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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101화『북부 동란⑦ 지하실에 비치는 빛』

제101화『북부 동란⑦ 지하실에 비치는 빛』

 
마지노 요새의 항복으로 인해 성문이 개방되고 가로막혀있던 남쪽과 북쪽이 연결됐다.
에이리히 소속 중앙군이 끊임없이 기다란 줄을 그리며 문 너머로 행군해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라고 말씀드릴 만큼 오래되지도 않았군요.”
 
횡렬로 길게 병사들을 세우고 선두에 선 채 내가 말했다.
 
“네 공적이다. 평원을 그렇게 크게 돌아서 우회하는 데에 성공하다니, 대단하더군.”
 
나는 악수를 하고서 에이리히와 합류한 뒤 포로 감시 및 요새 관리용 병사를 남겨두고 일단 로레일로 향했다.
……솔직히 도시 안에 부대가 전부 다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서 왕도 근처에 잔존 병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나?”
“왕도 쪽에는 경비대, 혹은 수비대가 있을 걸로 보입니다만 눈에 띄는 건 그것뿐 아닙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왕도 근처에 있는 각 영주의 군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숫자와 훈련 상태 모두 우리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실제로 우리 부대와 근위병-마그라드 연합군이 충돌했을 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쯤 영지 안에 틀어박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을 게 분명하다.
 
“……모든 병력을 요새 안에 넣어뒀었단 말인가?”
“근위병이 있긴 했습니다만 격파했습니다. 생존자는 쥐꼬리 수준이니 생각하실 필요없습니다.”
“그래? 원군도 없이 잘 해냈군.”
“그것보다…….”
 
문득 마그라드에 관한 이야기를 병사들 앞에서 해도 되나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내 병사는 다들 깃발을 본 상황이다.
이제 와서 말을 얼버무려도 달라질 건 없다.
 
“근위군와 연합하고 있던 마그라드 군대와도 전투를 벌였습니다. 간신히 격파하는 데에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희생도 제법 나온 걸 생각해 보면 상당한 수준의 정예벙이더군요.”
“마그라드!? 트리에아 군으로 위장하지도 않고 자기네들 깃발을 세워두고 있었단 말인가?”
“예, 병사들도 전부 목격했습니다.”
“으음…….”
 
에이리히는 나와 대화하던 걸 멈추고 사자를 불러서 왕도한테 전언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정보는 그 정도로 긴급한 사항이었던 모양이다.
 
“병사를 위장시키고 은근슬쩍 원호하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태입나다만, 깃발을 당당히 세워두고 있다는 건 고르도니아와 명확히 싸울 의지가 있다는 걸 보였다는 뜻입니다.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레오폴트가 내 뒤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가르쳐 주었다.
아직 안 끝날지도 모르겠군.
전쟁을 벌이는 건 상관없지만 조금은 쉬고 싶은 심정이다. 여자도 따먹고 싶고.
 
“잔뜩 따먹으셨지 않으십니까……제 배에도 아직 씨가 남아있습니다.”
 
세리아가 배를 문지르면서 투덜거렸다.
이리지나와 루나도 얼굴을 붉혔다.
어제 만든 이리지나, 루나, 세리아, 피피의 여체탑은 아주 훌륭했지.
 
 
“미안하다, 왕도에 바로 알려야 할 사항이라 생각해서 말이야. 아무튼, 일단은 로레일에서 병사를 휴식시킬 생각이다만 이후에 있을 왕도 진군……너도 올 생각이겠지?”
“따라가겠습니다.”
 
왕도 함락을 끝으로 아마 트리에아 전쟁은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로레일에서 잠만 자면서 기다리는 건 시시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동행을 허락해준 것은 내게 주는 포상이기도 하다.
왕도 돌입 이후, 귀족과 대상인들의 저택은 약탈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전리품을 입수할 권리를 내게도 주겠다는 뜻이다.
 
“알고 있긴 할 테지만 민중들한테는…….”
“재산 탈취는 귀족 저택과 그쪽과 관련이 있는 상인들 한정, 알고 있습니다.”
“그래, 네 군대는 일반적인 사군과는 다르게 규칙을 잘 지키더군. 걱정할 필요 없겠어.”
 
