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마그라드 전쟁⑦ 노르 평원 결전』
오르가 연방의 함대가 마그라드 수군을 박살낸 지 어느새 일주일. 강을 가로막는 수군이 사라져 낮밤할 것 없이 상륙을 이어나간 덕분에 부상병을 제외한 모든 병력이 포트란델과 그 주변에 집결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안에는 레오폴트와 마이라, 그리고 다쳤던 세리아와 이리지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드릿 공, 이제 부상은 다 나았다!”
이리지나가 바지를 내리고서 허벅지 상처를 보여주었다.
신기하게 이 녀석한테 흉터는 잘 어울리긴 하지만 좋은 약을 발라서 없애줘야지.
“저도 다 나았습니다!”
세리아도 옷을 들춰서 어깨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상처는 이리지나보다는 작았던 덕분인지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 알았다만은……. 지금 그 행동은 위문도 겸하고 있는 거냐?”
“엥?” “네?”
두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자 병사들이 곧바로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바지 앞섬이 부풀어 있었다. 전장에서 여자를 안지 못하는 병사들의 눈앞에 갑자기 미녀의 허벅지와 어깨가 맨살로 드러나게 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보지 마!”
“응? 으응?”
당혹스러워하는 세리아와 잘 이해하지 못한 이리지나, 아무튼간 상륙엔 성공했다.
“그래서……기드는 어떻게 됐지?”
“아…….” “끙…….”
세리아와 이리지나가 말을 삼켰다.
살아남지 못한 건가.
“기드는 내장까지 깊은 상처를 입었나이다. 간신히 죽음은 면했사옵니다만, 상처에서 독이 들어가……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고 있사옵니다. 의사는 아마 목숨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단숨에 죽게 놔두는 게 오히려 더 온정일 것이라 말하였나이다.”
감정을 죽인 목소리로 루나가 말했다.
그녀 입장에서도 자기한테 반했던 소녀의 최후를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울 게 틀림없다.
“그대로 죽음과 싸우게 놔둬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야.”
“……정말로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그렇다 해도 말이야. 지금은 지옥일지 몰라도……살아남으면 극락을 맛보게 해주지.”
루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기드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그런 생각인 것이리라.
“자,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그 녀석한테 득 될 건 없지. 여서 우리가 졌다가 다 죽으면 그게 진짜 본말전도다. 적한테 이길 계획이나 세워보자고.”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루나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건지 레오폴트가 쑥 앞으로 튀어나와 지도를 펼쳤다.
루나와 세리아가 노려보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레오폴트는 이래야지.
“우리의 병력이 전군 상륙한 덕분에 적의 수적 유리는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의 포위망은 전력 분산일 뿐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적은 이미 포트란델에서 후퇴 중입니다. 평원에서 집결한 뒤 결전에 임할 테지요.”
그 얘기는 정찰병도 파악한 이야기다.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 중인 대군을 섣불리 기습했다간 반대로 위험해질 수 있다.
“농성을 벌일 가능성은?”
놈들의 왕도 오드로스는 그리 멀지 않다.
튼튼한 도시벽도 있을 테니 그쪽으로 도망칠 가능성도 있다.
“없습니다. 농성을 펼칠 경우엔 현재 라드할데 경의 상륙 작전에 대치 중인 군단이 사이에 끼어 괴멸한 뒤 세 방향에서 포위당할 뿐입니다. 애당초 놈들의 주력 부대는 중장보병, 이것 또한 농성전에 적합한 구성이라 보기는 힘듭니다.”
“흠, 그렇다면 놈들은 어느 부근에서 진을 칠 것 같지?”
“왕도와 포트란델의 중간 지점인 [노르 평원]이 될 것입니다. 수적 우위에 있는 우리를 상대하기엔 증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까지 후퇴하는 게 정석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지형 때문에 진형이 붕괴되지 않을 장소……그것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한테 유예 시간을 줄 필요는 없지. 우리도 지금 당장 이동 준비를 시작한다. 일단 에이리히의 제1군단과 제2군단에도 연락을 넣어둬라.”
