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급습』
클라우디아가 귀국하고 나서 몇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드디어 내 영지로 이사할 것을 결단했다.
최종적으로 결단하게 된 이유는 아돌프가 보내온 편지로, 전 영주 저택의 보수 개선이 대부분 끝났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옛 아크랜드를 지배하고 있는 영주들의 통치가 어지간히도 지독한 건지 민중들의 유입은 아돌프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현재도 계속되는 중이라고 한다.
내가 클라우디아한테서 빌린……결코 그냥 받은 게 아닌 그 돈이 있기 때문에 식량 공급이나 인부를 고용할 임금은 부족하지 않지만 관개나 도로 정비 공사도 그냥 사람 수만 맞춰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구멍을 파서 땅을 메꾸는 단순 노동만 시킬 수도 없었던 차에, 영주관 개선 공사는 노동력 소비처로 쓰이기에 적합했다고 한다.
레오폴트는 니나를 데리고서 얼마 전에 출발한 상태다.
군대 사령관으로서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
“이거랑 그것도 들고 가죠. 그리고 이것도 필요하겠네요.”
“바보 아냐? 의자 같은 건 저기에도 있다구.”
“어머, 루우 안 된단다. 그 의자는 저주받은 사람이 앉은 거라 봉인해 둔 거거든.”
“엄마 뭔가 무서워, 스우까지 울고 있다구.”
“창이랑 갑옷, 밥 정도만 있으면 이사는 별 거 아니지! 안 그런가, 세리아!”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과자표는 미티한테 줄게요. 저쪽에 과자 가게 안 생기려나…….”
“에이길 씨. 사람들 다 움직이는 와중에 은근슬쩍 엉덩이 만지지 마세요! 엄마~.”
“하드릿 님께서 만져주시는 거니까 좀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지세요. 저라면 일부러 뒤쪽으로 뺐을 거예요.”
여자들이 이것저것 물건을 살 때도 소란스러웠지만 그때에 비해 몇 배나 더 시끄럽다.
애초에 아기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10명이 같이 가는 이사, 심지어 우리집은 그 중에 8명이 여자다.
여자들한테 맡겨두면 언제 끝날지 가늠도 안 갈 것 같아서 세바스찬한테 고르도록 시켰다.
이쪽을 완전히 비워둘 수도 없기 때문에 전부 다 들고 갈 수도 없는 것이다.
남게 되는 사람은 고아원 삼인방과 집안 사람들 중에선 둘, 일단 멜리사는 저택 여주인, 마리아한테는 하인 관리 담당역을 맡겨 두었다.
관리라고 해봤자 혼낼 걸 혼내고 용돈을 주는 정도밖에 할일은 없을 테지만.
“크롤, 저택에 남게 될 남자는 너 하나뿐이다. 만에 하나의 경우엔 다른 사람들을 지켜내.”
“네, 넵!”
나는 크롤한테 검 한 자루를 건넸다.
크롤은 이리지나와 함께 단련을 했었다.
어리긴 하지만 잘만 하면 일대일 승부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죽는 건 맨 처음, 도망치는 건 맨 마지막. 그게 남자란 거다, 알겠나?”
“예, 옙!”
제법 무게가 나가는 검이긴 하지만 매일같이 물을 퍼올리고 장작을 하던 신체는 그것을 간단히 받아들게 만들었다.
정말 뭐가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법이군.
“…….”
세리아가 아무 말없이 크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스로 크롤을 만진 건 이번이 처음이군. 귀여우니까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지.
대중소 순서대로 인간이 사람을 쓰다듬으며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제법 우습다.
“저기! 세리아 씨. 저,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듣고 싶지 않다. 그럼 이만 출발하시죠.”
크롤은 아직 멀었군, 이럴 땐 그냥 가만히 배웅하면 될 것을.
심지어 마리아한테 설교까지 듣는 신세다.
당연하지, 세리아는 내 여자니까.
