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묘지의 이변 전편』
한밤중 라펜 바깥, 나는 지금 앨리스와 이리지나 그리고 크롤을 데리고서 어디론가 걸어가는 중이었다.
“어둡네……호잇.”
앨리스가 휙 하고 손가락 끝에 작은 불을 일으켰다.
그녀는 굉장히 희귀하다고 알려진 마법사, 그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술사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은 그 안에 담긴 불꽃 마법의 상징, 마력을 전부 다 소진했다간 머리가 전부 새하얗게 바래버린다.
“밤에 산책하는 것도 괜찮군 그래! 달도 예쁘고 무엇보다 조용하군!”
이리지나는 창을 짊어진 채 기분 좋은 모양새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중이다.
방금 전부터 계속 나뭇가지랑 부딪히는 중인데 그걸 꺾어버리며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한밤중의 정적을 깨부수고 있는 건 네가 내고 있는 소리 아니냐?
“왜 제가 여기 있는 걸까요…….”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리지나 뒤에 모습을 감추듯이 크롤이 뒤따라갔다.
횃불을 든 채 겁먹은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람인지 토끼인지, 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아무것도 없네.”
앨리스는 손가락에 피운 불의 크기를 키워 확인했다.
“와하하하하하하! 바람이 시원해서 좋구나!”
이리지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히익!”
크롤은 작게 비명을 내지르고 이리지나의 등 뒤에 숨었다.
“너 남자잖냐……여자 등 뒤에 숨지 마라, 꼴사납긴. 숨을 거라면 최소한 내 뒤로 숨어 둬.”
16살이 된 남자가 꼴사납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하여간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냐? 전장도 아니고 갑자기 화살이 날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곳은 라펜의 도시벽 바깥 부근이긴 하지만 도적이나 마물이 돌아다니는 장소는 아니다.
“하, 하지만 에이길 님……이곳은…….”
“응?”
“여긴 묘지잖습니까! 무섭다구요!”
그렇지, 좀비라도 튀어나왔다간 경계해야 하긴 하는데 말이야.
이 세 명을 데리고서 한밤중에 묘지를 돌아다니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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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저녁
마이라에게 불려나간 나는 거실에서 서로 마주본 채 가볍게 술을 홀짝였다.
듣자하니 별로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운 좋게도 지금 이곳엔 아무도 없다.
“참 수상쩍은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영 자신이 없어보이는 서두와 함께 마이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바깥 묘지에 좋지 않은 것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처음엔 시덥잖은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목격자가 여럿 있는 데다가 치안대가 옆에 있어도 말이 전혀 바뀌질 않더군요.”
“단순한 허풍이라면 치안대가 나온 순간 허둥지둥 도망치든지 바로 고개를 박겠지.”
마이라의 치안대를 개무시할 용기 있는 시민은 거의 없다.
“낮에 한 번 확인을 해 보긴 했습니다만 딱히 이상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라 단정 지어도 괜찮긴 합니다만 시기가……별로 좋지 않다보니 일단 보고를…….”
“그렇지, 지금은……썩 좋지 않아.”
아레스, 아트로아와 전쟁을 벌이고 난 뒤 그 전쟁에서 죽은 천 명의 병사가 매장된 곳이 바로 라펜의 묘지다.
매장된 지 아직 1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인생에 만족한 뒤 죽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전사한 사람들이니 생에 미련이 남았다거나 사랑하는 가족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묘지는 정기적으로 물로 청소하고 있으니 좀비의 소행이라고 믿고 싶진 않습니다만…….”
묘지가 불길한 기운에 잡아먹혔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라펜까지 데리고 오는 데에 며칠이나 걸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 사이에 원령이 생겼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근데 낮에 찾아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좀 이상하군.”
좀비는 태양빛 아래에선 별로 움직이지 않긴 하지만 흡혈귀들처럼 빛을 피하고 숨을 정도의 지능은 갖고 있지 않다.
적당히 그늘 뒤에 숨든지 태양빛 때문에 못 움직이고 있을 테니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밤에 탐색해 봐야 할 수도 있어.”
