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돌아온 편지』
“으음…….”
나는 격렬한 운동을 끝마친 듯한 나른함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달라붙어 있는 세 여자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레 떼어놓는다.
빛을 잃고 평범한 돌멩이가 된 물건을 발로 치우면서 창문을 열었다.
해는 이미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으음―.”
“……끄엑.”
논나가 잠꼬대를 하다가 거대한 가슴을 카라의 얼굴 위에 덮어씌웠다.
오오, 입이랑 코가 완전히 막혔군.
카라는 손발을 버둥거리다 결국 가슴을 붙잡아 밀어버렸다.
“푸핫, 뭐야 이거! 신혼 첫날에 바로 죽이러 온 거야!? 좋아, 상대해……논나 냄새 나.”
논나의 얼굴이 끈적끈적한 무언가, 아마 멜의 모유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마지막엔 멈추지 않게 됐었지.”
“근데 이제 찔러도 안 나오는데?”
“하지 마, 계속해서 흘려대진 않을 건 아냐. 빨면 아직 나오긴 할 테지만.”
“그래? 한 번 마셔볼래.”
나도 좀 더 맛보고 싶은데, 다른 쪽은 내가 받아가 볼까.
“으음, 얼굴이 끈적거려요. …………무슨 상황인가요?”
논나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눈앞에는 잠든 채 몸을 비트는 멜의 모습과 그녀의 가슴을 한쪽씩 물고 있는 나와 카라의 모습이 있었다.
아침 유유를 잔뜩 마시고서 오늘도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녘까지 힘을 쓴 우리는 점심이 지난 시간까지 잠에 빠져있었지만, 그런데도 거실에 있는 여자는 많지 않았다.
어제 상태를 생각해 보면 마리아랑 쿠우는 완전히 무리, 오늘 하루 동안은 분명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멜리사도 살짝 머리를 쥐어싸매고 있었다.
오늘도 건강한 이리지나는 동이 틀 때 동시에 일어나서 힘차게 정원을 달리고 온 것 같지만.
“오늘 정도는 뭐 어때. 신혼 첫날인 우리도 하루 종일 꽁냥거려보자고.”
소파에 앉은 채 미녀 세 사람이 주는 차와 과자를 즐긴다.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도 좋잖아.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비명소리, 이건 세리아로군.
이렇게 심각한 비명소리는 웬만해선 듣기 힘든데.
우당탕탕 발소리와 함께 그녀가 나타났다.
이제 막 일어난 건지 머리가 완전 새집이었다.
“에, 에이길 님! 어제 저, 어느 분 방에!!”
“응? 그건…….”
세리아는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곧바로 감췄다.
아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런 장난을 쳤던 기억이 있긴 하군.
좀 더 놀려볼까?
“그러고 보니 취한 너를 크리스토프 보고 옮기라고 시켰는데,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나 보구나.”
세리아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쥐어싸맨 채 중얼중얼 저주를 외우는 중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없애야 해……입을 막아야 해…….”
세리아가 각오를 다진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에이길 님, 크리스토프 씨는 어디 계십니까?”
“어제는 창관에 간다고 했었는데. 아마 지금쯤 군대 막사에서 자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창관 말이군요……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세리아가 엄청난 표정으로 외출 준비를 하는 중이다.
설마 이 거짓말 때문에 크리스토프한테 귀여운 세리아를 빼앗길 일은 없겠지?
그녀를 빼앗기게 되면 논나를 빼앗기게 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데미지를 입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걱정은 할 필요 없어보였다.
“……세리아? 어디 갈 생각이냐?”
허벅지에 단검을 숨겨두고 검을 쥔 세리아.
투척 나이프나 본 적도 없는 암기를 몸에 붙이기 시작한다.
“슈바르츠를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확실히 처리해 둬야 하는 일인지라!”
“잠깐만, 어디서 뭘 할 생각이냐?”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거 놔주십시오! 그 남자의 입을 막지 않으면 저는 에이길 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그 남자의 목만 잘라내 버리면!
