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정통 마그라드 소탕 작전③ 결판』
토고르 협곡 내부 아침
“야습을 오진 않았군요.”
세리아가 옆에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놈들은 정예병으로 비좁은 지형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겁니다. 야습을 통해 혼란을 일으키는 건 약간 유리해지긴 합니다만 그 빈틈을 타 우리 부대가 협곡 바깥으로 돌파할 가능성을 남기게 될 겁니다.”
레오폴트가 말한대로 앞뒤로 둘러싸여버리면 아무리 강력하다고는 해도 숫자로 밀어붙여서 끝장이니까 말이야.
“우회하는 것도, 반포위망을 만들 수도 없어요…….”
“그걸 알고 일부러 여길 전장으로 고른 거겠지.”
방법은 단 하나, 놈들을 정면에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협곡 내부에 늦은 아침해가 들어선 뒤부터 계속 적진이 시끄럽다.
“어이, 하드릿! 해가 떴지 않나! 어서 싸우자꾸나!”
길드레스가 방패를 검으로 치면서 텅텅 소리를 내고는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정말로 즐거워 보인다.
“대포나 불화살로 한꺼번에 불태울 순 없을까요?”
“세리아, 그건 어제 말했잖아. 마그라드처럼 단순한 상자라면 쓰러트릴 수 있을 테지만 놈들은 상황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인다고……섣불리 무방비한 공성 병기를 앞으로 내세웠다간 순식간에 당할 거다.”
“일단 불화살은 쏴보도록 하지요.”
레오폴트가 신호를 내리자 동시에 공성용 불화살이 쉭 하고 발사됐다.
하지만 그것은 철벽과도 같은 방패에 가로막혔고 땅바닥에 붙은 불도 두 번째 사격을 날리는 동안에 간단히 사라져버렸다.
놈들은 상자처럼 움직이는 게 다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굉장히 재빠른 것이다.
“하드릿! 이제 여름인데 난로를 피워서 뭘 어쩌려는 거냐? 와하하하!”
“그 다음에 이런단 말이지…….”
선두에 서서 수많은 불화살을 막아낸 길드레스가 웃음을 터트린다.
에잇, 열받아.
“역시 정공법으로 갈 수밖에 없겠어.”
“예, 정밀도는 떨어집니다만 각도를 높인 거대 석궁과 대포를 이용해 혼란을 유도하고 정면에서 병력을 충돌시키는 게 최선책일 겁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쓸 수 있는 전술 폭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상당히 수를 쓰기 힘든 상황이로군.
“패배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시간을 많이 들이면 패주한 아트로아 군이 태세를 정비할 시간을 얻게 될 테고, 무엇보다 고작 100명을 상대로 고전하기 시작하면 주변 폴리스가 우리에게 길을 내어준 것에 대한 의미를 의심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나……뭐 달리 수는 없나?”
“꼭 없는 건 아니지만……주력으로 사용할만한 건 아니네요. 정공법이 먹힌 다음에 써야 하는 게 기책이니까요.”
역시 싸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는 창을 치켜올렸다.
“총공격이다. 낮이 지나가기 전에 뚫고 간다!”
“““오오―!!””
어제 일방적으로 쓰러졌던 병사들도 어찌저찌 사기를 회복한 상태다.
단숨에 쓰러트려 주마.
굉음이 울려퍼지고는 대포가 불을 뿜었다.
거대 석궁에서 차례차례 거대한 볼트가 발사되기 시작했다.
지형 문제 때문에 그렇게 많은 숫자를 설치하지 못했고 심지어 아군이 일렬로 서 있는 상황이라 오사하지 않게끔 후방에서 각도를 높여 발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데다가 적의 숫자가 고작 100명이다보니 명중률 자체는 크게 기대할 수 없지만 방패로는 막을 수 없는 공격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적의 사기를 꺾어낼 수 있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돌격――!!”
동시에 보병이 장창부대를 선두로 돌격을 시작했다.
