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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99화『북부 동란⑤ 로레일 합전』

제99화『북부 동란⑤ 로레일 합전』

 
눈앞에 졸졸 흘러가는 냇가.
군데군데 완만히 솟아오른 작은 언덕을 제외하면 딱히 장애물도 보이지 않는 평원.
 
그 앞에 수많은 깃발을 내세우고 강철 갑옷을 장비한 군대가 펼쳐져 있었다.
 
 
“적은 역시 마그라드였습니다. 놈들의 깃발이 보이는군요.”
“그래. 근데 어차피 상관없는 거 아닌가?”
“그렇지요. 어차피 여기에 온 이상 적을 박살내는 게 전부입니다.”
 
나와 적의 군대는 냇가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다.
로레일 부근, 살쪽 남쪽에 위치한 초원.
대하 노스테리에스와 이어지는 냇가를 사이에 두고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강이라고는 해도 비가 내리지 않는 지금, 수심은 기껏해야 허벅지 수준에 물살도 느릿느릿하다.
주변보다 살짝 지반이 낮다는 점과 자갈길 때문에 살짝 달리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군대를 방해하는 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 모두 쉽사리 넘어갈 법한 냇가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초원이 심리적 경계선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레오폴트, 지난번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적이 강물을 이용해서 공작을 해오진 않겠지?”
“지형상 불가능합니다.”
 
흠,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겠군.
 
“적은 아마도 마그라드 군, 숫자는 대략 1만, 트리에아 근위병이 5000명, 총 1만 5천입니다!”
 
세리아가 보고했다.
계산을 하다니 자랑스러운걸.
 
투구 너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세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도 없을 텐데.
 
“자, 출격해 보실까.”
“예.”
 
레오폴트의 지시 아래 궁기병이 세 집단으로 나뉘어 보병과 창기병, 중장기병이 대열을 짜서 나아갔다.
 
“전진 개시!”
 
돌격은 하지 않는다.
모든 부대가 같은 속도로 천천히 적과의 거리를 좁히며 나아갈 뿐이다.
 
“이번엔 돌격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도 처음부터 무작정 달려나가는 놈은 아니라고.”
 
적은 훌륭하게 대열을 유지한 채 우리쪽과 대치하듯이 전진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독 돌격을 했다간 순식간에 저세상 행이다.
 
“적은 전투 범위를 넓게 잡으려는 모양입니다.”
 
적은 옆으로 넓게 벌어지는 대열을 짜고 있었다.
마그라드 군과 근위병이 서로 옆으로 붙어 면적을 늘리는 중이었다.
 
“횡대진열은 돌파하긴 쉬워도 우회하는 건 어려워집니다. 적은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에 자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동방 수비대도 엄청나게 기다란 창을 사용했었지.
시험 삼아 돌격시켜볼까?
 
“루나한테 전달해라, 궁기병 1번대를 이끌고서 우익 근위병 쪽으로 전진하라.”
 
사자가 달려나간 이후, 궁기병 2천이 순식간에 진로를 바꾸고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루나의 부대는 근위병 정면에서 잠시 멈춘 이후 대열을 갖추고, 곧바로 노성을 내지르며 돌격을 시작했다.
 
“궁기병 1번대, 돌격 개시.”
“적이 궁병을 앞으로 내세우는 중입니다.”
 
적의 대열에서 궁병이 앞으로 나와 일제사격을 시작한다.
몇몇 궁기병이 화살을 맞고서 낙마하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타격까지는 아니다.
아군 쪽도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이 돌격과 함께 대응사격을 날리자비슷한 숫자의 적이 쓰러졌다.
역시나 전력 질주 상태에서 날린 사격술은 정밀도가 떨어지는 모양이다.
 
서로 미묘한 피해를 남긴 채 거리가 좁혀지자 적의 근위군이 활로 아군을 격퇴시키는 건 힘들다 판단했는지 궁병을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지난번에 보았던 6m는 되어보이는 거대 장창을 장비한 부대가 앞으로 나왔다.
일제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고슴도치, 기병이 앞으로 나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해 보인다.
심지어 그 사이에 보우건을 장비한 병사들도 상당히 많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궁기병의 진면목이다.
 
“전 부대 정지, 난사하라!”
 
루나가 소리치자 궁기병이 제자리에 정지한 채 곧바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통제된 일제 사격 전술이 아닌, 저마다 목표를 정해 자유롭게 날리는 자유도가 높은 전술이다.
 
“겁먹지 마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건 정밀도가 떨어지니 저건 우리를 혼란시킬, 크억!”
 
