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집 찾기』
아침부터 다같이 쇼핑을 하러 나왔다.
“에이길 님께서 귀족이 되셨으니, 그에 걸맞은 것들을 갖춰야만 해요! 집, 옷, 가구, 그리고 하인! 필요한 게 끝도 없다구요!”
그리고 가장 흥분한 게 논나다.
“집은 큰 게 좋지만 나머진 적당히 골라도 되잖아. 그것보다 맛있는 거라도 먹자구―.”
“조용히 하세요! 그랬다간 서민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다구요. 에이길 님께서 웃음거리로 전락해도 당신은 괜찮다는 건가요!? ……다행히 돈은 아주 많이 있어요. 자, 출발합시다.”
“가구랑 옷은 알겠는데요, 하인 없이도 전 집안일 할 수 있는데요?”
마리아는 여관에 있을 때에도 방 청소를 빼먹지 않았다.
요리, 빨래, 부엌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고 한다.
“일단은 옷이랑 집부터 사야겠어. 나머진 차차 사면 돼.”
논나는 분명 원래 가문의 완성된 귀족집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나는 이제 막 출세한 반 귀족,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럼 일단 옷부터 사시죠. 카라! 당신도 일단 애첩이니까 천박한 옷은 입으면 안 돼요! 특히 멜리사 씨는 너무 몸을 드러내고 계세요. 그런 건 밤에 그, 정도면 충분해요.”
너무 지나친 논나의 모습에 나를 포함하여 모든 여자들이 조금 거북해하고 있었다.
카라가 “잔소리 심한 아줌마 같아.” 리고 중얼거리자 귀가 무지하게 밝은 논나가 곧장 한 소리 하려고 하길래 엉덩이를 툭 하고 때려 주었다.
“윽!” “히익!”
내가 준 벌이 아주 효과적이었던 덕분에 쇼핑의 평화는 지켜낼 수 있었다.
논나와 마리아는 평소부터 마을을 산책했던 모양인지 곧장 목표를 지정해 가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화려한 고급 상점까진 아니지만 유복한 시민이나 계급이 낮은 귀족을 위해 맞춤용 옷을 만들어 주는 가게로 사용하는 천도 품질이 꽤나 훌륭하고 실력도 확실하다고 한다.
“일단은 다들 입을 정장하고 에이길 님의 옷은 정장, 외출용, 실내용 이렇게 해서 최소 세 벌은 사고 싶네요.”
“정장은 그렇다 쳐도, 외출용이랑 실내용 옷까지 새로 살 필요가 있는 건가?”
“있습니다. 친한 귀족 분한테서 무도회 초청을 받았는데 정장이나 평상복 차림으로 가실 건가요? 그 분께서 우리 집으로 오신다 하셔도 마찬가지예요. 최소한 세 벌, 웬만하면 종류도 늘려놔야 해요, 안 그랬다간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맨 처음엔 논나의 독무대였으나 다른 여자들도 원래부터 옷에는 흥미가 있었는지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어떻느니 저건 어떻느니 하면서 자기 옷들은 물론이고 내 옷까지 골라대기 시작해서 귀찮아진 나는 전부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여자들은 정장과 손님이 찾아왔을 때 입을 실내복 각각 두 벌, 나는 정장, 외출용, 실내용, 그리고 예비 복장 4벌까지 해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옷을 사게 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되도록 빠르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만 양이 워낙 많다보니 어느 정도 시간이…….”
“그럼 에이길 님의 복장부터 먼저 부탁드릴게요. 여자들 물건은 정장부터 차례대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하드릿 님이라 하셨지요, 완성된 물건부터 보내드릴까 합니다만.”
“아뇨, 제가 받으러 오겠어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아직 집이 없으니까.
“? 그,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죄송하지만 대금을……금화 50닢입니다만 상품을 교환하시겠습니까?”
“아니, 지금 내지.”
금화를 건네주자 종업원이 정중한 모양새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있잖아, 옷에 금화 50닢이나 쓰는 게 말이나 돼? 가격도 안 적혀 있던데.”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가게들은 옷을 완성할 때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성품과 다르게 가격표를 적어두지 않는 법이에요.”