주인의 여자한테 집적댔다간 큰일이 나는 법이다.
“아직 꼬맹이로구만.”
세리아, 그 녀석은 아직 이쪽을 보고 있으니까 손수건으로 손을 닦지는 말거라.
여자를 못 믿게 될 거다.
여자들과 세바스찬이 마차 위로 올라타기 시작했다.
말 네 필이 끄는 대형 마차와 짐을 실을 마차들이 몇 대 모여 있어서 꽤 북적거린다.
“에이길 씨…….”
마리아와 멜리사는 한동안 작별이라는 사실이 슬픈 건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두 손에 끌어안고 셋이서 혀를 얽듯이 키스를 나누었다.
길을 지나가던 부인이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뛰기 시작했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매주 편지 쓸게.” “저도 적을게요오.”
왕도와 내 영지를 다니는 배달부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다닌다.
이것도 궁전에 있던 문관한테 억지로 요구한 것이다.
작위를 처음으로 편리하게 써먹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다녀올게.”
그 말만 남기고서 마차 위에 올라탔다.
“가끔씩은 여기로 와 줘야해!” “감정 정리가 끝날 때까지 실례할게요.”
““새 여자가 생기면 알려 주셔야 해요!!””
현재 시각은 대낮,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호기심과 수치심과 약간의 경멸 섞인 시선을 받고서 우리는 왕도를 뒤로 했다.
왕도에서 내 영지까지는 짐마차를 끌고 가는 현재 속도로는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
주변에는 왕도에서 모은 사병이 30명 정도 호위 임무를 맡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내가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내가 완벽히 지켜낼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아둔 것이다.
만에 하나 도적이 습격해서 논나의 찻잔이라도 깨졌다간 난리가 날 게 뻔하다.
“에이길~저 갑옷 안 입어? 예쁘잖아.”
카라가 말하고 있는 건 그때 그 황금 갑옷, 짐마차 뒤쪽에 고이 모셔뒀는데 지금도 아름다운 광채를 내뿜는 중이다.
왕도에 그냥 놔두고 갈까 싶기도 했는데 아무리 봐도 집에 도둑을 들이기 딱 좋은 물건이라 포상으로 받은 보석창과 함께 가지고 왔다.
“저 창을 들고서 갑옷을 입으면……큭!”
세리아가 고개를 내리깔고 웃었다.
그런 금삐까 기사가 되고 싶진 않다.
“그나저나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네요. 연병의 변경 같아요…….”
논나는 여기 오는 게 처음이었지.
옛날에 노예 신분으로 팔려나가 운반되는 도중에 본 광경과 비교하고 있는 모양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직 여기는 에이리히 영지에 걸친 부분이라고. 내 영지는 이것보다 더 아무것도 없는데.”
“네에!? 하지만 주변에 마을, 밭, 아무것도 없는데요?
나는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여기에는 길이 있잖아.”
논나는 충격을 받은 건지 옆에 있던 루우를 끌어안았다.
“와왓, 왜 그러세요? 으으, 가슴 커다래……뭉개져요~.”
나도 이에 질세라 세리아를 끌어안았다.
“하으, 왜 갑자기?”
이 껴안는 베개는 내 전용이다.
그리고 방금 전부터 머리를 올려두고 있는 베개는 멜의 무릎이다.
몇 번 정도 왕복해 본 길이지만 이 정도로 쾌적한 건 처음이군.
좋은 일이 생기면 언젠가 같은 수준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법이라고 어디 사는 누군가가 말했던 기억이 있다.
내 영지에 들어오고 난 이후. 내일 즈음엔 라펜에 도착할 거라는 생각에 다같이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 비명 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적습――――!!” “오른쪽이다!!” “방어진을 구축해!”
사병들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철컥철컥 갑옷을 입는 소리, 검을 뽑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소리는 순식간에 비명과 노성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상하군, 여기는 꽤 탁 트인 지형이다.
