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왕도에서 일어난 사소한 소동』
“전군, 진군 개시!!”
내 호령 소리 한 번에 라펜 바깥에 모여 있던 군단이 북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왕의 부름에 응해 춘계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왕도로 이동하는 중이다.
이 시기엔 도시 안에서 진행 중이던 작업도 중지, 어른과 아이들 모두 높은 자리를 쟁탈하듯이 위로 올라와 군대를 지켜보는 중이다.
도시에 남아있는 건 몇 안 되는 경비대뿐이다.
“군대가 없는 사이에 공격당하면 끝장나는 거 아닌가?”
“도적 정도라면 불완전하긴 해도 도시벽도 있으니 막을 수 있습니다. 트리에아가 침공해 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왕국군 전체가 연습하러 모여있는 시기에 공격하다니, 그건 광기입니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그렇긴 해도 나는 도시가 불탔다간 엄청난 손실이다.
그리고 카라와 멜도 남아있다.
“족장님……아니, 자작님의 땅에 위험이 닥치면 우리의 전사가 달려올 터이니 안심하셔도 좋나이다. 아이 분과 사모님 모두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지켜드리겠사옵니다.”
만약 경비병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나면 산의 민족이 모든 병력을 끌고와 도와줄 예정이고, 최악의 경우엔 가족을 탈출시켜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지금은 이들을 믿는 수밖에 없겠군.
“멜리사랑 마리아를 만나러 가는 건 오랜만이네요.”
“저도 그 분들한테는 신세를 많이 져서…….”
군단 중심부에는 대형 마차에 올라탄 논나와 카트린느도 있다.
이번에 동행하지 않는 인원은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카라와 멜, 그리고 딸들뿐이다.
사실 이번 연습은 단순히 군사적 목적만 있는 게 아니라 평소엔 영지에 가 있는 귀족들을 왕도로 불러모아 안면식을 트는 것도 목적 중 하나다.
따라서 꽤 오랜 기간 왕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그럴 바에야 가족들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난번에 여자들을 데리고 영지로 갔을 땐 엄청 큰일이 나긴 했지만 말이야.”
“피피는 모르는 일이다!”
그때는 산의 민족한테 습격당하는 신세였지만 이제 그들은 아군이다.
심지어 데리고 다니는 병사는 대략 8000 정도다.
도시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어.
“에이길 님, 이번에 나온 부대를 정리해 봤습니다. 연습 때 파악해두지 못했다간 수모를 겪게 되실 테니 반드시 기억해 주세요.”
세리아가 깔끔하게 정리해 둔 편성표를 내게 건네주었다.
문장 표현에도 다들 개인차가 있어서 재밌다.
레오폴트가 쓴 서류는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밖에 쓰여있질 않다보니 「이 정도는 설명 안 해도 이해해라」 라는 분위기가 글에서도 느껴져서 짜증난다.
아돌프가 쓴 글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긴 하지만 진짜 세세한 부분까지 적어두다보니 길다. 내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나 부주의까지 전부 지적해대다 보니 마찬가지로 짜증이 난다.
클라우디아의 편지는 9할이 쓸모없는 내용, 내용물은 거의 없다.
짜증은 나지 않지만 의욕이 꺾인다.
논나도 그런 경향이 있단 말이지…….
요즘 들어 논나가 아기 일 때문에 초조해해서 그런지 점점 클라우디아처럼 변하고 있는 게 걱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세리아의 문장은 정리도 잘 되어 있고 이상하게 비꼬는 말투도 없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데, 정작 중요한 부분이 가끔씩 빠져있는 경우가 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어.”
“? 뭐가 말인가요?”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편성표를 바라본다……아, 오탈자다.
동방독립군
병력수 2000
보병 1200 궁병 300 창기병 300 중장기병 200
사군
병력수 3000
보병 1500 궁병 500 창기병 700 중장기병 300
궁기병
병력수 3000
궁기병 3000
치중대
대형 마차 50대
합계 8000명의 대군이다
사실은 궁기병을 동원할 때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산의 민족의 장들이 연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습? 무엇입니까 그것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 우리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피피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초원에는 족장님 말고도 수많은 전사를 거느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모여서 전투 대련을 한다. 데려올 수 있는 전사의 숫자가 적으면 약한 족장이라며 멍청이 취급받는다.”
