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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97화『북부 동란③ 무적 요새, 우회당하다』

제97화『북부 동란③ 무적 요새, 우회당하다』

 
트리에아 서부  로레일 도시
 
로레일을 시작으로 그 일대 지역을 영지로 갖고 있는 페이얼틴 백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동부 수비대는 뭘 하고 있는 건가! 하필이면 전면 항복이라니, 무릇 충신이라는 것은 전원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지 않나!”
“그러하옵니다.” “참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배반자로군요.” “만 번 죽어 마땅하나이다.”
“적은 에르그 근처까지 와 있다 하였나……트리에아 군의 영광도 밑바닥까지 추락하였군.”
 
그의 기분이 나쁜 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지금까지 그는 이 일대의 대영주로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왕가에도 당당히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고르도니아와 관계가 악화되며 상황은 급변, 방어를 중시하는 재상 뒤누아 후작뿐 아니라 무관 전부가 영지 안에서 활개치게 되었다.
 
“북부 요새 사령관도 본디 내가 맡아야 마땅하건만, 어찌하여 그러한 늙은이한테 맡기는가!”
“그러하옵니다.” “그야말로 믿기 힘든 우행이군요.” “그저 우스울 따름이나이다.”
 
백작은 일부러 정식 명칭으로 정해진 마지노 요새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의 직함은 요새 물자 보충 사령관, 작위는 동등하다고 해도 요새 사령관 마지노 백작의 부하로 간주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까짓 늙은이가 사령관이었다간 언제 요새가 뚫릴지 모른다. 그렇게 됐다간 내 영지는 순식간에 침략당하고 만단 말이다!”
“그러하옵니다.” “그야말로 걱정해야할 꺼림칙한 사태.” “두려워하기 마땅하나이다.”
 
백작 자신은 군을 경험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과 마지노 백작이 방어전의 전문가이며 아크랜드의 맹렬한 침공으로부터 국토를 지켜낸 군인이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방푸늬 남작, 파크대가리 남작, 저눈아 준남작. 시찰하러 가지, 따라오거라!”
“훌륭하시옵니다.” “훌륭하기 그지없는 헌신.” “존경할 따름이나이다.”
 
아무튼 그가 할 수 있는 건 병사들 앞에 자주 나타나 보급 작업에 이것저것 참견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뿐이었다.
 
 
네 사람이 영지 안에 있는 도시 안에서조차 수많은 호위병을 이끌고 시찰을 나온 탓에 병사들의 딱딱한 칭찬세례를 받고 있던 사이, 정찰탑 위에 서 있던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백작은 측근 세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적인가? 아니, 설마 혼자서 올 리는 없을 테지. 숲에 보내두었던 근위병 사자……혹여나 또다시 패배한 것은 아니겠지? 자네들은 어찌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말에 올라탄 자가 문앞까지 다가오더니 문을 열라고 소리칠 줄 알았더니 제자리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긴급 보고! 적이 에르그 숲을 돌마한 것으로 보임, 이미 근처까지 다가옴! 시간 유예가 없으니 당장 방어 태세를 취하길 바람!!”
 
긴박한 사자의 외침이었으나 백작과 측근들은 초조함보다는 넋이 나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에르그 숲을 돌파했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병사들도 곧바로 믿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숲을 우회하면 근위대와 전투가 벌어질 거다. 만에 하나 지게 된다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테고, 사자도 근위병 쪽에서 왔을 게 분명해.”
 
문 바깥에 있는 남자는 아무리 보아도 근위병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적의 교란 공작일지도 모르겠군.”
 
기병 한 기쯤이야 밤길에 숨어 근위병의 눈을 피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붙잡아서 낱낱히 조사를…….”
 
백작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정찰탑 위에 서 있던 모든 병사들이 미친듯이 고함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다.
 
““적습――――!! 엄청난 숫자의 기병!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하던 땅울림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군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소리, 군마 무리가 연주하는 죽음의 행진곡이다.
 
“비켜라!!”
 
백작은 정찰탑으로 서둘러 올라가 병사를 밀어젖혔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악몽과도 같은 광경, 수천 기의 기병이 몇십줄로 서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쪽은 그들이 풍겨대는 흙먼지 때문에 전혀 보이질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한층 더 많아보일 수 있다고는 해도 결단코 과대망상 수준은 아니었다.
 
“서, 성문을 닫아라!! 밖에 있는 놈은 버려도 상관없다!!”
 