적 창 부대의 지휘관이 목과 눈에 화살을 맞고서 낙마했다.
안타깝지만 이 녀석들의 사격 정밀도는 너희의 궁수 부대보다 훨씬 더 뛰어나거든.
특히 정지 상태에서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의 보우건 병사도 허둥지둥 대응사격을 시작했지만 거리가 멀다.
활을 쓰면 충분히 사정거리권이라 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바람을 타지 못하고 무게도 무거운 볼트는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 힘들다.
어마어마하게 기다란 창을 두 손으로 쥐고 있다보니 방패를 장비하지 못한 병사는 사실상 무방비한 과녘, 보고 있는 게 우스울 정도로 순식간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알고는 있었다만 엄청난 사격 속도로군.”
“예, 자유 사격을 시키면 평범한 궁병과 비교해 봐도 2배는 빠를 겁니다.”
“피피는 좀 더 빠르다!”
 
그래그래, 하고 피피의 턱밑을 쓰다듬어 주는 동안에도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진다.
적의 궁수 부대도 원호해주기 위해 창병대 뒤쪽에서 사격을 시작한 듯했으나, 시야가 트이질 않아서 명중률은 별볼것 없었다. 압도적으로 우위인 상황에 변함은 없다.
 
“젠장! 창병대를 후퇴시켜라, 궁병대를 앞으로 내세워 반격하라!”
 
적의 진형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적 앞에서 두 번이나 진형을 바꾸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만 그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나보군.
 
“훈련대로군.”
 
적에겐 사격을 이어나가는 궁기병이 2000인지, 1500인지 숫자를 세고 있을 여유는 없는 듯했다.
 
“돌격!”
 
횡렬로 서서 사격 중이던 진형이 갈라지더니 종렬로 대열을 짠 500기의 기병이 검을 뽑아들고서 돌격하기 시작한다.
적이 진형을 바꾸고 창병대와 궁병대가 자리를 바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는 보우건의 볼트라 해도 닿을법한 근거리, 가속도를 붙인 기병 돌격에 대처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방금 전 대열은 뒤쪽에서 달려오는 그들을 감추기 위한 진형이기도 했던 것이다.
 
놈들의 거대창은 대열을 짜두면 견고한 수비력을 자랑하긴 하지만, 병사끼리 부딪치는 상황 속에선 제대로 휘두를 수도, 손에 쥘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검을 쥐고서 쳐들어오는 적을 상대할 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루나 씨가 적한테 돌격했습니다! 나머지 궁기병도 검을 장비하고서 돌격 중입니다!”
“이리지나, 가라.”
“음! 맡겨만 다오!”
 
이리지나는 창기병의 절반, 500기를 이끌고서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 우익……근위병 집단을 한층 더 우측으로 몰아세웠다.
경장비를 사용하는 창기병이라 해도 거대 장창의 방어진을 돌파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창기병은 놈들에게 포위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불어넣기만 해도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이미 적은 루나가 이끄는 부대에게 박살이 나 진형이 무너진 채 혼란에 빠져있는 중이다.
 
“끄엑!” “흐극!”
“속도를 낮추지 마라, 놈들을 돌파하면서 베어내라!”
 
궁기병의 검은 일반병이 쓰는 물건과는 다르다.
일직선이 아니라 중간에 휘어 초승달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스쳐지나가듯이 공격할 때 적을 쉽사리 베어낼 수 있게 되고, 검이 몸통에 박히는 경우도 없어진다.
 
“궁기병이라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한 수준인데 이제.”
 
새로운 명칭이라도 생각해 둘까?
그런 잡다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상황은 한층 더 변화하기 시작했다.
 
“적 중앙에서 기병대 출현! 대략 2000기, 전방을 통과하고서 우익을 지원하러 가는 중입니다!”
“호오, 역시 수를 쓰기 시작했나 보군요.”
 
세리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레오폴트가 놈들을 멍청이 취급하듯이 말을 꺼냈다.
 
여기서 보건대 중앙과 우익의 마그라드 군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완성된 군세였다.
우익의 트리에아 근위병하고는 연계가 좀 어설픈 것 같더니만 그게 진짜였나 보군.
 
“나라면 방치할 테지만 연합군이라 하니 그럴 수도 없나보지?”
 
내가 손을 치켜올리자 궁기병 2번대, 2000기의 기마병이 적과 함께 달리듯이 비스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참에 적의 기병을 박살내 두면 상황은 아주 유리해진다.
 
곧바로 사격이 시작되더니 적지 않은 숫자의 적 기병이 화살을 맞고 낙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그라드 군은 잘 훈련되어 있는 병력인지 허둥대지 않고서 말을 탄 채 창 부대가 이끄는 대열까지 아슬아슬하게 우리 부대를 유인했다.
 
뒤쫓으려던 2번대를 향해 중앙 진지의 궁병이 대량의 화살을 쏟아붓자 우리 쪽도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숫자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흠, 좀 힘들어 보이는데. 2번대를 후퇴시켜라. 루나랑 이리지나도 후퇴시켜라.”
 