“뭐라고! 그것은 아니 되오!”
“그렇다면 일족을 모조리 다 데리고서 초원의 민족에게 우리 족장의 위대함을 알려줍시다!”
그만둬.
왕도에서 민족 대이동이라도 했다간 병사가 없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수치스러워진다.
“그럴 필요는 없어.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뛰어난 전사를 데려가는 데에 의미가 있으니까 말이야. 장비를 갖추고 훈련된 전사 3000명이면 충분해.”
“그렇습니까……?”
“모든 전사를 데리고 가시면 그 2배는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고맙긴 하지만 갑옷이 모자르다보니 가죽옷을 입고서 돌아다니는 전사들을 데려갈 순 없다.
“3000이나 데려가면 먹을 게 궁해지지 않나?”
산의 민족의 전사는 사냥꾼 역할도 동시에 맡고 있기 때문에 식량을 책임져야 하는 인물들이다.
너무 많은 인원 수를 데리고 갔다간 그들의 생활에 지장이 발생한다.
“족장님께서 변변찮은 말을 가져가신 대신 받은 식량도 있습니다. 굶주릴 일은 없지요.”
“절반 정도 남으면 어떻게든 되는 법입니다.”
좋아, 그러면 결정이다.
“그래서 연습이라는 데에 데려가실 여자는 100명 정도면 되겠습니까?”
“멍청한 녀석! 강력한 전사들이 한 데 모이는 자리다! 300명은 모아오지 않으면 우습게 보일 게 뻔하지 않나!”
산의 민족 여자를 300명이나 데리고서 왕도로 갔다간 오랑캐의 왕이라는 소문이 나돌 것이다.
그 후, 어떻게든 장들을 진정시키고 전사를 데리고서 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 행복해 보였다.”
피피가 말을 타고서 나와 세리아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리아……진심으로 살기를 내뿜지 말거라.
“분명 다음 세대 족장이 될 거다.”
피피가 말한 그 여자라는 건 지난번에 내 목덜미의 성감대를 찾아낸 여자다.
이번에 산의 민족들을 동원하러 갔을 때 커다란 배를 부둥켜안은 채 내게 달려온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정해달라길래 남자 이름과 여자 이름을 각각 말해주었더니 엄청나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피피도 족장님의 아기가 갖고 싶다.”
“제게도 아기를 베풀어 주시면 영광일 따름이옵나이다.”
루나까지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피피보다 전사로서도 우수하고 통솔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궁기병 부대를 맡겨 두었다.
이들은 나 말고 다른 부외자의 명령은 전혀 듣질 않는다. 그렇다고 피피한테 대장을 맡겼다간 전술에 지장이 발생할 테니 루나한테 맡기기로 한 것이다.
동방독립군은 내 직할군, 사군은 이리지나가 대장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동시에 운용하게 될 테니 대부분은 내가 직접 관리할 것이다.
참모역으로는 레오폴트가, 세리아는 부관을 맡고 있다.
무표정 상태로 말에 올라타는 참모와 어떻게든 루나를 밀어내려고 하는 부관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상당히 거창한 직책을 붙여두었군.
보병의 걸음에 맞춰 행군하다 보니 왕도로 이어지는 길목까지 오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에이리히 영지의 중반까지 들어오니 정비된 도로가 깔려 있어 순식간에 행군 속도가 증가했다.
“벌써 여기까지 지어졌군.”
“우리 영지까지 이어지면 물류도 순식간에 빨라질 겁니다.”
레오폴트는 자기 전문 밖이라며 그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 도로가 연결되면 철을 운반하는 것도 현실화에 가까워진다.
클레어가 어서 길을 연결하고 왕가에 연락하라고 시끄럽게 군단 말이지.
“그건 그렇고, 에이리히 영지 안은 괜찮은 건가?”
대충 둘러보니 트리에아 진영만큼 파멸적은 수준은 아니지만 밀밭의 잡초를 뜯고 있는 민중들의 표정도 밝지 않고 몸도 야위어 있었다.