“나 뭔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어, 가격이 엄청나아…….”
“응……나도 분위기 타서 마구잡이로 산 것 같은데 에이길 씨 화 안 났겠지?”
“저, 저는 사용하는 천도 적으니까 다른 분들보단 나을 겁니다!”
아마 값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내 정장이랑 논나의 드레스일 텐데.
다른 옷은 삼베나 양털을 사용했는데 나와 논나는 비단을 사용한 물건이다.
그녀의 시커먼 부분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금화 50닢이라 하면 이곳 왕도에서도 평균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평민 가족이 5년 넘게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다.
상류 귀족을 상대로 거래를 하지 않는 이상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다.
이 가게는 그 정도로 고급 가게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가게 주인뿐만 아니라 종업원까지 전부 모여서 고개를 숙이곤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산 물건 중에 그 정도로 비싼 물건은 없었을 텐데, 옷을 몇 십벌이나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라고 논나는 변명했다.
“이번에 사면서 느낀 건데 일단 집부터 사야 여러모로 편할 것 같더라.”
집도 없는 귀족이 쇼핑을 하다니, 대체 이 무슨 웃긴 소리란 말인가?
“그러게요. 일단 집부터 찾아볼까요?”
집을 산다고 해도 지금부터 짓는 것과 중고로 된 물건을 사는 것 등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이번엔 아예 처음부터 짓기엔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중고 중에서 좋은 물건을 찾는 수밖에 없겠군.
“집에 대해선 저도 거의 아는 게 없는지라…….”
논나 말고도 이 안에서 집을 거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일반적인 방법으로 가는 게 맞겠지.
“어서 오십시오. 전 왕도에서 주택과 토지 매매를 맡고 있는 [밀더]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하드릿이다. 중고 주택을 사고 싶은데. 되도록 물건이 크면 좋겠어.”
그것 말고도 말 몇 필 정도 보관이 가능한 마구간과 목욕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러가지 희망사항을 추가했다.
“그렇군요, 예산은 어찌 되시는지?”
“어디 보자, 금화 천 “금화 800닢이에요!”
논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구를 산다고 했었지.
“800닢이라면 대규모 저택을 사기엔 조금 부족합니다만…….”
안 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려던 순간 밀더가 다시 말을 이어붙였다.
“하지만 하드릿 님께선 지난번 반란 소동에서 큰 무공을 올리셨던 분! 특별히 값싼 물건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상인이라 그런지 정보가 빠르다.
일단 물건을 봐 달라는 말과 함께 내 등을 떠밀듯이 밀더는 현장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소는 시내 중심부 부근, 급 낮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이 모여있는 구획이었다.
“우와! 넓네요~. 부엌만 해도 우리 여관 객실보다 넓어요!”
“대단하다!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니 믿기질 않아―.”
평소엔 별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 마리아와 멜리사가 웬일로 흥분해 있었다.
멜리사는 집이라는 것에 남보다 배는 더 애착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회가 된다면 침대 안에서 한 번 물어보도록 할까.
“마구간도 꽤 크더라. 저 정도라면 슈바르츠 말고도 2마리는 더 들어갈 것 같아.”
“실내도 넓은 게 멋진 가구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담장도 높고 단단합니다. 경계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다들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목욕탕 상태는 어떻지?”
“예 물론, 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판매 특징이니 아주 훌륭한 상태입니다.”
그가 보여 준 목욕탕은 확실히 방 하나 정도 수준이라 해도 될만큼 컸고 욕조 안에도 다섯 명은 들어갈 수 있어 보였다.
“이 사이즈의 욕조는 귀족 분들의 저택에서도 보기 힘든 물건인지라…….”
욕조는 원래 기호품이기 때문에 귀족 저택이라 한들 반드시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심지어 이렇게 몇 사람이나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욕조의 경우,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물건이다.
“이쪽 욕조는 외부 우물에서 물을 퍼울린 다음 이쪽 부뚜막으로~.”