영주군들한테서 자주 보이는 현상으로, 농민이나 부랑자한테 무기를 쥐어줘서 만든 군대일 경우엔 도시 습격 때 여자를 강간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둥 큰일이 벌어진다.
적어도 내 군대는 명령을 어기지 않을만큼 질서는 유지되는 중이고 만에 하나 규율을 어길 경우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이미 대세가 정해진 전쟁이긴 하지만, 적들도 문을 열고서 기다리고 있진 않을 거다. 며칠 쉬고 나서 왕도로 출발하지……얘기를 나눠야 할 사람도 있고 말이야.”
 
에이리히가 슬쩍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 끝에는 병사들 사이에 끼어있는 말 위에서 축 늘어진 마지노 백작의 모습이 있었다.
 
◇◇◇◇◇◇◇◇◇◇◇◇◇◇◇◇◇◇◇◇◇◇◇◇◇◇◇◇◇◇◇◇◇◇◇◇◇◇◇◇◇◇
일주일 후  왕도 트리스니아
 
“발사아!!”
 
지휘관의 호령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돌이 날아가고 낙하 지점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그 뒤를 쫓듯이 거대한 볼트가 몇 개나 날아간다.
 
“궁병대, 사격 개시!”
 
한순간, 햇빛을 가릴만큼 엄청난 숫자의 화살이 쏟아져내렸다.
도시벽 위에서 활을 장비하고 있던 적들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 궁병, 대부분 전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성추를 내보내라. 성문을 박살내고 정공법으로 간다.”
 
 
“에이길 님?”
 
에이리히의 명령에 한 순간 앞으로 나갈뻔 했다.
이것도 전부 레오폴트 그 자식이 나쁜 거야.
 
공성추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거북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느린 속도지만 이미 트리스니아 수비대에 반격을 할만큼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제일 앞에 있던 공성추가 문에 도착해 공격을 시작하고,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공성추도 추가타를 먹이자 순식간에 문이 박살났다.
 
“제1병단, 제2병단은 도시 안으로 돌입하라. 제3병단은 주변에서 대기, 제4병단은 예비병력으로 이곳에서 대기한다.”
“전 부대 돌입, 민중들에 대한 처우는 명령해둔대로 행동하라!”
 
에이리히 군대 일부와 내 군대가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왕도의 수비 병력은 기껏해야 3000정도, 우리 쪽은 요새에 놔두고 온 병력을 제외해도 7만에 육박한다.
공성병기의 숫자도 많기 때문에 마지노 요새와 비교해 보면 왕도 트리스니아 따위 장난감을 부수는 것마냥 간단했다.
 
“항복해도 좋을 것 같아보였습니다만.”
 
에이리히한테 시덥잖은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항복하지 않을만큼 트리에아는 용감하지도, 전쟁에 굶주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사자도 없고 수비병은 전혀 연계하질 못했어. 싸우기 전부터 혼란에 빠져있던 것처럼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낮은 건 당연하다 쳐도 너무 맥빠진다.
쓸데없는 희생이 발생하는 것보단 낫긴 하다만.
 
“뭐, 여기서 떠들어도 별 수 없을 테지요.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이미 승부가 정해진 전장에서 죽지 말라고.”
 
 
나는 상처가 다 나은 슈바르츠 위에 올라타고는 세리아를 데리고서 부대의 뒤를 따랐다.
슈바르츠한테 왠지 기운이 없는 건 상처 때문이 아니라 치료를 받는 사이 암말과 마구 교미를 해대 지쳤기 때문이다.
이제 진짜 거세를 고려해야 할 상황이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 겁을 먹고 있는 민중들을 달래면서 궁전으로 향하자, 거리에서 트리에아 병사 세 사람이 뛰쳐나왔다.
전투가 벌어지나 싶어 창을 겨눴는데, 놈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잠깐만! 우리는 더 이상 싸울 생각 없어!”
“항복하겠다. 목숨은 살려다오…….”
“왕도 도망친 상황에 저항할 이유가 없다고…….”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뭐야, 재미없긴.
그런데 왕이 도망쳤다는 게 무슨 소리지?
 