“어쩔 수 없지요. 다들 하드릿 경처럼 자금이 넉넉한 게 아닙니다. 지난번 그 부인한테서 빌린 돈과 약탈을 통해 획득한 돈을 제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흠, 확실히 상당히 적자다.
“하지만 경비대의 사기도 많이 낮아보이는데.”
에이리히의 영지 내에는 군대라 부를만한 게 없다.
도적이나 오랑캐는 내가 상대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나 사소한 도적단까지 모조리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일단 경비대 정도는 구비되어 있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창을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단 말이지.”
연습을 하러 떠나는 아군을 향해 항복한 것도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만약 우리가 진짜 적이었더라면 싸우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반드시 전보를 전하러 달려가야 할 필요가 있다.
“아기가 태어난 걸 마음대로 떠벌린 건이랑 이번 건까지 합쳐서 뭐라 말 좀 해야겠군.”
“지난번 분쟁 건으로 2배가 돼서 돌아올 뿐일 것 같습니다만.”
뭐라 형용하기 힘든 답답함이 있다.
피피를 옆말에서 들어올린 다음 내 앞에 앉혀두었다.
“우왓! 족장님, 얼굴을 꺾으면 안 된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가 없어진다!”
피피가 날뛰자 물건이 엉덩이에 닿았다.
피피나 루비 같은 산의 민족들은 신체가 다부진 게 훌륭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장들이 권해준 것처럼 100명이랑 난교해서 씨를 뿌리는 것도 괜찮겠어.
“에이길 님, 서쪽에서 무언가 오고 있습니다.”
언덕을 넘고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사 몇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습에 참가하는 고르도니아 귀족인 것으로 보이오!”
“하드릿이다. 그쪽은?”
병사들은 내게 경례를 하더니 뭐라뭐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올돈느 자작님의 기사요! 우리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왕도로 향하는 중이오만 사전에 알릴 게 있어 찾아뵈었소. 우리 병력이 먼저 도로를 쓸 테니 잠시 이곳에서 대기…….”
그때, 뒤쪽에서 궁기병 집단이 나와 기사를 빠져 지나갔다.
방금 전 길이 트였기 때문에 전방에 뭉쳐서 대열을 갖추도록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숫자는 1000기 정도 될 것이다.
기사의 말소리는 양옆을 지나가는 말발굽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경례!”
내 옆을 지나가면서 병사들이 검을 쳐들고 걸어갔다.
굉음이 몇 분 동안 이어지고서야 간신히 병력이 전부 지나간 듯했다.
“미안하군. 그래서, 뭐라고?”
“……왕도까지 무사히 가시길 바라오.”
기사들은 그렇게 말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뭐였던 거지, 저놈들은?
“어느 쪽이 길을 양보할지, 귀족들은 그런 부분에도 집착한답니다. 가문이나 집안 권력, 뒷배의 권력과도 관련이 있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죠.”
마차 창문을 통해 고개를 내민 논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로 옆에서 내게 복잡한 표정을 보이던 올돈느 자작의 병사들을 추월해 나아갔다.
미안하다는 생각에 손을 쳐들어 인사를 해줬더니 방금 전 그 기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놈이군.
◇◇◇◇◇◇◇◇◇◇◇◇◇◇◇◇◇◇◇◇◇◇◇◇
왕도 고르도니아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오랜만이다 멜리사, 마리아. 딱딱한 인사는 됐어.”
현관 앞에서 나를 맞이해 주는 멜리사의 엉덩이를 쓰다듬고서 입술을 훔쳤다.
“정말! 일부러 기품 넘치게 인사한 거였는데!”
화를 내는 멜리사 뒤쪽에 붙어있는 마리아한테도 진한 키스를 맞추고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마리아는 동성애에 완전히 빠지지 않도록 남자가 어떤 느낌인지 떠올리도록 만들어야 필요가 있다.
“앗! 아앗, 안 돼!”
성기에 손가락이 들어간 순간 세리아가 날 막아세웠다.
“에이길 님, 먼저 궁전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랬지.
일단은 병사를 주둔지에 집어넣고 그 이후 궁전으로 가서 연습 참가 인원에게 인사를 하러 갈 예정이다.
에이리히도 집에서 한바탕 하고 나서 올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고 잔소리를 늘어놨었다.
