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마그라드 내전④ 비정한 전장』
왕국군 1만 5천명 중, 3000명을 포로 호송용으로 붙여두고 오드로스로 귀환, 나머지 1만 2천명을 이끌고 총독부군을 도우러 가게 되었다.
“총독부군과 합류하면 약간 숫자가 줄어든다 해도 패배할 일은 없습니다.”
“애초에 이런 작은 거점에서 막힐 정도라면 어차피 도와주지 않고 칼디아를 공략하긴 힘들겠지.”
라고 레오폴트와 트리스탄도 말하는 중이다.
“족장님이 가시면 적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기드가 웬일로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햇볕에 탄 건강한 이마에선 덥지도 않은데 땀이 흐르고 있었다.
““…….”
“마을 처녀를 범하는 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목 안쪽에 싸서 기침을 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세리아와 마이라, 덤으로 이리지나의 압력을 느끼고서 불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직 멀었군.
“나 같은 경우엔 마린을 남편한테 돌려주고 원만하게 해결했는데 말이야.”
말을 맞춰두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으니 부부 관계가 나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원만하게 해결됐을 리가 없잖아요!”
마이라가 내 말에 반박했다.
“키스 자국이 잔뜩 난 목덜미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지는 못하는 바람에 부축 받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 고 말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세리아도 덧붙였다.
“남편 앞인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또 만날 수 있나요?” 라고 물어봤잖아요. 남편이 분하다는 듯이 땅바닥을 치고 있었다니까요!”
그랬던가?
“심지어 마지막엔 “고마워, 즐거웠어.” 라고 말하면서 남편 눈앞에서 키스까지.”
“그 여자도 “저야말로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기분 좋았어요.” 라고…….”
뭐,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말자고.
“그보다 슬슬 적 거점이 보이는 거 아니야? 사전 정보로는 아주 작은 거점이라 들었는데.”
아니지, 1만명의 총독군을 격퇴했다는 얘기는 상당히 요새화됐다는 반증이 아닐까?
아니면 5천명 이상의 병력이 있기라도 했던 건가?
“전령의 제한적인 정보로는 작전을 세울 방도가 없습니다. 직접 상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작전을 세우는 건 레오폴트 아니면 트리스탄이니까 그쪽에 맡겨야지.
이윽고 우리 눈에 들어온 건 하늘 높이 치솟는 검은 연기였다.
아무래도 격렬한 전투를 벌인 모양이다.
“총독부군은 진을 구축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상당히 당한 듯합니다.”
마이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총독부군은 마을에서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떨어져서 진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간이 울타리와 참호를 간단히 설치해 둔 느낌이다.
그때 익숙한 소리와 함께 불로 달군 돌이 날아갔다.
아무래도 진지 안에서 투석기를 설치해 계속 공격을 퍼붓고 있는 모양이다.
돌은 적진에 착탄, 화염과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금세 잦아들었다.
적도 금방 불을 끄러 오는 걸 보아 이 공격만으로는 마을을 함락시키긴 힘들어 보였다.
“저놈들은 장기전을 할 생각인 건가?”
이 전투는 칼디아 공략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얼른 해치우고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인데.
“워, 원군이다!” “다행이다……이제 어떻게든 되겠어.”
총독부군 병사들은 우리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일단 손을 흔들어 답했으나 분명 웃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뒤누아 총독을 불러와.”
나조차 깜짝 놀랄만큼 딱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병사가 허둥지둥 본진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의 사기는 엉망이군요. 공격 준비가 전혀 되어있질 않습니다.”
비트먼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왜 이렇게 사기가 낮은 건지?
왕국군이 진에 들어오자마자 뒤누아와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저것들은 분명 반푼이, 빡대가리, 저능아 3인조잖아.
“으아아아, 실태이옵나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태인지.” “머리를 조아리나이다.”
후들후들 떨고 있는 세 사람, 한편 뒤누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 딱히 미안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과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기에 쓸데없이 겁먹는 쪽이 더 짜증나긴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뒤누아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라.”
솔직히 「부하가 무능하여 공략에 실패했습니다」, 라고 말해버리면 「그러냐」하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 멍청이에게 병사를 맡겨야만 하는 시점에서 불쌍하긴 하니까 말이야.
“두 번 총공격을 가했습니다만 첫 번째 땐 벽을 넘지 못했고, 두 번째 때는 간신히 내부에 침입하긴 했으나 강력한 적의 반격으로 인해 침입한 부대가 고립, 괴멸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병사들의 사기는 복구되지 못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손해는 어느 정도지?”
“1000명의 병사가 죽고 2000명이 다쳐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적은 보건대 기껏해야 2000명 정도, 대체 얼마나 일방적으로 당한 거냐.
“그렇다 해서 계속 투석만 해대는 건 태만한 태도 아닙니까?”
뒤누아의 말을 듣고 마이라가 반박했다.
