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오랑캐 제압 전쟁③ 산의 천둥』
오랑캐의 대규모 집단을 진창 속에 빠트려 격파한 우리는 패주한 생존자들을 쫓아 그들의 영역까지 군대를 진군시켰다.
뒤를 쫓던 경기병은 그들의 기마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중간에 놓치고 말았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알아냈다.
과거의 습격 규모를 고려해 봤을 때 지난번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익숙지 않은 토지에서 싸우게 되긴 할 테지만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나저나 내 영지가 세상에서 제일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 생각했다만, 여기에는 견주지도 못하겠군.”
끝없이 펼쳐진 황야. 심지어 평탄한 땅도 아니라 군데군데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있고 살짝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다.
“여기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면 대산맥이 나옵니다.”
대륙을 남북으로 가르는 대산맥, 중앙 평원에서 잠시 끊어지는 그 산맥이 여기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다시 나타난다.
그곳의 산 정상은 사람이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일각에선 정상 높이 1만m가 넘을 것이라고 불리는 신의 영역이다.
“대산맥 본체 위에선 아무도 살 수 없으니 말이지요. 산의 민족은 산맥과 연결된 이 황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레오폴트가 강의해 주고 있다.
고맙긴 하다만, 멍청이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라 화도 난다.
이 영지는 불모의 땅이지만 광활하다.
여기서 방향도 제대로 모른 채 놈들을 놓쳤다간 찾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방향만 짐작이 가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들의 생활에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전투뿐 아니라 사냥 및 이동에도 사용되고 성인일 경우엔 한 명당 말 한필은 기본으로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말을 유지하기 위해선 대량의 물과 말먹이풀이 필요하다.
산의 민족의 기술 수준은 낮은 편이기 때문에 짐마차와 도자기 그릇 같은 것들 모두 약탈하는 것 외엔 획득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을 대량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상 그들의 주거지는 결국 수원이나 풀밭을 끼고 있어야 한다.
방향만 알아내면 하천이나 강가를 찾아 따라가면 된다는 뜻이다.
“호오,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레오폴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 특히 그들의 기술 수준이나 한 사람당 말 한 필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너도 모르는 정보였겠지?
“오랑캐 여자랑 잠자리를 가지고서 물어보신 거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세리아한테 딱밤을 먹여 주었다.
완전히 정가운데를 맞아서 이마가 새빨개진 채 신음하는 중이다.
방금 전 전투 때 붙잡은 포로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기 때문에 손만 묶어두고서 100명 정도 되는 병사들을 감시역으로 돌려두고 마을에 두고 왔다.
병사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이라 이제 와서 100명 정도를 아까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포로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침대로 끌고 가는 데 성공했다.
그 여자는 내가 고작 한 번 사정하는 동안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다 두 자릿수 가까이 절정에 도달했다.
산의 민족은 밤기술조차 제대로 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건지, 그냥 그 여자가 단순히 숫처녀였던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 그 여자는 완전히 내게 마음을 사로잡혀 여러가지 정보를 전부 다 털어놔 주었다.
“방법은 어찌 되었건 귀중한 정보입니다. 대단하시군요.”
이렇게 비꼬는 듯한 대단하시군요, 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여자, 저한테 “대장님의 여동생 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봤단 말입니다! 심지어 제가 에이길 님한테는 아내가 세 분이나 있다고 말해줬더니 “네 번째 아내로 추천해 주실 수 없을까요?” 라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산의 민족들 사이에선 강한 남자가 아내를 여러 명 갖는 게 당연하다고 했었지.
그 말은 자기를 아내로 삼아달라고 유혹하는 거였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제 오늘 만난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진 않다.
“안 된다구요, 다음번에야말로 제……가 아니라 닥치는대로 여자를 따먹으셨다간 언젠가 큰 코 다치실 겁니다.”
세리아는 늘 필사적이라 보고 있으면 재밌다.
하지만 요즘엔 이리지나한테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커지는 중이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시덥잖은 대화라도 나누지 않으면 이 영역엔 산 말고 아무것도 있는 게 없다보니 지루함을 달랠 수가 없다.