“예, 하지만 결전 시기에 그쪽 병력과 합류하는 건 기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알고 있어.”
에이리히의 제1군단이 있던 위치에도 연방의 함대가 나타나 적의 수군과 상륙 예정이었던 도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고 한다.
인구 1만이 넘는 도시를 박살내던 포격은 반나절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고 지금은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고 한다.
다행히 적은 내륙 지역 쪽으로 물러났고 에이리히의 병력이 상륙 자체엔 성공했지만 너무 도시가 망가져버린 탓에 물자 수집에 시간이 걸려 곧바로 침공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제2군단은 빗속에서 억지로 상륙을 시도하다 많은 함선을 잃고서 마찬가지로 시간이 걸린다 합니다.”
누가 사령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좋아, 그럼 다들 각자 부대를 정비해라! 손이 빈 사람은 내 침대로 오도록.”
“““예!”””
그 후, 엄청난 속도로 편성을 끝마친 세리아가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왔지만 그땐 이미 피피가 내 물건을 받아들이고 있었던지라 세리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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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노르 평원
전쟁 개시 직후, 우리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던 비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울도 점차 다가오면서 맑디 맑아진 푸른 하늘 아래 두 군대가 마주보고 섰다.
가로막는 것은 일절 없는 평원, 서로의 모습을 확실히 확인 가능한 지역이다.
“역시 약간의 증원이 있던 모양입니다. 적의 숫자는 대략 3만 5천, 우리와 똑같습니다.”
“아니, 우리 쪽은 4만이 넘는데.”
제후군은 병력으로 안 치는 모양이다.
적은 보병 병력을 중심으로 집중한 뒤 좌우에 기병대를 배치해 둔 진형이다.
우리 쪽은 왕국군을 좌우로 나누어 전개한 뒤, 가운데에 내 사군을 전개해 두었다.
한 번 보여준 이상 감출 의미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중장보병은 이미 대방패를 손에 쥐고서 여러 개의 상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 진형, 맨 처음 봤을 땐 애먹었는데 말이지.
“또 저 상자가 튀어나왔군. 어떻게 할 수 있나?”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전술에 당하진 않습니다.”
레오폴트는 태연한 표정으로 진형에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
전술은 이 녀석한테 맡겨둬야지.
나는 창을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상당히 무모한 짓을 많이 시켰는데도 흠집 하나 없다.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걸까?
“하드릿 경, 적이 움직입니다.”
지난번에 싸웠을 때와 완벽히 동일한 모습, 철의 상자가 되어 진격하는 전법이로군.
상자의 크기는 1000명 정도로 이것도 지난번과 마찬가지, 상자가 20개 늘어서더니 그 주변에 1만 정도 전개한 보병과 5천 정도 되는 기병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 쪽의 접근을 막아내면서 진형을 박살내고 내부에서 산개……그렇게 할 생각일 겁니다.”
“우리 쪽도 움직여 볼까.”
“내가 말한 걸 준비해라. 궁기병 말고 다른 사군은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병력 상으로 봤을 때 주력 부대는 왕국군이니까 문제없겠지 뭐.
“궁기병은 앞으로 내세워라. 저 상자에 활은 안 통하니까 주변 보병을 노려라.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마라!”
“족장님의 명령이다. 죽어서라도 완수해라!”
루나가 검을 치켜들고 돌진해 나아갔다.
아니, 궁기병은 귀중한 병력이니까 너무 죽으면 또 안 되는데.
궁기병 4000이 일제히 돌격하는 모습을 보이자 상자 형태의 진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방패를 땅바닥에 꽂아넣고 창을 겨눴다.
저들이 기병에 보이는 방어 수준은 철벽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껍고 커다란 방패를 상대로는 검은 물론이고 화살도 뚫지 못한다.