그렇게 요란을 피워대던 세리아가 울음을 터트렸고 집안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장난친 사실을 자백했고 아내 세 사람으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아아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 남자한테 더럽혀진 건 아닌지, 제 몸에 오물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으으으으으으.”
세리아는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샘이 고장난 것처럼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을 텐데. 크리스토프는 바보에 무능한 놈이긴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란 말이지.
“……왜 이런 시시한 거짓말을 치시는 건가요?”
“에이길~너무 심했어. 애가 울잖아.”
“농담은 사람을 가려서 하셔야죠. 자, 세리아 짱. 루우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진정하세요.”
아니 나는 세리아가 너무 무방비하길래 그만……이라 말하려고 했으나 다들 떠나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여자들 사이에서 즐겁게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이제는 세바스찬이랑 둘만 남았다.
“여자를 놀린 대가는 크구나.”
“여자가 울면 변명은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경험이 있는 건가?”
“쓸데없이 나이가 많은지라.”
“이 설탕 과자, 맛있군.”
“제가 만들었습니다. 여기 봉투에 담아두었으니 환심을 사는 데에 쓰시는 걸 권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담담히 할말을 해 주는 세바스찬과의 대화는 고독을 치료해 주는 오아시스다.
세리아는 울상을 지은 채 거실에서 식사를 시작했고 내 악행은 숙취 때문에 잠들어 있는 마리아와 쿠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전해지고 말았다.
단, 크롤 하나만큼은 처음 보는 세리아의 연약한 표정에 새삼 얼굴을 붉히며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을 계속 이어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세리아, 미안하다. ……그냥 장난 한 번 쳐볼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아뇨, 저야말로 너무 당황한 모습을 보였네요. 에이길 님만이 써야 할 몸이 그 천박한 남자에게 안긴 건 아닌가 싶어서.”
정말로 세리아는 크리스토프를 싫어하는군.
“사과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자, 받거라.”
세바스찬 특제 설탕 과자다.
봉투에 한가득 들어 있다.
“이건……가게에서 산 과자가 아니군요. 맛있어라!”
세리아는 사실 과자를 좋아한다.
주변 과자 가게 메뉴도 전부 파악 중이고 신상품 정보도 빠르다.
한밤중에 그녀 방에 들어갔을 때 각 과자 가게들이 언제쯤 새 과자를 내놓는지 정리해 둔 표를 본 기억이 있다.
그런 부분까지 성실한 녀석인 것이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이번 일은 용서해 줬으면 해.”
“아뇨!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깜짝 놀라서 눈물이 나왔을 뿐이에요.”
“하지만 앞으로 술 마실 때는 조심해. 정말 다른 남자한테 안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조심하겠습니다…….”
오묘한 표정을 짓는 세리아, 내 마음속에 또다시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눈을 떴더니 옆에 크롤이 알몸으로 누워있다거나 말이지.”
크롤이 세리아한테 반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은 당사자들 외에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스갯소리로 넘길 생각이어는데 세리아한테서 살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만약……정말 그런 추태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 녀석의 물건과 알을 잘라낸 다음 에이길 님께 사과하겠습니다.”
크롤이 일을 저지르지 않길 빌자.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소소한 사건으로는 논나가 나와 사랑을 나눌 때 허가제로 하자고 제안한 것이 있었다.
쉽게 말해, 측실 말고는 논나한테 허가를 받고 나서 내게 안긴다는 방식을 제안한 것인데 여자들의 절대 반대 및 여당 카라의 배신으로 인해 완전히 무산되었다.
정실의 폭거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 논나는 그날밤, 애첩들 앞에서 공개 처형……내게 엉덩이가 새빨개질 때까지 얻어맞는 형벌을 받았다.