얼른 놈들을 찾아내고서 토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라펜 주변조차 엄청나게 자극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전방의 강가 근처, 오랑캐의 것으로 보이는 천막들을 발견했습니다.”
전위병의 보고를 듣고서 상황이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기병, 적과 싸우지 말고 후방으로 파고들어라. 놈들은 여자와 아이들 모두 말에 탈 수 있을 거라 판단해라. 포위해 두지 않으면 놓치게 될 거다.”
“궁병 부대를 선두로 세워서 가도록. 놈들은 궁기병이다. 장창으로는 막을 수 없을 테지.”
각 부대는 몇 번의 전투 경험을 통해 저들이 얼마나 성가신 적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숫자가 적다고는 해도 방심하지 않고서 대열을 짜맞춘다.
“전투가 벌어지긴 하려나?”
나는 솔직한 감상을 그렇게 입에 담았다.
“저들의 방식은 미지수이니까 말이지요.”
레오폴트도 마음속으로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적은 우리 쪽을 발견하고서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공격에 대비해 무장하고서 말 위에 올라타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대충 보기엔 기껏해야 100명 정도, 나머지는 노인이나 아주 어린애들뿐이다.
우리 쪽은 숫자가 조금 줄었다고는 해도 사군을 포함하면 약 2000명, 이쯤 되면 전투 성립도 안 되는 수준이다.
병력 숫자를 보여주면 항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아군 창기병이 후방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세리아가 그렇게 보고를 했다.
이제 놈들의 운명은 완전히 끝났다.
“저놈들은 저항할 생각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기병들이 대열을 맞추는 중이군요.”
물론 레오폴트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대열을 맞추기 전에 궁병 부대가 사격을 개시, 놈들이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대부분이 쓰러졌다.
어디, 이제 불이라도 붙여서 내쫓아보실까?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남자가 우리쪽을 향해 뭐라뭐라 큰 소리로 소리치는 중이다.
아무래도 일대일 승부를 신청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대일이라…….”
“안 됩니다! 이미 전황은 기울어진 상태입니다. 이제 와서 위험한 짓을 무릅쓸 필요가 아예 없습니다!”
세리아는 내가 당장에라도 달려갈 거라 생각했는지 날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요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동침한 여자가 준 정보에 따르면 놈들의 지도자는 그들 중 가장 강력한 사람이 맡는 관습이 있고, 그것은 일대일 전투를 통해 결정된다.
지금 소리치고 있는 남자의 복장을 보아 저 녀석이 아마 족장, 혹은 추장쯤 되는 위치일 것이다.
내가 놈을 쓰러트리면 남아있는 적들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서 우리한테 투항할지도 모른다.
“모처럼 찾아낸 우수한 기병들이니까 말이지, 여기서 다 죽이기엔 아까워.”
그리고 여기서 놈들을 다 죽여버렸다간 항복시킨 놈들까지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 알 수 없다.
카라를 다치게 만들긴 했지만 어젯밤 내게 안긴 여자의 얼굴을 봐서 용서해줘야겠군.
세리아의 한숨 소리를 뒤로 하고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결코 그냥 싸우고 싶었던 건 아니다.
“우리 성역을 더럽힌 어리석은 놈들이여! 거룩한 대지와 산의 노여움이 두렵다면 나의 요청에 응하여 신성한 결투를 통해 승부를 내자꾸나!”
“딱히 산이 두렵진 않다만, 결투 신청은 받아주지.”
남자는 언뜻 보기엔 40대 정도, 산의 민족답게 체격이 작은 편이긴 하지만 숱한 전투를 겪은 듯한 외견을 지니고 있었다.
“오오! 용자가 나타났군. 우리의 전투를 거룩한 산께서도 지켜보고 계신다. 자, 싸우자꾸나!”
남자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고 말을 타고 달려와 활을 쏘기 시작했다.
결투에서 활이라니?
그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애초에 저들은 활과 검으로 싸우는 민족, 이런 게 당연한 방식인 것이리라.