“이건 소문인데요……왕족이랑 고위 귀족들은 어젯밤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갔답디다.”
“상관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그 다음부턴 아무런 명령이 없는 걸 보니……틀림없지.”
“우리를 버리고서 마그라드로 도망친 게 분명해! 제일 먼저 꽁무니를 뺀 왕 때문에 죽을 생각은 없다고!”
 
“이 소식은 라드할데 경한테 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세리아가 말한대로다.
 
“이 녀석들을 본진으로 데려가라.”
 
 
“만약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제대로 저항할 적은 없겠군…….”
 
왕이 도망쳤는데 죽을 기세로 나라를 지키는 녀석은 충신을 넘어서 반푼이에 가깝다.
잘 생각해 보니 시내에서 약탈이나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는 들려도 절규소리나 금속음 같은 전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저항하는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시시하군.”
“이거면 된 겁니다. 에이길 님께서 다치지 않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
 
 
꺄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우리 부대 병사 중 하나가 여자를 어깨에 짊어지고서 뒷골목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강간을 금지했을 텐데.
 
“어이, 멈춰라.”
 
병사가 짜증을 내며 이쪽을 보았으나, 내 얼굴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뭘하는 거냐?”
“이, 이것은…….”
 
여자를 빼앗고서 병사를 그 자리에 앉혔다.
세리아가 검을 뽑아들자 병사가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내가 분명 강간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누가 봐도 여자가 싫어하고 있었단 말이지.
 
“예, 옙! 그게 이것은……죄송…….”
 
세리아가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서 부탁해라, 전력으로!!”
 
병사는 내게 머리를 박고서 필사적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용서를 “내가 아니라, 이 여자한테 말이야!!”
 
 
“예?” “어엉?” “네에?”
 
세리아와 병사,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겹쳤다.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이 여자를 안고 싶었던 거 아니냐? 그러면 전력으로 부탁해라!”
 
병사는 혼란스러운 건지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 부탁입니다! 당신 같은 미녀를 안고 싶습니다! 상냥하게 해드릴 테니 제발 한 번만 하게 해주세요!”
“으음……미녀라……뭐, 너무 거칠게 하지만 않는다면야……나도 처음인 건 아니니깐…….”
 
허락이 떨어졌다.
 
“좋아, 다녀와라.”
 
내가 일으켜 세워주니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번엔 여자를 상냥하게 끌어안고서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거면 돼.
 
“………….”
“그러고 보니 넌 왜 검을 뽑은 거냐?”
“……여자를 범하면 사형 아닙니까?”
“강간일 경우엔 사형이지. 화간은 상관없어.”
“………….”
 
세리아의 한숨과 차가운 시선은 궁전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됐다.
 
 
 
 
 

 
“역시 왕족은 아무도 없던 모양이다.”
 
에이리히와 테이블에서 마주보고 차를 마신다.
이 녀석은 최고 사령관이라 할 일이 많다보니 한 잔 걸치기는 힘들다고 한다.
 
“사령관 자리에 있어야 할 고위 군인들도 말입니까?”
“그래, 붙잡은 중신들은 전부 병에 걸린 대신들뿐이었어.”
“역시……마그라드인 건가요?”
“그것밖에 가능성이 없어. 수트레나 유레스트가 그런 짓을 해야 할 의미도 없고, 실제로 군대를 보내온 건 마그라드니까.”
“강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연방으로 갔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에이리히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민중으로 살아갈 생각이라면 가능한 얘기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족이라는 것들은 그렇게 쉽사리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족속들이 아니거든. 언젠가 국토로 돌아올 생각이라면 마그라드 말고는 달리 없겠지.”
 
방금 한 얘기는 폐하한테는 비밀이다, 라며 에이리히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그게 사실이라면 골치 아프군요. 쫓아갈 수도 없을 테니까요.”
 