놈의 조잡한 방식을 보고 군인으로서 납득하지 못한 것이리라.
“네, 네놈 남작 주제에 뒤누아 백작님께 무슨 망발을!”
“총독님에게 아무런 직책도 없는 네놈이 감히!”
“규탄할 따름이로고!”
갑자기 화를 내면서 마이라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 세 멍청이.
내 여자한테 불쾌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군.
“입 닥쳐.”
나는 쾅, 하고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이런, 박살이 나버렸잖아.
“““히이이이이이익!!”””
서로를 끌어안고 제자리에 주저앉은 세 사람.
“말다툼을 벌일 시간이 있으면 얼른 부대를 재편성해라. 왕국군과 공동으로…….”
공격을 개시한다, 라고 말하기 전에 레오폴트가 뒤쪽에서 귓속말을 했다.
“적의 사기가 높은 상황이니 억지로 공성을 시작했다간 피해도 커질 겁니다. 책략이 있으니 우선 이쪽 병력으로만 공격시키시죠.”
“……재편성 후, 총독부군은 당장 공격을 시작해라. 세 번째 총공격이다.”
“지금 즉시――!” “으아아아아아!” “히익―――!”
레오폴트가 말하는 거니까 괜찮겠지.
탁자를 망가트린 보람이 있었는지 재편성은 금방 끝이 났고 저녁이 오기 전에 공격 준비가 갖춰졌다.
“공격 개시.”
뒤누아의 호령과 함께 총독부군 7천이 일제히 도시벽으로 다가갔다.
마을의 방어 수준은 우리가 함락시킨 거점과 다를 바 없다.
간이 울타리와 해자로 구성된 급조 방어진이 있을 뿐이다.
“병사의 사기가 이상할 정도로 낮군요.”
앞으로 나아가는 총독부군을 지켜보면서 마이라가 중얼거렸다.
병사는 우리 왕국군이 참전하지 않는 사실에 실망한 건지 딱 보기에도 떨떠름하게 진군 중이었다.
보폭이 느린 데다가 발걸음도 흐트러졌고 진형도 무언가 불안정한 형태를 유지 중이다.
“화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세리아가 보고하는 것과 동시에 두 군의 궁병한테서 교차하듯이 화살이 날아갔다.
숫자가 줄었다고는 해도 총독부군은 여전히 적의 3배 정도 되는 병력이기 때문에 날아가는 화살의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화살을 맞고서 동요 중인 건 누가 보기에도 총독부군 쪽이었다.
죽은 숫자는 기껏해야 100명도 안 될 텐데 진형은 흐트러졌고 진군은 한층 더 느려졌다.
진형이 흐트러진 탓에 다음 사격에선 더욱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나와 비트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고개를 마주보고 참 심각하다는 듯이 시선을 교환했다.
“벽에 붙었습니다. 공격이 시작됩니다!”
기드가 소리쳤다.
아무리 혼란에 빠졌다고 해도 3배나 되는 병력을 화살만으로 막아낼 수는 없다.
내가 탁자를 발로 걷어찬 효과 덕분인지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병사들한테 소리치고 있었다.
도끼를 손에 쥔 병사가 울타리를 쓰러트리고 문을 격파하려 하고, 사다리를 들고 온 병사가 벽을 올라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 안쪽과 도시벽 위에서 칼부림을 벌이기 시작했으나…….
“하아, 이거 안 되겠네.”
트리스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문 안쪽에 아군이 들어갔는데도 뒤쪽에 있는 병사가 제대로 도와주질 않는다.
오히려 되도록 자기가 먼저 가지 않으려고 보폭을 늦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변명하듯이 활을 쏘고 힘없이 창진을 짜서 적을 위협하는 게 고작이다.
“아주 의욕이 없네. 싸우기 싫다는 감정이 팍팍 눈에 들어와. 이러면 10배의 병력을 끌고 와도 못 이겨.”
트리스탄이 말하는대로 점차 전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도시벽 위에서 싸우고 있던 병사는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고 문 안쪽에 침입한 부대는 점차 소탕되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군이 쉽사리 안으로 들어오질 않아 침입 부대한테 적이 집중되어 포위당하는 형태가 되고 만 것이다.
증원 지시는 내리고 있는 모양인데 병사들의 반응이 워낙 느려 제때 도와주질 못하는 중이다.
레오폴트 쪽을 힐끔 쳐다보니 예상 범주 안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 부대를 더욱 전진시켜라. 본쇼 자작의 대대를…….”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고 지시를 내리던 뒤누아에게 말했다.
“여기서 더 해봤자 못 이겨. 후퇴해라.”
“……알겠습니다.”
후퇴 신호 나팔이 불자 총독부군의 지휘관들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병사들은 어딘가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은 뒤쫓으려고 문이 있는 곳까지 모여들었으나 왕국군이 대기 중인 걸 보고 포기한 듯했다.