게다가 얼굴은 울상이면서 배신자 카라가 그녀의 성기가 축축히 젖어있는 걸 지적한 결과, 피학 취미가 있는 변태라는 소문이 퍼져 위신을 크게 실추하게 되었다.
이것은 부부의 비밀이긴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 둘만 있을 때 논나는 가끔씩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졸라댄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사건은 한순간에 잊히게 된다.
“주인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편지를 갖고 오는 건 대개 미티 혹은 알마다.
가끔씩 카라가 슬쩍해 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여러모로 바쁜 세바스찬이 직접 갖고 오는 경우는 적다.
“세 통……아뇨, 두 통과 한 통인 것 같습니다. 한 통에 왕가의 인장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이리 줘 봐.”
내용은 최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 동방 독립군이 2000명의 병사와 함께 정식적으로 발족된 것이다.
조만간 설립식 자리를 가지고서 그대로 라펜으로 이동시킬 예정이다.
“드디어 왔군. 이제 영지 안에 있는 도적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어.”
인구 2000명의 영지 내에 같은 숫자의 무장병이 들어오는 것이다.
도적 입장에선 이만큼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직장도 따로 없으리라.
“2000명 분량의 보급 물자는 왕국에서 지급해 준다고 해도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숫자의 병력을 변경에 배치해 두는 것일까요?”
“표면상의 목적은 오랑캐 토벌일 테지요.”
세리아의 질문에 레오폴트가 대답했다.
산에 사는 오랑캐. 지금은 얌전하지만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인원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백 명 정도로는 상대하기 턱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농민과 달리 여자, 아이들까지도 전부 전력으로 사용한다.
그걸 생각해 보면 2000명의 병사를 배치해 두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게 표면상의 이유입니까?”
세리아는 요즘 들어 레오폴트가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전술, 전략에 능통하다는 걸 인정하고 그의 지식을 흡수하려는 것이리라.
놈한테는 세리아한테 손을 댔다간 니나를 받아갈 거라고 엄포를 늘어놓았다.
“그렇지요. 진짜 정답은 중앙군에 있습니다.”
에이리히의 중앙군은 슬하 부대를 제1군단부터 제3군단까지 나누어 이미 3만 명이 넘는 규모까지 증설된 상태다. 심지어 지금도 계속 강화 중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크랜드 전쟁 때 입은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중앙군의 증강을 생각해 보면 진짜 목적은 명백합니다. 폐하께선 북부 소국들 전부를 상대할 생각인 것이죠.”
“그럴 수가! 그들은 아군 아니었습니까!?”
“외교에 적과 아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발생하기에 손을 잡는다, 그것뿐이죠. 현재 고르도니아한테 있어서 그들과 우호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싸우게 될 대상은 어느 쪽이라 생각하지?”
“트리에아겠군요. 유레스트 연합과는 국경이 바로 맞닿아 있긴 하지만 그 나라는 고르도니아와의 교류 관계도 친밀한 편이고 두 나라에 혈연 관계로 맺어진 귀족도 많습니다.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서 흡수하고 싶을 테지요.”
세리아는 메모를 적는 중이다.
그 메모 떨어트리면 안 된다?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것 같으니.
“동방 독립군은 기습을 위한 무기라 이거군.”
“그렇습니다. 중앙군이 남하하는 시기에 맞춰 우리들도 남하합니다. 트리에아는 병력상으로 열세인 데다가 우리들 때문에 변경 쪽으로 병력을 할애해야 하는 상황이죠.”
하지만, 하고 레오폴트는 덧붙였다.
“지금 상태에선 힘들 겁니다. 이유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간 침략 행위로 인정되어 다른 나라가 개입할 구실을 주게 됩니다. 그들 입장에선 고르도니아의 비옥한 토지는 매력적인 요소일 테니까요. 지금 전력으로 북부 소국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게 되면 고르도니아의 승산은 낮습니다.”
“어떻게든 전쟁을 정당화할 구실, 대의 명분이 필요하단 거군.”