적이 달려왔다고 해도 상당히 예전부터 확인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매복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답은 내 귀를 통해 전해졌다.
“에이길 님!” “하드릿 공!”
“알고 있어. …………기병이다. 그것도 많아!”
기병의 말발굽 소리에 긴장감이 한층 더 높아졌다.
세리아와 이리지나는 이미 무장 상태, 카라도 활을 만지작대는 중이다.
“세리아는 나를 따라와라. 이리지나, 세바스찬은 마차를 지켜라. 카라는 가능하다면 적들을 쏴 줘. 무리는 하지 말고.”
세리아, 이리지나는 순식간에 마차 바깥으로 뛰어나갔지만 전투와 연이 없었던 여자들, 특히 쿠우와 루우가 심하게 동요했다.
의외로 배짱이 있는 건지 논나와 멜은 차분한 상태다.
“논나, 다른 사람들을 부탁한다.”
“부디 무사하시길.”
마차를 뛰쳐나가자마자 눈앞에 커다란 벌목도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곧바로 창을 내질러 떨어트리긴 했지만 벌써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을 줄이야.
사병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드릿 경, 놈들은 도적이 아닙니다! 오랑캐 집단입니다!”
아군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등에 화살이 꽂혀 쓰러졌다.
그렇군, 산의 민족이 내려온 건가.
다들 말을……우리들 것보다 상당히 작은 체구의 말을 쓰는 중이다.
“쳇!”
다시 한번 활을 겨눈 오랑캐를 보고 쓰러진 남자 검을 던졌다.
세리아의 투척 나이프 흉내를 내 봤는데……실패했군, 자루 쪽이 얼굴에 맞았다.
뭐 낙마했으니 성공한 걸로 치자.
“에이길 님!”
세리아가 달려왔다.
상대가 전원 기마인 이상 세리아의 검으로는 싸우기 힘들다.
“말을 노려라, 놈들은 경장이다. 말에서 떨어트려 버려!”
오랑캐는 통일되지 않은 가죽 갑옷을 장비 중이었지만 말에는 대부분 방어구가 장착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안장만 있을 뿐 등자조차 달려있지 않았다.
“등자도 없이 기승 전투라! 대단하구만!”
날 지나치며서 내 목을 베어내려고 한 남자의 검을 튕겨내고 반대로 말에서 낙마시킨다.
곧장 세리아가 검을 두 세 번 찔러넣어 놈의 숨통을 끊었다.
그때, 세리아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옆에서 끼어들어 막아냈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 난전 상황에선 슈바르츠를 찾고 있을 시간도 없다.
“닥치는대로 죽이는 수밖에!”
놈들의 전술인 건지 말 속도를 유지한 채 지나칠 때 목을 베려고 돌진해 오는 게 보인다.
첫 번째 놈의 검을 장갑으로 막아내고 목을 꿰뚫은 뒤, 두 번째 놈의 검은 몸을 숙여 피하곤 손을 붙잡아 밑으로 끌어당겼다.
세 번째 놈은 앞의 두 놈이 당한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는지 말의 등 위에 바짝 엎드리길래 말의 얼굴에 창을 박아넣어 말과 함께 통째로 쓰러트려버렸다.
“끄엑!”
땅에 떨어진 두 번째 놈한테 창을 박아넣었다.
당장은 어떻게든 막아냈군.
고난에 처해있던 병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환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여전히 불리한 상황인 건 변함없다.
상황이 조금씩 파악되면서 아군도 대응하기 시작했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적들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다.
“카라, 대략적인 숫자라도 좋아. 적이 어느 정도인지 거기서 보이나?”
카라는 활을 들고서 마차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대충 50, 전부 다 기병이야!”
위험하군.
우리 쪽은 30 정도다.
게다가 절반 언저리가 이미 부상당한 상태라 제대로 된 병력이라 할 수 없다.
“이얍!”