세리아가 지시를 내리자 색깔이 섞인 불화살이 날아갔다.
궁기병 2번대가 방향을 반대로 돌리고 루나의 1번대와 이리지나의 창기병은 적진을 빠져나와 후방으로 크게 돌아 우리 쪽 진영으로 돌아왔다.
궁기병은 근접 전투에서도 충분히 강력하지만 적의 기병과 정통으로 맞붙으면 무기 차이 때문에 유리하다고 보긴 힘들다.
이점을 무시하면서까지 억지로 접근전을 시킬 필요는 없었다.
 
“후퇴 신호를 내리면 바로 돌아올 수 있는 이 속도가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지요.”
 
레오폴트는 묵직함보단 속도를 중시한다. 요즘 관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커다랗고 무거운 걸 좋아하지만 말이야.
 
 
“루나 씨, 이리지나 씨가 복귀하셨습니다. 적의 증원 기병 측 손해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우익 쪽에는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황을 보니 우익 쪽은 재공격 태세를 갖추기 위해 창진을 다시 짜려고 하는 듯했으나, 중간중간 병사가 쓰러져 있거나 혼란에 빠져 대열이 망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지휘관이 노성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대열 같은 걸 완성시키려 했으나 이미 제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우익은 한동안 못 움직이겠군. 루나, 잘 했다.”
“황송한 말씀, 감복할 따름이옵나이다.”
 
이제 남은 건 그 말투를 어떻게든 고치도록 하자고.
 
“적 대열에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중앙 부대가 우익과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리아의 목소리를 듣고서 다시 전방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영이 만들어져 있었다.
 
◇◇◇◇◇◇◇◇◇◇◇◇◇◇◇◇◇◇◇◇◇◇◇◇◇◇◇◇◇◇◇◇◇◇◇◇◇◇◇◇◇◇◇
트리에아 마그라드 연합군 진영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원정군의 최고 사령관, 라드갈프는 신음하듯이 말을 꺼냈다.
 
“엄청난 공격력입니다. 설마 기병이 장창부대를 격파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라드갈프의 부하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병은 장창부대의 방어 진형으로 막아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러한 상식을 너무나 간단히 박살내고 있었다.
 
“변경의 오랑캐들은 말 위에서 활을 쏴도 무척이나 솜씨가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놈들을 끌어들였거나 혹은 용병으로 고용한 건 아닐지…….”
“둘 중 무엇인지 지금 당장 알아낼 필요는 없다. 지금 진형으로 싸웠다간 똑같은 신세가 될 거다. 좌익을 합류시키고 편성을 변경해라.”
“예!” “알겠습니다!”
 
수기 신호와 함께 순식간에 진형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고르도니아 쪽도 방금 전 습격에 참전했던 부대가 진지로 복귀 중이기 때문에 일시적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
상황이 불리하게 굴러갈 가능성이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해 두었다.
 
“만약 처음부터 우리 진영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으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에선 트리에아가 방패가 되어준 게 다행입니다. 저런 궁술은 화살을 막아내지 못하는 이상 전투 성립 자체가 안 됩니다.”
“얼추 봐서 정밀도로 3배, 속도로 2배인가. 놈들의 기병이 6천이라 하면 3만 6천 명의 궁병 부대와 마찬가지다. 정면에서 부딪쳤다간 갈기갈기 찢겨나갔겠군.”
 
라드갈프와 부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서로 웃음을 터트렸다.
전장에선 생각지 못한 불운과 행운이 항상 공존한다.
그것도 전부 실력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중장 보병대, 남쪽과 측면 부분에 전개 완료했습니다! 돌파 진형 완성입니다!”
“우익에 있는 트리에아 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버려 둬, 혼란에 빠진 부대는 어차피 걸림돌이다. 방해물까지 지켜가면서 싸울 수 있을만큼 만만한 놈들이 아니야.”
 
뒤쪽에서 재상이 무어라 말하고 있긴 하지만 라드갈프와 부하 모두 무시했다.
지금은 전장, 문관이 나설 자리는 없다.
 
“우선 놈들의 전술을 파악했다. 다음엔 우리의 전술을 보여주도록 하자고.”
 
부하들은 라드갈프에게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숱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그들에게 두려움은 없다.
 
“전 부대, 진격 개시! 놈들을 찢어버려라!!”
 
◇◇◇◇◇◇◇◇◇◇◇◇◇◇◇◇◇◇◇◇◇◇◇◇◇◇◇◇◇◇◇◇◇◇◇◇◇◇◇◇◇◇◇
고르도니아 진영
 
“철로 된……상자?”
 