“맞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치에는 그리 밝지 않다 보니.”
이 정도만 얘기해 줘도 충분하다.
아무튼 이 말대로 오랑캐만 상대하고 있으면 된다는 건 아니로군.
“대화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른 편지는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너무 이야기하는 데에 열중해 버렸군.
세바스찬이 내민 편지를 확인했다.
“이건 아돌프한테서 온 건가, 세리아…….”
슬쩍 보고서 세리아한테 건넨다.
놈이 쓴 편지는 내용이 길다. 지난번엔 필사적으로 끝까지 읽어서 내린 결론이「아무 일 없이 순조롭습니다」였다.
따라서 세리아한테 맡겨둔다.
“이건…………그 남자!!”
내용은 문제없었다.
다만 지난번에 보냈던 세리아 대필 편지가 오탈자와 잘못된 문법이 첨삭된 채 돌아온 것이다.
날뛰어대는 세리아를 내버려두고 세바스찬한테 마지막 한 통을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쪽 손을 내민 나의 충실한 집사의 동작에선 망설임이 느껴졌다.
“왜 그러지?”
“아뇨……이것은 손으로 드리기엔 좀 많을 것 같습니다.”
세바스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무거워 보이는 그것 안에는 편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뭐야 이건………….”
아무리 봐도 편지 한 통이 아니다.
“그것이, 이게 전부 합쳐서 한 통입니다. 오르가 연방에서 전속 우편부가 왔더군요.”
전속 우편부는 고속 우편보다 더 빠른 우편으로, 오로지 편지 한 통을 보내기 위해서 말을 한계까지 사용하며 달려오는 것이다.
물론 가격도 말도 안 되게 비싸다.
이런 걸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된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일단 누가 보냈는지 확인해 보자.
[클라우디아 알벤스 말로도르] 저의 사랑하는 에이길 님께.
역시나, 그럴 줄 알았지.
“에헴, 이제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편지를 앞에 두고서 논나가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세리아가 보고해 버리고 만 것이다.
“역시 이 편지에 대해선 정실인 논나 씨한테 알려드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고 한다.
이 안에서 클라우디아를 알고 있는 건 논나, 세리아, 멜리사 세 사람뿐이다.
“그래서 왜 그 분한테 편지 같은 걸 적으신 건가요? 일이 귀찮아질 거라는 건 알고 계셨을 텐데요.”
세 사람 말고는 다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지만 아무튼 논나가 날 추궁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침대 위에서 한 얘기가 있었거든…….”
◇◇◇◇◇◇◇◇◇◇◇◇◇◇◇◇◇◇◇◇◇◇◇◇
과거 백도
“하아하아…………좋았어요. 당신의 이건 여자를 죽이는 보검이랍니다.”
“당신이야말로 더 음란해졌군요. 불타올랐습니다.”
“아아, 사랑스러운 사람! 저를 그렇게 기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아요!”
나는 침대에 누워 손을 내밀었다.
“이리로 와, 클라우디아.”
팔베개 위로 올라온 클라우디아는 내게 계속해서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스러운 분, 이제 곧 떠나시는 거군요……. 그 남자의 아내만 아니었더라면 함께 떠났을 텐데.”
별로 같이 다니고 싶은 타입은 아니지만 이런 말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은 법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해드릴게요. 돈을 필요로 하신다면 드릴 테고, 여자를 원하신다면 하녀 중에서 미녀를 골라 드리죠. 귀족 여자를 원하신다면 딸도 내어드리겠어요. 부디 범해 주세요.”
어제 자기 눈앞에서 똑같은 말을 듣게 된 클라우디아의 딸, 크리스티나는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한테 겁을 먹고 방 안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여행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만큼의 돈은 있으니까요. 그것보다 약은 잘 쓰셨습니까?”
당연히 피임약을 말하는 것이다.