쉽게 말해 우물에서 물을 바깥에 있는 부뚜막까지 잔뜩 퍼올린 다음 적절한 온도로 달아오르면 안쪽에서 꼭지를 뽑아 욕조에 넣는다는 소리군.
우리가 직접 했다간 집 바깥과 안쪽을 계속 들락날락해야 할 테니 하인을 고용해서 시키는 걸 전제로 한 구조겠어.
“이만한 넓이에 건물과 외벽도 튼튼한 상태, 게다가 대형 욕조까지 붙어있는만큼 금화 800닢은 상당히 싼 가격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들 그 말을 듣고 납득하고 있었으나, 세리아는 혼자서 묵묵히 밀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는 서류가 계약서이니 사인만 해 주신다면 당장에라도 권리서를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뭘 그리 서두르는 건지, 언뜻 보기엔 초조해 보이는 듯한 그 태도에 살짝 불안한 무언가가 느껴져 계약서를 확인해 보았으나 가격과 저택 장소는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이래서야 딱히 뭐 속일 수도 없겠네 싶어서 사인을 하려고 한 찰나, 세리아가 내 손을 붙들었다.
“에이길 님, 이 남자 이상합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로 말하는 세리아.
“조금 수상쩍긴 하다만 계약서에 잘못된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뇨, 무조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동산 계약에 대해 아는 건 없습니다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확실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확인해 봐서 나쁠 거 없지.
나는 계약서를 다른 사람들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천천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밀더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분명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무,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사인을 하기 전에 확인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이쯤 되니 나도 수상쩍은 부분이 확실히 느껴졌다.
다른 여자들도 불온한 분위기를 느낀 건지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곤 계약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내 멜리사가 무언가를 찾아냈다.
“이거! 토지 임대료가 매달 금화 100닢이라고 적혀 있어!”
여자들은 전부 작은 비명소리를 내질렀고, 밀더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집이 800닢, 토지가 1달에 100닢이라……상당히 비싼 임대료로군.”
“그, 그것은 이만한 집을 이런 싼 가격에 팔아넘기는 것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그럼 이런 식으로 판매해도 되는 것이냐고 동업자들한테 물어봐도 되나?”
밀더는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죠! 하지만 신(新)귀족님들께는 원한을 품은 이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외출은 삼가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유치한 도발이지만 일부러 받아들이기로 했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그런데 바로 그 신귀족이 얼마 전 전투에서 근위병을 20명 정도 베어넘겼다만, 그보다 더한 무법자가 있을 것 같은가?”
세리아의 허리춤에는 강철검이 매달려 있었다.
혀 한 번 까딱 잘못 놀렸다간 1초 뒤에는 목이 남아나 있지 않을 것이다.
“저, 저는 범법 행위는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조건에 관해서도 계약서에 적혀있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네가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하진 않았어. 다만 원체 시골 출신이라 이런 거래에는 어두워서 말이야. 다음번에 폐하를 뵙게 될 때 슬쩍 화젯거리로나마 삼아볼까 싶은데. 도시 안에서 집을 사는 건 어렵더군요……라고 말이지.”
폐하와 만날 예정도 없고, 만난다 한들 그런 시덥잖은 소리를 나눌 시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폐하의 주목을 받은 신귀족 중 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효과는 발군일 것이다.
실제로 밀더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딱히 악덕 부동산 가게주를 처벌할 생각도 개심시킬 생각도 없었다.
“토지 임대료 부분은 기재 실수일 테니 고쳐놓도록. 그리고 이 집은 이미 지어진 지 좀 시간이 흘렀던데. 조금 더 수리해 준다면 금화 80 “700닢!” ……700닢에 사는 데에 별 말 않기로 하지.”
밀더에겐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금화 700닢 정도라면 수선비를 포함해도 거의 손해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속이려고 한 대가 치고는 너무 가벼운 수준이다.
그리고 논나는 별로 돈에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통해 상당히 인상이 바뀌었다.
고급 귀족의 혈통이 들끓어서 나중에 낭비벽이 생긴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밀더는 침통한 듯한, 그러면서도 안심한 듯한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계약서를 수정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논나와 멜리사, 마리아가 몇 번이나 체크한 다음 사인을 끝마쳤다.