적의 사령관이 뒤누아보다 더 뛰어난 모양이군.
“병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에 패배를!”
“옆 대대의 증원이 뒤처진 탓에 패배를!”
“역풍 때문에 화살이 제대로 날아가지 못해 패배를!”
복귀한 세 멍청이가 제각각 패배한 이유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모양이다.
부하 때문, 동료 때문, 날씨 때문이라며 참 멋지게 서로 다른 이유로 변명하는 중이다.
“이제 그만, 재편성 하러 가봐.”
나는 딱히 질책하지 않고 놈들을 해산시킨 뒤 레오폴트 쪽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되나?”
레오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합니다. 적은 우리 쪽을 격퇴했다며 사기가 치솟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원군인 왕국군을 위협적이라 느끼고 있을 겁니다.”
“다음은 어떻게 하지?”
“야영 준비를, 대량의 횃불을 설치하고 투석기를 눈에 띄게 배치해 두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야영지에는 횃불만 두고 병사는 다른 곳에 배치하려는 속셈이군.”
그렇게 말하자 레오폴트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살짝 눈이 커다래진 듯한……정말 기분 탓이었다.
“하드릿 경께서 이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만 남겨두고 레오폴트가 준비를 하러 떠났다.
후후후, 저놈도 놀란 모양이군.
나는 시원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마이라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뒤, 왜 그런지 나도 감이 와 버렸다.
“……잘 생각해 봤더니 저 자식, 날 멍청이 취급한 거잖아.”
불평을 말하려고 레오폴트를 찾아보았으나 이미 없었다.
에잇, 너 이리 와.
“우왓, 뭐하는 겁니까! 그만하세요! 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옆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트리스탄의 귀를 잡아당겼다.
너도 참모니까 연대 책임이야.
“너무해. 횡포라구. 이래서 군대는 싫다니까.”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 트리스탄의 귀를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당기면서 나는 슬쩍 뒤누아를 멀리서 바라봤다.
세 멍청이처럼 변명을 하거나 혼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하거나 하는 둥, 놈에게는 그런 감정이 더 이상 없는 느낌이다.
분노도, 당혹감도, 슬픔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을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레오폴트도 어지간한 편이긴 하다만…….”
그 녀석의 철면피하고도 다른, 무언가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만하련다. 나까지 이상해지겠어.”
딱히 저 녀석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번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볼일도 없는 사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말아야지.
한밤중
주변이 시커먼 와중 아군 진지만 눈에 띄게 빛나는 중이다.
나는 슈바르츠의 머리 위에 턱을 괴어두고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없나?”
“만사 문제없습니다.”
세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확실하게 보고를 해주었다.
우리는 야영지를 슬쩍 빠져나와 새까만 어둠 속에 몸을 감춰두고 있었다.
내가 있는 본대 외에도 왕국군은 몇 개로 갈라져서 야영지를 포위하듯이 병사를 매복시키고 있다.
물론 불은 피우고 있지 않다.
“밤에 모닥불도 없으니 춥구만. 이러다 적이 안 오기라도 하면 감기만 걸리고 끝나겠어.”
최소한 손이라도 녹이려고 옆에 있던 세리아의 갑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살짝 망설이고서 내 손을 끌고 가장 따뜻한 가랑이 주머니로 손가락을 데워주었다.
후후후, 어두우니까 주변 놈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테지?
“틀림없이 올 겁니다. 병력적으로 열세, 아군의 높은 사기, 직전 전투에서 거머쥔 승리……심지어 이렇게 경계심도 없이 횃불까지 피워두면 모든 조건은 갖춰집니다. 적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수단은 하나입니다.”
레오폴트는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다.
“총독부군의 무능함도 오히려 이제는 고마울 지경이야. 그렇게 꼴사나운 전투를 반복하다 보면 우리 쪽 함정을 경계하지 않게 되거든.”
트리스탄도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다.
작전은 간단하다.
야영하는 척 위장한 뒤 전군을 진지 주변에 배치하는 것이다.
야습을 유도하고 반대로 격파한 뒤 단숨에 적 전력을 괴멸시킨다.
그걸 위한 포석으로 일부러 패배할 걸 아는 공격을 시도한 뒤, 허술하게 횃불을 마구 피워둔다.
투석기를 깔아둔 건 「내일이 오면 이놈들이 다시 돌을 날려댈 거다」라는 위협 표시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야습으로 해치우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심리인 법이니까.
내가 세리아의 주머니에 더욱 많은 손가락을 집어넣어 따뜻한 물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을 즈음,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온 것 같습니다.”
“아윽.”
손가락 세 개를 단숨에 뽑아내자 세리아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귀를 기울이니 확실히 부스럭부스럭 풀밭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적이 온 듯합니다. 숫자는 모르겠습니다만……100, 200 정도는 아닐 테지요.”
그야 그렇지.
우리 쪽은 2만이 넘는다.