좀비란 시체에 사령이 깃들어 움직이고 있을 뿐, 엄밀히 말하면 죽은 본인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함께 싸웠던 병사의 육체가 언데드가 되어 밤길을 헤메고 있다 생각하니 불쌍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건은 크게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병사들의 사기와 시민 감정에도 문제가 생기니까요.”
가족들의 시체가 당장 지금도 밤길을 떠돌아다닐지 모른다.
유족이 그것을 알게 되기 전에 처리해 두는 게 내 의무이리라.
“그럼 묘지 쪽 탐색은 내가 직접 하지.”
“네에!? 영주가 직접 위험한 조사를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그까짓 좀비한테 큰일이라도 당할 것 같아?”
“그건……그렇긴 한데요.”
좀비는 약하다. 어쨌거나 인간의 몸은 그대로인데 지성이 없는 놈들이니 당연한 얘기다.
덤으로 살점이 물러져 약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남성이라 한들 무기만 있으면 쓰러트리는 건 어렵지 않다.
“아무튼 정말 움직이고 있으면 내가 직접 쓰러트려줘야 하는 법이지.”
그들을 죽게 만든 건……대부분 아레스 병사이긴 하지만 데리고 간 것도 전쟁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도 바로 나다.
죄악감은 없지만 뒤처리를 해줘야 할 의무는 있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아니, 너는 치안데를 데리고서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있어.”
불만스럽다는 듯이 삐죽 솟은 입술에 손가락을 맞댔다.
“낮에 네가 묘지를 조사했다면서? 그럼 병사들이랑 시민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이 돌고 있을 거다.”
수많은 전사자가 매장된 묘지에서 불손한 움직임, 다들 좀비나 스켈레톤을 연상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너는 치안대랑 술이라도 한 잔 해. 아무것도 없었다고, 겁쟁이들이 그냥 잘못 본 거라면서 농담이라도 해 두라고. 오늘밤 확인한 다음……사실이라면 없애 둘 테니까.”
으음, 병사를 데리고 가면 의미가 없단 말이지……그렇다면.
“배가 고프다!!” “오늘은 소고기 스테이크일 겁니다.”
훈련을 끝마친 이리지나와 세리아가 돌아왔다.
마침 잘 됐군. 같이 가야겠어.
이리지나와 세리아는 가족이다. 사실을 얘기해도 전혀 문제없다.
“좀비……그건 안 되지!! 얼른 퇴치해야 한다!”
소리가 크잖아. 저택에 다 울리니까 소리 좀 낮춰.
“좀비 말입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어서 처리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세리아도 같이 갈 생각으로 의욕이 가득 찬 모양이다.
하지만 문득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좀비, 스켈레톤이라면 쓰러트리겠습니다. 만에 하나 구울이 나와도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혹시라도 진짜 유령은 아니겠죠? ……검이 통과되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그러고 보니 세리아는 이래 보여도 괴물이나 유령 같은 걸 꽤 싫어한다.
좀비와 스켈레톤은 원래 시체였기 때문에 검이 먹힌다. 이런 식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라면 문제없다.
하지만 물리법칙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나 유령 같은 종류는 공포가 더욱 앞서버리는 것이다.
“하하하, 있다 해도 마물일 뿐이야. 유령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때 문이 열리더니 나한테는 케이시가, 「보이지 않는」 사람 입장에선 허리춤 정도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귀여운 봉제인형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밥은 뭐려나~)
왔구나 케이시. 소고기 스테이크랑 고구마, 호박이 잔뜩 든 스프라던데.
(와―기대돼~ 호박 완전 좋아~)
케이시는 이리지나를 경계하면서 크게 돌아 내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는 사람한테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도 많다.
꼼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일수록 보기 쉬운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리지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층 더 둔감한 건지 기척과 목소리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어째서인지 노린 것마냥 케이시를 짓밟는다거나 위에 앉는 둥, 케이시는 늘 그 사실에 화를 내고는 한다.