하지만 방패 안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는 보병대 입장에선 무시무시한 위협이다.
“장창을 겨눠라! 진 바로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저들은 일반적인 대기병 방어진을 짜고서 상자 쪽에서 날아올 원호 사격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설프군. 이들의 주특기는 근접전이 아닌데 말이야.
세로로 기다랗게 돌격하던 자세 그대로 적에게 달려들던 궁기병은 검이 아니라 활을 손에 쥐었다.
“왼쪽, 전개!!”
선두에 선 지휘관이 노성을 내지르자 진로를 급변경했다.
뒤쪽을 따라오던 부대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 진로를 따라 움직이고는 정면에 있는 적을 향해 계속해서 활을 쏜다.
내가 이들을 영입한 이후 가장 많이 훈련시켰던 전술이다.
기병이 장창으로 구성된 대기병진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강력하다.
“이게 그 고르도니아의 궁기병인가!”
“침착하게 대응해라! 진형을 무너트리지 마라!”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전술이니만큼 일단 대응책을 생각해 뒀던 것이리라.
창병부대는 곧바로 작은 방패를 손에 쥐고서 화살을 막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사정거리는 궁기병들 입장에선 사실상 근거리나 다를 바 없는 거리, 방패가 없는 병사나 빈틈 사이로 화살을 쏘는 것은 간단한 일인지라 점차 피해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적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왕국군 기병도 내세워야 할 차례입니다.”
세리아가 기쁘다는 듯이, 레오폴트는 안색 0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가라. 상자에는 손대지 마라.”
궁기병이 질풍처럼 지나친 뒤, 곧바로 왕국군 기병대가 달려들었다.
접근전에서 창과 검으로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활이나 창의 반격에 맞으면서 어느 정도 손실이 발생하긴 했지만 거의 다 박살난 진형으로는 이 공격을 완벽히 막아낼 수 없다.
한 번 쳐들어가기만 하면 기병의 무게와 크기는 보병 입장에선 굉장히 위협적이다.
“숙련도, 지휘, 모두 문제없습니다. 라드할데 경도 잘 훈련시켜뒀군요. 저건……정면,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쯧, 멍청한 놈들.”
적의 보병을 베어낸 왕국 기병 중 일부가 그 기세 그대로 상자 진형 안으로 돌격한 것이다.
상자에서 튀어나온 창을 베어내며 틈 사이로 창을 밀어넣고 정면에 있는 적 몇 명을 쓰러트렸다.
거기까진 좋았다.
“가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정면의 구멍은 내부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적이 금세 메꾸었고 우리 쪽은 반대로 적의 방패 뒷편에서 튀어나온 창 때문에 기병이 계속해서 당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내부에서 화살과 보우건 볼트가 날아오더니 공격권을 잃은 기병은 손실만 내놓은 채 후퇴하려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적이 측면에서 기병 부대를 전진시켰다.
이대로 가다간 저 먼저 앞서나간 놈들이 포위당할 게 분명했다.
“……왕국군 전체를 내보내라. 버릴 수는 없지.”
호령 한 번에 3만 가까운 왕국군 전체 진형이 움직인다.
그걸 보고 적들도 눈앞에 있는 소수의 적을 포위하길 그만두고 정면으로 우리 쪽을 마주보았다.
“정면에서 부딪치고 싶진 않았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상황은 움직이는 법이죠……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대포를 쓸 수 있긴 했습니다만.”
적이 이쪽으로 와줬으면 대포도 쓸 수 있었을 테지만 우리가 먼저 움직인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
대포를 움직이는 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대포는 성능도 낮고 잘 부서지는 주제에 포신은 두꺼워서 무겁다.
상황에 맞춰서 간단히 움직일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치명적으로 계획이 틀어졌나?”
“아뇨, 문제없습니다만 먼저 적의 상자 진형을 고립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하드릿 경께는 대포 대용으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좋아, 출격이다……레오폴트, 너는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하자.”