커다란 목소리를 내지르며 이리지나가 적을 꿰뚫어 죽인다.
그녀의 창은 무겁진 않지만 경장비 기병 상대로는 상성이 좋다.
“몇 명이냐!”
“7명! 하이얍!”
나는 세 명인가, 지고 있을 순 없지.
다시 적 세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같은 전술만 계속 쓰면 질리는데.
사거리 차이를 이점으로 살려 놈들이 칼을 치켜들기 전에 두 손을 베어냈다.
두 쌍, 총 네 개의 팔이 공중을 맴돌고 마지막 한 명은 깜짝 놀란 표정 그대로 목을 날려주었다.
이리지나의 깔끔한 전투 방식과는 정반대, 피분수가 몰아치는 호쾌하고 추잡한 방식이다.
그만큼 적과 아군의 사기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돌진 이후,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려던 기병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카라의 화살 때문이다.
그녀의 활 솜씨는 군대쪽 사람과 비교해봐도 상당한 수준이다.
속도를 낮춘 순간 화살이 차례차례 꽂히고, 거리가 먼 경우엔 말을 노린다.
우리 쪽 저항이 거세진 걸 확인한 놈들은 일단 물러나기로 결정한 듯했다.
놈들은 통솔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병 후퇴합니다!”
“방심하지 마라. 놈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완전히 후퇴하기 전까진 방어진을 무너트리지 마라.”
카라는 추격타를 가하려는 듯이 화살을 겨눴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오랑캐 하나가 검을 집어넣었다.
“카라! 돌아가!”
“뭐?”
기병은 무장을 활로 바꾼 뒤 후퇴하면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라를 향해 날아갔고 지붕 위에 있던 그녀는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땅에 떨어지기 직전, 세바스찬이 그녀를 받아 마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카라 씨!!”
“뭣이! 당했나!”
세리아와 이리지나가 허둥지둥 마차로 돌아왔다.
등자도 없이 말 위에서 배면 사격……고르도니아에는 이런 짓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
아니, 등자 위에서 정면에 있는 적을 향해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오랑캐의 기술을 우리의 그것과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난전 상태가 끝나고 이제서야 우리를 발견한 슈바르츠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카라가 다친 걸 알고 있는 건지 마차에 머리를 들이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상태는 어떻지?”
“화살을 맞은 곳은 우측 복부입니다. 제법……깊군요.”
“지금부터 약을 쓰겠습니다만 출혈이 심합니다. 움직여선 안 됩니다.”
부상을 확인하던 리타한테 지시를 내리는 세바스찬.
금방 약을 바르긴 했지만 카라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고 의식도 몽롱해 보였다.
“세리아, 이리지나. 마차를 지키고 있어라. 세바스찬, 카라를 부탁하마.”
“맡겨 두십시오 주인님.”
활을 겨눈 이상 반격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장 속에서 악의를 담아서 한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다.
내 여자를 다치게 만든 이상, 논리 따위 없다.
전부 다 죽여버려주겠어.
“적병, 한 번 더 오고 있습니다!”
적은 대열을 다시 갖추고서 일제히 돌진해 오고 있는 듯했다.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40, 놈들이 손에 쥐고 있는 건 활.
일단은 기승 사격으로 우리한테 피해를 입힌 뒤 돌진한 생각인 듯하다.
“적은 말 위에서 정확하게 표적을 노리고 활을 쏜다! 돌격해 오더라도 방패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마라!”
슈바르츠 위에 올라타고서 나도 대열을 짜기 시작했다.
이미 숫자는 10명 정도로 줄어버리고 말았지만 마차를 지키는 것 정도는 해낼 수 있는 병력이다.
그들은 지키기만 해도 된다. 공격은 나한테 양보해야 할 테니까.
나도 있다는 듯이 슈바르츠가 히힝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을 가장 귀여워하던 게 카라였었지.