논나와 카트린느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이 슈바르츠 위에 올라탔다.
“………….”
어째서인지 세리아가 내 앞에 타있는 건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왕도까지 천천히 말을 타고 나아가면서 계속해서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궁전에는 귀족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알현실로 들여보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 안에서 에이리히를 찾아냈다.
“라드할데 경,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만…….”
아기 이야기를 떠벌린 사실에 대해 불평을 넣으려고 말을 꺼냈는데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하드릿 경, 너무 과하다.”
“예?”
“병사 숫자 말이다. 8000명이나 데리고 오는 놈이 어딨나! 변경백이어도 기껏해야 3000명이다. 너는 자작이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보기로는 동방군도 그대로 다 데려온 것 같은데 치안 대책은 괜찮은 건가!?”
엄청난 말공세에 당하고 말았다.
흠, 어쩌면 좋나?
“문제없습니다. 왕국군은 연습에 참가시키기 위해 데려오긴 했지만 영지에 남겨둔 예비 병력만으로도 치안 유지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오랑캐 제압 작전 덕분에 놈들의 위협은 격퇴해 두었구요.”
사실 예비 병력이란 바로 그 오랑캐들이지만 말이야.
아돌프, 레오폴트와 대화해 본 결과 오랑캐를 완전히 복종시켰다는 얘기는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클레어를 안은 다음날
“아돌프 씨, 산의 민족의 영역에 질 좋은 철광산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심지어 그들을 복종시켜서 이제 방해하는 자도 없다던데……. 침상 위에서 들었답니다. 너무 많이 얘기하는 것도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법이죠. 앞으로는 조심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라며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그녀 입장에서도 라이벌이 늘어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인 듯하다.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산의 민족을 전부 제압한 것도 아니고 안쪽 땅에는 내게 따르지 않는 소수의 부족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완전히 복종시켰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된다. 그런 걸로 해두자.
“아직도 예비 병력이 있단 말이지? 폐하께서 사군을 자유롭게 증강해도 좋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한도라는 게 있는 법인데…….”
에이리히의 잔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나는 대충 대답하면서 한 귀로 흘려들었다.
슬쩍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세리아의 엉덩이를 쓰다듬기로 했다.
소리를 낼 수 없기에 세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버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로 오던 도중 라드할데 경의 영주민이 꽤 궁핍한 것럼 보였습니다만.”
“할말은 제대로 하는 녀석이군. 뭐, 잘못된 얘기는 아니지. 전쟁 때문에 입은 피해가 아직 회복되질 못했거든. 힘든 상황인 건 알고 있다만 세금을 필요 이상으로 경감시켜줄 수도 없단 말이지.”
“대관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지난번 녀석은 쓸데없는 세금을 거둬서 사리사욕을 채우기만 하길래 처단하긴 했다만……후임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정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 나는 왕도에서 거의 나갈 수 없다보니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그 정도로 바쁘신 겁니까?”
“네가 저지른 분쟁이랑 그 뒷처리도 원인 중 하나라고.”
더 이상 끼어들었다간 쓸데없는 잔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에이리히의 영주민이 불쌍하긴 하지만 이 녀석이 조금이라도 영지를 조금 더 신경 써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라드할데 경, 하드릿 경. 폐하께서 들라 하십니다. 들어가 주시지요.”
대신 중 한 명의 부름을 받고서 입실 허가를 받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세리아가 갈 수 있었을 텐데.
축축한 구멍에서 손가락을 뽑아내고 에이리히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왕에게 하는 인사,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사용하며 고개를 숙인다.
내가 데리고 온 엄청난 숫자의 병사에 다들 깜짝 놀라고, 오랑캐한테 승리한 것을 칭찬받고, 신분에 걸맞지 않은 병력 수에 잔소리를 듣는다.
정리하면 결국 그 정도뿐이다.
“영주들이 모이는대로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하겠노라.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만 이번 연습은 군사적인 목적보다 주변국과 민중들에게 군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니라. 추태를 보이지 않게끔 조심하라.”
““예!””
왕은 기분 탓인지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영주 귀족은 광활한 영토를 지녔고 주변 귀족을 통괄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을 전부 불러모은 상황에서 다들 잘 부탁한다, 한 마디로 끝낼 순 없는 것이다.