눈앞에 닥쳐오는 기병 중 10분의 1이라도 도시 안에 들어왔다간 아무런 방도가 없어질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병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문을 닫은 덕분에 그 전에 기병이 침입해 오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로레일 성벽은 전쟁을 대비해 어느 정도 강화되어 있긴 했지만 결국 주축은 북부 요새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래도 백작은 최대한 이곳에서 버텨 원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너희도 어서 지휘를 시작해라! 병사를 이끌란 말이다!”
“아와와와와와…….” “히에에에에에에에엑…….” “우으으으으으으…….”
 
측근 세 사람은 허리 힘이 풀린 건지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들은 쓸모가 없겠단 걸 깨달은 백작이 직접 지휘를 맡으려던 그 순간…….
 
폭발음과 함께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백작이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본능을 간신히 억눌러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완전히 박살이 난 목재와 함께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대……대체 무슨…….”
 
멍하니 서 있던 사이 누군가가 채 말도 끝내기 전에 한 번 더 굉음이 울려퍼지더니, 또다른 곳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더 생겼다.
 
더 이상 성벽으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벽에서 병사들이 물러나고, 박살난 부분을 통해 기병 군단이 달려들어온다.
 
“이럴 수가……말도……안 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작과 측근 세 사람의 말은 말발굽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벽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창기병, 시내로 돌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레오폴트의 감정 없는 목소리도 기분 탓인지 꽤 고양되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클라우디아가 준 철기둥이 고장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억지로 마차에 탑재한 물건이라 조금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만.”
 
공성 병기를 끌고 온 보병들은 후방에서 쫓아오는 중이다.
그들을 데리고서 공격을 시작하면 로레일 정도야 간단히 함락할 수 있을 테지만, 그랬다간 도시가 불바다가 된다.
마리아의 집과 어머니도 이 도시에 있는 상황이니 되도록이면 신속하게 함락하고 싶다는 생각에 강력한 그 철기둥을 탑재해 갖고 온 것이다.
 
“계속해서 발사해라. 침입로는 많은 게 더 좋으니까 말이야. 아군한테 맞추진 말고.”
“선처하겠습니다.”
 
레오폴트가 팔을 아래로 휘두르자 세 번째 발사음이 울려퍼졌다.
정찰탑에 맞은 건지 트리에아 병사가 떠밀려 날아간 직후,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도 다녀오지.”
“하아, 또 가시는 겁니까? 하드릿 경께선 뒤쪽에서 가만히 앉아계셔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런 말 말고.
축제를 뒤쪽에서 구경만 하는 것만큼 시시한 것도 없거든.
 
 
“에이길 님께서 출진하신다. 호위병, 뒤를 따르라!”
 
세리아가 소리치자 30명의 중장 기병대가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단기 돌격을 걱정하던 세리아가 사군 기병 중에서 30명을 엄선해 호위대로 완성시킨 것이다.
귀중한 중장기병을 내게 전속시키다니, 레오폴트가 허락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령관이 제멋대로 죽는 것보단 낫지요.” 라며 인정하고 자빠졌다.
 
병사와 말 모두 체격이 좋고 무예에 자신이 있는 자들로 편성된 부대인 데다가 창과 보우건까지 장비한 상황이라 내 병력 중에선 최정예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그 안에 끼어있는 세리아는 몸집이 많이 작은 편이라 아주 눈에 띈다.
 
그리고 이 부대의 인원수는 정확히 따지면 32명, 세리아와 나머지 한 명은 크리스토프다.
원래 부대에서 쓸모없다는 이유로 방출된 탓에 내게 울며불며 달라붙길래 이곳에 편입시킨 그 녀석은 부대 안에서 최약체다.
세리아는 틈만 나면 놈을 전사시키려고 든다.
 
“가자!”
 
도시로 향하는 와중에 하나 더 생긴 커다란 구멍을 통해 도시 안으로 침입하니, 내 눈앞을 병사 몇 사람이 가로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항하다니 대단한 놈들이군.
한 사람의 창을 날려버리고는 복부를 찌른 다음 땅바닥에 내던졌다.
또 한 놈은 나한테서 거리를 두려고 한 순간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세리아의 말에 걷어차였다.
 
“민중은 죽이지 마라! 방화 행위도 일절 허락하지 않겠다. 병사만 처리해라!”
 
내게 덤벼드는 갑주를 장비한 기사의 목을 날려버리고 그 몸통은 적의 병사가 있는 곳으로 던져버렸다.
 
“히익!” “일격에…….”
 
잡졸들은 사기를 잃고서 창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저항만 안 하면 도시도 안 무너진다고.
 