우리한테 배가 없는 이상, 강을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트리에아는 강의 상류 부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너비가 좁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km는 떨어져 있다.
헤엄을 치거나 통나무를 끌어안고서 건너갈 수 있을만한 거리가 아니다.
 
“그쪽 관련 문제는 왕도의 판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 왕과 케네스 자식……아니, 외무경이 무언가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해.”
 
에이리히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짓고 말투도 용병 시절 때 그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외무경이라는 건 분명 왕의 심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왕도 권력 투쟁 쪽도 여러 일이 많나보구만.
 
“일단 트리에아 국토를 제압하는 게 우선이다. 각 영주들을 굴복시켜야지.”
 
그것도 문제없다.
왕도가 함락당한 이상, 영주들이 이미 도망친 왕가에 따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곧 물밀듯이 항복하고 복종 의사를 표할 게 분명하다.
 
“시내는 어떤가? 무분별한 약탈이나 살생이 일어나고 있진 않겠지?”
“예, 금기를 어겨 처벌을 받은 놈들도 몇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 질서는 유지되는 중입니다.”
“그렇군……그럼 얼추 정리가 됐다 봐도 되겠어.”
 
에이리히가 의자 깊숙이 몸을 맡겼다.
이대로 자게 놔두고 싶긴 하지만, 아직 한 가지 걱정거리가 남아있다.
 
“그 처형대는 뭔지 알아내셨습니까?”
“그래……병에 걸려 잠들어 있던 대신한테 물어봤지.”
 
 
궁전 앞에 있던 광장에 몇십 명이나 되는 남녀가 목매달려 죽어 있던 것이다.
트리에아의 중신들이 도망치기 전에 목매단 게 분명하긴 한데, 일부러 죄인을 처형하고 난 다음 도망친 이유도 불분명하고 애초에 그들의 옷차림은 누가 봐도 고위 귀족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라 생각해도 되긴 하지만, 신경이 쓰여서 조사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그건 트리에아의 재상, 뒤누아 후작의 일족이라더군. 듣기로는 왕의 허가없이 타국의 군대를 불러들이고 패배 후 행방불명이 됐다고 해. 본보기로 가족들이라도 처형시킨 모양이더군.”
 
마그라드의 원군이 온 건 그것 때문이었나?
가장 고전했던 전투가 그들과의 전투였다보니,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다.
 
“일단 시체는 전부 내려서 화장해 두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야……재상도 행방불명 상태고 말이지.”
“격전 중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이제 와서 신경 쓸 일도 아니니까.”
 
에이리히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맡겼다.
부하 중 한 명이 모포를 들고서 다가왔다.
이제 여기 남아있을 필요는 없겠군.
 
“그럼 저는 이만.”
“그래, 정말 잘 해줬어.”
 
부하가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며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갑옷을 입고 남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자의 냄새가 난다.
빨리 나가주는 게 좋겠군.
 
 
 
에이리히의 천막을 나오긴 했지만 아직 졸리지 않은 나는 잠시 바깥을 걷기로 했다.
 
“이런 시간에 산책이십니까?”
 
내 뒤를 따라오는 세리아는 평소와 똑같다.
벽에 손을 짚게 하고서 야외에서 한바탕 즐길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기분이 아니다.
 
“바람 한 번 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길래 말이야.”
“밤도 제법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가을이 오는 모양이군요.”
 
세리아를 옆에 세워두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는 기쁘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내 손길을 받아들여주었다.
가끔씩은 이런 시간도 괜찮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억 한켠에 남아있던 풍경 때문에 편안한 분위기가 망가지고 말았다.
지하로 이어져 있는 그 계단은 돌로 막혀있긴 했지만, 잘못 볼 리가 없다.
앞쪽에 있는 건물, 지형, 그 뒤에 보이는 나무들……그토록 시간이 지났건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무언가 인연이라 할 수 있으리라.
 
“에이길 님?”
 
세리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서 내 앞에 있는 건물 문을 두드렸다.
그냥 보기엔 낡은 숙박시설이었으나,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고르도니아 분이시군요……대체 무슨 일로?”
“안쪽을 한 번 보고 싶다만.”
“저희 가게는 별볼일없는 숙박시설, 수상쩍은 건 아무것도…….”
 