게다가 활 자체는 그리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
바로 정면에서 나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 따위는 간단히 간파할 수 있다.
창으로 떨쳐낸 다음 단숨에 거리를 좁혀주지.
남자는 내 커다란 창을 보고서 접근전을 꺼리듯이 거리를 두고서 활로 처리하려는 듯했다.
훌륭한 기마 솜씨로 장해물을 방패 삼아 거리를 유지하려는 중이다.
하지만 내가 한 번 기합을 넣고 슈바르츠의 옆구리를 발로 차니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단순한 계산이다. 놈의 말 속도로는 슈바르츠의 속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슈바르츠는 평범한 군마와 다르게 다리도 두껍고 튼튼하다.
약간의 장해물 따윈 발로 걷어차고서 달려나갈 수 있기에 내 별볼일 없는 기마 실력을 보조하듯이 슈바르츠 스스로가 판단하여 제일 짧은 거리를 달려나간 것이다.
그 대가로 내가 녀석한테 줘야할 건 미녀의 보살핌과 빗질이다.
이걸 해주지 않으면 놈은 금방 삐진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10m로 좁혀졌고, 사내는 더 이상 나를 뿌리치긴 힘들다 판단한 건지 검을 뽑아들었다.
벌목도처럼 생긴 약 1m 정도 길이의 검, 내 무기는 3m 정도 되는 거대 창.
너는 활을 썼으니까 비겁하다고 생각하진 마라.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창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노렸다.
검을 써서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압도적인 완력 차이 때문에 검이 퉁겨 날아가고 팔이 반대로 꺾였다.
“윽!!!”
비명을 터트리기도 전에 내가 창을 휘둘러 목을 날려버렸다.
나이 40살 정도에 몸집도 작은 남자가 일대일 승부에서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이 조용히 제자리에 멈췄다.
“족장은 죽었다! 아직도 싸우겠나!”
나는 주변에 있던 산의 민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움직임을 멈추고서 검과 활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당혹스러워하고 있던 여자들도 내 곁으로 모여들어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무래도 여자가 말했던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민족들의 수장은 내가 된 것이다.
레오폴트가 지시를 내린 건지 동방군 쪽에서도 공격을 멈췄다.
전투는 끝을 맞이했다.
오랑캐……산의 민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복종시키는 형태로.
산의 민족 중 한 사람이 머리를 잃은 족장의 장신구를 벗겨와 내가 있는 곳으로 갖고 왔다.
진짜 바바리안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 저항감이 느껴지지만 원만하게 통치하기 위해선 이걸 입는 게 더 낫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손을 뻗은 그때, 천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게 엎드린 채 장신구를 내밀던 산의 민족 남자가 벼락을 맞고서 완전히 바싹 탄 모습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아직 끝을 맞이하지 않았었다.
최악의 기분이다.
승리를 만끽하려고 한 순간 인간이 통구이가 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으니.
“에이길 님!”
세리아가 허둥지둥 내 쪽으로 달려오려고 했으나, 손짓으로 제지했다.
지금은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벼락 따위 떨어질 리가 없다.
이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악의가 담긴 소행, 그렇다면 세리아를 다치게 만들 순 없다.
“인정 못 한다, 인정 못 한다아!”
땅을 긁는 듯한 목소리.
별로 크지는 않지만 귀에 불쾌감이 남는 목소리였다.
“산을 섬기지 않는 어리석은 민족이 수장 자리를 맡아서는 아니 되는 법. 규칙을 어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은 인정하지 못한다!”
불길하게 장식된 천막, 말이나 양의 두개골……아니라고 믿고 싶긴 하지만 인간의 뼈처럼 보이는 것까지 장식되어 있는 그곳에서 한 명의 인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상 옷이라 부르기 힘든 넝마조각을 잔뜩 걸친 상태라 얼굴은커녕 입 주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안 가는 그 사람은 누더기를 마치 드레스처럼 질질 끌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인정 못하겠다는 건 알겠다만, 일단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은 잠깐 동안 자리에 멈추더니 또다시 불쾌한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들이여. 두려워하라, 경배하라. 이 몸이 바로 거룩한 산의 화신 [도르바가], 벌을 바라는 자만 고개를 들라!”