세리아가 무심코 중얼거린 그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적군의 정면에는 중무장한 보병이 나와 있고, 그들은 모두 자기 키 정도 되는 크기의 커다란 방패를 내밀고 있었다.
방패 틈 사이로 장창을 내민 채 전방위를 방어하는 진형이다.
 
깊이가 상당한 거대한 철 상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한 진형이 총 8개, 그리고 기병이 좌우에 1000기씩 나뉘어 있다.
그런 진형이 전장에 울려퍼지는 징소리에 맞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발소리와 함께 진격해 오고 있었다.
 
“방어진하고도 형태가 다릅니다. 속도는 느린 것 같군요.”
 
얼핏 보기에도 무거워보이는 전신 갑옷에 커다란 방패까지 손에 쥔 보병이 정면에 있다.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을만한 진형은 결코 아니었다.
 
“가만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궁기병 2번, 3번 부대. 출격하라.”
 
놈들의 진형을 무너트리면 다른 기병과 보병을 이용해 결판을 낼 수 있다.
 
“돌격!”
 
루나가 다시 병사를 이끌고서 돌진한다.
그럼에도 양익의 적 기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궁기병은 정면에 있는 덩어리와 마주친 채 일제히 화살을 날렸으나, 거대 방패에 가로막혀 거의 효과가 없었다.
 
“정면이 튼튼한 건 보면 알 수 있다. 곡사 방식으로 화살을 쏴라, 대열의 정중앙을 무너트려라!”
 
궁기병 4000기는 정면에 보이는 적을 포기하고 진형의 한가운데에 비처럼 화살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적은 한 치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진격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머리 위에도 방패를 올려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화살이 통할 것 같진 않군요.”
 
레오폴트가 냉정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 세리아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보라고, 아직 진 것도 아니잖아.
 
“큭! 정면 적을 향해 사격을 집중, 방패 틈 사이로 노려서 놈들을 쓰러트려라! 방어를 무너뜨려!”
 
루나의 지시에 따라 모든 이들의 화살이 집중되더니 정면에 있던 적들 중 몇 명이 쓰러졌다.
하지만 끼어들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것마냥 한 줄 뒤에 있던 병사가 앞으로 밀고 나와 구멍을 틀어막고 말았다.
심지어 방패 틈 사이에서 화살이 날아오더니 방패를 갖고 있지 않은 궁기병이 역으로 당했다.
 
“……!?”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나가 놈들을 우회해 측면으로 파고들려고 했으나, 공격은 시작되지 않았다.
 
“아마 측면부도 정면쪽과 똑같은 진형이 있는 것일 테지요.”
“그야말로 철로 된 상자로군.”
 
 
궁기병은 놈들의 약점을 찾아내려듯이 주변을 돌아다녔으나 오히려 철 상자 쪽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병력을 잃을 뿐이었다.
후방으로 빠지려고 한 궁기병을 향해 적의 기병이 움직인다.
4000대 2000, 아군이 우세한 상황이긴 하지만 주변에서 화살을 맞고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기 때문에 적당히 교전을 끝마치고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적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루나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아무래도 공격 수단이 전부 막힌 모양이다.
 
“레오폴트, 뭐 생각나는 거 있나?”
“있긴 합니다만 당장은 힘듭니다.”
 
기병을 통한 전술도 획기적인 책략도 없다면야 남은 방법은 정공법뿐이다.
 
“궁기병 2번, 3번대는 후방으로 돌아가서 휴식, 다른 부대는 전부 전진이다!”
“되도록 냇가로 유인해 주십시오.”
 
당장 쓸 수 있는 건 아니어도 레오폴트는 무언가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다.
기대하고 있어야겠군.
 
 
“돌격!!”
 
요즘엔 궁기병만 잔뜩 활약해서 눈에 띄질 않았지만 다른 병사들도 착실하게 훈련을 거듭해왔다.
이번에 그 성과를 한 번 보여보라고.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보병부대가 질주, 적의 정면과 충돌한다.
엄청난 금속음이 울려퍼졌지만 정면에 펼쳐진 방패의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몇 사람 정도는 쓰러졌지만 곧장 뒤쪽에 있던 자가 구멍을 막아버린다.
 
그래도 활과는 비교가 안 될만큼 충돌이 거센 검이나 창에 얻어맞으면 적도 어느 정도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 빈틈을 노리고 안쪽에 창을 꽂아넣는 용감한 자도 있었으나, 곧장 뒤쪽에 있던 병력에 밀려 내쫓겼다.
오히려 적이 밖으로 내지른 창에 꿰뚫려 죽는 아군이 더 많았다.
 
“좋지 않군…….”
“저 방패를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면 싸울 수 없습니다…….”
 
