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반드레아 전쟁⑤ 거스를 수 없는 힘』
다드 산에서 터져나온 엄청난 양의 연기가 하늘을 잿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광경을 앞에 두고 병사들은 적과 아군 구분없이 멍청하게 입을 떡 벌린 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이 이래서야 싸울 수도 없겠군.”
앞으로 나온 반드레아의 사령관처럼 보이는 사내가 거북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저게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휴전하도록 할까.”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라는 생각과 함께 대답했다.
지금 전투를 재개한다고 했다간 의욕없는 농민군 훈련병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으리라.
적 사령관은 날카로운 시선과 함께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설마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말을 나누게 될 줄이야…….”
“음, 그렇지. 대체 얼마만인지.”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세리아를 바라봤다.
이 녀석이 누구였더라?
“맨 처음 만났던 침공군의 사령관입니다. 베이첵이라고 하는……그, 포로가 됐던 사람이요.”
“그때 이후 처음인가. 이야, 감개무량한걸?”
“……나 같은 건 신경 쓸 존재조차 되지 못한다는 건가.”
간신히 떠올렸는데 오히려 기분이 상해버렸잖아.
하여간 자기 멋대로군.
어쩔 수 없지, 화제를 바꾸는 수밖에.
“그건 그렇고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 반드레아에선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만.”
“당연한 소리를. 다드 산이 불을 뿜는다니 전설 속에서도 들은 적 없는 얘기다! 신의 분노인지 마왕의 부활인지……감도 안 잡히는군.”
“신의 분노라, 흔해빠진 관용어이긴 하다만 믿고 싶어질 지경이군.”
연기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양이 늘어나는 중이다.
이미 다드 산 남쪽은 잿빛 연기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늘 높이 치솟은 연기는 하늘 전체를 가려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아무튼 적과 아군이 이렇게 섞여있는 상황에선 무슨 일어날지 모르지. 일단 나눠두는 게 어떤가?”
“그래…….”
나와 베이첵은 산을 올려다본 채 움직이지 않는 병사들한테 호통을 치면서 억지로 남북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일단 대열을 가다듬으려 하긴 했으나 썩 잘 되진 않앗다.
잠깐 동안 휴전, 아군의 상태를 지켜보았으나 역시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그 중에서 특히 동요심이 큰 게 궁기병, 그리고 그들을 지휘 중인 루나였다.
“사, 산께서 노하셨다. 우리는 대체 언제 역린을 건드렸단 말인가……?”
평소엔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루나가 자기 몸을 끌어안은 채 떨고 있었다.
안심시키려고 끌어안았으나 떨림은 전혀 멈출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가랑이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나 “지금은 안 됩니다.” 라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조금 슬퍼지는군.
어쩔 수 없지, 이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어.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
이런 이상 사태에 레오폴트와 트리스탄조차 잠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았다.
“이변이 잠잠해지거나 현상을 유지할 경우엔 진군해야 합니다.”
“일단 후퇴해야지. 이미 몰트 남쪽까지 내려오겠다는 목적은 달성했거든.”
더욱 진군할 것을 주장한 것이 레오폴트, 후퇴를 주장한 게 트리스탄이다.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건 적 또한 마찬가지, 이변 때문에 반드레아 전체가 혼란에 빠져있는 지금 진군하면 수도 함락도 손쉬워진다.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미지의 사태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도박수를 둘 것까진 없잖아. 몰트 남쪽 국경선까지 후퇴한 뒤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게 맞다고. 이 상태로는 적이 쫓아올 걱정도 안 해도 되니까 말이야.”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변 속에서 적을 더욱 더 추격해서 비약적인 성과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당초의 성과를 견고히 할 것인가. 좀 더 얘기를 나눈 다음에 결론을 알려 주도록.
““그럼 하드릿 경의 생각을 여쭤보도록 하죠.””
이 놈들, 결국 나한테 책임을 전가했잖아.
하여간 누가 할 일인 줄 알기나 하는 거냐?
“최종 결단은 틀림없이 하드릿 경의 책무로군요.”
……알고 있어.
“……후퇴할까. 이미 목적은 달성했으니.”
진실은 아니다.
목적을 달성해서 후퇴하는 게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보이는 트리스탄. 너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었던 거 아니지?
반면 표정에는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알겠습니다.” 라는 말만 남긴 레오폴트.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너 사실은 조금 화났지?