“알겠습니다.”
두 군대는 서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화살이 닿을 거리까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고르도니아 왕국군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마그라드의 기묘한 진형을 보고 살짝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창을 치켜들고서 선두에 섰다.
“걱정하지 마라, 저건 이미 내가 한 번 격파한 진이니 무서워할 필요 없다! 처녀를 따먹은 여자는 다음부터 편하게 안을 수 있는 법이지!”
침묵이 전장을 지배했다.
이런, 실수했군.
“놈들을 죽여버려라! 돌격――!!”
“오, 오오―――!!?”
그냥 억지로 소리쳐서 얼버무려서 망정이지 위험했군.
속도를 높이는 우리를 보고 적도 달려오기 시작했다.
내 옆에선 세리아가 지난번에 내가 다친 걸 신경 쓰고서 이제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히힝, 하고 울부짖는 슈바르츠. 놈의 몸통이 왼쪽으로 흔들렸다.
놈의 왼쪽 몸통에는 주머니 몇 개가 축 매달려 있었다.
“그런 걸 들고 와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대포 대용으로 쓸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대포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포탄으로 쓰는 철구만 몇 개 들고 온 것이다.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건지 슈바르츠가 얼른 던지라는 듯이 불쾌한 표정을 내비쳤다.
“재촉 안해도……흐라압!”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상자를 향해 철구를 내던진다.
그럼에도 거리가 꽤 있다보니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철구는 적의 한복판 안에 떨어졌고 금속음이 들리긴 했지만 자세한 건 보이지 않았다.
“계속 던져주마!”
요령도 슬슬 익혔겠다 다음 포탄부턴 감을 잡아서 원하는 위치에 던질 수 있었다.
한 발 정면에 명중한 철구가 두 명 정도를 방패째로 날려버리자 아군 쪽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역시 큰 효과는 없구만, 창이라도 던지는 게 더 낫겠어.”
“저런 무거운 철구를 사람 힘으로 날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질 않는데요.”
“재활 운동으로 딱 좋은……우왓!”
마지막 한 발을 던지려고 했던 그때, 갑자기 적의 기병이 창을 내지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곧바로 그놈을 향해 있는 힘껏 철구를 내던지고 말았다.
“끄윽!!”
처치했다……라기보단 폭발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을 수도 있겠군.
창이 닿을 법한 지근거리에서 철구를 받아낸 적 병사는 온갖 것들을 흩뿌리며 박살이 나버렸다.
“마지막 한 발이었는데 말이지.”
“히이익!” “브리스가 폭발했다!” “악마아아아아아!”
남아있던 적 기병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효과가 있었나보군.
“자, 여흥은 여기까지다. 밀어붙여!”
아군과 적이 일제히 충돌한다.
내 말발굽소리마저 없애버릴 것만 같은 노성과 금속음, 그리고 단말마. 이게 바로 전장이지.
전투는 처음부터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적의 기병은 측면에서 위협을 가하려 했지만 궁기병과 왕국군 기병에 가로막혀 반대로 패주, 정면에선 왕국군이 적을 압도하고 측면 유격에 나섰던 제후군조차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세도 상자 진형과 본격적으로 부딪칠 때까지만 유지되었다.
우선 제일 먼저 충돌이 일어난 곳은 제후군 소속 1귀족 군단이다.
“뭐, 뭐냐 이것은! 화살을 쏴라! 창으로 뚫어버려라!”
“둘 다 효과가 없습니다! 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진형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마그라드 중장보병은 그 장비와 방패 무게 덕분에 상당히 둔중하다.
하지만 그 느릿한 걸음 또한 확실히 진영을 붕괴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영 한복판까지 쳐들어온 순간, 호령이 떨어졌다.
“길을 터라!”
방패를 버린 상자 진형 안에서 일제히 병사들이 사방으로 뛰쳐나왔다.
아군 진형 한복판에서 공격당한 이상 막아낼 방도가 없다.