세리아도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편성 부대 중 절반을 차지하는 궁기병이 가로막힌 이상, 불리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적 기병, 움직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는 걸 보고 승부를 내러 온 건지 적의 기병이 좌우에서 협공을 시도했다.
한쪽은 루나의 궁기병이 일제사격을 날려 난전 상태로 끌고 갔지만, 또다른 쪽은 상자와 충돌 중인 보병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레오폴트, 지휘는 맡겨두겠다. 세리아, 가자!”
“예!”
 
상대해야 할 적 기병은 1000, 우리쪽은 예비 병력으로 남겨둔 중장기병 500, 재밌는 승부다.
 
“나를 따르라!”
 
레오폴트의 한숨소리를 들으면서 세리아와 호위대를 이끌고 선두에 나선 채 적한테 돌진한다.
기병끼리 전투를 벌일 때, 접근전은 한 순간이다.
 
측면에서 다가오는 적을 보고 병사들이 내지르던 비명소리가, 나와 중장기병의 등장으로 인해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중장기병은 강력하긴 하지만 무게가 무겁고 속도가 느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슈바르츠를 타고 있는 내가 한 발 더 빠르다.
 
“단숨에 놈들을 해치우고 마그라드의 강력함을 만국에 알리끄아악!!”
 
나와 마찬가지로 선두에 나서고 있던 귀족의 머리를 창으로 베어낸다.
선두는 위험한 법, 다음 생에선 조심해라.
 
귀족 뒤를 따르고 있던 기병 두 기를 놈들이 장비한 방패째로 날려버리고, 한 놈의 창을 왼손으로 빼앗았다.
 
“받아라!”
 
점점 다가오던 중인 적을 향해 창을 던져보았다.
무거운 창은 어느 말 하나에 꽂히더니 뒤쪽에 있던 기병 두 기와 함께 뒤엉켜 놈들을 넘어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속도가 떨어진 내 뒤를 세리아가 따라붙었다.
 
“또 혼자서 나가시다니요! 에이길 님보다 뒤쳐지지 마라! 놈들을 처리해라!”
 
나를 선두로, 마치 화살촉 같은 돌격 진형으로 적의 기병대와 충돌, 그 기세 그대로 적들을 도륙한다.
주변에 있는 호위부대는 중무장한 덕분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기병끼리 싸울 땐 우리가 유리하다.
 
“그대가 그토록 유명한 하드릿 경인 것으로 보이오! 승부요, 승부!”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 오는 중년 기사의 창을 막아내고 있는 힘껏 위로 내던진다.
창은 손에서 떨어져 공중을 맴돌았고, 나는 포기한 채 눈을 감은 기사의 목구멍을 단숨에 찔러 숨통을 끊었다.
 
정면에서 날아드는 세 자루의 창. 첫 번째는 튕겨내고, 두 번째는 피하고, 세 번째는 손으로 붙잡아 병사와 함께 휘둘러 놈들을 전부 낙마시켰다.
엄청난 난전이군. 세리아는 괜찮나?
 
“쉭!”
“끄악!”
 
세리아는 말 위에서 창을 재주 좋게 피하고는 장갑 틈 사이에 검을 집어넣어 적의 손목을 날리고 있었다.
정말로 잘 싸우는군.
검술로만 따지면 나는 절대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 유명한 하드릿 경과 일대일 승부, 아――!! 비겁하도다―!”
 
소리치는 남자의 얼굴에 화살이 꽂혔다.
피피는 정말로 가차없군.
최소한 목이라도 내가 날려줘야겠어.
 
“크, 큰일이다! 너무 강해! 후퇴하라―!!”
“도망쳐 얼른――!!”
 
한동안 전투가 이어지다가 결국 절반수 이하로 줄어든 적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황을 살펴보니 루나 쪽도 훌륭하게 적 기병을 격파하고 놈들을 추격 중이다.
기병전만 보면 승리했다고 봐도 될 수준이지만, 전체 양상은 좋지 못하다.
 
“적의 상자 진형은 거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군 쪽 피해도 확대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맨 처음 우리가 공격했을 때보단 확실히 열세에 몰렸다.
레오폴트가 지휘하고 있는데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정말로 버거운 상대인 듯하다.
좋아, 도와주러 가볼까?
 
“전 부대 중 부상자와 무기를 잃은 자는 후퇴하라. 그 이외엔 전부 나를 따르라!”
“하시려는 겁니까?”
 
정확해.
 
약 1000명 정도로 구성되는 걸로 보이는 철상자가 총 8개, 아군을 가장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상자 쪽으로 목표를 지정하고 측면 쪽으로 돌격한다.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지만 전부 다 창을 휘둘러 막아낸다.
 
“화살은 안 통하지만 투창이라면 어떨까!”
 
방금 전 적이 쓰던 물건을 미리 주워왔다.
 