후퇴 준비를 시작하려던 레오폴트를 불러 세웠다.
“내가 트리스탄의 의견을 선택한 사실이 마음에 안 드나?”
“결단은 하드릿 경께서 맡아야 할 일입니다. 지시가 내려진 이상 따르는 게 저의 일입니다.”
흠, 진짜 이유를 얘기해 둬야겠군.
“나는 말이지, 트리스탄의 의견을 고른 게 아니야. 처음부터 후퇴하고 싶었을 뿐이지.”
레오폴트가 시선만 내 쪽으로 돌렸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인지?”
나는 웃으며 레오폴트의 군복 깃을 세우면서 말했다.
“안 좋은 예감이 느껴져. 그것뿐이야.”
산이 불을 뿜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등골이 오싹오싹거리며 안 좋은 예감이 멈추질 않는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지금조차 그 오한은 멈추질 않았다.
“……예감 말고 특별히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까?”
레오폴트는 자기 깃을 고치면서 말했다.
“그래, 직감뿐이다. 기분이라도 상했나?”
다시 레오폴트의 깃을 세우면서 말했다.
놈은 곧바로 깃을 고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오, 하드릿 경은 확실히 강운만큼은 갖고 계십니다. 섣불리 생각한 결론보다는 순순히 따르는 게 정답입니다.”
“고맙다. ……잠깐만.”
이 자식 지금, 나는 운밖에 없다고 말한 거 아닌가?
“실례했군요. 완력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 준비를 하러 떠나 보지요.”
레오폴트는 그 말만 남기고서 곧장 그 자리를 비웠다.
이 자식, 표정만 싹 없애고 웃고 자빠졌네.
명령을 내리고서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을 즈음, 등 뒤에 충격이 느껴졌다.
피피가 내게 뛰어든 것이다.
“족장님! 산이……산이…….”
피피도 루나랑 똑같이 산의 이변을 보고 겁먹은 건가?
상냥하게 끌어안아서…….
“그게 아니다! 산의 연기가 이상하다! 짧아지고 있다! 산으로 빨려들어가는 중이다!”
“연기?”
연기는 흩어지는 법이잖아.
빨려들어간다니, 정말로 거대한 신이 빨아들이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니 산 주변은 연기 때문에 까맣게 변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개가 낄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아 있던 연기가 살짝 짧아진 것 같은 기분도 느껴졌다.
“걱정 마라, 피피. 우리는 곧 북쪽으로 돌아갈 거니까.”
안심시키려고 피피를 끌어안았으나 또다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길 님, 연기가 산등을 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세리아의 목소리다.
잘 보니 피어오르고 있던 연기는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다드 산의 등을 타고서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다드 산은 작은 산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도로 살펴봐도 흔한 뒷산 같은 게 아니다.
알테일/반드레아에 걸쳐 있는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산이다.
높이도 몇천 미터는 될 것이다.
“하, 하지만 벌써 연기가 산 중턱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소름이 돋는 오한이 한층 더 거세졌다.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는 연기, 지금은 아직 간신히 보이는 수준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진 거리가 있는 데다가 평원이니까 좀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망설임은 한 순간이었다.
“레오폴트! 모든 준비를 멈추고 북쪽으로 퇴각한다!”
“예……지금 당장 말입니까?”
토론을 할 생각은 없다.
“천막과 무거운 것들은 전부 버리고 대열도 필요없다. 장비도 전부 버려도 상관없어. 전원 후퇴……아니, 도망쳐라!!”
레오폴트도 한 순간 산을 살펴보았으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명령을 복창했다.
평소엔 불평만 늘어놓던 트리스탄도 똑같이 평범한 전령처럼 열심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퇴각……이라니 대열도 안 만들고서?” “자유롭게 도망치라니……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진 건가?”
병사들은 대열도 만들지 않은 채 각 병과대로 마구잡이로 섞여 그대로 북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훈련 때엔 절대로 해선 안 된다고 엄명을 받은 무질서한 후퇴, 나를 보자마자 “정말로 괜찮은 건가?” 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속도를 늦췄다.
“뭘 꾸물대고 있는 거냐! 뛰어라, 전력으로 뛰어서 도망쳐라!!”
내가 화를 내자 허둥지둥 모든 이들이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산에서 내려오던 연기 덩어리는 절벽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엄청난 속도다.