어제 봤던 걸 생각해 보면 보병끼리 육탄전을 벌일 경우 승산은 사실상 없다.
심지어 맞붙을 수 있는 숫자는 서로 20명 정도……이런 상황에선 일방적으로 당할 게 분명하다.
따라서 일부러 장창부대를 선두에 내세워 돌진,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려 한 것이었으나.
“빈틈!”
장창의 날끝이 적에게 닿기 직전, 적진 앞쪽에 있던 인원들이 땅을 기듯이 주저앉았다.
동시에 놈들이 방패로 창을 튕겨낸 탓에 장창이 전부 하늘 높이 날아가버렸다.
“쓰러트려라!”
빈틈을 주지 않고 적이 간격을 좁혔다.
이렇게 된 이상 장창은 그냥 기다란 봉에 불과하다.
순식간에 제일 앞에 서 있던 20명이 쓰러졌다.
“장창부대를 구해라!”
“덤벼라!”
허둥지둥 앞으로 밀고나간 보병대는 방패를 내밀고서 돌진했고 마찬가지로 방패를 쥔 적과 충돌했다.
“끔찍하군…….”
충돌한 순간, 아군은 얼음 위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전부 다 뒤쪽으로 튕겨날아갔다.
“뭔가 날아왔나?”
“아니, 우리 딸의 몸통 박치기보다 가벼워서 뭐가 있는 줄도 모르겠던데.”
아레스 병사들은 제각각 농담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겁먹지 마라! 계속해서 돌격해라! 4번, 6번, 물러나라, 7번은 앞으로!”
크게 당한 부대는 후퇴하고 곧장 다른 부대가 적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격파당해 다시 패주, 다른 부대가 그 구멍을 메운다.
강력한 적, 바닥을 구르는 건 내 병사들의 시체뿐이다.
하지만 전장에선 아무리 실력이 나빠도 10번 정도 부딪치면 운으로 역전의 병사를 쓰러트리는 경우도 있다.
“끄윽……왕이여……먼저 가겠다!”
“으윽……후후, 100명이라 했는데 아직 10명밖에 베질 못했군. 저 세상에서 전쟁의 신께서 혼내시겠어!”
하나, 또 하나씩 적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약간이라도 난전 상태가 해소되면 곧장 궁병대가 화살비를 날리고 그에 대응하지 못한 사람이 고슴도치처럼 변하고는 시체가 된다.
돌덩어리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적들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이 후퇴하면서 공간이 생겼습니다. 단숨에 밀어붙이겠습니다.”
적은 후퇴……다시 말해 점차 경사면 위쪽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그리고 아군은 그 뒤를 쫓아 앞으로 나아간다.
빈 공간 사이에 미리 준비해 둔 거대 석궁을 설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적은 우리 쪽의 총공격을 막아내는 데 온 신경을 쏟는 중이니 화살을 부수러 올 여유는 없을 것이다.
“발사!”
후방에서 쐈던 위협용 말고는 달리 크게 도움이 안 됐던 그 사격과는 다르다.
정확히 표적을 겨냥한 거대 화살이 방패째로 거구 남성의 상반신을 날려버리곤 진형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지금이다, 단숨에 놈들을 처리해라!”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적진을 보고서 아군 보병이 기세를 붙이곤 함성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쓰러지는 숫자는 아군이 훨씬 많지만 그럼에도 지난번만큼 압도적이진 않다.
피로도 쌓여서 그런지 적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전위도 붕괴된 채 아군이 점차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끝물이군요.”
세리아도 평정을 되찾은 모양이다.
조금 마음이 괴롭군. 길드레스는 정말 짜증이 나긴 했지만 싫어하는 인물상은 아니었다.
용감하게 맞서싸운 적을 화살과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당연한 일이지만 살짝 무언가 속에 얹힌 느낌이다.
“이겼군!”
이리지나가 말한 것처럼 이제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남은 건…….
“아직이다! 아레스의 전사는 이런 걸로 끝나지 않는다!”
나부끼는 진홍빛 망토.
비명소리와 함께 아군이 10명 가까이 날아갔다.