비명 소리와 함께 산의 민족들이 다같이 땅바닥에 엎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저들은 방금 전까지 족장을 쓰러트린 나한테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지금은 부들부들 떨면서 용서를 구하는 중이었다.
한편 동방군의 병사들은 당연히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르바가가 노성을 터트렸다.
“거룩한 산을 받들지 않는 어리석은 놈들에게 죽음을!”
순간, 놈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에 빛이 내달리더니 병사들 한가운데에서 빛줄기가 터져나왔다.
방금 전보다 몇 배는 커진 굉음, 몇 사람이 순식간에 검댕처럼 타버리고 그 주변에 있던 열 몇 명도 크게 떠밀려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병사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법사인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정령을 다루고 불이나 바람 같은 신기한 힘을 행사하는 놈들을 뜻하는 말이다.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한 능력으로, 대부분은 국가나 대귀족 밑에 들어가 후한 대접을 받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게 될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만큼 정보도 애매하고 부정확한 부분이 많다.
어떤 사람은 마법 같은 건 속임수에 불과하다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방식에 따라선 대군이 움직이는 전장 속에서 승패까지도 좌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마법사라고 해도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크고 별볼일 없는 수준부터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자들까지 있는 모양이다.
과거에 루시가 말해준 얘기로는 대부분의 마술사는 기껏해야 한 명, 두 명을 쓰러트릴 수 있는 정도.
한꺼번에 몇 명이나 쓰러트릴 수 있는 건 우수한 마법사라고 들었다.
거리가 벌어진 적을 단숨에 10명 이상 날려버린,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틀림없이 최상위 마법사다.
“어제 안았던 여자는 이런 게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말이지.”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든지, 그 여자 정도의 신분으로는 알지도 못했던 존재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간 동방군이 전체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당장에라도 지휘관이 화살비를 퍼부으라고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10명을 죽인 이 녀석의 힘은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2000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전 속에서 사망자도 발생할 테고, 간신히 항복시킨 산의 민족들도 다시 봉기를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군.”
창을 고쳐 쥐고서 주변 사람들한테 떨어지라고 신호를 보냈다.
지켜줄 생각은 없지만 내 옆에 있어도 방해될 뿐이니까 말이지.
“네놈도 거룩한 산을 받들지 않을 것이냐!”
“당신이 대단하단 건 알겠다만 이미 전황은 기울었다. 얌전히만 있어주면 목숨은 살려주지.”
항복을 권유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할 심산이었다.
“헛소리 하지마라, 어리석은 놈!”
지팡이에 빛이 모여든다.
나는 단숨에 앞으로 파고들어 놈한테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놈의 지팡이에서 빛이 날아오기 전에 창을 휘둘러 곧바로 빛덩어리를 튕겨내려 하다가,
크게 뒤로 떠밀려 날아갔다.
“크윽…………!”
가슴 깊숙한 곳에서 공기가 빠져나오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휘청거렸다.
전투 도중에 계속 누워 있을 순 없으니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온몸이 마비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다.
확실히 창으로 튕겨낸 줄 알았는데, 마법이란 건 정말 알 수가 없군.
“뭣이! 이 몸의 마법을 맞고서도 어찌 사라지지 않느냐! 네놈, 마물인가?”
“몸에서 이상한 걸 날려대는 네가 훨씬 더 괴상하거든!”
내가 날리는 건 여자한테 보낼 사랑뿐이다.
몸 안에 들어가면 아기가 되는 사랑이긴 하지만 말이야.
“끝이냐? 그럼 다음은 내 차례군.”
폼잡고 있긴 하지만 창을 붙잡고 있는 손이 저려서 생각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잘 보니 손바닥이 완전히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내 몸이 불타지 않았던 건 망토 덕분일지도 모르겠군.
창보다도 훨씬 가벼운 듀얼 크레이터를 뽑아들고서 다시 돌진한다.