“얼떨결에 싸게 샀네.”
“하마터면 사기에 당할 뻔 했다구요!”
“무서웠어어…….”
“……나도 저런 방식으로 팔린 걸지도…….”
“글만 읽을 수 있다면……저라도…….”
수선 공사 기간 때문에 입주까진 조금 더 시간이 걸릴 테지만 아무튼 집은 마련됐다.
이제 남은 건 적당한 가구들인데, 논나의 눈이 의욕적으로 불타고 있는 걸로 봐서 맡겨두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어차피 나한텐 장인이 만든 소파나 통나무 그루터기나 거기서 거기니까.
결국 내가 세리아와 가구 직공 가게에서 차와 차과자로 배를 차우던 사이 나머지 여자들은 금화 50닢 정도를 사용하여 다양한 가구를 샀다.
논나가 식탁을 금화 100닢 정도 되는 비싼 물건으로 사려던 걸 카라와 마리아가 결사 반대해서 막아냈다.
“좋은 가구를 들여놓는 건 우수한 귀족의 본보기라구요. 이 정도면 그렇게 비싼 건 아닌데…….”
“미친 거 아냐!? 금화 100닢 테이블이라니 미친 게 틀림없어! 금화 5닢 가격의 소파만 해도 이해가 안 가는데.”
“제 생각에도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멀쩡히 만들어진 물건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테이블이 나랑 같은 가격이라니……맨 처음 팔렸을 땐 10닢이니까 이 장롱이랑 똑같단 거잖아……하하…….”
카라 말고도 다른 사람들까지 반대하기 시작하자 논나도 어쩔 수 없이 타협한 모양이다.
가구는 전부 직공이 직접 만들 예정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다음은 식기예요. 식기만큼은 정말 귀족의 본보기, 타협할 수 없어요!”
출신내기 기사작 가문과 전통의 백작 가문을 동일 선상에 둬도 안 될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귀족에서 노예로, 단숨에 최하층까지 굴러떨어지면서 여러모로 힘든 경험을 많이 했나보군.
다행히 아직 돈도 있겠다 원하는대로 해줘야지.
카라와 마리아가 폭주하는 논나를 억제하기 위해 쫓아나갔다.
서민 수준의 금전 감각을 지닌 두 사람이 있으니 펑펑 써대긴 힘들겠지.
“문제는 하인이네요.”
세리아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대로다. 물건은 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고르는 게 가장 어렵다.
다행히 나를 제외하면 전부 여자만 사는 집이고, 집안일을 좋아하는 마리아가 있으니 청소와 빨래, 요리는 문제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목욕탕 물 채우기와 불 때는 일까지 맡기기엔 내 마음이 불편하고, 논나도 하인이 없는 저택에 만족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여자들한테 맡길 수 없는 힘 쓰는 일을 시키려면 결국 남자를 집에 불러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만약 여자들한테 손을 댔다간 쓸데없는 피가 흐르게 될 테고, 애초에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집 안에 들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인을 고용할 땐 어떻게 하지?”
은으로 된 식기를 둘러보며 소란을 피우고 있던 논나한테 물어보았다.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몰라서…….”
그럴만도 하지. 귀족 아가씨가 하인을 어떻게 고용하는지 알 리가 없다.
“그게, 저희 집에 있었던 *가령(家令)은 제 기억이 맞다면 서자 가문 출신의 차남이었던 것 같은데……으음, 집사는 기사작 가문의…….”
(*가령: 대갓집에 딸려, 그 집의 고용인을 지휘·감독하고 가사 일체를 관리하는 사람)
귀족 가문 출신의 고귀한 하인에 관해선 들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테지만, 아무튼 논나 입장에선 일반 하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사실상 없던 걸로 보인다.
“보통 친분 있는 가문의 혈연 쪽에서 고른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
멜리사가 슬쩍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집도 그렇게 큰 집은 아니었지만, 상인 집안이라 몇 사람 정도 있었으니까……귀족 가문 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가 됐든 상관없다.