귀족군은 순식간에 붕괴했고 그걸 본 제후군도 전체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면 주력 왕국군 중에서 똑 같은 방법으로 파훼당한 부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르도니아의 압도적 유리에서 시작된 전황이 급속도로 균형을 이루었다.
레오폴트가 있는 본진을 바라봤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아직 때는 아닌 모양이다.
그럼 한바탕 날뛰어 보실까.
“길을 터라――!!”
동료의 진형 깊숙이 파고든 상자가 길을 텄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지.
길을 터는 것과 동시에 내가 슈바르츠와 함께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길만 터주면 창도 들어간단 말이지!”
진로상에 있는 적들을 찔러 죽이고 말발굽으로 날려버리면서 중앙까지 파고든다.
슈바르츠는 중장보병을 적당히 짓밟았다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부드러운 부분을 밟으려고 세심한 조절을 하는 듯했다.
“우와아! 왔어, 또 튀어나왔다고!”
“왜 맨날 우리가 있는 곳에만 오는 건데!”
이놈들은 포트란델 공격 때 참가했던 모양이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시끄럽다! 어디로 가든 내 마음이잖냐!”
무슨 사람을 케이시처럼 취급하기는.
창을 휘둘러 놈들을 날려버렸다.
날아간 끝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보아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잘 됐구만.
밀집 진형 한복판에 있다보니 적은 사방팔방에 있었다.
창을 휘두르기만 해도 모든 게 찢겨나간다.
손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창을 한손으로 쥐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듀얼 크레이터를 뽑아들어 휘둘렀다.
10, 20으로는 세기도 힘들 지경의 병력을 시체로 바꿔버렸을 게 분명하다.
“큭! 이 자식,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내……응?”
절반이 된 몸통으로 소리치고 있던 중년 남성의 숨통이 끊어졌다.
원수를 갚겠다며 소리치고는 쳐들어온 젊은이가 공중을 맴돌고 아군의 창에 박혀 목숨을 잃는다.
대혼란 상태에 빠진 적은 공격 기회를 잃게 되었고 직전까지 혼란에 빠져 있던 아군은 태세를 정비해 다시 진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 듯했다.
에이리히가 훈련시킨 군대는 그리 연약하지 않다.
이렇게 된 이상 적은 아군 진형 안에서 고립된 거나 다를 바 없다.
“이제 남은 건 지휘관만 해치우면 이 상자도 끝인데…….”
주변을 둘러보니 병력한테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는 남자가 하나 보였다. 복장도 멀끔하다.
“뭘 하고 있느냐!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돌격진을 짜라, 한 번 후퇴한 다음…….”
찾았다.
“찾았다, 너로구나!”
“억! 우와아아아아악!! 아무나 나를 지켜라! 어서 지켜라!”
도망치기 시작한 지휘관과 내 사이를 가로막듯이 적 몇 명이 끼어들었다.
“방해된다.”
내가 휘두른 창에 한 명이 찢겨나갔고, 나머지 하나는 튕겨날린 뒤 공중에서 공격을 먹여 세 번째 놈한테 날려주었다.
하지만 네 번째 인원이 내지른 검이 슈바르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자식!”
네 번째 놈의 가슴을 꿰뚫어 내던졌지만 지휘관은 상당히 내게서 멀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시간은 걸릴 테지만 확실하게…….
“크억!”
도망치던 지휘관의 목에 화살이 꽂혔다.
뒤쪽을 돌아보니 크리스토프의 어깨 위에 올라탄 피피가 화살을 쏜 듯했다.
난전에선 키가 작은 피피가 보기 힘드니까 말이지. 크리스토프가 인생 처음으로 올린 전과다.
“끄윽……무, 무거워……얼른 내려가.”
나원참, 한손으로 들어올릴 수 있는 피피가 대체 뭐가 무겁단 건지.
이래서야 여자를 들어올려서 박는 것도 못하겠구만.