세리아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이긴 했지만 이 녀석은 풍만하고 야생적인 여자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적이 일제히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아군은 방패를 쥐고서 그 틈 사이로 창을 내밀었다.
나는 죽은 적들을 꼬챙이처럼 꿰고서 그것을 패 삼아 내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우리를 향해 돌격해 오는 적들을 향해 혼자서 공격에 나섰다.
적들은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듯했으나, 나 하나를 위해 전 부대를 동원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건지 정면에 있던 10명의 적병 정도만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화살 솜씨였지만 그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화살은 정확히 내 앞에 쳐든 시체에 꽂혔고, 슈바르츠한테도 닿지 않았다.
고슴도치가 된 시체를 버린 뒤 창을 치켜들고 돌진한다.
적은 허둥지둥 다음 화살을 활시위에 겨눴지만 서로 마주본 채 시작된 기마 돌격인지라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적이 화살을 날리는 것보다 내 창이 놈들을 썰어버리는 게 더 빨랐다.
전력으로 휘두른 일격에 정면에 있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두 동강난 놈, 손잡이에 맞아서 머리가 박살난 놈, 어중간한게 몸이 찢겨나가서 버둥대고 있는 놈.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져 움직임을 멈춘 한 놈의 목에 창을 꽂아넣고 옆에 있던 기병한테 내던진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코앞에서 화살이 날아왔지만 거리가 가깝다 보니 나도 화살이 아주 잘 보인다.
화살을 붙잡고서 씨익 웃어주니 나를 향해 활을 쏜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무기를 떨어트렸다.
평소 같으면 전의를 잃은 적은 무시할 테지만 이번엔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유감이지만 목을 날려주었다.
슈바르츠의 거구가 적진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피분수를 터트린다.
적들 중 일부는 마차를 지키는 병력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듯했으나 적진의 중심부가 나 하나한테 정신이 팔려있어 제대로 우리 측 아군을 밀어붙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동시에 좌우에서 달려오는 기병 둘, 한쪽을 창으로 꿰뚫고 나머지 하나는 놈의 검을 붙잡아 낙마, 그 상태 그대로 한동안 질질 끌고 다녔다.
땅에 질질 끌리며 몇 번 정도 바위에 부딪혔을 즈음 풀어주었다.
이미 살아있진 못하리라.
거품을 물고서 적 기병 하나가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내 창의 속도가 더 빠르다.
얼굴을 보니 소년이라 부를 수 있을만큼 어렸다.
그러고 보니 오랑캐한테는 병사와 민간인 구분이 없고 일족 전체가 싸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년의 배를 꿰뚫고 창을 휘둘러 내던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말과 사람 10쌍 이상의 시체가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한 번 마차 쪽으로 위치를 옮기려고 속도를 줄이자마자 내 양옆에 달라붙듯이 오랑캐가 검을 뽑아들고서 덤벼들었다.
한쪽은 내가 창을 내리찍어 말과 함께 동강을 내버렸다.
나머지 한놈은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슈바르츠가 갑자기 몸을 틀어 적의 말을 향해 몸통 박치기를 날린 것이다.
적의 말은 비교적 체구가 작은 편이기에 그놈들보다 2배 이상의 몸무게는 나갈 슈바르츠의 몸통 박치기를 맞고서 적병은 그대로 머리 쪽으로 낙마하게 되었다.
저렇게 낙마한 이상 말과 기수 모두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마차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도 유리한 상황이 이어진 덕분에 적들을 거의 몰아내고 있었다.
뒤쪽에서 날뛰어대는 내 고함소리와 아군의 단말마가 귓가에 들린 탓에 공격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적은 일단 마차를 공격하길 포기하고 나를 처리하기 위해 다같이 내게 활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놈들 중 한 사람, 특징적인 투구를 쓴 체구 좋은 남자.
그 남자가 내게 검을 겨누고 나서부터 적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꿨다.
저 녀석이 지휘관이군.