“하이야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전신 갑주를 입은 기사가 커다란 창을 내걸고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기병 둘이 이런 식으로 돌격하는 시합이 있었지.
창 자체가 두꺼운 걸 보아 찌르기 특화용이라 베는 맛은 없어 보인다.
 
금속음이 울려퍼지고는 적 기사의 말만 홀로 앞으로 내달려 나아간다.
기사의 창은 내 가슴……정확히 말하자면 가슴 앞에서 막아낸 내 손 안에 있었다.
그리고 적은 창 손잡이를 손에 쥔 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공중에서 흔들리는 중이다.
 
그냥 내게 달려드는 기사의 창을 붙잡아서 들어올렸을 뿐인데 말이지…….
손잡이를 놓지 않은 덕분에 낙하하지 않은 모양이다.
 
창을 떨어트려 땅바닥에 놔주려고 하자 기사가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무기를 손에 쥐면 죽이려고 생각했었는데 목숨은 건졌군.
 
“기마 돌격을 막아냈다고?” “괴물이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뒤쪽에서 창을 쥐고 있던 기사와 병사 모두 무기를 버리고서 도망쳤다.
이 주변에서 저항하는 사람은 사라진 모양이다.
 
 
도시 바깥 부분도 대부분 제압되어 현재 전장은 시가지, 귀족 거리, 그리고 영주관 쪽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로레일에는 그렇게 많은 병력이 있던 것도 아니고, 병사들도 중무장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꽤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도시를 불태우지 않은 것도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소수 병력 치고는 잘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사격 개시! 10연발!”
 
하지만 그러한 저항도 영주관을 지키는 최후의 부대가 궁기병 500명이 날리는 10연발 사격……5000개의 화살을 맞고서 전멸,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
 
“끝났나.”
“그러게요.”
 
내 옆에 선 세리아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내 바로 옆에서 싸울 수 있다는 기쁨에 5명이나 처치했다고 한다.
역시 최정예 호위대인지라 다들 아무런 피해 없이 100명 이상의 적을 처리한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크리스토프 혼자서 창에 스쳐 말에 떨어지고는 머리를 다쳐서 쉬는 중이다.
정말 써먹을 길이 없는 놈이긴 하지만 저건 저것대로 재밌군.
 
말에서 내려와 호위대를 데리고 영주관 안으로 들어가고는 저항을 포기한 병사들 사이를 지나 큰 복도가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대기 중인 갑옷 차림의 귀족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귀족은 투구는 쓰지 않았지만 온몸에 묵직한 갑옷을 장비한 중년 남성이었다.
수염도 길게 기르고 머리카락도 잘 꾸민 전형적인 귀족의 인상이라 별로 강해보이진 않는다.
 
“트리에아 왕국 백작, 발롯 페이얼틴!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고르도니아 왕국 자작, 에이길 하드릿. 이곳의 영주인가?”
 
에이길?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눈앞의 귀족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다! 페이얼틴 가문의 명예를 걸고서 일대일 승부를 희망한다.”
 
백작은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겨눴지만 검끝은 떨리는 데다가 갑옷이 무거운 건지 움직이기 힘든 듯했다.
검을 다루는 것도, 갑옷을 입는 데에도 익숙치 않은 게 분명했다.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님!! 하드릿……공은 예전에 이 도시에 왔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옆에서 소리치는 건장한 남성, 그 두꺼운 목소리와 외견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예전에 아랑 퇴치 보수를 건네주고 부하로 들어오지 않겠냐며 권유했던 로레일의 근위 대장, 글록이었다.
생각해 보니 여기 있는 건 당연한 일이군.
그립긴 하지만 옛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때는 신세 졌지. 설마 적이 돼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성씨는 그때 그……인과란 모르는 법이군.”
 
하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건 백작의 얼굴에 먹칠을 칠하는 꼴이다.
나는 시선을 백작 쪽으로 돌렸지만 글록은 백작 앞으로 걸어나왔다.
 
“페이얼틴 백작님! 이것도 인연, 제가 결투를 대행……”아니 된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새된 목소리와는 다르게 박력 넘치는 고함소리에 글록도 뒷걸음질쳤다.
 
“이곳은 우리 일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땅, 근위대장인 자네와는 상관없다. ……민중을 지키는 것이 자네의 사명, 내가 패배할 경우엔 항복하라.”
 
백작은 다시 검을 손에 쥐었다.
뜻은 훌륭하지만 솔직히 승부가 될 거라고 보진 않는다.
머리라도 때려서 기절만 시켜둘까.
 