납작해진 그녀가 울면서 날아가는 모습을 본 게 한 두 번 있는 게 아니다.
한 번은 굉장히 화가 난 채 유령화까지 해서 침상 위에 서 있던 경우도 있었는데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결과 요즘엔 아예 포기해서 그냥 피해버리기로 한 모양이다.
이런 게 만약 꿍꿍이속이 있을 법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평소 이리지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아, 이 녀석한테는 안 보이는 거구나.” 하고 납득이 되는 게 문제다.
“아무튼, 유령이 있을 리가 없잖아. 괜찮아.”
““…….””
“그렇지! 있을 리가 없다!”
이리지나만 혼자 동의해 주었다.
세리아는 추욱 어깨를 늘어트렸다.
“무, 무조건 있어요! 갑자기 반투명한 무언가가 휙 하고 튀어나올 거라구요!!”
세리아는 케이시를 보면서 후들후들 고개를 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한테는 약하구나. 하지만 그 부분도 귀엽다.
(있잖아, 무슨 얘기야?)
흥미가 솟은 케이시가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려두었다.
그녀 같은 경우엔 좀비한테 다칠 걱정도 없겠다 진짜 위험할 경우엔 날아서 도망칠 수도 있다.
사정을 설명해 봐야겠어.
(완전 싫어)
완벽히 부정당했다.
(밤에 도시 바깥을 나가기만 해도 무서운데 묘지를 가다니 말도 안 돼 괴물이 튀어나오면 어쩔 거야!)
그러고 보니 케이시는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데다가 상당히 겁이 많았다.
(무서운 얘기를 듣게 되면 밤에 화장실을 못 간단 말이야)
너, 화장실도 가는구나.
(밤에 걸어가는 게 무서우니까 밤에 일하는 메이드 분들 등 뒤를 딱 달라붙어서 가거든)
“……요즘 메이드 사이에서 「순찰을 도는 중에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하지만 결코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라는 괴담이 유명하던데……당신 짓이었습니까?”
(나는 오히려 뒤를 돌아봐 주는 게 더 든든한데 말이야)
아무튼 이리지나는 같이 데리고 가야겠군.
그리고 세리아가 문제인데…….
“저, 저도 가겠습니다! 에이길 님께서 나가시는데 제가 안 갈 수는 없습니다!”
표정이랑 말하는 내용이 전혀 다르군.
표정이 가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중이다.
“너는 집을 지키고 있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저택을 잘 지키라고.”
라펜에서 내 저택만큼 안전한 곳도 달리 없다.
정통 마그라드 습격 이후 경비 태세도 한층 강화됐기 때문에 세리아 한 명이 남는다 해도 특별히 의미가 있진 않지만.
“아,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저택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변명거리를 줘야 한단 말이지.
“나랑 이리지나 둘이서만 가게 됐군. 잘 부탁한다.”
“그래! 맡겨만 둬라!”
“이리지나 씨가 계신다면야…….”
마이라도 납득한 모양이다.
단순히 정면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이리지나는 아마 마이라보다 강하다.
특히 언데드 같은 마물을 상대로는 베는 것보다 파괴하는 공격이 필요해지는 법이다.
기량뿐 아니라 힘이 실린 공격도 날릴 수 있는 이리지나는 최적의 상대다.
“두 사람은 안 됩니다!”
하지만 세리아는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뺨을 쓰다듬으면서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흐아앗! 왜 쓰다듬으시는 겁니까! 이리지나 씨랑 두 분이서만 가셨다간 에이길 님이 욕정해서 행위가 시작됐을 때 뒤쪽이 무방비해질 겁니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사리분별을 안 하는 건 아니라고.”
“만약 한바퀴 돌고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해버릴 수도 있지.
달빛이 비치는 묘지에서 한바탕 구르는 것도 기분이 좋을지 모른다.
“한 명 정도는 더 데리고 갈까.”