“그건 마상창입니다……투창용이 아닙니다.”
 
세리아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무시하고서 완전히 방패로 가로막힌 측면부를 향해 전력을 실어 창을 내던진다.
창은 겉으로 드러난 방패에 가로막히……긴 했지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격을 막아낸 병사를 진형 한가운데로 튕겨날렸다.
역시 투창은 화살하고는 위력이 다르다.
 
“그러니까 그건 일반적인 창이라구요……평범한 사람이 던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형에 뚫린 구멍은 다른 병사들이 곧바로 막아내긴 했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놈들을 향해 돌진, 이번엔 내가 원래 쓰던 창을 휘둘렀다.
 
“끄악!” “뜨허억!” “꾸에엑!”
 
방패를 쥐고 있던 병사 3명이 안쪽으로 튕겨날아가서 생긴 커다란 구멍을 통해 진형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대방패를 손에 쥔 병사가 정면, 측면 바깥쪽을 몇 줄로 가득 채우고 군데군데 궁병과 창병을 배치해 둔 진형이다.
이러니까 구멍을 뚫어도 당장 막히는 거였군.
 
동시에 세 사람이나, 심지어 뒤쪽에 있던 병사까지 함께 떠밀려 날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방패를 대신 세울 병사가 나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중이다.
절호의 기회로군.
 
슈바르츠의 거대한 체구로 밀어붙이며 창을 휘둘러 병사를 베어낸다.
세리아와 부하도 내 뒤를 따라 진형에 뚫린 구멍 안으로 파고들어가 점점 크기를 넓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도 필사적으로 창을 내질러 저항한 탓에 몇 자루가 슈바르츠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렇게 강한 힘이 실린 것도 아니고 크게 다친 것도 아니지만 “아파, 아파.”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녀석의 몸집이 워낙 크다보니 대충 찌르면 맞는 모양이다.
 
“어!? 에이길 님!?”
 
나는 슈바츠에서 뛰어내린 다음 적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한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있는 힘껏 창을 휘둘렀다.
내가 날릴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실은 일격이다.
 
“히익!”
 
금속이 찌그러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리아가 주변으로 날아온 병사의 모습에 비명을 내질렀다.
좋아, 내 창 사정거리 안에 살아있는 적은 이제 하나도 없군.
 
“끄엑!!” “10명을 날려버린 건가!?” “말도 안 돼…….” “괴물이다!”
 
적까지 날 칭찬해주니 기분이 좋아진다.
 
“크오오오오오오오오!”
 
짐승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한 번 더 창을 휘두르고, 덤으로 떨어져 있던 적의 창도 반대쪽 손에 쥔 채 근처에 있던 적을 닥치는대로 찔러댔다.
문득 최고의 쾌락을 느끼며 사정할 땐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악!!” “사람이 아니야!!” “누가 저놈을 막아봐아아아아!!”
 
내게 다가오는 적들은 차례차례 손발을 잃거나 운이 나쁘면 목이 날아갔다.
철로 된 상자였던 진형은 완전히 붕괴, 구멍이 뚫렸다기보단 마치 찌그러진 것처럼 휘기 시작했다.
중장기병들도 말에서 내린 채 필사적으로 싸우는 중이다.
 
그리고 결국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있던 모든 대방패를 내던지고 적병이 진형을 포기,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형을 무너트렸다! 놈들을 도륙해라!”
 
한 번 붕괴한 이상 중장비 보병은 다리가 느린 거북이에 불과하다.
이쪽으로 증원을 온 궁기병와 다시 말에 올라탄 중장기병이 놈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해냈습니다! 적의 진형을 붕괴시켰습니다!”
 
세리아가 아주 기뻐하고 있긴 하지만 고작 1개다.
나도 상당히 지친 데다가 주변 아군들은 숨을 헐떡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다.
이 기세를 살려도 다른 7개의 진형을 박살내는 건 불가능했다.
 
 
중장기병을 이끌고서 본진으로 돌아가니 물조차 마실 시간도 없었다.
 
“하드릿 경, 한 번 더 출전해주시지요.”
“……어째서지?”
 
내가 왜 레오폴트한테 명령을 받아야 하는 거냐.
 
“적의 정면에 빈틈이 생길 겁니다. 돌파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왜 빈틈이 생기는지 말해봐.”
 
솔직히 나도 지쳤다.
적당히 둘러대는 거라면 조금 쉬고 싶다.
 
“적은 우리 부대를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 곧장 냇가까지 돌아오게 될 겁니다.”
 
그거야 보면 알고 있긴 하다만 오히려 놈들이 밀고 있는 상황이잖아.
심지어 냇가로 유인해 봤자 물길도 느리고 수심도 얕다.
적이 고작 그 정도에 붕괴할 것 같진 않은데.
 
