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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2화『지하에서 눈을 뜨다』
어두컴컴한 지하, 작은 창문을 통해 간신히 빛이 새어드는 그 공간은,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수없이 나뉘어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나는 이 감옥 같은 방 안에 누워있었다.
방 안에 누워있을 뿐, 잠들어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소음이 내 숙면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여자다, 그냥 조용히 범해지면 될 것을.
공간 안에 울려퍼지는 여자의 목소리.
아양을 떨려고 하는 건지,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어필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곳’에선 늘 있는 일, 또 감시역이 마음에 든 상품을 미리 따먹어보고 있는 듯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신경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이불……진드기투성이인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윽고 소리는 사라지고, 정적이 돌아왔다.
아침 해가 오를 때까지 그리 시간이 많이 남진 않았지만 수면 시간은 많을수록 좋다.
나는 눈을 감고, 아침이 되기 전까지 주어진 짧은 수면 시간을 만끽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아직 철이 들기 전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 있었고, 그 전엔 어디에 있었는지, 왜 여기로 온 건지도 모른다.
내 자신의 나이도 열셋이나 열넷 정도 됐을 뿐, 정확한 건 모른다.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 여길 온 놈들한테 사정을 물어봤을 땐, 부모한테 팔렸든지, 도적한테 납치당했다는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간단하게 설명 가능하다.
소년, 소녀들이 모여서 침대로 끌려가거나 살육전을 펼치는 둥, 변태 손님들을 즐겁게 만드는 곳이다.
징징, 하고 울려퍼지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비해야 할 건 내 몸 하나뿐.
오늘도 또다시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전투가 시작된다.
작은 방에서 나온 나는 식당에서 받은 토사물처럼 생긴 스프를 쭉 들이켠 후, 가만히 기다렸다.
“피니, 위에서 손님께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신다! 물로 씻고 나면 얼른 가!”
“도라! 네놈은 부인을 상대해라! 돈 씀씀이가 상당하니까, 실수했다간 너도 끝장날 줄 알아!”
“에이길! 너는 시합이다, 얼른 무기를 고르고 준비해!”
감시역이 고함을 소리치고, 모여있는 놈들이 흩어진다.
에이길은 내 이름인데, 어디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라고 한다.
예전 시합에서 상대를 정수리부터 가랑이 끝까지 두 동강 냈을 때 받은 이름이다.
다른 놈들의 이름은 잘 들리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한다.
어차피 금방 사라질 게 뻔하니 외워봤자 시간 손해일 뿐이다.
내 상대로 지명된 남자, 그래봤자 15살도 안 된 소년의 낯빛이 바뀌었다.
시합이라는 건 쉽게 말해 손님들 앞에서 진검으로 펼치는 살육전이다.
손님은 돈을 걸고, 야유와 응원을 퍼붓고, 승부가 끝나면 그 처절한 광경을 즐기는 것이다.
일대일 대결뿐 아니라, 맹수와 싸우거나 작은 소녀를 일방적으로 희롱한 뒤 죽이는 기분 나쁜 시합도 존재한다.
상대의 낯빛이 변한 원인은 바로 나 때문이다.
나는 다른 놈들과 달리 손님을 상대하는 경우가 적다.
근육도 잘 붙는 체질이고, 키도 작은 편이 아니다 보니 아동을 따먹고 싶어하는 변태 취향의 몸뚱아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남자로서 나이든 여자를 상대하기에도 애교나 귀염상이 부족하다.
따라서 내가 ‘이곳’에서 맡는 역할은 시합이다.
그리고 시합에서 패배한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곳’에서 펼쳐진 시합 중, 숫자로 대략 100번 정도의 전투를 살아남았다.
감시역은 내 두 팔과 다리에 차여있던 족쇄를 풀고서 시합으로 내보냈다.
손에 쥔 무기는 늘 쓰던 대검이다.
길이 1.2m, 무기 10kg 정도는 되는 두꺼운 양날 양손검.
키가 160cm도 안 되는 내가 들기엔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무기지만, 날이 다 빠지고 핏자국이 잔뜩 묻은 이 검으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상대방의 장비는 길이 60cm 정도 되는 한손검과 가죽 원형 방패인 듯하다.
검을 휘두르고, 감촉을 확인하는 동작을 보건대 검을 쥐는 게 처음인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네가 고른 장비는 잘못된 선택지’라고 중얼거렸다.
어차피 가죽 방패로 내 양손검은 막아낼 수 없다.
승산은 내 품 안으로 파고든 다음 일격을 날리는 것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방패 따윈 움직임과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한데 말이야.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진 않는다.
덕분에 나는 상대방을 죽이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대광장……이라 해도 기껏해야 2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중심에 철제로 된 울타리로 둘러싸인 “투기장”이 존재한다.