“하드릿 공, 봐줄 필요는 없소. 귀족에게 있어 땅이란 목숨,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이상 이 땅은 얻을 수 없다 생각하시게!”
 
흠……그 정도의 각오를 다졌다면야 봐주는 것도 모욕이 되겠군.
실력은 없어도 그러한 각오는 싫어하지 않는다.
 
“크리스토프, 검 좀 빌리마.”
 
내 창이나 듀얼 크레이터를 쓰는 건 불공평하다.
최소한 무기만이라도 똑같은 걸 써줘야겠군.
 
나는 오른손 하나로 검을 손에 쥐고, 백작은 두 손으로 쥔 채 눈앞에 겨누었다.
 
“호오오오오오오오오옷――!!”
 
백작이 기합을 내지르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와 함께 검을 위로 치켜든 채 달려들었다.
그 동작은 너무나도 느리고,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머리 위에서 가볍게 검을 튕겨내주니 백작의 자세가 무너졌다.
직후, 내가 날린 횡베기.
 
 
둑, 하고 백작의 머리가 떨어지더니 몸통이 제자리에 넘어졌다.
나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선 그의 머리 앞에 가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죽음을 각오한 채 내게 달려든 그 근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병사들과 귀족, 글록까지도 검을 버리고는 투구를 벗고서 무릎을 꿇었다.
 
“완패하였사옵니다.” “그야말로 믿기 힘든 무용.” “복종해야 할 따름이나이다.”
 
어째서인지 굽신거리는 세 명의 귀족은 무시하고서 글록한테 도시에 있는 모든 병사를 항복시키고 무장해제 하도록 알렸다.
 
고작 2시간 남짓한 전투 끝에 로레일은 함락, 마지노 요새로 이어지는 보충 거점은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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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마지노 요새  중앙 성채
 
“고르도니아 군, 중앙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6번 부대한테 대응 사격하도록 시켜라.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려 놈들을 지치게 만들라.”
“3번 진지가 불타고 있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당황하지 말고 불을 끈 다음 다시 구축해라.”
 
마지노 백작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요새의 사령관으로서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의 지휘는 사기를 끌어올리는 맹렬함은 없었으나, 부하의 모든 보고에 적확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진중한 태도의 노장이기에 가능한 묵직한 지휘, 오랜 기간 방어전에서 선보인 실적이 부하들에게 커다란 안심감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중앙 평원에선 볼일이 없던 규모의 대군, 고르도니아 중앙군과 귀족군 8만 이상이 들이닥치고 있었으나, 노장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100개 이상의 투석기가 날려대는 돌덩이와 기름, 비처럼 쏟아져내리는 수만 개의 화살들도 요새의 기능 중 그 무엇 하나 파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냉정할 것, 무슨 일이 생기면 잠시 숨을 돌리고 생각하라. 이 요새는 잠깐 쉰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야전과 달리 공성전은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구력과 치밀한 계획이 공성전의 전부다.
 
굉음이 울려퍼지더니 불이 붙은 돌덩이가 요새 위에 설치된 화살막이를 파괴했다.
하지만 화살막이가 박살나는 광경에도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는다.
 
성벽 위쪽 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그 안에 나무 막대기를 꽂아넣고서 토대를 깔고 흙으로 된 지붕을 씌운다.
성벽 위쪽으로 날아오는 화살은 대부분 원거리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법이다.
지붕이 있으면 병사들이 화살에 맞고 피해를 입는 경우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당연히 투석기나 거대 석궁에는 버티지 못하지만 자리가 박살나면 그곳은 버리고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지으면 그만이다.
짜맞춤식으로 만든 간이 건물은 파괴된다 한들 몇 분만에 원상복구된다.
 
 
“마지노 백작님! 적들이 며칠 동안이나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요동조차 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로 적은 3번에 걸쳐 큰 피해가 발생해 후퇴 중입니다! 이런 때야말로 한 번 놈들을 쫓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노장은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위험한 생각이군. 지금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있음에도 그보다 더한 걸 바라는 것, 그것이 파멸로 이어지는 법이다.”
 
전체 양상을 둘러볼 수 있는 창가에 기댄 채, 노장은 끝까지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해주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도박에 나서야 하는 건 적이지, 우리가 아니야. 그저 적의 도박수를 간파하고 그것만 잘 막아내면 승리는 굴러들어오는 법이지.”
“주, 주제넘는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괜찮다, 젊은이는 무릇 그래야 하는 법. 얌전해지는 건 할아범이 되고 나서 해도 충분해.”
 