아무리 야습이라 해도 어느 정도 숫자를 갖추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적의 전군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는 얘기다.
“갑옷끼리 부딪치는 금속음이 안 들립니다. 딱 좋군요.”
마이라가 나를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적은 소리 때문에 들킬 걸 우려하여 금속 갑옷을 입지 않고 경장으로 온 모양이다.
야습 상식을 고려해 보면 정답이긴 하지만, 우리 쪽이 매복해 있는 지금은 최악의 선택이다.
“적이 공격해 오는 것과 동시에 포위한다.”
이동 중인 적은 언제 들킬지 몰라 항상 경계 중이기 때문에 섣불리 습격을 가했다간 놓치기 십상이다.
적이 바로 공격을 하려고 시도한 그 순간을 노리는 게 최고의 타이밍이다.
그리고 그때가 찾아왔다.
“돌격――――!!”
숨을 죽이고 접근 중이던 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휘관의 고함소리와 함께 달려오기 시작했다.
“돌격이다!”
동시에 나도 소리를 내질러 아무도 없는 진지를 향해 돌진하는 적의 옆구리를 향해 달려나갔다.
준비를 끝마쳤던 아군 궁병이 단숨에 불화살을 활시위에 겨눴다.
“큰일이다! 적의 함정이다!”
소리치는 적병, 하지만 이미 늦었다.
놈들은 빠져나갈 수 없을만큼 이미 안으로 파고들어와 있었다.
돌격 때문에 흐트러진 대열도 다시 정리할 시간은 없다.
전방향에서 매복 중이던 아군이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적의 머리 위로 미친듯이 빛이 쏟아지더니 놈들의 전체적인 양상을 훤히 드러냈다.
“적 숫자는 대충 보기에 2000! 거의 전군인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이놈들을 해치우면 끝이다. 가라!”
“““오오오오오오오!!”””
적 병사의 고함소리를 몇 배는 더 큰 고함소리로 없애버리고 아군이 전방향에서 돌진을 시작했다.
사기가 낮은 총독군은 뒤쪽에서 대기시키는 중이지만 그렇다 해도 적 2000명에 비해 우리 쪽은 1만이 넘는다.
적은 후방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이 포위당한 데다가 장비도 기습을 고려해 경장을 입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승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갈 생각이었다만……그만두는 게 낫겠군.”
“이미 의미가 없습니다. 자중해 주시지요.”
전투 개시 몇 분만에 이미 적은 무너져 있었다.
저항을 포기하고 그냥 진지 안으로 도망치려 할 뿐이다.
“놈들을 쫓아라. 적의 꽁무니를 뒤쫓아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는 거다!”
비트먼이 소리치자 아군이 적을 쫓아가기 위해 추격전을 시작했다.
“오, 해냈군.”
도시벽 위에서 아군 병사가 횃불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고르 대대가 문을 제압했습니다. 전군이 돌입 가능 상황입니다.”
비트먼이 기쁜 듯이 말했다.
야습을 반격하고 성문까지 빼앗았다.
이렇게 깔끔하게 작전이 성공하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끝입니다. 이제 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가 뜨길 기다리고 전력으로 짓밟으시죠.”
레오폴트가 무표정 상태를 유지하며 말했다.
네 책략이 깔끔하게 먹혀들었군.
하지만 나를 멍청이 취급한 건 잊지 않았다고.
언젠가 니나와의 성생활을 폭로하고 라펜의 게시판에 글을 붙여두마.
적의 야습부대는 괴멸, 대부분이 죽거나 완전히 포위당해 항복했다.
마을로 도망친 건 1할이 될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성문도 우리 쪽이 제압한 상황이기에 초조해 할 필요도 없다.
해가 뜨길 기다리고 천천히 해치우면 그만이다.
다음날 아침
“뭐야 이건.”
더 이상 적에게 저항할 여력은 없기에 우리도 해가 뜨길 기다리다 천천히 마을 안으로 들어갔으나……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주민의 시체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건 알고 있어.”
곧이곧대로 답한 비트먼에게 나도 모르게 호통을 치고 말았다.
미안하다,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마을 안으로 쳐들어간 우리는 마지막 적이 숨어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주관을 향해 나아갔으나, 그 도중 함정이 없는지 조사하기 위해 마을 안을 가볍게 탐색했다.
그리고 발견하고 말았다.
방어진을 쌓기 위해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민가 몇 척과 그곳에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을.
무장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는 걸로 보아 단순한 주민들이었다.
다들 검이나 창으로 살해당한 게 분명했으며 젊은 남자부터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전부 다 죽어있었다.
“에이길 님, 마을을 탐색해 보았습니다만 어느 곳에도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세리아가 보고했다.
이 마을도 우리가 함락한 마을과 비슷한 수준의 크기였으나 천 명 정도 되는 민중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쌓인 시체의 숫자는 딱 그 정도 숫자로 보인다.