“야, 야아. 적이 도망치는데?”
“왜지……? 휴전 중이잖아.”
“설마 우리, 이긴 건가?”
살짝 남쪽에 있는 적 병사들도 혼란스러워하는 중이다.
베이첵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창을 크게 한 번 치켜올려 산 쪽으로 겨눴다.
시선으로 창끝을 쫓아간 적 병사는 산을 타고 내려오는 연기를 깨닫고서 비명을 내지르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이긴 건가……오오오오오――이겼다!! 아야!!”
“멍청아! 도망치는 거라고!!”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고 있던 병사를 뒤쪽에서 다른 병사가 때리고는 팔을 끌고 데려갔다.
맨 처음엔 무엇에서 도망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던 아군 병사들이었으나 연기가 점점 근처까지 다가오는 사실을 깨닫고 속도를 점점 높였다. 마지막에는 모든 이들이 전력 질주로 뛰기 시작했다.
“족장님! 분명 여기까지 올 겁니다!”
저건 연기 같은 게 아니다.
시야를 한가득 채운 잿빛 벽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이미 완전히 산을 내려온 그 벽은 평지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달리는 중이다.
“말보다 훨씬 빨라……엄청난 속도입니다!”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는데도 벽은 점점 그 크기가 커지는 중이다.
보병들은 도망칠 수 없을 거라며 비명을 내질렀고 기병이 하나씩 뒤쪽에 태워주기 시작했다.
“저길 봐주세요!”
세리아가 말을 타고 달려가면서 가리킨 건 한 농촌 마을이었다.
전장 바로 옆에서 농민들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전쟁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곳인데.
“집어삼켜졌잖아…….”
이웃 마을과 통째로 마을은 순식간에 잿빛 벽에게 집어삼켜졌다.
그 직후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저 연기는 불이 붙을 정도로 뜨겁단 건가……?”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마을 사람들은 전멸했을 것이다.
우리도 전장에서 멍하니 사태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심두멸각하면 불이라 한들…….”
“시끄러워!”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크롤을 한 대 쥐어박고 뛰게 만들었다.
열심히 도망치는 우리는 이미 상당히 북쪽까지 왔을 텐데도 불구하고 벽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있는 마을과 밭, 작은 촌락까지 모든 것을 불태우며 다가오는 중이다.
“대체 뭐가 신의 술잔치란 거야. 그야말로 악마의 숨결인데.”
잘 보나 우리 뒤쪽을 달려오던 반드레아 병사 중 일부가 발걸음을 멈추고 바위 뒤편에 몸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그냥 돌풍 같은 게 아니라고. 불이 붙을 정도로 뜨거운 화염이란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바위가 있는 곳까지 연기가 들이닥쳤고 금세 끔찍한 단말마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도 금세 사라졌다.
이제 정말 등 뒤가 신경 쓰일 지경이 됐을 그때,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세리아!”
세리아의 말이 바닥에 패인 홈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평소라면 그런 실수를 저지를만한 녀석이 아닌데 뒤쪽에서 느껴지던 압력에 말의 다리가 엉켜버린 모양이다.
“쯧!”
허둥지둥 말을 멈췄다.
나와 함께 달려가고 있던 마이라도 속도를 늦추려 했다.
“하드릿 경! 지금 멈췄다간 따라잡힐 겁니다!”
“먼저 가라, 나는 문제없어.”
“하, 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마이라를 노려보았다.
여자한테 이런 시선을 보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마이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갔다.
미안하다, 걱정해 주고 있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세리아를 두고 간다는 선택지 자체는 고려도 할 수 없다고.
“비켜라, 비켜!”
아군 집단은 이미 북쪽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는 반드레아 병사를 헤집으면서 세리아 곁으로 달려갔다.
“괜찮나?”
“네, 네에……하지만 말이…….”
세리아 자신은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지만 말은 다리가 부러졌다.
“시간이 없다. 올라타.”
짧게 말을 끝마치고서 세리아를 끌어당기고 내 앞으로 올려태웠다.
힐끔 뒤쪽을 쳐다보았다.
잠깐 멈춘 탓에 연기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버렸다.
“슈바르츠, 전속력으로 달려라.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놈은 걷어차버려도 상관없다.”
솔직히 지금까지 다가오던 연기의 속도를 고려해 보면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세리아를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만큼 하는 수밖에 없지.