의자가 설치된 벽 부근에는 수십 명의 관객이 노성인지 환호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는 중이다.
그들의 중심에는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채 무장을 한 감시역과 ‘이곳’의 주인, 살찐 돼지 같은 남자가 있다.
놈이 여기 있는 걸 보면 관객들 중에 상당히 귀중한 사람이 하나 끼어 있는 게 분명하다.
저 돼지가 밥이나 술, 여자를 범하거나 돈을 세는 걸 제외한 나머지 무언가를 할 땐 고객 때문이다.
나한테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돼지는 내가 얼마나 강한지, 상대방도 나와 얼마나 맞붙을 수 있는 실력인지를 떠들어댔다.
태반은 과장이지만, 실제로 이 이야기 덕분에 배당금이 올라가는 걸 보고 있으니 우스울 지경이다.
나는 그저 상대방과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어려울 건 없다.
이기면 밥이 조금 좋은 게 나오고 또다시 내일을 맞이한다.
지면 여기서 죽는다, 고작 그 정도다.
나는 왼발을 한 발 내딛고서 검을 오른쪽 어깨에 짊어지듯이 자세를 취했다.
상대방도 방패를 손에 쥐고 옆구리를 크게 벌린 채 검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자, 전투다.
죽느냐 죽이느냐, 끝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선수 배당 시간도 마무리가 지어진 회장 안에서, 불타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건 틀림없는 살육전, 관객들도 ‘이곳’ 바깥에서 보기 위해선 보통 목숨을 각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전 상대와 3m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싸우기 전부터 숨이 이렇게 거칠어져 있어서야, 이길 수 있는 시합도 못 이길 텐데.
반면 나는 컨디션도 문제없다.
100번이 넘는 전투에서 살아남은, 평소와 똑같은 상태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이길 수 있으리라. 만약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일어나서 패배하게 된다면……죽을 뿐.
시합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데엥하고 울려퍼진다. 그와 동시에 상대방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방패를 앞으로 내민 채 달려오는 모양새.
3m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움직임이 느린 대검이 반응하기 전에 검을 내지르는 상대방……하지만 그 전에 내 대검이 상대방을 방패와 함께 몽땅 날려버렸다.
놈은 간신히 무기는 놓치지 않았지만 바로 옆으로 떠밀려서 두 세 번 정도 땅바닥을 굴렀다. 관객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상대방이 자리에서 일어나, 믿기지 않는 걸 보는 것마냥 나를 바라본다.
저 시선은 직전까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라는 내용의 그것이다.
딱히 별다른 트릭이 있는 건 아니다. 단순히 놈이 한손검을 내지르는 속도보다 내가 대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더 빨랐을 뿐.
이게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내 나이대의 사람이 10kg이나 되는 대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원래 말이 안 되는 모양이다.
나는 떠밀려 날아가긴 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부상이 없는 상대방을 향해 달려나간다.
놈이 자세를 고치는 걸 기다려 줄 이유는 없다. 상대방은 간신히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지만 무식한 철덩어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내 검은, 방패와 상대방의 왼손, 왼다리를 날려버렸다.
“끝났다아!”
“30이나 잃었네!”
“역시 에이길이구만!”
엄청난 노성과 환호와 함께 승부는 끝났다.
하지만 시합이 끝났어도 쇼가 끝난 건 아니다.
관객들은 마지막 일격을, 패자에게 내려질 무자비한 처형을 기대하고서 소리를 내지른다.
나는 딱히 패자를 농락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 녀석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주는 게 한솥밥을 먹은 상대방에 대한 마지막 온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검이 발버둥치는 상대방의 목을 날려버렸다.
“오오!”
“해치웠다!”
“목이 날아갔잖아!!”
최고조에 도달한 관객들의 목소리, 나는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할 일은 이걸로 끝이다.
남은 건 돼지의 부하가 배당금을 회수하러 돌아다니고, 관객들은 자리까지 튀었던 피와 살점을 보면서 흥분하는 광경뿐이다.
하지만 돌아가려던 나를 감시역 두 사람이 가로막았다.
그리고 창 손잡이로 나를 찔러서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다.
한 순간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금방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지금부터 한 가지 여흥이 더 남아있는 모양이다.
일대일 승부가 끝난 이후 늑대가 튀어나오거나, 3연속 승부가 되는 경우도 곧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남자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의 얼굴은 증오가 뒤섞인 표정과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단순히 시합 직전의 위협 태세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내가 베어버린 남자의 가족, 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자인가?
오늘 상대는 이상하게 약하다 싶었더니만, 사실은 이쪽이 진짜고 눈앞에서 육친을 죽게 만든 다음 감정을 부추기려는 심산인 건가.
