들을 전부 쫓아갈 수 없습니다. 절반이 넘게 살아 돌아가면 놈들의 거점에서 또다시 전투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처리하고 싶은 겁니다.

 

, 병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전체 양상을 따져보면 이런 발상도 나올 수 있는 법이다.

죽지 않게끔 적당히 싸우길 바라면서 전황을 지켜본다.

 

우리가 나갈 차례는 아직인가!?

 

이리지나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였지만, 이번엔 안 된다.

 

작전이 있으니까 말이지. 우리는 여기서 대기, 사군도 본진 수비를 사수해라.

그렇군…….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고 세리아를 보고 배워. 그냥 내가 쓰다듬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으니까.

 

대열을 짜고서 천천히 전진하는 아군과 달리 오랑캐 집단은 여전히 뭉뚱그려 모여 있었다.

놈들은 항상 50명 정도 단위로 움직였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인원을 데리고 행동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놈들이 움직인다!

 

이리지나가 소리쳤다.

 

오랑캐 중 한 사람, 머리와 어깨에 화려한 새 깃털 장식을 달고 있는 걸 보아 특별한 지위에 있는 듯 보인다.

그 남자가 집단 가장 맨 앞에 서서 검을 뽑아들고는 전진하고 있는 아군을 향해 겨눴다.

 

오겠군. , 오겠군요.

 

오랑캐들 사이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나오더니 아군을 향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정렬된 움직임이라 보긴 힘들지만 그런 무질서한 상황 속에서도 놈들은 서로 부딪치지도, 낙마하지도 않았다.

 

기마 능력만큼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는 수준이군.

아군 기병들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군요.

 

 적과 아군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다.

아군은 충돌에 대비하여 전진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창을 앞으로 내세웠다.

한편, 오랑캐는 속도를 낮추지 않고 창의 숲을 향해 돌진해 오는 중이다.

 

설마 이대로 돌진을 계속하려는 것일까요!?

 

세리아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귀엽긴 하다만, 그럴 일은 없겠구나.

 

놈들의 기마 사격술을 잊었느냐? 활을 이용해서 장창 부대를 쓰러트릴 생각일 거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궁병 부대의 사정 거리 안으로도 들어온다는 뜻이다.

맨 처음 충돌 순간에만 피해를 감수하면 숫자가 더 많은 우리 쪽이 더 유리해진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적은 활을 쏘지 않은 채 우리쪽 진영까지 계속해서 다가온다.

설마, 싶어진 그 순간.

놈들은 일제히 방향을 돌려 우리쪽 대열에 맞추듯이 횡렬을 짜맞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횡진 상태 그대로 장창 부대한테 활을 쏜 것이다.

 

적들의 돌격에 대비하여 방패를 놔두고 창을 준비하고 있던 장창부대는 바로 앞에서 날아온 화살비를 맞고 단숨에 쓰러졌다.

 

심지어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선두 기병이 횡렬로 차례차례 화살을 날린 직후, 무너진 대열을 향해 후속 부대가 돌진해 온 것이다.

창으로 된 방어진만 사라지면 그 뒤에 남는 건 무방비한 궁병들뿐이다.

도저히 기병 돌격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훌륭하군. 엉망인 것처럼 보여도 제대로 된 전술이 있잖아.

그렇군요. 기마 기술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정돈된 대열을 짤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와 레오폴트가 냉정하게 분석을 하는 사이, 이리지나와 세리아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이! 전위가 격파당했다만!? 이대로 상황이 굴러가면 부대 중심까지 놈들이 파고들 거다!

놈들의 기병 숫자를 생각해 보면 대열 전체가 무너질 겁니다. 우리 쪽도 기병을 내보내서 막아야 합니다!

 

나도 상황을 몰랐더라면 이런 식으로 허둥댔을지도 모른다.

나는 레오폴트 쪽을 힐끔 쳐다봤다.

 

전군에 후퇴 명령을.

 

레오폴트가 나팔수한테 명령을 내리자 나팔 몇 개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후퇴 신호다.

 

병사들은 멍하니 그 신호를 들은 후,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후퇴한다는 것은 패주 그 자체다.