하나하나 불러내서 인사를 받아야 하는 게 왕이고, 만찬회나 무도회도 매일같이 열린다.
전왕에 비해 왕의 권한은 아주 크게 강화되었지만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서 유력 귀족과 다툼을 일으킬만큼 왕은 어리석지 않은 듯하다.
“나였더라면 그만큼 어리석었을 테지만 말이야.”
“무슨 얘기인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자, 돌아가서 멜리사랑 마리아하고도 마구 몸을 섞어야겠군.
카트린느는 슬슬 참지 못하는 지경이 됐을 것이다.
“하드릿 경!! 지난번에 아기가 태어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이야, 여기서 만나뵙게 돼서 다행입니다. 실은 오늘밤 저희 집에서 만찬회가 열립니다. 오랜만에 왕도로 오셨으니 부디 이번 기회에 친목을 다져보시죠. 라드할데 백작님께서도 하드릿 경은 오늘밤 예정이 없으니 한 번 초대해 보라고 말씀하셨던지라…….”
그렇게 완전히 바보가 될 수도 없는 모양이다.\
◇◇◇◇◇◇◇◇◇◇◇◇◇◇◇◇◇◇◇◇◇◇◇◇
밤
만찬회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밤바람을 좀 쐬고 싶어져서 먼저 논나만 마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맨 처음엔 논나도 같이 내리겠다고 주장했지만 왕도라고는 해도 그녀 같은 미녀를 밤거리에 내보낼 수는 없다고 내가 설득한 것이다.
딱히 창부를 찾으려던 것은 아니다.
“아앙, 대단해! 이런 듬직한 귀족님은 처음이에요!!”
“여긴 어떠냐?”
“커다란 게 들어와요―! 안쪽이 너무 깊어서 괴로워요! 근데 기분 좋앗!!”
우연히 눈에 띈 창부가 자기를 사달라고 애원하길래 어쩔 수 없이 도와준 것뿐이다.
시간도 없으니 뒷골목에서 선 자세 그대로 격렬하게 박아넣었다.
“슬슬 쌀 것 같은데. 안에 싸도 되나?”
“안에다 하는 건, 좀 그래요. 그치만 은화 1닢을 추가로 더 주신다면.”
마지막 말은 듣지 않고서 그녀의 가슴팍에 은화를 밀어넣은 다음 허리를 박아넣어 사정했다.
여자의 다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육봉이 맥박칠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아아, 씨가 흘러들어와……. 거근 귀족님한테 임신당했을지도.”
내 여자들은 다들 미인이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밖에서 군것질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으으, 못 일어서겠어. 부탁해요, 저기 있는 판잣집까지…….”
허리 힘이 풀린 창부를 주거지까지 배웅해주자 여자는 서비스 대신 입으로 물건을 깨끗하게 해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서 도착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다들 걱정하겠어.
“그만해!! 싫어어어어어!!”
여자의 비명소리와 천이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맨 처음엔 나처럼 창부가 뒷골목에서 손님이라도 찾는 줄 알았는데, 이 비명소리는 평범한 소음이 아니다.
결국엔 입이 틀어막힌 건지 우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한 번 들은 이상 확인해야 하는 게 남자의 의무다.
“그만해! 누나를 놔줘!”
“시끄러워, 꼬맹이! 한 방 더 얻어맞고 싶냐!”
“으음――――!!”
“크으~기분 좋은데. 끝내주는구만!!”
만약 그런 놀이를 하는 거라면야 미안해질 테지만 소리없이 슬쩍 그쪽을 들여다보니 네 남자가 두 명의 여자를 상대로 강간하는 중인 듯했다.
한 명은 여동생인 것 같은데, 등을 짓밟힌 채 엎드린 자세 그대로 땅바닥에 눌려 있었다.
얼굴에는 얻어맞은 흔적도 엿보였다.
또 한 사람, 아마 언니 쪽은 남자 몸 아래에 깔린 채 범해지는 중이다.
여동생을 붙잡고 있는 남자 말고는 전부 허리를 흔드는 남자를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놀이는 아닌 모양이군.
“어이.”