히힝, 하고 살짝 울부짖은 슈바르츠는 검은 질풍이 되어 내달렸다.
앞을 달려가는 반드레아의 보병은 물론이고 기병조차 마치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따라잡는다.
이 녀석을 이길 수 있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연방까지 하루만에 달려갈 수 있을 듯한 속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따라잡힐 겁니다…….”
잿빛 연기는 그것보다도 빠르다.
뒤쪽을 돌아볼 여력조차 아깝지만 바로 코앞까지 닥쳐있을 것이다.
이미 뒤쪽에선 반드레아 병사들의 단말마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순간 옆에 있던 냇가가 눈에 띄었으나 부정했다.
안 된다고 직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은 슈바르츠를 믿고서 그저 도망치는 게 최선이다.
그러자 슈바르츠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내 쪽을 돌아보았다.
입에서 거품 같은 침을 문 끔찍한 몰골로 시선이 무언가를 호소하는 중이다.
“무거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리아, 나이프를 빌려다오.”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낸 뒤 말에게 씌우는 가죽 갑옷을 갈기째로 찢어버린 뒤 내던졌다.
또한 내가 입고 있던 갑옷도 벗고서 내던졌다.
그걸 보고 세리아도 옷과 함께 갑옷을 통째로 버렸고 속옷만 남겨두었다.
몇십kg 정도의 무게가 사라지자 한층 더 속도가 빨라졌다.
이미 주변 병사들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안 되나!”
그럼에도 다가오는 검은 연기의 홍수는 멀어질 줄을 몰랐다.
속도를 높인 슈바르츠보다 더 빠른 건지 점점 거리가 좁혀진다.
불길 옆에 있는 듯한 열기가 우리를 감쌌다.
슈바르츠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무겁단 건가.
“저를 버려주십시오! 저 때문에 에이길 님까지 죽고 말 겁니다!”
뛰어내리려고 하는 세리아를 붙잡고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듀얼 크레이터는 가벼우니까 문제없다.
“이 녀석인가…….”
드워프가 준 창, 이쪽은 30kg이 한참 넘는 무게를 자랑한다.
상당히 마음에 들던 물건이기도 하고 드워프와 우정을 맺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창을 손에 쥔 채 새까맣게 타버려도 소용없는 법이지.”
창을 뒤쪽으로 내던졌다.
이제 남은 건 슈바르츠한테 맡길 수밖에 없다.
검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세리아를 끌어안은 채 몸을 낮게 낮췄다.
또다시 한층 더 속도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단말마, 점점 거세지는 열기, 그리고 몸에 달라붙는 작은 입자들.
끝내 따라잡힌 건지 앞쪽까지 연기에 뒤덮여 시야가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루시를 만나기 전까지 죽고 싶진 않은데.
세리아도 이제야 잘 큰 미인이 됐는데 여기서 불타버리는 건 너무 아깝잖아.
울면서 내게 엉겨붙는 세리아를 포근히 끌어안아준 그때,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뒤쪽을 돌아보니 연기의 홍수는 멈춰 서 있었고 점차 천천히 무너지듯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직 루시를 만날 수 있는 모양이군.”
울음을 터트리는 세리아한테 살았다며 말해 주었다.
“흐에……흐에에에에엥! 에이길 님을 위험하게……넘어지다니……죄송해요오!!”
역시 엉엉 울면서 나를 끌어안는 세리아.
마이라와 이리지나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무래도 내 뒤쪽에서 살아남은 놈은 없는 모양이다.
“혹시 모르니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간 뒤 손실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레오폴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말했다.
하여간 조금은 걱정해 줘도 되는 거 아닌가?
“대장이 제일 먼저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번엔 조심해 주십시오.”
그런 소리 마라, 세리아가 더 울 거 아니냐.
살아남았으니 잘 됐잖아.
그 말만 남기고서 등을 돌리는 레오폴트. 트리스탄도 그 뒤를 따라갔다.
“방금 전에 크게 한숨 쉬던데. 역시 걱정됐던 거지?”
“대장이 죽으면 군대는 붕괴된다. 당연한 걱정이지.”
“아주 잠깐 돌아가려고 했지? 냉정한 당신답지 않게 말이야.”
“…….”
둘이서 무언가를 대화하는 중이다.
아, 레오폴트가 발을 걸어서 트리스탄이 넘어졌잖아.
아군끼리 싸우지는 말라고.