거리는 조금 멀긴 하지만 과연 할 수 있을까?
다같이 내게 활을 쏘기 시작하면 성가시다. 하는 수밖에 없다.
창을 얼굴 뒤쪽으로 빼고, 있는 힘껏 내던진다.
투창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거대한 그것이 굵직한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공중을 맴도는 거대한 창을 곧바로 발견한 지휘관이 방패를 쳐들었다.
곧바로 부하처럼 보이던 남자가 놈을 지키듯이 앞으로 나왔지만……내 창은 그 모든 것을 꿰뚫고서 땅바닥에 처박혔다.
아이가 장난으로 짓뭉갠 벌레처럼 두 남자가 땅바닥에 달라붙은 껌딱지가 되었다.
터져나오는 처절한 비명소리, 즉사 때 들리는 단말마와 다르게 바로 끝나지 않는 목소리가 전장 속에 울려퍼진다.
적들의 동요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
듀얼 크레이터를 뽑아들고서 단전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고함 소리를 내지른 나는 동요하고 있는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차 쪽에서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리지나를 선두로 반격을 개시했다.
검은 말 위에서 다루기엔 사거리가 짧다.
하지만 슈바르츠는 그걸 알고 있는 건지 적들과 아슬아슬한 사거리를 유지하며 내달렸다.
무라도 베어내듯이 목을 날려버리면서 껌딱지가 된 지휘관이 있던 곳까지 도착했다.
지휘관을 잃은 적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 혼란에 빠진 채 후퇴를 시작하는 중이다.
전부 다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 기병도 없이 도망치는 적들을 전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안타깝군.
두 사람을 꿰뚫은 채 박혀있던 창을 손에 붙잡았다.
아무리 튼튼하다고는 해도 남자 두 명이 박혀있는 채 창을 들어올렸다간 휘어질지도 모른다.
놈들의 시체에 발을 걸고 단숨에 뽑아냈다.
“끄아아아아아악!” “끄헥!”
두 명의 비명소리는 참 시끄럽군.
나도 모르게 한 사람한테 검을 꽂아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지휘관 남자 하나뿐이다.
정보를 캐내볼까 싶기도 했지만 오랑캐라는 정보 외에 달리 무슨 정보가 필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이 남자의 목숨을 연명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카라와 똑같은 약을 아무리 많이 쓴다한들 살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그 녀석은……설마 포로로 삼을 생각이십니까?”
도망치는 적들을 몇 명 정도 처리한 세리아가 끝내 놈들을 다 쫓지 못하고 돌아왔다.
물어보면서도 불만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얼굴에 다 드러나는군.
너도 카라가 다친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아 기쁘구나.
“아니, 필요 없다.”
이 녀석이 악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살아남을 수단으로 시도한 약탈이었을지, 달리 이유가 있는 습격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표적으로 삼고 카라를 다치게 만들었다.
운이 없었군.
나는 남자의 얼굴에 다리를 올려두고 힘을 주었다.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이번 전투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부상자들을 짐마차에 태우고 바로 출발한다!!”
병사들도 문제긴 하지만, 무엇보다 카라를 빠르게 도시로 옮겨야만 하는 상황이다.
라펜에는 동방군이 왔을 때 의사도 몇 사람 정도 함께 데려왔다.
이 근방에 있는 마을로 옮기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나은 조치일 것이다.
“카라, 괜찮나?”
“응, 간신히. 배가 뜨겁긴 하지만 말이야.”
카라는 전투 도중 의식을 되찾은 모양이다.
화살을 뽑아낸 세바스찬이 말하길 치명상까진 아니지만 안심할 수 있을만한 부상도 아니라고 한다.
“으―, 아기 낳을 수 있으려나…….”
“자궁 쪽은 빗겨나갔어. 그리고 그까짓 화살보다 훨씬 커다란 게 들어가고 있으니까 문제없지 않겠어?”
“하하, 그렇지. 커~다란 창이 박히고 있기는 해.”