하지만 혈연이라 해봤자 내가 알고 있는 건 브루노와 에이리히 대장, 남은 건 안드레이 정도인데.
돌격대 인원들의 지인을 고용할 바에야 도적단한테 부탁하는 게 더 나을 지경이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거군.”
우리는 브루노의 집을 방문해 있었다.
브루노는 지금 잠시 집을 빌려 살고 있는 중이고, 우리보다 더 차분하게 집을 찾고 있다고 한다.
“에이길……아니, 하드릿 경이라 불러야 하려나?”
브루노를 포함하여 각 대장들도 기사작을 받아 신귀족이 되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왕도 안에 거처를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성씨는 [랜스터]로, 예전에 살았던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적인 장소에선 그럴 필요없소, 랜스터 경.”
농담하듯이 그렇게 말하자 그러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에이리히……경은 우리보다 더 높은 준남작 작위를 받았어. 게다가 국군 증강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 하인 운운할 상황이 아니지.”
“그렇다면 역시 너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유감스럽지만, 라는 말과 함께 브루노는 손을 들었다.
“나도 1년 전에 여길 막 온 신참이라고? 게다가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용병단 소속이었던지라 신뢰할만한 지인이라 해도 아는 게 거의 없단 말이지. 그나마 간신히…….”
뒤쪽에서 20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엄청난 미인이라 표현할만한 여자는 아니지만 얌전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배가 불러있는 모습이 그 안에 아이가 있다는 걸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마리인데, 이 사람과 그녀의 가족은 신뢰할 수 있어. 나중에 집을 사고 나면 여동생이나 남동생한테 도움을 받을 생각인데 말이야.”
브루노가 마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자 마리도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결국엔 또 가족 관련이로군. 둘이 꽁냥대는 모습에 나도 카라 가랑이 사이에 손이라도 집어넣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한 순간 떠올랐다. 하지만 진짜로 발정 나서 내게 달려들었다간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 그만두기로 했다.
“이번엔 못 도와주겠지만 서로 아군도 없는 몇 안 되는 신귀족 사이잖나.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뭐든지 상담해도 좋아.”
그 말에 이견은 없다.
브루노는 상당히 멋진 남자고 역량도 훌륭하다.
하지만 이제 결국 남은 건 안드레이……로리콘 댄디 사나이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인이라……확실히 어렵군.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들 중에도 돈을 들고 도망치는 녀석이 있긴 했으니까 말이야.”
나는 평소처럼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술을 나눠 마시면서 안드레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관심없다만, 네 집에 들일 여자들은 전부 미녀들뿐이니까 말이야. 남자를 고용하는 건 위험하지. 나는 관심없다만.”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지.”
훗, 하고 안드레이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기둥 뒤쪽에서 평소의 그 종업원이 얼굴을 붉히는 중인데.
“맡길 일 중에 좀 어려운 게 있나?”
“우물에서 목욕용 물 퍼올리기, 장작 패기를 시킬 생각이다. 나머지는 청소랑 빨래 정도.”
마리아가 집안일을 할 생각인 듯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게 편할 것이다.
“물 퍼올리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그래,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군. 따라와라.”
안드레이가 간 곳은 석재 건물, 사이즈는 크지만 상당히 낡은 걸로 보아 귀족이나 부자가 사는 집은 아닌 듯했다.
입구를 청소 중인 여자한테 안드레이가 말을 건넸다.
“올레리아, 잘 지내냐?”
“안드레이 씨! 늘 감사합니다!”
올레리아라 불린 흑발 여자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자는 이제 소녀라 부르기에 힘든 나이긴 했으나 무척이나 키가 작고 몸매도 가냘팠다.
나를 포함하여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안드레이 쪽으로 쏠렸다.
안드레이의 성적 취향에 관해선 이미 다들 예전에 나를 통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조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도로테아 있나?”
“네. 어머니는 지금 안뜰에 계실 거예요. ……뒤에 계신 분들도?”
“그래, 이 사람들은 괜찮아. 내 지인이거든.”