입 밖으로 꺼낸 제일 첫 말이 「수상쩍지 않다」인 놈들은 대부분 수상쩍다, 나도 이건 기억해 둬야겠군.
남자를 무시하고서 안에 들어간 다음 실내를 둘러보았다.
부자연스럽게 방구석에 깔려있던 카페트를 들어올리니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이 드러났다.
 
“이 자식! 뭔 짓거리야!?”
 
나를 때리러 달려드는 남자의 목을 한손으로 붙잡고서 들어올린다.
 
“컥……꾸엑……끄극………….”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점차 숨이 막혀가는 남자.
앞으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 남자의 목숨을 빼앗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이 밑으로 안내해라. 그렇게 하면 너는 안 죽이고 놔두지. 알겠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가 손을 풀어주자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얼른 해.”
 
목을 억누르며 걷기 시작한 남자의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에이길 님……? 이곳은 대체…….”
“조금 인연이 있는 곳이라 말이지……. 보기에 좋은 곳은 아닐 테니 나가 있어도 돼.”
“설마요, 혼자서 가시게 놔둘 리가 없잖습니까!”
 
되도록이면 세리아한테는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여기서 문답을 하는 것도 일이 귀찮아질 테니 데리고 가는 수밖에.
 
 
기다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니, 먼 옛날에 보았던 낯익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내가 지하에서 탈출했을 때, 병사와 주인을 모두 죽이고 나왔지만 시설을 파괴한 건 아니었다.
주인은 바뀌었을 테지만, 도시 한구석에 있는 이런 지하 시설을 얻으려고 하는 놈이 생각하는 것쯤이야 대충 비슷한 짓거리일 게 분명하다.
 
감옥 같은 작은 방에 갇혀있는 아이들, 오물 냄새와 비명소리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안쪽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소녀가 범해지고 있든지, 혹은 체벌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이, 이것은!”
 
세리아가 깜짝 놀라 내게 달라붙었다.
그때, 좁은 통로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씨발! 전쟁 때문에 귀족이랑 상인들도 다 갇혀버려서 손님이 안 오잖아……이러다 노예 놈들 밥값 때문에 적자가 나겠어. 바볼로 너 임마, 정찰은……아니, 손님이십니까?”
 
딱 보기에도 탐욕스러워보이는 남자, 살이 찌지 않은만큼 나 때보단 살짝 더 나은 수준의 남자가 우리를 보았다.
미안하지만 손님은 아니야.
 
 
“고르도니아 군이다. 이 시설은 우리가 접수한다.”
 
주인처럼 보이는 남자와 주변에 있던 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 고르도니아!? 무슨 권리가 있어서 그런 짓을!!”
“한 번 둘러보니까 어린 노예가 제법 끔찍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 같던데.”
“노, 노예를 어떻게 다루든 주인 맘 아니요?”
“나랑 같이 밖으로 나가서 한 번 그렇게 주장해 볼 테냐?”
 
노예 매매 자체는 합법이라 문제없는 일이다.
사들인 노예를 쓸데없이 죽이는 건 위법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법에 자세하지 않다.
하지만 일그러지는 주인의 표정을 보건대 불법적인 짓을 잔뜩 저지른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애초에…….
 
“점령군이 토지를 접수하는데 권리가 필요한가?”
 
일부러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어차피 조사해 보면 불법적으로 납치해 온 아이들을 노예로 삼은 것일 테지만, 되도록이면 수고는 덜고 싶었다.
 
주인은 부하들과 얼굴을 마주본 후, 검을 뽑았다.
좋아, 내 기대대로 흘러가는군.
 
“고작 두 명, 죽여서 지하실에 쳐박아버리면 아무도 몰라! 죽여버려!!”
 
그걸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지.
이제 법이니 권리니 하는 소리는 안 해도 그만이다.
반란분자로 처형이 가능하다.
 