 
고르도니아 군이 중앙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억지로 요새를 뚫으려 시도한다.
하지만 공격 측의 화살은 대부분이 지붕에 막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반대로 요새 측이 발사하는 화살은 맹렬한 기세로 고르도니아 군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가끔씩 건물과 함께 병사를 날려버리는 투석기도 둔중한 요새 본체에는 그 어떠한 타격을 주고 있지 못했다.
우뚝 솟아있는 성벽에 나 있는 무수한 구멍,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어 보우건을 발사할 수 있도록 제작된 구조는 더욱 더 많은 고르도니아 병사의 목숨을 앗아갔다.
 
병사 중 몇 명이 성벽에 달라붙었지만 구멍 자체가 너무 좁아 들어가는 건 불가능, 결국엔 사다리를 대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화살을 맞게 되는 신세다.
 
상당수의 병사가 성벽에 달라붙자 갑자기 화살 세례가 멈추더니 보우건을 쏘던 구멍도 닫혔다.
그러고는 맨 위에 있던 창문에서 불이 붙은 기름이 잔뜩 쏟아져내리고 사다리를 성벽에 대려던 병사를 남김없이 불태워 죽였다.
 
 
“고르도니아의 네 번째 공격, 격퇴!”
“하지만 적 기병이 동쪽 숲을 빠져나와 우회를 시도 중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요새라고 해도 취약한 부분은 있다.
지형 문제 때문에 높은 성벽을 짓지 못한 부분, 간단한 요새와 울타리밖에 안 보이는 부분을 노리고서 고르도니아 기병이 돌파를 시도하는 중인 것이다.
 
 
“마지노 백작님!”
“그쪽에는 창병대를 배치해 두었다. 걱정 마라.”
 
 
기병은 땅굴 사이를 단숨에 질주하려고 했으나, 선두가 그 사이로 내달린 순간 땅바닥이 푹 꺼졌다.
자연스럽게 뒤이어 따라오던 기병들도 전부 전복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대혼란 상태에 빠졌다.
 
사실 땅굴 쪽에는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단순히 얇은 판을 그 위에 올려두고 흙을 뿌려두었을 뿐이다.
보병 몇 명 정도라면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을 테지만 대군 혹은 무거운 말이 올라가면 곧바로 깊은 땅굴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매복해 있던 진지에서 곧바로 창병이 튀어나와 대열이 무너진 기병을 쫓아내고 구덩이에 빠진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기병의 뒤를 따르려던 보병들한테도 화살비가 쏟아지자 적병은 데굴데굴 굴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황할 것 없다. 냉정하게 대처하면 적은 반드시 쓰러트릴 수 있는 법이니.”
 
늙은 백작의 부하는 경직되었던 표정이 부끄럽다는 것마냥 쑥스러워하며 다시 미소 지었다.
 
“그것보다 로레일 쪽으로 보낸 사자는 아직 오지 않았나?”
 
노장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보급 문제였다.
원래는 매일 로레일에서 화살과 기름이 운반될 예정이었는데, 그저께부터 오질 않고 있던 것이다.
일단 요새 안에 저축분이 있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페이얼틴 백작은 나를 싫어하고 있었으니 말이야……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만.”
“백작에 대한 원한 때문에 보급을 중지한 것이라면 멍청이도 그런 멍청이가 없을 겁니다.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닐 텐데…….”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말이야. 사소한 착오라면 좋으련만.”
 
 
쿵쾅쿵쾅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사령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병사의 당황한 모습은 조용한 노장, 부하와는 대조적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정확한 보고를…….”
 
노장은 병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으나, 병사는 무례하게도 그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적 집단이 에르그 숲을 빠져나와 로레일을 습격하여 도시는 함락, 페이얼틴 백작님께서는 전사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레일은 함락당했습니다!!”
 
부하들은 한 순간 넋이 나갔지만, 그럼에도 존경하는 상사가 하는 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노장 쪽을 바라보았다.
 
“마지노 백작님……어찌 대응하면…….”
 
노장은 눈을 치켜뜨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침착하던 그의 시선에는 더 이상 차분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노장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찻잔은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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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길 하드릿  21살  늦여름  전시 상황
예하 부대 11200
보병 2700 기병 1500 궁병 800 공병 200 궁기병 6000
 
군대 부하: 레오폴트(참모 겸 부총사령관) 세리아(부관, 호위대장) 이리지나(지휘관)
루나(궁기병 지휘관) 피피(마스코트)
 
현재 지점: 로레일
전과: 트리에아 동방 수비대 괴멸(항복), 로레일 탈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