주문을 날릴 때마다 한참을 떠들어대던 걸 생각해 보면 빛의 마법은 연속으로 날릴 수 없는 모양이다.
거리는 대략 20m, 돌진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얼마 안 되는 거리이고 놈은 그렇게 재빨리 움직일 수 있는 듯 보이지도 않는다.
검만 닿으면 승부가 날 게 분명하다.
“헛소리! 사라져라, 마물!”
나는 놈한테 다가갔지만 빛은 날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능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검을 치켜든 순간, 놈의 지팡이가 방금 전과는 다른 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벼락 같은 굉음이 아닌, 마치 기름이 튀는 듯한 치직치직대는 소리와 함께 놈을 중심으로 주변에 빛의 벽이 둥글게 쳐졌다.
“아니, 대체 능력이 얼마나 많은 거야?”
빛의 벽이 땅바닥의 풀마저 불태우는 중인 걸로 보아 만졌다간 큰일이 날 게 분명하다.
우리가 움직임을 멈춘 걸 보고 병사가 놈을 향해 보우건을 발사했지만 화살은 빛의 벽에 닿은 순간 불타오르더니 밖으로 튕겨나갔다.
“이걸 만졌다간 또 방금처럼 끔찍한 꼴을 맛보게 생겼군.”
화상을 입은 손바닥이 쑤신다.
망토에서도 타는 냄새가 나는 중이다.
이 망토까지 잃게 됐다간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것밖에 방법이 없군.”
내가 불기둥이라도 쏠 수 있으면 그걸 부딪쳐서 대항해 볼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이 몸뚱이라와 검밖에 없다.
듀얼 크레이터를 위로 크게 치켜들고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거친 고함 소리와 함께 검을 내리쳤다.
이판사판, 논나 가문의 보검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검이 빛의 벽에 맞닿자 부드러운 물건을 억지로 베어낸 듯한 감촉과 방금 전 몸이 불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파직파직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진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도박에서 승리했고, 아름답게 빛나는 보검은 빛에 튕겨나가는 일 없이 반대로 벽을 찢어버렸다.
산의 민족과 동방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벽은 찢겨나간 뒤, 안개가 걷히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뭣이! 거룩한 산의 가호를, 이 몸의 신력을 베어내다니 대체 네놈은!”
“글쎄다, 뭘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다.
벽을 뚫고서 놈한테 다가간다.
놈은 다시 코앞에서 빛 덩어리를 나한테 날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이 검은 이미 빛을 찢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냈다.
더 이상 네 마법은 통하지 않아.
날아오는 빛의 창을 일도양단하고서 놈의 몸통을 발로 걷어찬다.
꼴사납게 뒤집어진 등을 발로 짓밟고 검을 위로 쳐들었다.
뒤쪽에서 폭발음이 두 번 들린다.
베어낸 마법이 뒤쪽으로 날아간 모양이다.
운 나쁜 병사는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을 원망해 줬으면 하는군.
“그, 그만! 나를 죽였다간 천벌이! 천벌이 내려올 거다! 산사태가! 눈사태가!!”
순식간에 이 녀석에 대한 흥미가 식었다.
이 녀석은 산의 신령 같은 것도 뭣도 아니다.
그냥 조금 강력한 마법사일 뿐, 그저 그걸로 산의 민족들을 겁주고 있었을 뿐이다.
자기가 내세우던 마법이 격파당하자 허둥지둥, 죽음의 구렁텅이가 눈앞에 닥치니 목숨을 구걸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네가 보여준 곡예, 대단하긴 하더군. 그럼 잘 가라.”
채소 꼭지를 떼어내듯이 놈의 목이 몸통에서 떨어져나갔다.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산을 가득 채운다.
동방군 병사들은 다같이 두 손을 들어올리고서 나를 칭송하고 있었다.
“고르도니아 최강의 기사!” “마법도 상대가 안 되는구만!” “무적의 대장님을 칭송해라!” “최강의 호색한!”
마지막 녀석은 나중에 벌을 주기로 하고, 환호성 자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번엔 생각보다 위험했다.