내게 달려드는 두 사람한테 듀얼 크레이터를 휘둘렀다.
천천히, 비스듬하게 썰려나가는 상반신을 바라보고서 땅바닥에 떨어진 검 두 자루를 두 손에 쥐었다.
듀얼 크레이터는 소중한 물건이니 오물을 벨 때는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다.
 
좁은 통로 안이라 한꺼번에 달려들 수 없는 상황인 건지, 적들은 두 사람씩 우리한테 달려들었다.
 
“전장이랑 비교하면 한참 편하군.”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의 머리를 쪼개고 머리를 날려버린다.
교차시키듯이 검을 휘둘러 두 손을 베어내고 발로 걷어찬다.
 
내가 큰 동작 이후 보인 빈틈을 찌르려고 한 놈의 손목이 툭 하고 떨어졌다.
세리아도 상황을 잘 이해하진 못했어도 일단 나를 공격하는 놈들을 처리해 두기로 한 모양이다.
 
“이, 이 자식 아는 놈이다……고르도니아의 괴물, 전귀 하드릿!!”
“칭찬 고맙다.”
 
소리친 남자를 가로로 쪼개려고 정수리 쪽부터 검을 때려박았으나, 날이 무딘 탓에 허리 위쪽에서 멈추고 말았다.
상반신만 절반으로 쪼개져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신종 몬스터처럼 변해 엎어진 남자가 마지막 병사였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맨 처음 내가 안내를 부탁한 남자가 허리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아 있긴 하지만 놈은 아직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너만 남았군.”
 
주인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무, 무례를 범한 점 죄송합니다!! 하드릿 경이라 하시면……여, 여자! 여자를 얼마든지 내어드리지요! 이쪽 방에 좋은 것들도 많고 각 방에도 제법…….”
“여자를 데려가는데 네가 살아있을 필요가 있나?”
 
이 더러운 아저씨는 필요없다.
피와 내장이 묻어 완전히 날이 죽어버린 검을 남자의 머리에 때려박는다.
짓뭉개진 토마토에서 튀어나오는 즙을 피하고는 안내역을 일으켜 세웠다.
 
“10명이……순식간에…….”
 
뭐야, 10명밖에 없었던 거냐?
범죄 시설도 돈 문제 때문에 골머리가 썩나보군.
 
 
세리아한테 병사를 불러오도록 시키고, 그 사이에 감옥에 갇혀있던 아이들과 몇몇 여자들도 해방시켜주었다.
성인 여성은 해방과 동시에 미친듯이 기뻐하며 내게 달라붙은 채 키스를 퍼부었지만, 아이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너무 어렸을 적부텨 이곳에서 살다보면 그게 너무 당연해서 바깥 세상 따위 전혀 모르는 채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옛날엔 그랬으니까 말이야.
 
“이 다음에 어떻게 될지, 그건 너희가 직접 정해야 할 일이다. 원하는대로 살러 가.”
 
추천하는 건 용병단이 있겠군.
어쩌면 미녀의 보살핌을 받게 될지도 모르거든.
 
안내역이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육중한 문이 달린 방으로 딱 보기에도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가 즐비해 있었다.
 
“처벌방인가.”
“예, 예이.”
 
한가운데에는 축 늘어진 소녀……아니, 소녀라 하기엔 조금 크다.
세리아와 비슷한 또래인 것으로 보인다.
직전까지 범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때리지 마……아픈 건……싫어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던 여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고 크게 치켜뜨였다.
 
“다, 당신……설마…….”
 
하지만 여자는 내 뒤에 있던 안내역을 보자마자 얼굴을 내리깔고 울음을 터트렸다.
 
“싫어! 이제 아픈 건 싫어어!!”
 
대화가 통하질 않길래 여자를 끌어안고서 방을 옮겼다.
온몸에 상처가 잔뜩 나 있는 데다가 더럽긴 하지만 용모는 나쁘지 않다.
이런 미녀일수록 조심스럽게 대해야 빛나는 법인데, 멍청한 것들은 참 어쩔 수가 없군.
 
 
“에이길 님!”
 
세리아가 호위대를 데리고서 지하로 들어왔다.
비위가 좋은 호위대 놈들도 너무 끔찍한 풍경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일단 본진에서 호위해 둬. 부상자나 병에 걸린 사람은 의사한테 데려가라.”
 