“앙? 끄엑!”
나는 언니를 범하고 있는 남자의 머리칼을 붙잡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남자의 물건이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뒤쪽에 있던 벽까지 부딪혔다.
손에는 두피째로 머리카락이 몽땅 남아 있었다.
미안하군, 대머리가 됐을지도 모르겠어.
“뭐, 뭐냐 넌! 무슨 짓이야!” “죽고 싶냐!”
나머지 세 사람이 욕설을 내뱉었지만 뒷골목에서 남몰래, 심지어 네 명이서 여자를 범하는 악당 놈들의 말을 신경 써줄 필요도 없다.
“그 애한테서 발을 치우고 어서 꺼져.”
나는 딱히 경비병이 아니니까 말이지.
대머리가 된 남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여기서 도망치면 용서해 주지.
““개소리 집어치워!!””
남자 두 사람이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검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크기지만 날붙이를 꺼내든만큼 진심으로 상대해 줘야겠군.
“야……이 자식 귀족 아니냐?”
여동생한테서 아직까지 발을 치우지 않은 남자가 살짝 불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얼른 꺼지면 용서해 주지.”
딱히 여기서 놈들을 때려눕혀봤자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
일부러 권위를 내세워 보긴 했다만.
“헹! 이 자식은 맨손이잖아. 죽여버리면 누가 알겠냐! 죽여버려!!”
두 남자가 내게 달려든다.
죽인 다음 강변에 던져버리면 확실히 모를 수도 있겠어.
하지만 그런 허접한 움직임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겠군.
날붙이를 손에 쥔 사람을 상대로 봐줄 필요는 없다.
먼저 내게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전력으로 패주었다.
콧날에 주먹이 명중하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를 벽으로 날려버렸다.
그 광경에 정신이 팔린 또 다른 남자의 손을 붙잡아 움직임을 막았다.
“야, 야아……얼른 일어서!”
힘들걸.
“임마! ……히익! 죽었잖아!”
코가 완전히 뭉개진 데다가 뼈도 박살낸 느낌이 있었다.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테지.
“아파아아아아, 그만해애애애애애!!”
붙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남자가 통증 때문에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땅에 털어트렸지만 힘은 풀지 않는다.
“그만해애애애애애애!!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손에서 우득우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지막엔 콰드득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남자가 절규를 터트렸다.
손을 붙들고서 바닥에 엎어진 이 남자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것이다.
엄청난 절규소리가 한밤중의 도시 속에 울려퍼진다.
“이렇게 소리가 커서야 금방 사람이 올 거다. 얼른 도망쳐.”
하지만 마지막 남은 남자는 여동생의 등에 다리를 올려둔 채 비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여자를 괴롭히려는 건가?
이쯤 되니 화가 솟구쳐서 남자를 앞발차기로 날려버렸다.
“아냐! 다리가! 굳어버려서!!”
뭐야, 동료가 당해서 겁먹은 나머지 못 움직였던 건가?
그거 미안하게 됐군.
위가 찢어진 건지 피를 토하면서 버둥대는 남자한테 마음속으로 사과하고서 여동생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다행히 얻어맞은 얼굴 말고는 전부 찰과상 수준이라 생명의 위험은 없다.
“나보다 누나를! 누나!”
흠, 제법 언니를 아끼는 착한 아이군.
더러운 걸 억지로 보게된 다음이니만큼 치유되는 느낌이다.
“너도 괜찮나?”
언니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동생의 말을 듣고서 정신을 차린 건지 찢어져버린 옷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아 몸을 감추었다.
일단 보기에 다친 덴 없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결국 삽입까지 당하고 말았다.
다친 덴 없지만 이쪽이 더 심각하군.
언니 쪽에게 웃옷을 걸쳐주니 절규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경비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이름을 대라!”
“왕국 자작, 하드릿이다.”
경비대는 내 복장과 얼굴을 확인하고서 허둥지둥 경례를 했다.
“실례했습니다! 하드릿 경, 무슨 일이십니까?”
“불량배들이 여자를 강간하고 있더군. 막으러 끼어든 나까지 죽이려고 들길래 저쪽 바닥에 내던져줬지. 두 명은 숨이 붙어있을 거다.”