점차 잘려나가던 적진 한가운데, 전신 근육덩어리처럼 보이는 남자가 화살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당히 서 있었다.
“왜 그러냐, 네놈들 바닥에다 고환을 흘리고 온 것 아니냐? 아레스의 사나이는 이 정도에 굴복하는 연약한 놈들이었나!?”
그 인물은 당연히 길드레스, 큰 소리를 외치며 주변 병사들을 마구 베어내는 중이다.
창 날끝을 붙잡아 날려버리질 않나, 검을 맞대자마자 검이랑 통째로 어깻죽지를 베어버렸다.
앞발차기를 얻어맞고 뒤집어진 병사의 머리를 가슴까지 쪼개 피투성이가 된 검을 위로 치켜들고 짐승처럼 포효했다.
“아레스의 등불……옛 왕이 전쟁의 신한테서 받았다던.”
“전쟁의 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꼴사납게 죽을 순 없지.”
[아레스의 등불]이라는 건 길드레스가 쥐고 있는 저 검의 이름인가?
강철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옅은 푸른색 빛은 듀얼 크레이터와 마찬가지로 신비로워 보인다.
“나아가라, 전사들이여! 우리의 길은 오직 앞에만 있을 뿐이다!”
열세에 몰려있던 적병이 사기를 되찾고는 아군을 밀어버리면서 전진을 시작했다.
숫자 자체는 절반 정도까지 줄어들었지만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돌격은 경사면을 내려오는 탓에 한층 더 굉장한 박력을 자랑했고 마치 산사태를 보는 듯했다.
“야, 야아, 저거 위험해!”
“마,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제 적에겐 진을 짤 마음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모든 이들이 방패와 검을 쥔 팔을 휘두르면서 전력 질주, 진로상에 있는 적을 베어넘기고 튕겨날린다.
그때 붕괴하는 아군을 구하려고 발사된 거대 화살이 일직선으로 선두를 달려오던 길드레스를 향해 날아갔다.
“맞았다!”
이리지나가 무심코 큰 소리로 외쳤다.
“왕이여!”
“걱정 마라!”
길드레스는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펄쩍 뛰더니 정면에서 거대 화살과 맞섰다.
“이런 장난감으로 나는 쓰러트릴 수 없다아!!”
몸을 공중에서 비틀고는 칼등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볼트를 때렸다.
화살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력이 담긴 그것은 중간 부분이 꺾인 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적도 아군도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길드레스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이것이 아레스다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왕의 고함소리를 뒤따라 적병 전부가 포효를 내질렀다.
“저, 저런 걸 어떻게 이겨!” “무, 물러나, 후퇴하라고!”
아레스의 사나이들은 포효하면서 돌진했고 아군은 도망치듯이 후퇴, 통제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방치된 거대 석궁……몇 명이서 움직여야 할 그것을 적 병사는 혼자서 들어올리고는 절벽 아래쪽으로 내던져버렸다.
……꽤 비싼 거였는데 말이야.
“전위가 붕괴 중입니다! 수습 불가능입니다!”
“여기서 후퇴했다간 다음 공격도 제대로 이루어지질 못합니다.”
마이라와 레오폴트가 나를 바라봤다.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최강의 병력을 데리고서 놈들을 물리치는 것.
“호위대는 내 뒤를 따라라. 더 이상 놈들 뜻대로 하게 놔둘 수는 없지.”
“네!”
내 군대 안에서 최강 병력은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중장기병, 호위대다.
물론 이런 난전 속에서 말을 타도 이점이 없기 때문에 모두 다 보병 상태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장비, 숙련도 모두 일반적인 보병보다 몇 단계는 위다.
“오오! 새로운 게 나왔군!”
“승부다, 승부!”
내가 호위대를 이끌고서 붕괴 중인 전선을 다시 밀어붙이자 적은 추격을 그만두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일반적인 보병보다 훨씬 체격이 좋은 남성들이 육중한 장비를 사용하고서 돌진, 이쯤 되니 흩어져서 상대하는 건 힘들다고 판단한 적도 곧바로 횡진을 짜고서 방패를 내밀었다.