“우리가 냇가까지 밀리고 난 이후, 측면으로 방향을 돌리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적도 방향을 바꿔서 대응해 올 뿐이겠지.”
 
아무리 느리다고는 해도 방향 전환 때 빈틈이 생길만큼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놈들은 징 소리에 맞춰 보폭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만, 냇가 주변은 높이도 일정치 않은 데다가 바닥도 일반적인 흙바닥과는 다릅니다. 같은 보폭으로 걷더라도 대열은 흐트러질 겁니다.”
 
레오폴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부분을 공성추……아니, 하드릿 경께서 박살내고 돌파구를 만들어 주십시오.”
“이 자식……지금 고쳐 말했지?”
“무운을 빌겠습니다.”
 
상황을 보니 적군의 상자 7개가 전부 딱 알맞게 냇가 근처까지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마냥 밀리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너는 이걸 노리고 있던 거냐?
 
“밀어붙이라 말씀하셨으면 할 수는 있었습니다만 결정타가 되진 않았기에 구태여 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놈이군.
폭언은 용서해 주지.
 
 
 
 
본진에서 일제히 파랗게 빛나는 불화살이 발사되었다.
그것을 신호로 그 전까지 정면에서 교전을 이어나가고 있던 부대가 일제히 후퇴, 왼쪽으로 우회해 측면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보였다.
 
“흥! 이제 와서 우회가 될성싶으냐? 전 부대, 좌회전이다. 놈들을 정면에 두고서 밀어붙여라!”
 
지휘관이 소리치자 훌륭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철 상자가 방향을 바꾸었다.
속도를 높일 생각인 건지 그 전까지 보다 빠른 간격으로 징이 울린다.
 
우회하려고 하는 아군을 몰아세우기 위해 냇가로 나아가는 마그라드 군, 하지만 그들의 대열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왼쪽은 원래 속도와 똑같은데 비해 냇가 근처에 있던 우측 부분이 점점 뒤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뭘 하는 거냐! 보폭을 맞춰라!”
 
지휘관이 필사적으로 소리쳤으나 한 번 어긋난 이상 빈틈은 점점 늘어난다.
 
“쯧! 바닥이 문제인가!”
 
보폭 수정을 명령하려던 그때, 궁기병 쪽에서 화살처럼 비를 쏟아부었다.
심지어 그것도 점점 뒤쳐지는 중인 적의 우측 부분뿐이다.
방패로 방어한 덕분에 별다른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화살의 충격을 막아내면서 움직인 탓에 보폭은 한층 더 느려지기 시작했다.
 
“간격을 좁혀라! 속도 낮춰!”
 
징소리의 속도가 줄어들었으나 전체 움직임이 바뀌어도 보폭 간격은 줄어들지 않는다.
끝내 강철벽에 균열이 생기더니 내부가 드러났다.
 
“제자리 정지! 대열을 원상태로…….”
 
그걸 가만 두고 있을 생각은 없다.
똑같은 상황에 빠진 모든 적 부대를 향해 방향을 바꾼 아군이 돌진하기 시작한다.
 
 
“우리도 가자.”
“예!” “피피도 간다!”
 
창은 놔두고서 듀얼 크레이터를 뽑아든 채 걸어서 적한테 달려든다.
방패째로 두 사람을 두 동강내고, 또 한 명은 맨손으로 머리를 짓뭉갠 뒤 방패를 빼앗는다.
거대한 방패는 무게 10kg 정도라 왼손 하나라도 충분히 들 수 있었다.
 
앞으로 들이닥치는 창을 방패로 막아내면서 몸통박치기로 창을 꺾어버리고 적을 뒤로 날린다.
이런 방식의 기술이 검술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우측에서 달려드는 적을 발로 걷어차고 놈이 쓰러진 순간 방패 모서리 부분으로 때려 죽였다.
이런 기술은 없었겠지.
 
“오랑캐다! 오랑캐가 나왔다!” “아니, 오크다!”
 
무례한 놈들이군, 다 죽여야겠어.
피바람을 흩뿌리며 대부분의 적들을 단칼에 베어죽이면서 되도록 크게 진형을 무너트린다.
진형이 점차 크게 무너진 탓에 결국 상자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 걸 보고 아군을 뒤로 물렸다.
 
“이제 산 건가?” “대열을 다시 고쳐…….”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다.
 
방패의 보호를 잃은 머리 위에 수많은 화살이 쏟아져내리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적들이 쓰러지기 시작한다.
필사적으로 자기 아군을 가다듬으려던 지휘관을 향해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내던지니 아주 멋지게 명중했다.
그것이 마지막 신호였던 것마냥 진형은 완전히 붕괴, 적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듯이 날뛴 게 조금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아무튼 결국 진형이 망가진 적은 끝끝내 형세를 수복하는 데 실패하고 차례차례 붕괴. 결국 마지막 적이 박살나 후퇴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의 승리가 확정됐다.
 