손목을 박살낸 놈이랑 대머리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피를 토하고서 버둥대던 남자는 축 늘어져 있었다.
이미 글렀을지도 모르겠군.
“귀족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희를 도와주셔서…….”
여동생이 필사적으로 호소해 주었지만 병사는 딱히 듣고 있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놈들을 포박해라!”
“그래서, 나랑 여기 있는 여자들은 돌아가도 되나?”
“예! 상황으로 보아 이 녀석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명백합니다!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낫겠습니까?”
“필요엾다. 나이프까지 튀어나올 줄이야, 왕도도 밤엔 흉흉하군.”
“면목 없습니다…….”
경비병은 내게 꾸중을 들었다 생각한 건지 고개를 숙이고서 이번 사건의 원흉인 남자들에게 매섭게 대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다니! 걸어라, 대머리!!”
자업자득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여자를 집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말한 뒤 뒷처리는 경비병한테 맡겼다.
“괜찮나? 안에다 사정당했으면 목욕탕이 있는 여관에 보내줘도 되는데.”
차분히 언니 쪽을 살펴보니 가슴도 크고 얌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미인이었다.
확실히 이 여자는 억지로라도 달라붙는 남자가 있더라도 이상한 수준이 아니었다.
반면 여동생은 가슴도 없고 몸도 빈약한 편이라 욕정이 끌리는 신체는 아니다.
짧게 잘린 머리는 손질도 되어있지 않았다.
이래서 강간당하지 않았던 거로군.
“사정하기 전에 도와주셨으니까요……그게, 집이 저 바로 앞이라 이제 그만…….”
강간당한 직후에 남자가 바로 옆에 있는 건 확실히 기분이 거북할 테지.
순순히 물러나는 게 도리다.
“저, 저기!”
여동생이 내 앞에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하드릿 님! 멋졌어요! 나랑 누나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래, 앞으로는 너무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자매.
특히 여동생 쪽은 나를 열띈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나도 조금 인사라도 해줄까?
“엇!?”
여동생 쪽의 이마에 손을 덧붙이고 상냥하게, 입술이 슬쩍 닿기만 하는 키스를 해주었다.
“어? 어어!?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는 여동생, 언니도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라는 중이다.
“싫었나?”
“싫……진 않지만……왜? 나……나는…….”
싫어하지 않는다면야 문제될 거 없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오랜만에 착한 일을 하니 기분이 좋다.
그 후, 집으로 돌아간 나는 이번에 한 선행에 대해 논나한테 자랑하다가 술기운이 너무 심하게 돌아 창부와 엉겨붙었다는 얘기까지 꺼내게 돼서 결국 박치기를 얻어맞게 되었다.
인생 참 제대로 되는 게 없구만.
◇◇◇◇◇◇◇◇◇◇◇◇◇◇◇◇◇◇◇◇◇◇◇◇
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1살 봄(세는 나이)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자작 아크랜드 남동부 영주 산의 왕
휘하군: 동방독립군 2000 사군 3000 궁기병 3000 최대 6000
재산: 금화 9980닢(6800) (재료 200) (노역비 400)(원정 400) (논나 20)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거대창
가족: 논나(아내) 리타(메이드) 카트린느(음란) 멜리사 마리아 세바스찬(집사) 루비 미티 알마 크롤
아이: 스우 미우 예카테리나(딸) 안토니오(아들) 쿠우 루우 로즈(의붓딸)
영지: 카라(측실) 멜(측실) 요구리(식객)
부하: 세리아(부관) 이리지나(지휘관) 피피(종자) 레오폴트(참모) 슈바르츠(말) 아돌프(내정관) 클레어(전용 상인)
경험 인수: 51명
자식: 9명
'왕국에 이르는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국에 이르는 길 제88화『춘계 대연습』 (0) | 2024.06.03 |
---|---|
왕국에 이르는 길 ☆인물소개 87화 종료 시점 (1) | 2024.06.02 |
왕국에 이르는 길 제86화『아이들』 (1) | 2024.06.01 |
왕국에 이르는 길 제85화『개인적 상인 회담』 (0) | 2024.05.31 |
왕국에 이르는 길 제84화『상인 회담』 (0) | 202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