두 진형이 격렬한 금속음과 함께 충돌했고……호위대가 밀려나갔다.
“와하하! 우리 딸보단 낫지만 마누라한테는 못 미치는구나!”
“아예 아내로 삼아서 엉덩이를 따먹어 줘도 되겠어!”
“이래도 허풍을 늘어놓을 수 있겠나?”
나는 지금까지 쌓인 울분도 풀 겸 전력으로 창을 휘둘렀다.
“뜨아앗!”
곧바로 방패로 막아낸 병사가 옆으로 날아가더니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오오! 꽤 하는군!”
그럼에도 적은 전혀 겁먹지 않는다.
빈틈조차 주지 않고 다음 남자가 내게 칼을 겨눴다.
“역시 직접 싸우는 게 기분이 좋군!”
남자의 검을 창으로 튕겨내고 앞발차기를 방패 쪽으로 날렸다.
대부분은 이 공격을 얻어맞고 뒤집어질 텐데, 남자는 약간 자세가 무너졌을 뿐 곧장 검을 다시 쥐었다.
“이까짓 것쯤!”
그 공격을 창 손잡이로 막아내자 남자는 물 흐르듯이 방패로 나를 때리곤 곧장 허벅지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고 시도했다.
일개 병사가 보일법한 움직임이 아니다. 다른 나라였으면 틀림없이 한 명 한 명이 호걸이라 불릴만한 실력이다.
“하지만 이건 어떠냐!”
그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머리 위에서 창을 내리쳤다.
남자는 방패로 막아냈지만 전력의 일격을 전부 다 상쇄시키진 못하고 허리 힘이 풀려버렸다.
“끝이다!”
간신히 드러난 목덜미에 날린 찌르기, 목이 베인 남자는 피분수를 터트리며 제자리에 쓰러졌다.
“아직이다!”
하지만 숨을 쉴 틈도 없다.
다른 남자가 날린 검을 피하고, 얼굴을 때렸으나 놈은 코피를 흘리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3합 정도 맞붙은 순간 간신히 왼발을 날릴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남자는 검을 놓지 않았다.
“심장이 멈출 때까지 아레스의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에잇, 짜증나는군!”
남자의 몸통에 창을 찔러넣고 그걸 등에 짊어지듯이 절벽 밖으로 내던졌다.
이제야 간신히 3명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적진 한복판에서 고립 중이었다.
적이 끈질긴 탓에 전혀 전진을 못하는 중인데, 호위대는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변 적을 떨쳐내려고 전력으로 창을 한바퀴 돌렸다.
“가자!” “그래!”
하지만 주변에 있던 적들은 방패를 내밀고서 방어 태세를 취했고 튕겨 날아간 네 사람은 모두 다 멀쩡한 모습으로 내게 검을 겨누었다.
“에이길 님! 이게!”
세리아는 바닥을 구르면서 어떻게든 적과 싸우고 있었지만 이쪽으로 올 여유가 없는 듯했다.
“하압!”
재주 좋게 적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넣었으나 상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힘이 약해서야 내 근육은 뚫을 수 없다!”
위로 검을 치켜든 남자의 공격을 피해낸 세리아는 뒤로 펄쩍 뛰고서 나이프를 연속으로 던졌다.
하지만 급소를 노린 나이프는 검에 튕겨 날아갔고 어깨와 복부에는 깊숙이 박혔으나 놈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리지나가 옆에서 놈의 머리를 날려버린 뒤에야 간신히 남자는 쓰러졌다.
“하아……하아…….”
세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더 이상 올 수는 없어보이는군. 나도 물러나야하나?
“오오오오오!”
그때, 전방에서 적병 다섯 명이 방패를 손에 쥐고서 돌진을 시작했다.
우리 쪽 대열을 격파할 생각인가?
이에 질세라 나도 창을 위로 치켜들었다.
“흡!”