“아녀자까지……쓰레기 자식들이!”
마이라가 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아고르도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으나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한 아가씨의 시체를 앞에 두고 주저앉았다.
옷이 흐트러진 걸 보아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손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손으로 눈을 감겨주니 살짝 평안한 표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민중을……무엇보다 여자를 죽이다니 어리석은 놈들이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니 슬픔이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여자를 희롱하다 죽인 독립파 놈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이 마을의 여자도 살아있었으면 언젠가 내 여자가 됐을지도 모르건만.
놈들은 그것을 빼앗아간 것이다.
“에이길 님! 생존자입니다!”
세리아가 소리친 걸 듣고 시선을 옮겼다.
그래,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
아고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를 보내려 했다.
“젊은 여자들로만 20명입니다!”
“뭐라고!?”
생각지 못한 후속 보고에 나는 아고르와 병사를 밀치고 달려갔다.
여자들은 오두막 같은 건물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전부 다 옷을 입지 않은 걸 보아 병사들의 위안부 역할로 살아남은 모양이다.
“대, 대낮부터 하는 건가요?” “아, 알겠습니다…….”
무장한 우리를 보고 여자들이 슬픈 표정을 지은 뒤, 바닥에 누워 가랑이를 벌렸다.
거칠게 다뤄진 성기는 새빨갛게 부어 있었고 보는 것조차 아플만큼 벌어져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 여자 위에 올라탈만큼 귀축은 아니다.
“이제 괜찮아. 독립파는 몰아냈으니까.”
겁먹은 여자 중 한 명을 끌어안았다.
“설마 총독파인가요!?”
한 순간 안도의 표정을 지을 뻔 했던 여자들이 다시 몸을 굳혔다.
이상하네, 총독파는 아군 취급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다시 여자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고르도니아군이다. 너희한테 이상한 짓 할 생각은 없어. 이제 너희는 살은 거야.”
그렇게 말하고서 끌어안은 여자한테 상냥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자 입을 맞춘 여자뿐 아니라 모든 여자들이 멍한 표정을 지은 뒤, 천천히 표정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흐……흐, 흐에에에에엥!! 살았어!”
터진 것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 엉겨붙은 채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
아쉽긴 하지만 나는 여자들에게서 손을 떼어두고 아고르 쪽 병사한테 맡겼다.
“절대로 손대지 마라. 했다간 목이 날아갈 줄 알아.”
“예!”
이 여자들은 이미 내 여자이기 때문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여자들한테 미소를 짓고 나서 영주관, 이 마을을 점거 중이던 독립파가 마지막으로 숨어있는 장소를 노려보았다.
스스로도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따라와라.”
나는 선두에 나서 영주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네!”
아무도 멈출 사람은 없다.
앞에 서 있던 왕국군 병사가 내 얼굴을 본 순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영주관 앞에는 변명거리 수준 정도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얼굴을 내민 지휘관처럼 보이는 남자가 나를 보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 사령관 각하께서 고르도니아군과 교섭할 용의가 있다고……끄아아아아악!”
마지막까지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장검으로 꼬챙이처럼 만들어버린 뒤 돌계단에 던졌다.
피분수를 터트리면서 지휘관은 가장 아래쪽까지 굴러떨어졌다.
“흡!”
곧장 검을 휘둘러 바리케이드를 날려버렸다.
탁자와 의자 같은 가구로 임시 제작된 바리케이드 따위는 이 장검 앞에서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한다.
양옆에서 넋이 나간 적 병사를 무시하고 영주관의 문을 발로 걷어찼다.
문이 크게 삐걱였으나 빗장이 걸려있는 듯했다.
“사, 사령관님이 항복 교섭에 응하겠다는 전언이…….”
문 반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장검으로 문을 때려부쉈다.
쾅, 하고 쓰러진 둔중한 문 저편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던 사내가 두 동강이 나 무너져내렸다.
뒤쪽에선 내가 무시한 적 병사를 호위대가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자, 수괴는 어디 있는 거냐.”
혼잣말에 대답하듯이 적 병사가 창을 들고서 뛰쳐나왔다.
오호라, 적이 튀어나오는 방향에 있겠군.
창날을 칼등으로 튕겨낸 뒤, 그대로 얼굴에 검을 꽂아넣었다.
“커븝!”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적 병사의 목을 붙잡아 부러트린 뒤, 들어올리고서 뒤쪽에서 튀어나오는 적 병을 향해 던졌다.
갑주를 입은 남자는 무게가 상당했는지 적 병사 두 명과 부딪치며 함께 쓰러졌다.
말없이 놈들에게 달려간 나는 엉덩방아를 찧은 한 놈의 머리에 장검을 때려넣었고 완전히 쓰러진 나머지 한 놈의 머리를 다리로 박살냈다.
“자, 어느 쪽이려나?”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씩 둘러보는 수밖에 없나.