“할 생각이었던 거군요.” “당연히 하시겠죠.” (밝힌다니깐)
어쩌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어떤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갓 구운 빵을 산처럼 끌어안고 걸어가는 마리아랑……앨리스, 새빨간 머리카락의 그녀는 요즘 엉덩이를 후벼파는 것 말고 다른 취미를 익히기 위해 마리아한테 요리를 배우는 중이다.
오늘은 별채에 있는 여자들한테 빵을 구워준 모양이다.
“앨리스는 어떨까?”
“앨리스 말인가요? 확실히 마법은 강력하다 들었습니다만…….”
“앨리스의 불은 대단하지! 눈앞에서 본 나도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녀의 마법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하지만 앨리스 자신한테 전투 경험이 없기도 하고 백병전은 전혀 불가능하다.
“이번엔 있다 해도 좀비나 스켈레톤이니까 말이야. 이리지나랑 내가 있으면 앞에서 지켜줄 수 있겠지.”
만약 지성이 남아있는 적이라면 허를 찔릴 가능성도 있으니 망설였을 테지만.
빵을 전부 다 옮긴 앨리스를 불러세우고서 사정을 설명했다.
“알겠어. 따라갈게.”
곧바로 돌아온 대답. 세리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밌으니 턱 밑을 쓰다듬어 보았다.
“흐에엥……아니, 저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그것보다 앨리스는 괜찮은 건가요? 묘지라구요.”
“응, 나는 딱히 괴물이 무섭지 않거든. 에이길 님도 같이 가잖아?”
“으으으…….”
얌전하고 말수가 적은 앨리스가 전혀 무서워지 않는 모습에 세리아가 복잡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재밌으니 머리를 쓰다듬어야지.
“하으, 뭐라 형용하기 힘든 패배감이 느껴져요.”
자, 이제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하드릿 경이 두 분을 한꺼번에 안아버리면 본말전도네요.”
이번엔 마이라가 쓸데없는 얘기를 해버렸다.
한밤중 묘지 안에서 난교를 벌일만큼 짐승이 아니라고.
“웬만하면 한 명 더, 그리고 남자를 데려가 주세요.”
남자라……비밀을 얘기할 수 있고 전투도 가능한 남자라면 레오폴트, 맥, 기드, 크리스토프 정도인가?
“레오폴트가 다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란 말이지.”
녀석이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간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못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
맥의 공병대는 수교 건설 때문에 야영 중, 기드는 아내랑 함께 이틀 동안 위안 휴가를 받았습니다.”
마이라가 대답했다.
단순히 소문을 확인하는 것뿐이고 마물이 나올지 어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불러들일 것까진 없단 말이지.
특히 기드는 지금쯤 아내 위에서 허리를 돌리고 있을 테니 방해하고 싶지 않다.
“크리스토프인가…….”
“그런 걸 데려 갈 바에 허수아비라도 끌고 가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그 녀석이 들으면 울겠다.
그래 보여도 적 앞에서 도망을 친 적은 없다고.
적 바로 앞에서 낙마한 다음 실신한 적은 있지만 말이야.
“그럼 크롤은 어떠냐! 그 녀석은 제법 근성도 있더군. 실전에서 적을 베어본 적도 있지.”
그래, 이리지나랑 같이 왕도 습격 때 싸웠다 그랬지?
그럼 크롤로 정해야겠어.
“뭐, 그 녀석이라면……최악의 경우 에이길 님의 방패라도…….”
세리아가 불손한 얘기를 중얼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해야겠군.
크롤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여긴 내 집이니까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다.
“로라는 끝부분을 핥고……미라 씨는 불알 쪽을 부탁할게……아아, 좋아!”
크롤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여자 두 사람한테 가랑이를 빨게 시키고 있었다.
이 녀석은 일단 다른 하인들과 다르게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개인실을 갖고 있다.
하인 중에선 부유한 편이라고는 해도 별로 넓지도 않은 방 안에 왕도에서 데리고 온 부모와 자식을 먹여살리고 있는 것이다.
“저녁도 먹기 전에 사치스러운 놈이로군.”