그때, 본진에서 녹색 불화살이 피어올랐다.
준비가 된 모양이다.
“진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후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상태를 포기하고 아군이 천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은 우리 쪽이 공세에 버티지 못한 거라 판단한 건지 다시 상자 진형을 짜고서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적의 좌우 측면에서 평행하게 기병 500이 달려왔다.
손에는 불이 붙은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저건 뭐죠?”
“공성병기 비슷한 거죠.”
도자기 항아리에 기름을 붓고서 표면에도 불을 지른 것이다.
실에 매달아 휘둘러서 던지면 닿은 부분이 엄청나게 불타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공성무기 중 한 개지만 사정거리가 부족해서 적진 근처로 다가가야 하고 그 탓에 화살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돌벽에 맞춰봤자 별로 효과가 없다는 점 등등 단점도 많다보니 위력에 비해선 그리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속도도 느리고 불을 끌 장비도 없을 중장보병한테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 판단한 건가?
“응? 적의 측면……아니, 발밑이라 말씀드리는 게 낫겠군요. 어째서 한복판에 던지질 않는 걸까요?”
기병대가 던진 기름통은 상자의 측면, 혹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병사를 불태우는 정도에 그쳤고 정작 중심으로는 던지지 않았다.
“글쎄, 레오폴트가 하는 짓이니까. 믿고서 지켜보자고.”
기병대한테 창도 없는 걸 보아하니 그냥 기름병만 휴대시킨 듯 보인다.
기병대는 측면부 근처로 몇 번이나 달려가더니 상자 진형에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그냥 보기엔 단순히 괴롭히는 수준의 전략에 불과하지만 측면부에서 들어온 불에 쫓기듯이 점점 상자 진형이 뭉치기 시작했다.
“오호라, 아무리 커다란 방패가 있다 한들 불 위를 걸어다닐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끝부분에 있던 병사 입장에선 대열을 유지하고서 불 위를 걸어다닐 수 있을 리 없다.
점차 상자 진형 전체의 중심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더니 옆에 있던 상자도 그에 이끌리듯이 진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군.”
“그렇네요……얼마 안 남았습니다.”
왕국군은 여전히 천천히 후퇴 중이지만 내 사군은 처음부터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기보단 일반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을만한 장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병이 몇 번이나 기습을 되풀이한 끝에 적의 상자들끼리 서로 딱 달라붙을 정도로 접촉한 그때, 화살이 일제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화살은 단순한 화살이 아니라 공성전 때 쓰이는 불화살이었다.
“우왓!” “뜨거워!”
불화살이라 한들 강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튕겨나간 화살이 발밑에 떨어지기만 해도 보폭은 흐트러진다.
손가락 크기의 불똥이라 한들 몸을 태우면 사람을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이걸로 끝날 리가 없다.
뒤이어 거대 석궁……그것조차 불에 달군 거대 화살이 날아가더니 방패와 함께 병사들을 불태운다.
심지어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던 사군 병사가 일제히 기름 항아리와 기름이 든 나무통에 불을 붙이고 내던졌다.
적의 정면부는 엄청난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불이다! 밟아서 꺼!”
“저기 안에서 불이 번지잖아, 방패 좀 치워. 앞이 안 보인다고!”
적은 속도도 느리고 앞도 잘 볼 수 없다.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꺼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엄청난 불길이군요……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됐던 거 아닙니까?”
“아니, 적을 밀착시킬 필요도 있었을 거고 무엇보다 주변에 산개한 보병과 기병이 있을 땐 안 돼. 화공용 장비로는 움직이는 적을 상대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격렬한 전투 끝에 상자 방어진이 사라진 보병, 기병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서 제대로 된 역할을 완수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즉슨, 우리쪽이 원하는대로 날뛸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아무튼간 정면뿐 아니라 좌우에서도 피어오르는 불길의 위력은 엄청나다.