“우왓!”
모퉁이에서 적 세 명과 조우한 순간 몸이 움직였다.
상대방이 반응하기 전에 한 명을 비스듬하게 베어내고 그 기세를 이용해 칼을 돌려 한 놈의 배를 찢어발겼다.
마지막 한 놈은 칼등으로 때려 팔을 부러트린 뒤, 손에 쥔 검을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명이 터져나오기 전에 남자의 투구를 벗겨내고 머리카락을 붙잡아 내게 잡아당겼다.
“너희 사령관은 어딨냐?”
“히이이이익! 모, 목숨만 살려줘!”
남자는 가랑이 사이를 적시면서 패배한 똥개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군. 상당히 기분이 나쁘니까 말이야.
“생각해 줄 테니까 대답이나 해.”
“오른쪽 통로 쪽 모퉁이에! 제발, 살려만 줘!”
그래, 잘 알았다.
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잠시 멈춰섰다.
“생각해 보긴 했다만 역시 안 되겠어. 잘 가라.”
“그, 그럴 수가! 끄아아아악!”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남자를 벽에 있는 힘껏 내던졌다.
머리부터 벽에 부딪힌 남자의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부러지더니 한 번 크게 부르르 떨다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은 안 했다. 제대로 생각은 해 줬으니까.
뒤쪽에서 다른 일행도 따라오고 있군.
그럼 적의 수괴가 있는 곳으로 가보실까.
적 병사가 가르쳐준 장소는 한층 더 커다란 방, 아마 댄스홀인 걸로 보인다.
높은 단상에 설치된 의자에 중년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초, 총독파의 지휘관인가? 나는 아그룸, 너희 사령관과 교섭을…….”
아무래도 나를 지휘관이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듣지 않고서 말을 가로막았다.
“주민을 학살한 건 네 지시냐?”
남자는 내가 말을 가로막은 걸 보고 당혹스러워하다가 말대꾸를 시작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여자를 죽인 게 너냐고 묻고 있는 거다.”
딱히 분노를 담아 말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남자는 내 기에 눌려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딱히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일단 확인해봐야 하는 사항이다.
“그, 그것은 복수였을 뿐 애초에 먼저 손을 댄 건.”
“이제 그만, 알겠다.”
사정은 관심없다.
명령을 내린 게 이 녀석이라는 사실만 알아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어깨에 짊어진 검을 오른손 하나로 붙잡았다.
동시에 호위대들도 방 안애 들어왔다.
“크윽. 펠리토스, 해치워라!!”
중년 남자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고, 그 대신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키는 170cm 정도로 살짝 작은 수준, 체격도 얇은 편이다.
“비켜라.”
“그럴 수는 없지.”
그럼 베어서 지나갈 뿐.
“그렇게 쉽사리……될 것 같나!?”
남자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고 돌진하면서 찌르기를 반복했다.
“음!”
가볍게 피한 다음 벨 생각이었는데 남자의 검이 생각보다 빨랐다.
상상보다 빠른 속도에 공격을 시야에서 잃고 직감으로 머리를 비틀었다.
뺨 살점이 살짝 베여나가 피가 고였다.
“내 필살의 찌르기를 피하는 건가!”
반격하려고 검을 휘둘렀으나 남자가 내 장검을 피해 다시 찌르기를 밀어넣었다.
눈을 치켜뜨고 찌르기를 간파한 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쳇, 아깝군!”
하지만 내 예상보다 아직도 더 찌르기는 날카로웠고 그 결과 반대쪽 뺨이 스쳐 피가 흘렀다.
“빠, 빠르다! 찌르기가 보이질 않아!”
“에이길 님! 한 번 물러나 주십시오! 호위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기드와 세리아가 뭐라 소리치는 중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힘에 맡겨 검을 휘두르는 걸로 끝내기엔 힘든 상대인 듯하다.
나는 다시 한 번 남자를 관찰했다.
가볍고 작은 체구를 살려 재빠른 공격을 내지르는 중이다.
무기는 가녀리고 얇은 한손검뿐으로 방패는 없음, 공격을 피할 것을 전제로 갑주는 굉장히 가볍다.
“자, 이번엔 내 차례다.”
나는 장검을 상단 자세로 들어올렸다.
“흥! 그런 커다란 게 끝인 검으로는 내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
글쎄, 어떨까?
나는 남자를 향해 달려나갔고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쾅, 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석재 바닥이 박살났다.
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놈은 피하고 말았다.
“빗나갔나…….”
“오오, 펠리토스가 더 우세하잖아!”
“놈은 예전에 마그라드 검술 대회에서 무패를 자랑했던 고수, 일대일이라면 아무도 이길 수 없다!”
뒤쪽에서 독립파 남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중이다.
하지만 펠리토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그 몸집에 어째서 이렇게 빠르……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 그런 느려터진 공격은 맞지 않는다! 이걸로 끝이다!”