내가 온 걸 눈치챈 크롤이 허둥지둥 바지를 끌어올렸고 부모와 자식은 방 구석으로 물러났다.
뒤따라오던 세리아와 마이라의 시선은 마치 얼음장 같았다.
“요즘 장작이랑 목욕탕 물 관리를 안 한다 싶었더니……이 녀석이 진짜…….”
크롤은 내 여자들이 사는 집 안에 들일 수 있는 특별한 남자 부하로 일하는 중이다.
그냥 힘들기만 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물 퍼올리기나 장작 패기 같은 건 새롭게 고용한 소년한테 떠넘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 여기저기서 물고 빨고 있던 알마랑 같이 있는 모습을 통 보질 못했네.
“너한테 명령이다. 오늘밤 라펜 묘지로 갈 거니까 무기를 들고서 따라와.”
“묘지 말인가요? 그리고 무기……저는 하인이라…….”
날카롭게 세리아가 노려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올게요!”
이제 인원은 갖춰졌군.
한밤중에 산책이라도 나가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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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묘지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조용하구만.”
“응, 분위기도 좋아.”
앨리스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조용하고 선선하군!”
이리지나는 목소리가 커다래.
“아뇨아뇨아뇨, 이상하거든요! 묘지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잖아요!”
어째서인지 세리아가 괴물을 무서워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귀엽게 느껴지지만 크롤은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난다.
내 뒤쪽에 숨으려고 하는 꼴사나운 16살 남자의 엉덩이를 찰싹 하고 때렸다.
“저기……뭐가 움직였어.”
앨리스가 휙 하고 손가락을 겨눴다.
손가락으로 피우고 있던 불이 한층 더 크게 불타오르더니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녀가 가리킨 곳엔 딱히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해. 잘못 봤나봐.”
“기분 탓이겠지. 좀비한테는 들킬 테니까 몸을 감추려 하는 그런 지능이 있지 않거든.”
만약 지금 그게 좀비였더라면 살점을 찾아 일직선으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응……그럴 수도.”
다시 선두에 이리지나, 그 뒤에 나랑 앨리스, 또 뒤에 크롤이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느껴졌던 무언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은 옅어졌고 나는 앨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동시에 이리지나의 콧노래를 들으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때 이리지나가 들고 있던 횃불 불빛이 땅바닥에 사람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비췄다.
한 순간 멈춰 서서 확인해 보았지만 이번엔 잘못 본 게 아니다.
“두 개……쓰러져 있어! 알몸이군!”
콧노래를 부르다 곧바로 소리친 이리지나는 횃불을 땅바닥에 떨어트리고 창을 손에 쥐었다.
이런 곳에 알몸으로 있다는 건 흙 아래에서 기어나온 좀비일 가능성이 높다.
나도 거대 창을 손에 쥐었고 크롤은 방패를 들었다.
너, 지금은 검을 들어야 할 때잖냐.
앨리스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녀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주변을 불바다로 바꿔버릴 수 있다.
두 마리의 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드는 걸 기다리고 있었으나 놈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감은 금세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저거……좀비가 아니라 그냥 버려진 시체 아니냐?”
묘지에 묻는 것도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평소 혐오하던 사람이나 부랑자의 시체는 묘지에 그대로 버려두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게 바로 좀비나 스켈레톤의 원흉이기 때문에 공적으로는 금지되어 있긴 하지만.
“엇! 숨이 붙어있군!”
확인하려고 했던 이리지나가 소리친 채 달려갔다.
우리도 허둥지둥 뒤를 따라갔다.
“어이, 어이! 정신 차려라! 무슨 일이 있었지!?”
확인해 보니 알몸의 남성, 나머지 한 명은 여자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으……으……저주받았……아…….”
남자는 시체로 착각할 정도로 야위어있었고 눈도 공허한 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여자의 경우엔 피골만 상접한 모습이 된 채 눈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저주받았다고?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여자친구랑…………사랑을 나누다……괴물……사령……사…………아아………….”
남자의 입에서 기나긴 숨이 새어나오더니 그것을 끝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죽었군.”