참 자기가 원하는 위치에 적을 유인하는 능력도 대단하군.
“비켜! 비키라고! 불타 죽겠어!”
“대열을 망가트리지 마라! 화살에 맞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불 안에서 죽으라는 거냐!?”
“뒤쪽으로 좀 비켜봐! 이랬다간 다 죽어!”
불길 속에서 진형을 유지할 수 있을 리도 만무, 이윽고 보병은 방패를 내던지고 불이 없는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늘 위를 가르고 날아간 불화살은 일반적인 화살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고 진형을 망가트린 적은 순식간에 화살에 꽂혀 죽거나 불타사라졌다.
이러한 지옥도는 준비를 끝마친 궁기병이 불화살을 쏘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욱 끔찍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상 백병전에서 할 게 없어진 걸 확인하고서 본진으로 돌아온 뒤 레오폴트와 나란히 광경을 지켜보았다.
“대단하군.”
“이걸 위해서 대량의 공성병기를 운송했던 것입니다. 중장보병을 이용하는 놈들의 상자 진형은 쉽게 말하면 전장의 성,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장비를 이용해 박살내면 그만입니다.”
전방에 모인 적들은 이미 대열을 붕괴시키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지만 후방에 밀집된 부대 때문에 가로막혀 제대로 도망칠 수 없다.
후방부대는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서 아직까지 전진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끝물이군요.”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건 바로 나인가?”
“그것이 사령관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어쩔 수 없구만.
후퇴를 이어나간 우리는 당초 적과 맞붙을 예정이었던 위치까지 물러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전면 대포……발사!”
적의 비명소리를 깨부수는 굉음, 연방 함대가 발사하는 포격을 본 다음이다보니 대포 10문은 좀 부족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그 위력은 충분히 강력했다.
간신히 진형을 유지하고 있던 적들도 대포에서 발사되는 철구 앞에선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고 정면에서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적은 완전히 괴멸 상태에 빠졌고 놈들은 방패와 검을 모두 내던진 채 도주를 시도했다.
비교적 손실이 적은 후방 부대도 그걸 본 이상 전진할 순 없다,
“전 부대……돌격!! 철저하게 놈들을 도륙내라!”
왕국군과 사군, 기병대와 궁병대가 한 데 섞여 놈들을 쫓는다.
도망치고 있던 제후군도 기세를 되찾고서 놈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질서정연한 행동은 필요치 않다.
그저 적들을 쫓아 처리하러 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속도가 느린 적의 중장보병이 도망칠 수 있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이날의 전투와 추격전으로 인해 마그라드 군대는 3만 5천의 병력 중 3만가량을 잃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상당한 병력이 불타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지만 괴멸적인 손실인 건 분명했다.
특히 놈들의 정예병력인 중장보병이 완벽하게 박살났다는 점은 상대방의 전의를 박살내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이제 전쟁도 끝이 보이려나?”
“으음……으으읍!”
나는 내 물건을 서로 경쟁하듯이 입으로 핥는 여자들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참고로 크리스토프는 추격전 도중 적이 마구잡이로 내던진 방패에 얻어맞아 실신, 이번에도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
◇◇◇◇◇◇◇◇◇◇◇◇◇◇◇◇◇◇◇◇◇◇◇◇◇
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2살 봄
제3군단 사령관
휘하 부대: 39900
사군: 7900(실전 부대만)
보병: 2500 기병: 500 궁병:700 공병: 300 궁기병: 3900
대포: 8문(사격 도중 2문 파손)
왕국군: 2개 병단 25500
근처 제후군: 6500
별동대: 라펜 방위대 1000
군 부하: 레오폴트(부사령관) 세리아(부관) 마이라(지휘관) 이리지나(지휘관)
루나(궁기병 지휘관) 피피(임산부 배) 트리스탄(파수꾼) 기드(위중)
현재 지점: 노르 평원에서 왕도 오드로스로
전과: 포트란델 함락 마그라드 군단 괴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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