카라가 웃음을 터트리자 주변 여자들도 웃었지만 목소리는 딱딱하게 느껴졌다.
이 부상은 근육을 뚫고 내장까지 닿은 수준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약이 없었더라면 치명상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뜻이다.
“지쳤어……잘래.”
논나의 무릎 베개 위에서 카라가 의식을 잃었다.
깜짝 놀란 논나가 카라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지만 어차피 깨워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라펜에 도착할 때까진 잠자코 재워두는 게 더 낫겠지.
마부 역할은 세바스찬이 원래 있던 마부를 대신해 맡는 중이다.
세바스찬이 더 실력이 좋다고 한다.
“세바스찬. 조심스러우면서 빠르게 가라!”
“알겠습니다.”
모순된 명령에도 불평 하나 하지 않는다.
마차는 속도를 높이고서 라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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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 다음날
“상처가 곪기 전에 약을 쓴 게 좋게 작용했군요. 이거라면 괜찮겠습니다.”
의사가 카라의 부상을 살펴보고 말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장까지 상한 부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동안 식사는 유동식뿐, 2주 정도 지나면 완전히 나을 거라고 한다.
“모처럼 새 집으로 이사왔는데 계속 누워있어야 한다니 진짜 최악이다~.”
“당신이 곧바로 무슨 짓이라도 저질렀다간 영주민들의 불안을 살 거예요. 한동안은 그냥 누워있는 게 딱 좋다구요.”
카라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 논나의 비꼬는 말투도 돌아왔다.
다른 여자들도 그 광경에 쓴웃음을 짓고는 각자 방을 정하고서 짐을 정리하는 중이다.
“있지―나 밥은 어떻게 해―?”
“하인이 가져다줄 거예요. 침대에서 먹으세요.”
“있지―나 화장실은―?”
“거기 있는 요강에다 하세요. 특기잖아요?”
논나와 카라의 시덥잖은 대화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레오폴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고생 많으셨습니다만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사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이지?”
“하드릿 경 일행 분들이 습격당한 건 이번 사태의 일부입니다. 다른 마을에서도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다수 접수되었지요. 산의 민족이 대량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로 판단됩니다. 숫자는 아마 백에서 몇백, 자칫하면 일천 정도로 보입니다.”
드디어 온 건가.
“지금 상황은 어떻지?”
“습격은 동쪽 마을에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치안 유지를 맡고 있는 동방군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긴 합니다만 피해도 발생 중이지요.”
그냥 쫓아내기만 해서는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겠군. 카라 일도 있겠다 전부 다 해치워버리고 싶단 말이지.
“레오폴트, 동방군 전원을 쓰면 놈들을 섬멸할 수 있겠나?”
“사람을 몰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만 놈들의 거점을 박살내고 부족 그 자체의 기능을 섬멸하는 것이라면 가능합니다.”
좋아, 놈들이 먼저 선수를 치긴 했지만 반격도 극적인 느낌이라 나쁘진 않다.
“마을 경비를 맡고 있는 부대에 명령을 내려라. 전 부대, 라펜 집결이다.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도록 해.”
일단은 해충 퇴치부터다.
철저하게 박살을 내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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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0살(세는 나이) 겨울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자작 동방 독립군 사령관 병사 숫자 2000
아크랜드 남동부 영주 사군 70
재산: 금화 5050닢 (5000닢 빚)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거대창
장비: 검은 망토(저주받음) 황금 갑옷(웃음)
가족: 논나(아내) 카라(측실) 멜(측실) 스우(딸) 쿠우 루우 리타(메이드) 세바스찬(집사)
왕도: 멜리사 마리아 미티 알마 크롤 카트린느
하인: 니나
부하: 세리아(부관) 이리지나(사군 지휘관) 레오폴트(독립군 부사령관) 슈바르츠(말) 아돌프(내정관)
경험 인수: 41명
자식: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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