손이랑 온몸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고, 무엇보다 망토가 신경 쓰이는데……불타서 넝마덩이가 된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한편 산의 민족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녀석이 죽으면서 복종할 대상이 나 하나만 남은 건지, 또다시 내 주변에 모여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났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와 전투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온 세리아에게 치료를 상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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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를 하니 이렇게 다치시지 않았습니까!”
전후 처리는 레오폴트한테 맡겨두고 세리아의 치료를 받는다.
손의 화상이 가장 심하긴 하지만, 그곳 말고도 분명 갑옷을 입었던 부분이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정말로 벼락에 맞은 것 같군.”
나는 용병 시절에 운 나쁘게도 벼락에 맞은 놈을 본 적이 있는데, 딱 그 상처가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 녀석은 온몸이 불타서 금방 죽었지만.
“병사들이 새까맣게 타버린 걸 보지 않았습니까! 대체 왜 무리를 하시는 겁니까!?”
창으로 튕겨낼 수 있을 줄 알아서 그런 거였는데, 세리아가 바라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미안하다. 걱정했겠구나.”
눈물을 글썽이는 세리아를 끌어안고서 상냥하게 말했다.
세리아가 얌전해진 걸로 봐서 이게 정답이군.
참고로 이리지나는 약을 잔뜩 써서 펴바르길래 출입금지 시켜두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망토는…….
“상당히 많이 불타서 구멍이 뚫렸군요. 아예 새로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
“에이길 님? 수선을 하기에도 본 적 없는 재료를 쓴 것 같으니,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세리아, 더 이상 말하지 말거라.”
내 생각보다 목소리가 차갑게 나오고 말았다.
약을 발라주던 손이 멈췄다.
“죄, 죄송……합니다.”
세리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치료해 주고 있는 세리아한테 미안한 짓을 해버리긴 했지만, 이것만큼은 가만 둘 수 없다.
이 망토를 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한 세리아를 쓰다듬으면서 망토의 냄새를 맡았다.
타는 냄새 사이에서 그리운 그 오두막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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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민족들은 좀 어떻지?”
“진정된 상태입니다. 도망을 시도하는 자들도 없습니다.”
레오폴트와 전후 처리에 관해서 얘기를 나눈다.
산의 민족은 매번 결투를 통해 족장을 결정하다 보니 내가 지난 족장을 죽였다고 해서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게 분쟁의 화근이 될 일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귀찮은 건 그들의 통치 체제다.
그들은 족장을 절대적인 존재로 두고 그 명령에 따라 각 일족들의 장이 움직인다.
다시 말해 완전히 중앙 집권 체제라는 뜻이다.
유일하게 족장한테 의견을 내세울 수 있는 게 주술사인데, 이쪽은 내가 죽여버렸기 때문에 담당자가 없다.
내가 이들의 장이 되어버린 이상, 내가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정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걸 가르쳐 준 것이 내 옆에 앉아있는 소녀다.
이름은 [피피]라고 하는데, 전 족장의 딸이지만 20명이나 있던 아내의 자식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딱히 느끼는 점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피피 넌 나한테 협력해 줄 생각이냐?”
“족장님한테 협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한다. 족장님을 따라서 어디든 간다.”
그 말투에 망설임은 없었다.
듣기로는 초원의 민족(산의 민족이 아닌 다른 인간을 뜻하는 듯하다)이 족장이 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자신들에 대해서 알아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동시에 힘이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산의 민족들 사이에선 전 족장을 단칼에 베어낸 나를 위대한 남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나의 환심도 사고 싶어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어떤 남자든지 기뻐하는 선물, 다시 말해 미녀를 선물하겠다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미녀라고 하기에 피피는 아직 어리지만 본인이 말하기엔 이렇다.
“피피 정도 되는 나이의 여자를 자기 색으로 물들이는 걸 남자는 기뻐한다고 들었다.”
“피피는 몸이 작으니까 남자가 지배할 수 있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서 기뻐한다.”
제법 문화가 다른 모양이다.
싫지는 않지만 말이야.