방패로 된 벽에 창을 내리찍자 적병 다섯명이 방패째로 뒤집어졌지만 나도 튕겨 날아가 뒤쪽으로 물러나게 됐다.
적병이 다시 돌격 태세를 갖추려 한 그 순간, 진홍빛 망토가 나타났다.
“하드릿……아레스의 전사를 상대로 훌륭히 싸우는구나! 하지만 서로 최강의 자들끼리 싸워야 한다 생각하지 않나?”
“그게 더 이야기가 빠르겠군. 이제 전투도 조만간 끝이다.”
“뭐라고?”
나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여 알려주었다.
적과 아군이 섞여 싸우고 있는 후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는 중이다.
적병이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니 협곡 출구 근처에 내 군대의 깃발……새까만 그것이 나부끼고 있었다.
“……절벽을 우회한 건가.”
아무리 가파른 절벽이라 해도 소수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장소 정도는 있다.
정면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판단한 레오폴트가 어제 절벽을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은 지점을 조사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숫자만 보면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매우 소수 병력일 뿐이지만, 후방이 막힌 시점에서 승부는 끝났다.
후방 병력을 처리하려고 등을 보이면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맞게 되고, 저쪽을 방치하면 방패로 막을 수 없는 후방에서 화살을 맞게 된다.
길드레스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건지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 드디어 신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하지만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도 대장이 스스로 나서 내 상대를 하다니 재밌는 놈이로군. 네놈은 전쟁의 신께 사랑받고 있을 거다.”
“사랑받을 거라면 몸매 좋은 여신이 좋겠군.”
“아직 새파랗게 젊구나 하드릿, 나는 여자라면 누구든 좋다.”
나와 길드레스는 서로에게 무기를 겨눴다.
그러자 지금까지 난전을 펼치고 있던 적과 아군이 싸움을 멈추고는 원을 만들어 우리를 감쌌다.
“왕이 일대일 승부에 나선다!”
“무모한 놈이군. 무용의 화신 길드레스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무슨 소리, 영주님을 이길 수 있는 적이 있을 리가 없지!”
“전귀 하드릿은 설령 드래곤이라도 죽일 수 있다고!”
자기들 멋대로 얘기하는 중이지만 길드레스가 엄청나게 강력한 상대라는 건 알고 있다.
나는 창을 뒤쪽에 있던 세리아한테 맡겼다.
이 남자와 정면 승부를 벌이는데 창으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듀얼 크레이터를 뽑아들자 길드레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오……아름답군. 그쪽은 흰색인가?”
듀얼 크레이터가 내뿜은 흰색 빛과 아레스의 등불이 내뿜는 옅은 푸른 빛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아름답다.
하지만 이 검은 지금부터 서로의 피로 물들 것이다.
“간다.”
“언제든지 덤벼라.”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전력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길드레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두 보검이 교차했다.
카랑카랑 울려퍼지는 금속음과 함께 엄청난 불똥이 주변으로 튀었다.
“크윽!”
맞붙은 검이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하마터면 손에서 떨어져 나갈 뻔했다. 엄청난 괴력이군.
놈도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그 거리는 나보다 짧다.
“부러지지 않다니, 좋은 검이군.”
“그쪽도 말이야.”
듀얼 크레이터를 전력으로 휘둘렀는데 상대의 검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역시 저건 평범한 검이 아니다.
즉, 닿기만 하면 팔 정도는 순식간에 날아간다는 뜻이다.
“으음!”
“흡!”
다리를 세운 채 우리는 서로 맞붙었다.
위로 내리치는 검을 떨쳐내고, 찌르기를 막아내고, 반격으로 내지른 찌르기를 몸을 웅크려 피한다.
주변 병사들은 환호성 하나 내지르는 일 없이, 적과 아군 모두 사이 좋게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빈틈!”
길드레스가 돌을 밟아서 한 순간 기울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깻죽지부터 베어냈지만 놈은 곧바로 방패를 내밀었다.