소녀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건지 빗자루를 내던지고 안드레이한테 달라붙었다. 그 태도는 남자라기보단 상냥한 아버지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뜰……은 원래 용도인 관상용 정원이 아니라 각종 식물을 심어서 기르는 간이 텃밭 같은 느낌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정원 가운데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주변에는 작은 아이들이 잔뜩 무리지어 있었다.
“어머, 안드레이. 오늘은 어쩐 일이야? 이렇게 많은 분들이랑 같이 와서는.”
“안드레이―!” “아저씨!” “근육―!”
아이들이 다같이 안드레이한테 달라붙었다.
여자의 나이는 40 정도 되어보이는 외모에 작은 체격과 야윈 손과 얼굴이 인상적인 느낌이었다.
논나는 그녀의 야윈 신체를 보고 깜짝 놀란 것처럼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도로테아, 너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거 아니냐?”
“후후, 아이들이 굶지만 않으면 돼. 게다가 곧 있으면 고구마도 캘 수 있을 테니까 괜찮아.”
안드레이는 술집에서 갖고 온 삶은 고구마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으나 도로테아는 그것을 바로 옆에 있던 아이한테 넘겨주었다.
“에이길……혹시 여긴…….”
이쯤 되니 나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오갈 데 없는 아이, 버림받은 아이를 데려와 길러주는 고아원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장소가 좀 별로네요. 여러분, 이쪽으로 와주시죠. 너희들은 놀고 있으렴, 밭은 밟으면 안 된단다!”
아이들은 우리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술래잡기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는 건물 안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너덜너덜한 모양새로 보아 식사할 때에도 꽤나 불편해 보인다.
“여긴 원래 몰락한 상인의 저택을 싸게 넘겨받은 건물인데요, 아무래도 제대로 된 수리도 못하다 보니 이렇게 낡았답니다.”
누추해서 죄송하네요, 라 말하며 웃는 도로테아의 야윈 얼굴은 그 모양새와 정반대로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원래 상인의 딸이었는데 도시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이 고아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안드레이는 고아원에 종종 식량을 나눠주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이 녀석은 이번에 국왕 서거 사건 때 한 자리 꿰찬 신귀족이거든.”
“어머! 귀족님이셨군요, 이런 결례를…….”
“그런 건 신경 안 쓴다고 해.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이번에 왕도에 집을 샀다고 하는데, 하인을 찾는 과정에서 생판 남한테 일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라 하더라고.”
“그래서……우리 아이들한테 맡기겠다는 건가요?”
도로테아의 시선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래, 귀족집의 하인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도 나오고 거기서 재워주니까 말이야. 너도 조금은 편해지겠다 싶었다 이거지.”
“우리 아이들은 착한 아이들이긴 하지만 귀족 저택에서 일할 수 있을만큼 예절 교육이 잘 된 있는 아이는 없는데요?”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나도 예절 같은 거 모르거든. 신경 쓰는 건 논나……저기 저 가슴 큰 여자 하나뿐이다.”
“앗!”
“어머, 그럼……무슨 일을 시키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물 퍼오기랑 불 때우기, 나머지는 집안일 도우미 정도가 되겠군.”
도로테아는 별로 내키지 않은 듯했다.
하인으로 일하러 나간 아이들이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나 성노예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걱정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도로테아, 나는 이 녀석하고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어. 네가 걱정할만한 일은 없을 거다.”
“안드레이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리고 한 번 보라고, 이 녀석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이 불행해 보이나?”
“행복해~.” ”나도 그래.” “밤에는 커다란 자 ”조용히 하세요 변태!” “저는 종자입니다!”
도로테아의 표정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 나도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들은 행복해 보여. 그럼 몇 사람 정도 들이실 예정이신가요?”
“일단은 3명 정도. 물을 퍼올리는 일은 꽤 힘드니까 너무 어린 아이한테는 힘에 부칠 거다. 잠잘 곳이랑 식사는 이쪽에서 준비하지.”
“그렇다면……올레리아, [크롤] [미티] [알마]를 불러 와주렴.”
얼마 니자니 않아 소년 한 명과 소녀 두 명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크롤이다! ……입니다.”
“미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알마……예요……잘 부탁해요.”