슬쩍 보건대 내 군대의 숫자는 줄어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들 도망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훌쩍.”
이제 남은 건 계속 울고 있는 세리아를 어떻게 하는 것뿐이군.
나는 남쪽,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토지를 지켜보면서 가볍게 탄식했다.
나와 반드레아 군은 한동안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가 공동으로 상황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재가 잔뜩 묻은 얼굴로 무기와 갑옷까지 전부 잃은 우리가 몽둥이나 돌을 손에 쥐고서 다툼을 벌이는 것도 너무 어처구니없지 않냐며 베이첵도 동의해 준 것이다.
“어땠지?”
“아군 희생은 거의 없습니다. 넘어진 몇십 명 정도가 삼켜진 게 끝인 모양입니다. 제후군도 거의 다 멀쩡합니다.”
그거 다행이군.
아슬아슬하긴 했으나 퇴각 준비를 하고 있던 게 잘 굴러간 모양이다.
슈바르츠의 그을린 꼬리를 잡아당기면서 레오폴트의 보고를 듣는다.
“한편 반드레아 군은 전사자와 구별하긴 힘듭니다만……3분의 1이 행방불명입니다.”
“그렇군……하지만 우리보다 한참 더 남쪽에 있던 거니까 말이야. 오히려 1만이나 살아남은 걸 대단하다고 해야겠지.”
앗! 꼬리가 빠져버렸잖아.
……뭐야, 불탄 털이 찢어진 거잖아. 깜짝 놀랐네.
임마 슈바르츠, 머리를 깨물지 마 아프잖아.
“척후병을 보내서 저 멀리까지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별로 유쾌한 보고는 아니겠군.
“연기……그것은 뜨겁게 달궈진 잿덩어리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듯합니다. 산을 중심으로 모든 방향으로 흘러나간 모양입니다. 피해는 막대, 아니 절멸 수준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군요.”
레오폴트가 정리한 척후병이 모아온 보고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타버린 마을을 떠올렸다.
“범위 내에 있던 마을과 도시는 하나도 빠짐없이 불타서 재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다드 산은 지금도 여전히 재를 내뿜는 중입니다. 산 정상 근처에는 거대하고 새빨간 화염도 보인다고 합니다.”
레오폴트와 나는 아직까지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반드레아 인원은 격렬한 동요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저 사람들 입장에선 자기네들 마을과 도시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보고이기 때문이다.
“산 근처에 있던 곳은 특히 재가 두껍고 뜨거운 탓에 아직 조사를 하러 갈 수는 없습니다만 조사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바깥 부분이 그 정도였으니 안쪽에 있던 곳은 가는 것 자체가 손해다. 생존자가 있을 리 없으니.
“……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이냐.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베이첵도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의 병사들도 도망치기 위해 무기와 갑옷을 전부 버린 상태다.
얼굴에 온통 재가 묻은 채 주저앉은 그 모습은 패잔병이라기보단 망령에 가까웠다.
“재는 산을 중심으로 원 형태로 퍼지는 중입니다.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마 반드레아 쪽 말고도 알테일 쪽까지 흘러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전대미문의 대재앙이로군.
“예. 남부 국가의 존재까지 포함하여 큰 변동이 일어날 겁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전략은 전부 무의미하게 바뀌었을 수도 있겠군.
“돌아갈까.”
나는 짤막하게 그 말만 남겼다.
반드레아와의 정전 교섭도, 전쟁 지속도, 그 어느 쪽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병사들도 한시라도 빨리 북쪽으로 돌아가고 싶으리라.
지금부터 재의 산을 뛰어넘어 진격한다고 말이라도 꺼냈다간 도망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거지?”
베이첵한테도 말을 건넸다.
“반드라는 산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이니……집어삼켜졌을 리는 없으니 보고를 하러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역시 이번 원정은 평범한 출격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쓸데없는 참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레오폴트가 베이첵 앞에 나섰다.
“반드레아는 고르도니아한테 귀군들이 탈주병 집단이며 우리나라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얘기해 두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음에도 베이첵은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진 않았다.
“탈주병……이라.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애초부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거다.”
베이첵도 주변 병사들도 낙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출격한 시점부터 이들에게 돌아갈 장소는 없었던 것이다.
“내 영지로 와라. 마음대로 하게 해줄 순 없지만 너희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나은 대우를 해주지.”