물론 정면으로 부딪쳤다간 듀얼 크레이터 입장에서 방패 따윈 버터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놈은 각도를 바꿔 내 검을 흘려보내곤 그 답례로 얼굴에 방패를 때려박아 주었다.
“끄윽…….”
“흐하하, 방패도 썩 괜찮지 않나? 그냥 막아내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
뚝뚝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고서 웃었다.
“지금 그걸로 눈이 뜨였군.”
길드레스를 향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놈은 그 검을 피하고서 내 몸통을 두 동강 내려고 몸을 숙이고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뭣이!”
몸을 비틀어 그 공격을 피하고 한바퀴 돌아 놈의 목 높이로 검을 휘둘렀다.
놈은 곧바로 방패를 들어 방어를 취했으나 이번엔 흘려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탕,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두꺼운 금속 방패가 두 동강나 땅바닥을 굴렀다.
“역시 방패는 필요없군 그래.”
“후후……한 방 먹었군.”
길드레스는 절반이 된 방패를 손에서 놓더니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자, 덤벼라 하드릿! 전쟁의 신께서도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의 싸움을!”
검을 맞대는 우리들,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할 속도의 연격을 막아내고 흘려려보낸 뒤 반격한다.
그 모든 공격이 필살, 아니 조금이라도 힘을 잘못 넣었다간 검이 튕겨나갈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한 번 합을 주고받을 때마다 공기가 떨리고 주변으로 흩어지는 불똥과 금속음이 절벽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합째인지 알 수 없게 됐을 때, 얼굴을 노리고 찌르려고 내민 검의 옆구리 부분을 길드레스가 손으로 튕겨내고는 반대로 검을 휘둘렀다. 나는 곧바로 뒤쪽으로 펄쩍 뛰었으나 칼날이 스친 건지 갑옷의 가슴 부분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위험해라……한 발자국만 더 앞에 있었어도 몸통이 베였겠군.
상반신이 겉으로 드러나고 말았지만 애초에 저 검을 상대로 갑옷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번엔 내 차례다!”
검을 벗고서 가벼워진 게 좋게 작용한 건지 다음 합에선 내가 길드레스의 검을 튕겨내고 놈의 팔에 핏자국을 남겼다.
상당히 얕긴 하지만 그럼에도 피를 흘리게 만든 건 기분이 좋다.
“끄응……역시 무겁군!”
그러자 길드레스는 진홍빛 망토를 벗어던지고 곧바로 밑에 차고 있던 몇 안 되는 갑옷도 벗어던지더니 팬티 한 장 차림이 되었다.
애초부터 급소만을 가리는 작은 갑옷이었지만 이렇게 되니 거의 나체 수준이다.
“좋아, 이제 움직이기 쉬워졌군!”
놈의 근육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겁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움직임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검을 단순히 막아냈다간 내리찍히기 때문에 전력으로 위로 치켜올려 막아낸다.
횡베기에는 횡베기로 막아낸다.
힘은 호각……아니, 어쩌면 놈이 더 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합이나 맞붙은 덕분에 내 눈에는 놈의 검술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승부를 끝내주마.
“이야압!”
횡베기를 피하고서 측면으로 돌았다.
빠져나간 순간 옆구리에 일섬, 이건 이겼군.
“으윽!”
“쳇, 얕았나!”
옆구리를 완전히 갈라낸 줄 알았으나 상처가 얕다.
길드레스의 인간 수준을 벗어난 속도와 단련된 근육이 내장을 보호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왕이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놈이 피를 흘리고 한쪽 무릎을 꿇은 광경은 적 병사 입장에선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중이다.
“……항복은 받아주마.”
“할 것 같나?”
아니, 그럴 리가.
길드레스는 거리를 벌리고 내게 조금 기다려달라는 듯이 손을 보였다.
“아직 무겁구나! 벗겠다!”
벗겠다 해도 더 이상 망토도, 갑옷도 없다.
이제 너는 속옷 같은 가죽 팬티밖에 입고 있질 않잖아.
“설마!”