“승전고를 울려라!”
“““오오오오오오오――!!”””
“오―, 꺄아아아아악――!!”
 
고양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세리아의 성기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고 말았다.
미안하다, 오늘밤은 원하는만큼 귀여워해줄 테니까 용서해 다오.
 
어느새 아군이 기세에 올라타 도망치는 마그라드 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말리진 않겠지만 모든 병력이 놈들을 쫓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로레일을 지켜내는 게 최대 목적이니까 말이야.
 
 
 
 
“자, 개선식이라도 한 번쯤 열고 싶은 마음이다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말이야.”
“예, 남아있군요.”
 
레오폴트와 의견이 일치했다.
루나와 이리지나도 눈을 빛내는 중이다.
 
시선 끝에는 초전 때 격파당한 근위병이 있었다.
놈들은 혼란을 틈타 북쪽, 로레일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지치긴 했습니다만 아직 우리 궁기병은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이미 대세는 정해졌다.
도시로 돌아가면 화살도 얼마든지 있으니 아까워할 필요는 없었다.
 
“근위병의 장비는 빼앗은 사람이 가져도 상관없다.”
 
피로에 찌들어 있던 병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근위병의 숫자가 적긴 해도 돈으로만 보면 최상급의 장비를 갖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든지 알고 있다.
 
“사양 말고……놈들을 섬멸해라!!”
 
기병, 보병이 한 데 섞인 채 돌진하기 시작한다.
 
승전보를 외치며 사기를 끌어올리는 아군.
 
패배한 적병들.
 
궁기병이 날린 화살비가 적을 찢어발기기 전부터 승부는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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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라드, 트리에아 원정군
 
 
“군단장님! 부디 무사하시길!”
 
땅바닥에 쓰러진 지휘관 중 한 명이 경례를 하고서 엎어졌다.
그는 복부에 화살을 맞아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걸을 수 없는 사람을 짊어지면서 갈만한 여유 따위는 지금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는 라드갈프의 아버지 대부터 그를 섬기던 부하였다.
 
병사는 방패와 강철 갑옷, 끝내는 검까지 바닥에 내던지며 달려갔다.
적 중에는 기병이 있다. 추격당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따라잡힌다.
패잔병의 말로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
 
라드갈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꺼낼 체력마저도 아까웠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배로 돌아가 본국으로 도망쳐야 한다.
 
“군단장님, 무사하시길!”
 
기사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더니 쫓아오는 적과 검을 맞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보우건을 맞고 숨이 끊어졌다.
저 사람은 라드갈프가 결혼 축하 겸 검을 선물했던 남자다.
 
뒤를 돌아보고서 끝까지 싸우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을 악다물었다.
라드갈프의 풍부한 경험은 지금 저항해봤자 섬멸 말고 다른 결말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입술을 깨물며 도망치는 것 말고 달리 수가 없다.
 
어느새 뒤쪽이 조용해지더니, 고르도니아 군은 추격을 그만두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예상한대로 우리를 끝까지 쫓아오진 않았다.
로레일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쫓아올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집합해라……전원 퇴각이다.”
 
평소에도 두꺼운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기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병사도 알몸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로 비틀거리며 모이기 시작했다.
 
“당했다……철저하게……이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하다니…….”
 
한 데 모인 지휘관들 중에도 모이지 못한 사람이 산처럼 있었다.
병사를 얼추 세어보았으나, 1만이었던 병력은 3천도 남아있지 않았다.
 
놈들이 비겁한 수를 쓴 건 아니었다.
정면으로 맞붙어 최선을 다했음에도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드갈프의 마음은 심란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부하, 어렸을 적부터 돌봐주었던 수많은 기사들이 이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검을 뽑아들고, 하늘 높이 쳐들었다.
 
“전쟁의 신이시여, 지켜봐주시오!! 나는 반드시 놈과 다시 싸워 쓰러트리겠소! 내 목숨을 걸고서!!”
 
검게 탄 얼굴, 그 눈에서는 평소엔 겁쟁이나 흘리는 것이라며 엄격히 금했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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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길 하드릿  21살  가을  전시 상황
예하 부대 9400
보병 2000 기병 1300 궁병 700 공병 200 궁기병 5200
 
군대 부하: 레오폴트(참모 겸 부총사령관) 세리아(부관, 호위대장) 이리지나(지휘관)
루나(궁기병 지휘관) 피피(마스코트)
 
현재 지점: 로레일
전과: 트리에아 동방 수비대 괴멸(항복), 로레일 탈취, 마그라드 군 격파, 트리에아 근위군 섬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