이리지나는 남자를 땅바닥에 놔두었다.
“에이길 님, 이거. 이 사람들 여기서 했던 것 같아.”
앨리스가 나무 뿌리 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남자와 여자의 옷이 떨어져 있었다.
“묘지에서 몸을 섞다니……아니,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무슨 생각으로 묘지에서 사랑을 나누려 했던 건지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깔끔하게 정리된 옷은 행위를 끝마치면 곧바로 입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몸이 약해져 버림받은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고 봐야하리라.
하지만 그들이 죽은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극도의 빈약사였다.
심지어 좀비나 스켈레톤한테 당한 상처도 아니다.
혹시 몰라 목덜미를 확인해 보았으나 송곳니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야?”
“으음, 모르겠군!”
“마지막에 사령이라고 말했어…….”
세 사람은 머리를 쥐어싸매고 있었다.
나도 정체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무언가의 소행이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마물이겠지. 다들 경계를 풀지 마라.”
이리지나와 크롤이 무기를 단단히 쥐면서 주변을 전체적으로 경계했다.
앨리스는 방금 전하고 똑같은 자세지만 머리카락이 한층 더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정적, 무언가 착각이라도 한 건가 싶어진 그 순간.
스스슥, 하고 흙을 가르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아니, 왼쪽……아니군, 전부다!”
이리지나가 소리쳤다.
주변 묘지의 흙이 솟아오르더니 썩은 팔이 수없이 많이 튀어나온 것이다.
“쯧.”
“으아아아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혀를 차버렸다.
우리 주변에서 좀비가 일제히 살아난 광경.
이런 게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으니 누군가의 소행인 건 명백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위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이다.
“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의미없는 신음소리를 내지르면서 다가오는 대량의 좀비들.
썩은내가 주변 일대를 한가득 채워버렸다.
“에잇, 짜증나는 놈들!”
창을 옆으로 휘둘러 두 좀비의 허리를 절단했다.
부패수가 이리저리 튀기고 창에도 달라붙자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한 마리, 두 마리라면 더러워질 테니 적당히 발로 걷어차버릴 테지만 숫자가 많다보니 그럴만한 여유는 없다.
“오른쪽으로 달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일 먼저 오른쪽으로 달려갔고 길을 가로막은 좀비 무리떼한테 무기를 휘둘렀다.
한 놈의 머리를 날려버린 뒤 뭉쳐있는 놈들은 한꺼번에 창을 때려박았다.
결국엔 시체로 된 마물,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손쉽게 몸이 찢기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뚫는 데에 집중하는 사이 한 마리가 옆에서 날 물어뜯으려 하길래 팔꿈치로 힘차게 공격을 먹인 뒤 발로 걷어차버렸다.
저 멀리 날아간 좀비는 우뚝 솟은 나뭇가지에 박힌 채 버둥댔지만 뒤이어 목을 잘라버리니 축 늘어져 힘을 잃었다.
“크롤, 앨리스한테 다가가는 적을 처리해! 노려야 할 부위는 목, 그게 힘들면 다리를 베어내고 도망쳐라!”
어느새 대열은 내가 선두, 중간에 앨리스와 크롤, 제일 끝에 이리지나가 서 있었다.
“오오오오오오!”
이리지나는 창을 머리 위에서 크게 회전시키는 중이다.
지성이 없는 좀비는 경계심 없이 다가온 다음 창에 맞닿자마자 크게 떠밀려 날아갔다.
저 정도의 기세가 담겨있으면 닿은 게 칼날이든 손잡이든 상관없으리라.
“이 자식! 이게!”
나와 이리지나가 폭주하고 있는 사이 빈틈을 찔러 다가온 좀비한테 크롤이 방패를 때려박았다.
좀비가 뒤집어진 걸 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크롤, 몸을 베어내도 의미가 없다, 냉정하게 노려! 앨리스 너는 놈들이 몰려있는 부분을 불태워라!”