크롤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센 척을 하고 있긴 했으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미티는 제일 나이가 많은 아이라 차분해 보인다.
그리고 미티의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소녀가 알마, 이 중에서 가장 체구가 작은 데다가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었다.
“크롤은 12살, 조금 건방지긴 합니다만 체력은 꽤 튼튼한 편이에요. 미티는 14살이라 이 중에선 제일 나이가 많고,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지 잘 해요. 알마는 11살이에요. 조금 겁이 많긴 하지만……재봉을 아주 잘 한답니다.”
“잘 부탁한다.”
나는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미티 말고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긴장한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운을 북돋아주려는지 안드레이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도로테아한테 신세 졌잖냐. 할 수 있는만큼 일해서 부담 좀 줄여줘야지. 특히 크롤, 넌 남자 아니냐. 열심히 하라고.”
“으, 응! 당연하지 하나도 안 무섭거든!”
크롤은 내 손을 힘껏 잡으며 악수를 했다.
그래, 이 정도 기합은 있어야 좋지.
알마도 후들후들 떨면서 내게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말없이 미티 뒤쪽으로 돌아갔다.
“우리집에서 일하게 된다 해도 결국엔 왕도 안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여기 돌아오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을 거다.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또 돌아올 수 있는 이야기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직 나이가 어린 이 아이들이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도로테아가 어머니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 자세한 건 일단 나중에 얘기해 주지. 지금은 집을 수리하는 중이라서 말이야, 그게 끝나면 또 얘기하러 오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스터. 이걸로 여기 사람들한테 뭐 좀 먹여줘. 특히 도로테아는 잘 먹으면 좋은 여자가 될 것 같거든.”
슬쩍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건네주자 안드레이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애들이 제법 잘 따르던데. 마스터한테 자선 활동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이 사람은 그저 불쌍한 아이들과 헌신적인 여성의 모습에 마음이 이끌려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그 숭고한 마음을 불순한 망상으로 더럽혀선 안 된다.
“유녀……아니, 아이들이 굶어죽는 건 참을 수 없지. 그것뿐이다.”
듣지 못했던 걸로 하자.
“가끔씩 여길 오면 말이지……나한테 달라붙거든. 유녀……아니, 아이들이.”
이쯤 되니 듣지 못한 척도 불가능했다.
도로테아의 안목도 별로 믿을 게 못 되는군.
이런 위험인물을 여기에 들이고 있으니.
풀썩 어깨를 늘어뜨리는 나와 슬쩍 미소 짓는 안드레이의 뒷모습은, 그럭저럭 하드 보일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들었어? 저 아이들의 식비 말인데, 30명이나 있는데 하루에 동화 10닢도 안 된대.”
“…….”
“금화 100닢짜리 테이블.”
“윽!”
“의자가 부서져서 어쩔 수 없이 부서진 통 위을 깔고 앉는 아이도 있다더라. 엉덩이 아프겠다…….”
“…….”
“금화 5닢짜리 소파.”
“힉!”
한 발 먼저 걸어가는 남자 두 사람의 뒤쪽에선 카라의 가시같은 말이 논나한테 푹푹 박히는 중이었다.
그 이후 논나는 약간이나마 절약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
이름: 에이길 하드릿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기사작 왕국군 소속
연봉 금화 80닢
재산: 금화 250닢(은화 이하 제외)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대형 버디슈(창)
방어구: 고품질 강철 플레이트 아머 검은 망토 (저주받음)
동료: 슈바르츠(말) 세리아(종자) 논나 엘렉트라 멜리사 마리아 카라(변태)
경험 인수: 28명
옷 가격 금화 50닢
현실 환산 가치 : 원화로 따지면 약 5천만원
※옷은 다른 물건에 비해 비싸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에이길: 예장 10닢
외출용 2닢
실내용: 2닢
예비용: 2닢
합계: 16닢
카라, 마리아, 멜리사, 세리아 네 사람 분량
(은화) 드레스 8닢
자택용 2닢
합계: 금화 16닢
논나 드레스 26닢
자택용 4닢
합계: 금화 30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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