일부 병사들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베이첵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국을 배신하는 불명예……하하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나.”
그는 재로 뒤덮인 토지를 바라봤다.
“내 친가도……다드 기슭 쪽에 있었단 말이다. 일족에게 수치심을 안겨줄 수 없다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제 끝이군.”
베이첵도 휙 몸을 돌렸다.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는 돌아가라. 물론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크게 동쪽으로 우회해야 할 테지만…….”
“며칠 먹을 식량은 나눠주도록 하지.”
라고 덧붙였다.
“나와 함께 고르도니아로 갈 사람은 이곳에 남아있도록. 하드릿 경이 우리를 허투루 대하진 않겠다 하시는군.”
웅성거리는 반드레아 병사들, 1할 정도 되는 병력이 식량을 들고서 동쪽으로 떠났고 9할 정도는 제자리에 남았다.
살육전 이후에 산이 불을 뿜고서 같이 도망치게 되다니, 어지간해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도 묘한 인연이라 봐야겠지.
“처우는 돌아간 뒤에 생각하겠다. 나쁜 짓을 하면 목을 바로 꺾어줄 테지만 얌전히만 있으면 걱정하진 마라.”
그때 어깨에 떨어지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가을인데.”
쏟아져내리는 하얀 물체……중앙 평원, 심지어 남부에서 위쪽이라고는 해도 가을에 눈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험 삼아 손으로 쥐어보니 녹지 않고 이질적인 냄새를 내뿜었다.
“재라……뜨겁진 않은 것 같다만.”
“점점 쌓이기 시작하는군요.”
마이라가 말한대로 눈처럼 생긴 재는 땅바닥, 강, 그리고 논밭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칠 줄 모르는 잿더미 사이를 뚫고 우리는 북쪽으로 나아간다.
숲과 강도 순식간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색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가끔씩 머리 위에 쌓인 재를 털어내면서 우리는 북쪽으로 걸어갔다.
어중간한 형태이긴 하지만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남부 지역은 영원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리아, 옷을 입거라.”
“저 같은 얼간이는 알몸이면 충분합니다…….”
세리아는 속옷 차림 그대로 내게 엉겨붙어 있었다.
내가 죽을 뻔했던 사실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다.
“살았으니까 된 거 아니겠느냐. 자, 크리스토프가 보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속옷을 고쳐주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운 엉덩이가 훤히 보인다고.
“저 같은 멍청이는 크리스토프한테 알몸을 보여준 다음 딸감으로 쓰이는 게 딱 좋은 수준입니다.”
세리아는 옷을 입지 않은 채 그저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훔쳐보려던 크리스토프를 발로 걷어차고서 세리아한테 담요를 둘러주었다.
완전히 풀이 죽어버렸군.
이쪽도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
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3살 가을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 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영주민 163000 중심 도시 라펜 24000 린트브룸 4000
가족
논나(정실) 카라(측실) 멜(측실) 쿠우(애첩) 루우(애첩) 밀레(애첩) 레아(애첩) 미티(혼약) 마리아(혼약) 카트린느(측실 욕구 불만++) 케이시(용의자K) 리타(메이드장) 요구리(극작가) 피피(애첩) 앨리스(마법 소녀)
말스린느(애첩) 딸 스테파니(애첩) 브리짓(욕구 불만+++) 펠리시(애첩)
세바스찬(집사) 도로테아(애첩, 왕도) 멜리사(애첩 왕도) 알마(왕도)
아이
스우 미우 예카테리나 아마타 아나스타샤(딸) 안토니오 클로드 길버트 라이너 바르톨로메이(아들) 로즈(의붓딸)
인외
라미(애인 뱀) 미루미(인어) ???(수수께끼의 풀)
부하
세리아(낙담) 기드(호위대) 크롤(허무 승려) 이리지나(지휘관) 루나(지휘관) 루비
마이라(치안관) 포르테(연수 감독) 그레텔(내정 연수)
레오폴트(참모) 아돌프(내정관) 트리스탄(참모B)
클레어&롤리(전용 상인) 슈바르츠(말) 릴리안느(여배우)
군: 14200명
보병: 7150 기병:800 궁병: 950 궁기병: 3900 (제후군 1400)
대포: 10문 대형포 10문 전선에 있던 포는 버림
반드레아 군? 9000명
재산: 금화 470닢
경험 인수: 233명 자식: 48명+555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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