세 번째 찌르기가 들이닥친다.
이번엔 눈알을 노리고 오는 중이군.
방금 전부터 이 녀석은 공격이 정확하다.
드래곤 가죽 갑옷도 너무 과신했다간 빈틈이 찔릴 듯하다.
나는 그 찌르기를 장갑으로 튕겨내고 반대로 한 발자국 앞으로 들어가 검으로 옆으로 휘둘렀다.
“히익!”
펠리토스는 속도를 확 죽여 몸을 웅크린 뒤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참격을 피했다.
아깝군……두 동강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에이길 님께서 두 번이나 헛손질을 치시다니…….”
“하지만 이미 족장님께선 저 찌르기가 보이는 중이야.”
역시 기드는 잘 아는군.
첫 번째 공격 땐 전혀 안 보여서 감으로 피했다.
두 번째 공격 땐 보인 줄 알았는데, 살짝 어설펐다.
세 번째 공격은 완전히 보였으나 놈의 민첩함이 예상 이상이라 반격은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빠르군.
대개 한 번, 혹은 두 번 보면 충분한데 말이야.
“다음이 끝이다.”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어주니 펠리토스의 표정에 분노가 서렸다.
도발한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성미가 급하군.
“헛소리를! 그 머리를 꿰뚫어주마!”
지금보다 더 빠른 찌르기, 하지만 네 찌르기는 이미 완전히 간파했다.
장검을 들어올려 가볍게 튕겨냈다.
검도 놈 자신도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막아내도 자세가 무너질 일은 없다.
“이 자식!”
몸을 비틀어 다시 날아오는 찌르기도 튕겨낸다.
재빠른 이 녀석한테 공격을 맞추긴 힘들어 보이지만, 한 번 시도라도 해볼까?
공격을 튕겨낸 기세 그대로 나는 횡베기로 검을 휘둘렀으나 방금 전과 같은 속도와 기술이기 때문에 역시나 피해버렸다.
그렇게 내 자세가 무너졌다.
“끝이다!!”
펠리토스는 검의 궤도를 수정해 자세가 무너진 나를 향해 혼신의 참격을 날리러 달려왔다.
오른손 하나로 무기를 쥔 내 장검은 크게 비껴나갔기에 도저히 그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왼손은 맨손, 놈은 승리를 확신하고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걸로…….
“붙잡았다.”
내 목덜미를 노린 놈의 검, 그 검술을 완전히 간파한 뒤 왼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무, 무슨 이럴 수가!!”
허둥지둥 검을 뒤로 빼려하는 펠리토스, 하지만 장갑도 드래곤 가죽으로 만들어졌기에 베일 걱정도 없고 나와 힘겨루기를 시작한 이상 이 녀석에게 승산은 없다.
나는 분명 살짝 웃고 있었을 것이다.
“끝이다.”
왼손에 힘을 주니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가녀린 검이 부러졌다.
동시에 내가 날린 앞발차기가 놈의 명치에 정통으로 꽂혔다.
펠리토스는 우스울 정도로 저 멀리 날아가더니 바닥을 구르다 벽과 부딪혔다.
“커흑! 크흑! 아, 아직 승부는…….”
기침을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놈의 앞에서 나는 이미 검을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대체 언제!”
날아간 너를 뒤쫓아 따라온 게 끝이야.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움직임이 느린 편은 아니거든.
“자, 잠깐만! 시간을 좀…….”
유감스럽게도 이건 검술 대회가 아니거든.
무기가 부러져도 전투는 멈추지 않아.
절반으로 부러진 검을 내지르는 펠리토스한테 장검을 내리쳤다.
놈의 오른팔……이라기보단 우반신을 베어낸 뒤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게 만들고서 즉사시켰다.
피 분수가 내 온몸을 더럽혔다.
얼굴부터 발까지 피투성이가 된 채, 나는 천천히 아그룸 쪽을 돌아보았다.
“자,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볼까? 네가 저항하지 않은 여자를 학살했다는 얘기까지 했었지.”
“히이이이이이익!”
나는 검을 바닥에 꽂아넣고 중년 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건 복수였어! 게다가 고르도니아군인 너하고는 상관없는…….”
하지만 나는 산처럼 쌓인 시체를 보고 매우 불쾌해졌거든.
너를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여자도 마음 편히 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두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으그그그그극.”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점점 일그러졌다.
입에서 거품을 물면서 손발이 버둥버둥거렸다.
“흡!”
마지막으로 힘을 주니 으지끈, 하고 멜론이 짓뭉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저항이 사라졌다.
“맨손으로 머리를…….” “괴, 괴물!” “악마다!”
독립파 귀족들이 나를 보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언뜻 둘러보기에 저놈들 안에 여자는 없는 것 같군.
잘 됐군, 잘 됐어.
기드를 보고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전부 죽여라.”
“예!”
순식간에 호위대가 놈들한테 달려들었다.