호위대는 차례차례 감옥을 파괴하고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자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위에서 화장해라.”
 
내가 경험했던 것과 겹쳐 보면서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다.
애초애 난 딱히 불행했다는 자각이 없었긴 했지만, 그냥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
 
“자, 이리로 와.”
“싫어어! 아픈 거 싫어!”
 
방금 전 여자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호위대한테도 저항하고 있는 모양이다.
완전히 겁을 먹었군.
 
어쩌면 좋을까, 하고 골머리를 썩이던 사이 여자가 휘청휘청 걸어와 내게 달라붙었다.
뭐야, 나는 괜찮은 건가?
 
“………….”
“뭐 상관은 없다만, 따라와.”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끌어안고서 그대로 지상으로 데려 나갔다.
다른 아이들이랑 같이 있으면 멀쩡한 것 같길래 같은 마차에 태우고 본진으로 보냈다.
여자는 마지막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나는 다시 지하로 내려왔다.
뒷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나, 나으리……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요?”
“아직 다 안내해주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일단 그것부터 마저 해.”
 
안내해달라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놈의 앞에 서서 지하를 이동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가벼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방금 전 여자, 좀 번거롭게 하더군.”
“예! 그렇다니까요, 그 망할년 같으니.”
“너한테 꽤 겁을 먹은 것 같던데, 종종 따먹었나 보지?”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농담하듯이 말했다.
 
“예에……뭐 그럭저럭은 그랬습죠.”
“맛은 괜찮았나?”
“그 여자, 구멍 상태는 최고입니다요! 꼭 한 번 나으리도 맛 한 번 봐주시길……아, 여긴 방이 아닌뎁쇼.”
 
지하 감옥 구석 한켠에, 무거운 철로 된 뚜껑이 놓여있었다.
 
“그 뚜껑은 둘이서 여는 물건이기도 하고, 애초에 열 때는 조심해야…….”
 
나는 뚜껑을 들어올렸다.
그 아래쪽은 깊고 튼튼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바닥은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다.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썩은 살점을 후벼파는 생쥐나 시체가 좀비로 변했기 때문이라.
 
“이곳은……”시체나 약해진 놈들을 넣는 곳이잖아?”
 
옛날이랑 같은 목적으로 쓰이는 중이군.
 
내 얼굴을 보고 새파랗게 질린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아 질질 끌었다.
 
“나으리! 야, 약속하셨잖습니까!!”
“약속이라…….”
“안내하면 죽이지 않으시겠다고!!”
“미안, 잊어버렸거든.”
 
남자를 구멍 안에 내던진다.
꽤 오랫동안 떨어졌는데, 아래쪽에 시체가 있던 덕분에 죽지 않은 건지 절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끄러워서 슬쩍 뚜껑을 닫았다.
 
자, 돌아가 보실까.
 
 
다음날 아침.
 
“꽤 요란을 피운 것 같던데.”
 
에이리히한테 아침 일찍부터 혼나는 신세였다.
 
“사령관이라는 녀석이……참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군. 점령 직후 민심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망자를 내다니, 언어도단이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고쳤다.
 
“남자로서는 잘 했다. 너는 그러는 게 맞아.”
 
참 이랬다저랬다, 불안정한 놈이구만.
 
 
 
하지만 왕도는 에이리히보다도 더 불안정했던 모양이다.
며칠 후, 왕도에서 달려온 사자가 전달한 소식은 종전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하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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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길 하드릿  21살  가을  전시 상황
예하 부대 9600
보병 2100 기병 1300 궁병 700 공병 200 궁기병 5300
 
군대 부하: 레오폴트(참모 겸 부총사령관) 세리아(부관, 호위대장) 이리지나(지휘관)
루나(궁기병 지휘관) 피피(마스코트)
 
현재 지점: 로레일
전과: 트리에아 동방 수비대 괴멸(항복), 로레일 탈취, 마그라드 군 격파, 트리에아 근위군 섬멸
마지노 요새 함락(공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