“자! 다음 상대방은 옛 기사 견습생 도일! 증오로 불타오르는 그의 승리에 돈을 거실 분이 계십니까!”
기사 어쩌구 하는 놈들은 대개 검을 잘 쓴다.
나는 바깥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기사 견습생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100번이 넘는 전투 속에서 그런 직함을 갖고 있는 놈들이 주로 검을 재빠르고 정확하게 사용한다는 걸 배웠다.
한편 도일 쪽도 에이길을 분석 중이었다.
아직 신체는 어린아이지만, 저 대검을 실제로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제대로 맞았다간 검은 물론 철로 된 방패도 쓸모 없겠군……
하지만 놈한테 방어구는 없다, 찌르기가 들어가기만 하면 일격에 끝낼 수 있으리라! 동생의 원수, 반드시 갚아주겠노라.
도일의 검은 도신이 얇은 레이피어에 가깝기 때문에, 방어구를 장비한 적 상대로는 그 빈틈을 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의 나체와 다를 바 없이 싸우는 이 장소에선 급소에만 박히면 어떤 무기든 즉사다.
그렇다면 가볍고 재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도일의 검이 철덩어리처럼 생긴 검보다 유리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저 소년의 검은 방어구도 없이 휘두르기엔 너무 과했다.
데―――엥
시합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진 순간, 나는 허리를 낮춘 자세로 놈에게 접근, 목을 향해 재빠른 일격을 날렸다.
소년은 백스텝 자세로 그걸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했다.
그와 동시에 뒤로 물러나면서 소년은 대검을 위로 베어 올렸다. 어쩔 수 없이 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
빠르다! 대검을 쓰고 있는 사람의 속도가 아냐!
내 일격을 피할 것까지는 예상 범주 안이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회피 이후의 반격 때문에 자세가 무너져서 그 이후 전술이 전부 망가졌다.
이런 곳에서 싸우고 있는만큼 조잡한 검술에 아류인 건가……
그 생각과 함께 나는 소년의 오른팔 부근으로 파고들었다.
이걸로 놈은 곧바로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될 테고, 잘만 하면 옆구리에 빈틈이익!!??
내 예상대로 소년은 검을 한손으로 쥔 채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예상을 벗어난 건 바로 속도다.
무거운 검을 역수로, 그것도 한 손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회피한 다음 다시 공격을 내지를 수 있을 거라 판단한 다음 달려든 것이었으나, 놈의 속도는 마치 벼락과도 같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굉음이 울려퍼진다.
곧바로 방패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얼굴이 쪼개졌을 거다……!!
방패는 티딩, 하는 금속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채 울타리 쪽으로 떨어졌다.
간담이 서늘해진 도일과는 대조적으로 내 표정은 냉정했다.
돌진은 이미 두 번 봤다, 이 녀석의 속도는 빠르지 않으니 문제없다.
나는 검을 상단에 두는 자세를 취한 채 가만히 멈춰섰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굉장히 무방비한 자세.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상대방의 속도를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에 칠 수 있는 함정.
다음에 덤벼들면 승부는 결정된다.
한편 도일도 승산을 계산 중이었다.
놈은 상단으로 자세를 취했다……뛰어들어야 하나……? 아니, 먼저 놈을 죽인다 하더라도 검이 내리쳐지면 나도 길동무 신세다.
그렇다면 먼저 놈에게 헛손질을 유도한 다음……
두 사람 모두 생각하는 건 한순간, 도일이 뛰어들고, 소년은 그걸 베어내기 위해 검을 내리친다.
그리고 도일은 그걸 예측하고, 급감속한 후 검을 회피했다.
쿵, 하는 굉음이 울려퍼지자 관객에서 조그맣게 겁먹은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승부의 행방을 끝까지 지켜보기 위해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내리쳤던 검을 들어올렸다.
도일한테는 머리부터 다리 끝까지, 깊이 10cm 정도 되는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그 균열에서 땅바닥으로 내장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그의 몸은 천천히 쓰러졌다.
승부의 결정적 요인은 내가 파고든 마지막 한 걸음.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할 심산이었던 도일을 베어낸 한 걸음이었다.
놈의 전술을 읽고서 파고들었던 건 아니다.
그저 그가 ‘피하려는 자세를 취한 걸 보고’ 나서 한 걸음 내딛은 것이다.
이게 내가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또다른 이유, ‘동체시력’이다.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길 수 있는 적을 상대로 승리하고, 살아남는다.
예상 밖의 패배는 없었다.
승리와 함께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는 관객들.
만족스러워 보이는 돼지 주인의 박수를 받고서,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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