놈들도 검을 뽑아든 듯했으나, 귀족 몇 사람이 중무장한 호위대 수십명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저택 안에 단말마 소리와 살점에 칼날이 꽂히는 소리가 울려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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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40
“멜 님, 이쪽은 어떠신지요?”
“좋은 향이네요~.”
멜은 상인이 내미는 향유를 팔에 발라보았다.
“이 향유는 피부를 매끈매끈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도시국가 디아스에서만 자라는 꽃의 꿀을 사용한 것이지요.”
멜은 만족스럽게 향유를 발랐고,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좋긴 한데요, 지금까지 받은 향유도 매끈매끈해졌는데요? 대체 뭐가 다른 건가요?”
상인은 과장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을 했다.
“실은 이 향유의 향에는 남자를 발정시키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뜨거운 물에 들어가도 향은 남기에……분명 남편분과의 생활이 더 돈독해지지 않을지.”
멜은 고풍스럽게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정말, 이런 중년한테 뭘 추천하고 계신 겁니까!”
쑥스러워하면서도 멜이 기뻐하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떠신지요? 작은 항아리 하나 분량부터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정말……전부 주시죠.”
“매번 감사합니다!”
이 상인에게 있어 멜은 좋은 손님이었다.
정실인 논나는 괜스레 불평이 많고 한 가지라도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호통을 치는 편이다.
애초에 그녀의 구매력은 단위 자체가 커서 너무 액수가 커지면 필치 상회와 충돌하게 된다.
그렇게 됐다간 화장품 행상인에 불과한 남자는 알거지가 되어 황야에 버려질 것이다.
상회를 거치지도 않은 소규모 거래이기에 봐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카라는 자유분방한 성격인 데다 별로 비싼 물건을 원하지 않는다.
애초에 화장품이나 향유 같은 걸 바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매상의 몇 할 정도를 차지하는 고급 손님 멜은 성격도 온화하고 군말도 별로 없다.
지난번에 대금을 선불로 받았으면서 물건을 납품하지 못한, 상인으로서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켰을 때에도 멜은 “되도록 빨리 구해주세요.” 라며 웃으면서 말하는 게 끝이었다.
천사 같은 멜의 분노 서린 표정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탓이었을까?
“멜 님께선 참 아름다운 피부를 갖고 계시는군요. 도저히…….”
상인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40살의 피부로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소리가 사라졌다.
세계가 멈췄다.
미소 지고 있던 멜의 표정이 사라지고 상냥하게 웃음을 띄고 있던 눈이 천천히 치뜨였다.
상인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리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피부라니요, 우후후.”
멜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몇 살로 보이나요?”
상인이 열심히 입을 떼려던 그때, 주변 잡음만 쓸데없이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배가 아프네요, 꽃을, 커다란 꽃을 따러 가야겠어요.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사모님!
“아, 아……삼십유…….”
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부에도 정도가 있다.
비만 체형의 부인을 상대로 날씬하다.
못생긴 여자를 상대로 절세 미녀라고 말했다간 반대로 놀리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금의 멜에게 실제 나이보다 5살 어린, 36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또다시 잡음소리만 크게 울려퍼졌다.
어떻게든 늦지 않았네요 흐응!
사모님, 소리를 줄여주십시오. 복도에 다 들립니다!
“3……2……18살 정도이신가요!?”
상인은 도박수에 나섰다.
그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고개를 내리깔았다.
“…….”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하고 천천히 눈을 위로 올려보니…….
멜은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큰딸이 20살이 넘은 상황인데 뭐가 18살이라는 건가요. 우후후, 아부하셔도 떨어지는 거 없어요?”
그건 그가 알고 있는 평소 멜의 미소였다.
(잊어버리자. 이분은 상냥한 손님이시라고)
상인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멜한테 향유를 판 뒤 조용히 저택을 뒤로 했다.
클라라, 클라라, 이거 보세요. 마치 커다란 뱀처럼 생긴 꽃이어요!
그런 것 좀 보여주지 마시라고, 우왓, 화장실 망가졌잖아요!
상인은 향유를 팔고 얻은 적지 않은 이익을 소중히 품 속에 집어넣고 멜한테 약속한 화장수를 조달하기 위해 왕도로 황급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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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4살 겨울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 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용살의 영웅
엘프의 중개자
영주민 175000명 난민 900
중요 도시 라펜 26000 린트브룸 5000 반드레아 특별 도시 9000명
동행
레오폴트(참모) 트리스탄(참모) 세리아(부관) 마이라(분노) 이리지나(분노)
기드(분노) 비트먼(왕국군 병단장 분노) 아고르(분노)
뒤누아(마그라드 총독)
휘하군
왕국군 제4병단 14700명
호위대 100명 3인조 최측근 100명
재산: 금화 19570 화장실 수리+보강(20)
경험 인수: 408명 자식: 55명+555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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