아무튼 우리는 갖고 있는 산의 민족 정보가 적기 때문에 피피가 나를 따라와 준다면야 이들을 지배하기도 쉬워진다. 사양 않고 받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물러나면 저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피피의 표정이 어두웠다.
“모르겠다. 초원으로 간 자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는 사냥하는 것도 힘들다. 아이를 잔뜩 만들어서 숫자를 늘리고 사냥할 수 없는 약한 사람은 솎아낼 수밖에 없다.”
확실히 인구 수가 많지 않은 그들 입장에서 1000명이 넘는 건장한 인원의 손실은 크나큰 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산의 민족 생존자는 현재 포로로 남아있다.
“그에 관해서는 일족의 장들이라고 했나? 그 사람들한테 전해 둬라.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중 절반 정도는 붙잡긴 했지만 죽이진 않았다고.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돌려보내주지.”
피피의 눈이 크게 치켜뜨였다.
“절반 돌아오면 괜찮다! 역시 위대한 족장님! 장들한테 알리고 오겠다!”
서둘러 달려나가는 모습은 아직 한참 어린애 같아서 사랑스럽다.
귀여운 딸이 하나 생긴 듯한 기분이군.
"………….”
세리아가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입지가 빼앗기는 건 아닐지 경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거라. 너는 여전히 내 귀여운 세리아거든.”
세리아의 표정이 헤죽거리며 풀어졌다.
“족장님! 장들도 기뻐하며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위대한 족장님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가 세 명인 건 너무 적다. 마음대로 20명 정도 골라서 데려가도 좋다고 말했다.”
세리아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산의 민족과의 전쟁은 내가 그들을 흡수하는 형태로 끝을 맞이했다.
그들에겐 계약서나 조약 같은 문화가 없고, 애초에 종이도 없다.
그저 산이 보이는 장소에 모여 내 앞에서 일족의 장들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
이것이 충성의 의식이라고 한다.
나는 포로를 풀어줄 것을 약속하고 그들과의 교섭 역할 겸 선물인 피피를 데리고서 라펜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아직 어린데 안았다간 안 된다구요.”
“어째서냐? 피피는 이미 여자다. 위대한 족장님의 아기를 갖고 싶다.”
“당신은 에이길 님의 물건을 보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작은 몸으로는 무리라구요.”
“무엇을 보지 못한 것이냐?”
“응? 당연히 그거 아니겠나? 하드릿 경의 커다란 자, 아야!”
이리지나의 머리를 때려서 조용히 하도록 시켰다.
교섭역 느낌이긴 하지만 또 여자가 늘어나고 말았다.
“으으, 또 여자가 늘어났습니다. 다른 분들한테 뭐라고 설명하면 될지…….”
“뭐 어때. 피피는 사자 같은 거잖냐.”
세리아는 그럼에도 납득하지 못했다.
“아뇨! 금방 따먹으실 게 뻔합니다. 게다가 어제 모르는 여자 두 사람을 데리고 오셨죠!? 아침에 보니까 시트에 붉은 선혈이 두 개나 있었는데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일족의 장, 그 중 두 명이 자기 딸한테 위대한 족장의 씨앗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게다가 미인이었다 보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난리법석을 피우는 세리아를 억누르면서 이리지나의 추궁을 회피한다.
불탄 망토, 부러진 창, 루시의 선물이 점차 망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조금씩 이 순간이 중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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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0살 여름(세는 나이)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자작 동방 독립군 사령관 병사 숫자 1900
아크랜드 남동부 영주 사군 120
재산: 금화 5050닢 (5000닢 빚)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거대창
장비: 검은 망토(저주받음) 황금 갑옷(웃음)
가족: 논나(아내) 카라(측실) 멜(측실) 스우(딸) 쿠우 루우 리타(메이드) 세바스찬(집사)
왕도: 멜리사 마리아 미티 알마 크롤 카트린느
하인: 니나
부하: 세리아(부관) 이리지나(사군 지휘관) 피피(산의 민족) 레오폴트(독립군 부사령관) 슈바르츠(말) 아돌프(내정관)
경험 인수: 44명
자식: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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