그녀의 마법은 화염, 도시에선 되도록 쓰지 말았으면 하는 종류지만 이곳은 묘지이기도 하고 제초도 되어 있기 때문에 불이 번질 위험성도 낮다.
“응, 갈게.”
순식간에 머리 위에 불로 된 구슬이 세 개 나타나더니 제각각 몰려있는 좀비들 무리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폭발했다.
비명소리는 없지만 한층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수많은 좀비가 불타버렸다.
“크윽……많군.”
하지만 그 불기둥 빛 때문에 한층 더 많은 좀비가 보였다.
대체 얼마나 있는 거지?
좀비가 이렇게 동시에 생겨날 리는 없다.
심지어 이 묘지는 옛날에 비하면 훨씬 더 꼼꼼하게 관리를 하는 중이니 사악한 기운이 깃들 여지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하드릿 경! 솔직히 숫자가 너무 많군. 이대로 계속 도망쳐도 점차 밀릴 뿐이다!”
“……마력이 오래 못 버텨.”
“히이이이이이익, 오지 마!”
묘지 한가운데까지 들어가버린 탓에 좀비 군단을 헤집으면서 꽤 먼 거리를 달려나가지 않는 이상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지만 운동 능력이 특히 낮은 앨리스한테는 위험한 선택지다.
게다가 우리가 도망치면 뒤를 쫓아 좀비들이 묘지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묘지를 둘러싼 울타리는 가끔씩 나타난 언데드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게끔 만들어둔 것이지 이런 식으로 대량 집단 출몰은 상정해 두지 않았다.
다가오는 좀비의 다리를 베어내고 머리를 짓밟으면서 생각했다.
몰려오는 집단에 불구슬 몇 개가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잿더미로 바꿔버렸다.
앨리스의 머리카락 색깔은 진홍빛에서 살짝 분홍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긴 어떤가!”
이리지나가 가리키는 손끝, 그것은 묘지 한가운데에 있는……작은 석조 구조의 영묘였다.
작은 도시 중에선 그럭저럭 역사가 있었다던 라펜.
그 안에는 당연히 전통적인 묘지가 있고 그게 바로 이 영묘였다.
인구가 늘어난 지금은 사망자도 늘어났기 때문에 공간이 현저히 부족해 묘지가 확장됐던 것뿐이다.
“돌로 된 건물인가……문을 닫으면 괜찮겠어.”
시체에 불과한 좀비가 아무리 떼지어 온다 한들 돌로 된 튼튼한 문을 쪼갤 수 있는 건 아니다.
저기에 틀어박혀 아침을 기다리면 좀비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되든지 이상한 점을 눈치 챈 군대가 달려와서 처리해 버릴 것이다.
“좋아, 다들 저기로 도망치자!”
“위험해!”
이리지나가 소리치고는 바닥을 앞으로 굴렀다.
어둠 쪽에서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갔다.
“앨리스, 엎드려!”
“흐, 흐에?”
대응할 수 없는 앨리스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창으로 튕겨내고 크롤한테 날아가는 화살은 손으로 막아냈다.
결과 복부에 푹 하고 화살이 맞긴 했으나 다행히 크게 힘이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복근으로 막아냈다.
뽑아내니 녹이 슬어 있었다……염증이 생길 것 같아서 영 꺼림칙하군.
“아야아……하아, 이거야 원.”
화살을 쏜 놈들은 숨지도 않고 진로를 가로막듯이 영묘 앞으로 걸어나왔다.
“스켈레톤……?” “지금 이 순간에 말이냐!?”
우리 앞을 가로막은 건 활을 들고 있는 스켈레톤 다섯 마리, 그 외에도 너덜너덜한 창을 들고 있는 개체도 다섯 마리 정도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켈레톤은 좀비보다는 약간 더 지성이 남아있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전술을 사용할 수 있을만큼 높은 수준의 지성이라 할 수는 없다.
심지어 집단으로 대열을 짜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뒤쪽에서 쫓기다 도착한 유일한 피난처에 매복이라……이건 마치.”
무언가가 조종하고 있는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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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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