조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늦어지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병사들은 자기가 먼저 가겠다며 앞다투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에이길 님!

 

세리아가 시끄러웠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붕괴한 걸 보고 기회라 판단한 오랑캐들이 단숨에 결판을 내려고 아군 사이로 물밀듯이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지금입니다. 좋아, 시작해라!

 

레오폴트가 신호를 보내자 정찰탑 위에 서 있던 기수가 새빨간 깃발을 쳐들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딱히 커다란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용하게, 전장에 물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자기들을 향해 흘러오는 물을 보고 아군과 적군 모두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홍수는 기후가 안정적인 편인 중앙 평원 안에선 가장 두려운 자연 재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한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으나, 혼란은 금세 종식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흘러들어온 물은 기껏해야 발목에서 허벅지 언저리 높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은 사람을 밀어넘어트릴 정도의 기세도 없이 조용히 흘러들어오다 조용히 멈추고 말았다.

병사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패주 중이던 사실마저 잊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틀 동안이나 강을 틀어막았던 것 치고는 이것밖에 안 되나?

여기 강은 원래부터 원류가 작은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비가 내려 양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준비된 책략이란 바로 이것.

관개용으로 정비되어 있던 댐을 임시로 확장해서 물을 쌓은 다음, 신호를 줘서 가림막을 파괴, 더 낮은 위치에 있는 평원 쪽으로 물을 흘려보낸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면 비장의 수단 치고는 좀 밋밋하다 싶어서 말이지.

 

만약 이게 엄청나게 강렬한 물줄기였고, 적을 전부 다 쓸어버릴 만큼 기세가 좋았으면 극적이었을 텐데 말이야.

 

그랬다간 아군 쪽 병사도 괴멸해 버립니다. ……그리고 밋밋하긴 합니다만 결판은 났습니다.

결판? 고작 저 정도의 물 가지고는 기껏해야 물웅덩이 수준…….

 

거기까지 말하다 세리아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치켜떴다.

 

 

 

 

전장 상황은 급변해 있었다.

보병을 내보내고 있던 아군 측은 그냥 진창에 발이 빠지는 정도였지만 오랑캐 쪽은 눈을 가리고 싶어질만큼 상황이 끔찍했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훌륭한 기마 능력은 어디 갔는지, 말과 함께 쓰러지는 자, 균형을 잃고서 낙마하는 자,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았으나 바로 옆사람과 부딪혀 함께 낙마하는 자. 바라보는 것조차 안쓰러울 정도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이건 대체 어찌 된 일이지!? 놈들은 대체 왜 저러는 것이냐?

 

이리지나의 의문에 레오폴트가 대답했다.

 

이 땅은 원래부터 습기가 많은 곳이라 배수 능력이 부족하지. 밭으로 개척하기 위해 주변 일대에 관개 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비가 내리는 것 정도라면 문제없다만…….

 

레오폴트는 거기까지 말하다 박살난 가림막을 바라보았다.

 

대량의 물을 투입하면 순식간에 진창으로 변한다.

 

진창은 기병한테 있어선 치명적이다.

무게가 나가는 말은 끈적한 진흙 속으로 들어가면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억지로 움직이려 했다간 발이 부러지는 경우도 있다.

빠르게 질주하는 건 꿈조차 꿀 수 없다.

 

발을 잃은 기병 따위, 단순한 표적에 불과하다.

 

후퇴 명령을 취소해라. 전군 총공격이다, 기병은 우회해서 물이 닿지 않은 위치에서 적이 오길 기다려라!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고, 도주하고 있던 병사들은 적이 쫓아오지 않는 걸 보고 대열을 다시 정돈했다.

한편 적들은 당연히 대열 따위는 무리, 사람 하나하나가 진창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게 고작이다.

 

각 지휘관들로부터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화살이 쏟아지고 장창 부대가 진을 짜고서 놈들에게 달려든다.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는 기병들은 무력한 산제물처럼 죽어나갔다.

일부 적들은 말을 포기하고 보병 전술을 택했지만, 말에서 내린 이상 장비, 체격, 통솔력, 그 어떤 면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나 기병들과 마찬가지로 죽어나갔다.