“이까짓 것, 사나이들의 싸움에는 필요없는 법!”
““꺄, 꺄악!!””
길드레스는 무려 팬티에 손을 댄 것이다.
귀여운 비명소리는 세리아와 마이라의 것이다.
“자, 잠깐! 서두르지 마! 기다려 줄 테니까 그건 벗지 마라!”
그런 게 튀어나왔다간 싸움을 벌일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해서 찰싹 달라붙으면 어쩔 생각이냐!
“그런가? 그럼 슬슬 결판을 지어보지.”
옆구리의 출혈 상태를 확인한 길드레스는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크게 검을 치켜들었다.
빈틈투성이지만 일격으로 승부를 끝낼 생각인 것이리라.
“그래. 얼른 너를 베어버리고 여자를 안아야 한단 말이다.”
나도 그에 맞서듯이 머리 위에 검을 치켜올렸다.
서로 천천히 접근한 뒤, 일격을 날린다.
쾅, 하고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굉음이 울려퍼지더니 길드레스의 검이 손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끝났다.
나는 마무리를 지어주려고 검을 치켜들었으나……턱 밑에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때 듀얼 크레이터가 손에서 휙 하고 날아가버렸다.
“검을 쓰는 게 싸움의 전부는 아니지!”
얻어맞았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얼굴에 연속으로 길드레스의 주먹이 들이닥쳤다.
공격 하나하나가 무겁다. 평범한 남자라면 한 번 얻어맞자마자 바로 정신을 잃었으리라.
“안 돼애!”
세리아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당할 순 없다.
나는 주먹을 크게 위로 치켜든 길드레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목을 붙들고서 얼굴에 박치기를 먹였다.
“끄으으윽!”
휘청거리는 길드레스의 몸통에 연속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솔직히 쓰러질 줄 알았는데 놈의 대답은 뺨으로 날리는 주먹질이었다.
“끈질긴 놈!”
“너야말로!”
목을 부러트려주려고 머리를 쥐어싸맸으나 반대로 내팽개쳐버렸다.
쓰러진 내 머리를 노린 발차기를 막아내고 놈을 잡아당겨 반대로 얼굴을 두들겨 패주었다.
대장끼리 싸우는 일대일 결투가 꼴사나운 길거리 싸움이 되고 말았다.
“하아, 하아…….”
“우오오오오오오오!”
놈의 주먹이 내 얼굴을 때리자 세계가 흔들렸다.
하지만 내 주먹이 놈의 턱에 꽂히는 것도 느껴졌다.
“아앗!”
“무, 무승부!?”
“왕이여, 일어나십시오!”
“상대보다 먼저!”
나도 미친듯이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어찌저찌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 한구석에 마찬가지로 일어나려다 실패하고 엎어진 길드레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왕을 구해내라! 적의 손에 넘기게 둬선 안 된다!”
“영주님을 구해라! 적을 도륙내라!”
“에이길 님, 붙잡으십시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세리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나를 옮겨 준 거구나.
미안하지만 잠시 몸을 맡겨야겠어.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거든.
“전면 추격하라! 적을 전멸시켜라!”
“상황이 바뀌었다! 의식이 없는 채로 왕을 죽게 놔둘 순 없지. 혈로를 뚫고 도망쳐라!”
전투는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원, 벽이 되어라! 후방에 있는 적은 뚫고 지나가라! 화살 10자루나 20자루 정도로 죽었다간 사나이의 이름이 운다!”
“적을 괴멸시켜라! 적의 왕을 처리해야 한다!”
“에이길 님이 누울 곳이 필요해! 그리고 물을 갖고 와라, 어서!”
세리아……너도 제법 부드러운 몸을 갖게 됐구나.
그렇게 느끼면서 내 의식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
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3살 여름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 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영주민 160000 중심 도시 라펜 23000 린트브룸 4000
사군: 11100명 -1000명
보병: 5500 기병: 800 궁병: 750 궁기병: 3950
대포: 18문
재산: 금화 300닢
경험 인수: 202명 자식: 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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