 

웬만하면 나도 가고 싶은데 말이지.

 

그만두라는 듯이 슈바르츠가 히힝거렸다.

이 녀석은 무거우니까 저기로 들어갔다간 푹 빠질 게 분명하다.

 

자중해 주시지요. 이미 하드릿 경께서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병사들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소문만 돌게 될 겁니다.

 

가끔씩은 사령관으로서 뒤에서 구경하는 것만 해도 된다 이건가, 심심한데 말이지.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다.

 

레오폴트, 놈들을 전부 죽여야 할 필요가 있나?

죽여두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도망치면 또 올 겁니다.

도망치게 놔두진 않을 거지만, 발이 묶여서 움직일 수 없는 놈들을 죽일 필요까진 없지. 포로로 삼는 건 어떠냐?

 

레오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가 기사단이라면 포로로 삼아서 몸값을 요구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수 있지만 산의 민족들한테 그런 걸 바랄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화페라는 개념조차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놈들 중에는 여자도 있으니 말이죠. 에이길 님께선 여자들을 살린 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따먹으실 생각인 게 틀림없습니다.

 

세리아가 사이에 끼어들자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니야, 그것도 있긴 하지만 그것만 있는 건 아니라고. 놈들은 우수한 기병이지. 만약 회유가 가능하다면 농부들 중에서 병사를 골라내는 것보다 훨씬 더 쓸만하다고 생각이 들었거든.

 

세리아가 역시 불장난칠 여자도 원하셨던 거군요, 라고 말하고 레오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요. 좋은 병사가 될 것 같긴 합니다만 회유가 가능할지 어떨지는 판단이 안 됩니다. 되도록 생포하도록 명령해 두겠습니다. 포로로 삼은 뒤 회유가 안 되면 그때 죽여도 되니까 말이지요.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사자를 말에 태우지 않고 각 부대 쪽으로 내보냈다.

명령이 전해지기 전에 죽은 놈들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되도록 미인은 죽이지 않았으면 하는구만.

 

 

 

습지에서 벌어진 전투도 대강 마무리가 지어졌고, 간신히 진창에서 빠져나와 도망친 적들한테도 밖에서 대기 중이던 창기병이 들이닥쳤다.

도중에 학살에서 포박으로 명령을 바꾼 덕분에 전부 다 몰살당하진 않았지만 진창에는 수많은 산의 민족들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개중에는 어린아이나 여자들도 종종 보였다.

 

젊은 여자가 죽어 있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군.

놈들은 모든 사람들을 병사로 끌고 와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죽는 건 당연한 일이죠.

 

세리아는 그렇게 딱 잘라 말했지만 아직 소년이라 불러야 할만한 나이대의 시체를 보았을 땐 눈을 감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병사들은 잔당을 소탕하는 중이다.

살아있는 자한테는 항복을 요구하고 저항한 놈이나 더 이상 살 가망성이 없는 놈한테는 칼을 찔러넣었다.

 

적병 약 1200, 죽은 사람 500, 포박한 사람 600, 도망친 사람은 100도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동방군 쪽 손실은 100여명, 사군과 인부들한테 피해는 없었다.

적측 병력은 완전히 붕괴, 아군은 이대로 행군을 재개 가능한 상태다.

경기병은 이미 적의 거점을 확인하기 위해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가는 중이다.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완벽한 승리라 부를만한 전쟁이었다.

 

문제라 하면 이게 남았군.

 

침수까지 된 데다가 2000명 이상이 짓밟아 가면서 싸운 토지.

아돌프가 고생해서 공사를 하고 밭으로 개간한 토지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설명은 네가 해라.

알겠습니다. 관개 공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책략은 성공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 자도 기뻐할 테지요.

……아니, 역시 내가 설명해야겠어.

 

이 녀석한테 시켰다간 틀림없이 싸움이 벌어질 거다.

귀찮은 설명을 하는 것도 상사의 책임이다. 정말 번거롭군.

 

오늘은 이리지나를 껴안는 베개 삼아서 자야겠군.

그 녀석은 세게 끌어안아도 멀쩡하고 몸매도 육감적이라 껴안는 보람이 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