“아아! 정말 가증스럽군요! 그런 시시한 남자의 아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의 씨를 받을 수 없다니. 제가 임신하지 못한 것도 분명 그 남자 때문일 거예요. 에이길 공처럼 진한 씨앗이었더라면 지금쯤!”
클라우디아는 감정 기복이 심하다.
내게 강아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남편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내비칠 때가 있다.
명문 귀족 가문에 시집까지 온 사람이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법 시달렸던 모양이다.
“만약 사랑스러운 당신과 이대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저는 망가지고 말 거예요. 최소한 편지를 보낼 수 있을만한 위치라도 가르쳐 주실 수 없겠나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정해진 거처가 없으니 말입니다. 언제 어디에 있을 거라고 확답하긴 힘들군요.”
“……역시 그런 불안정한 생활보단 제 저택에서 기사를 하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 어떤 것보다 당신을 우선시할 수 있는데 말이죠.”
“저도 언젠가 어느 도시에 터를 잡고서 그곳에 살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면 제가 먼저 당신한테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시죠? 기대하고 있겠어요! 기억해 주세요, 당신은 제게 있어서 제일 위,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바라는 건 뭐든지 말씀만 해주세요. 당신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내어드릴 테니…….”
클라우디아는 내게 몸을 비비대며 기운을 되찾은 남근을 다시 입에 물었다.
“두꺼워, 커다래! 배를 뚫어줘요! 오오오오!! 음란한 저를 자지로 박아 죽여줘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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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도 확실하니까 말이지. 돈도 받고 같이 자기도 했는데 그걸 끝으로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좀 너무하다 싶어서 편지를 썼을 뿐이야. 편지로 대화라도 나눌 수 있으면 자기가 버림 받았다곤 생각 안 하겠지.”
“그 결과가 이건가요…….”
클라우디아의 손편지는 50통이 훨씬 넘었다.
필적을 보아 전부 여자의 글자, 아마 대필 없이 자기가 직접 적은 것이리라.
“고귀한 분에 대한 무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분은 불장난을 하기엔 좋지 않은 여성으로 보입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저도 남자에 대한 사랑이 무거운 여자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도가 지나친 것 같군요.”
리타도 불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불장난을 하려고 편지를 보낸 건 아닌데 말이지.
침상 위에서 한 얘기라고는 해도 약속도 했고 영지 경영을 위한 조달금에 조금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흑심도 있었다.
에이리히도 귀족끼리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는 건 중요하다 했었고.
“중요한 건 당주와의 관계예요. 부인의 마음을 빼앗아서 어쩌시려는 건가요?”
논나의 차가운 목소리는 듣지 못한 걸로 해두자.
“그래서 결국 무슨 내용인지 이해했나?”
내용이 너무 길다 보니 세리아한테 부탁해서 적혀 있는 걸 요약해 달라고 했다.
“……크윽, 이렇게 불쾌한 독서는 처음입니다.”
세리아는 가끔씩 혀를 차면서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요약문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걸로 보아 대부분이 나에 대한 의미없는 칭찬이나 사랑의 말이 적혀 있는 모양이다.
한동안 세리아는 신음하고 짜증을 내며 한숨을 내쉬다, 간신히 끝을 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 다 됐습니다. ……저는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세리아는 비틀거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정신적인 피해를 심하게 입어 단 과자라도 먹으러 가는 것이리라.
자, 그녀의 전과를 살펴보도록 할까?
사랑하는 에이길 님께~ 생략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략
설마 고르도니아의 귀족이 되었다니 놀랐습니다. ~생략
영지도 받게 되신 거군요. ~생략
영지 경영은 어려운 일이니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해주세요.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생략
고르도니아에선 왕의 세대 교체와 함께 전쟁도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가문은 고르도니아 왕가하고도 연줄이 있으니 한 번 새로운 왕께 인사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로, 사실은 에이길 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생략
선물을 잔뜩 들고 갈 테니 기대해 주세요. ~생략
“……뭐야 이거.”
내용만 따져 보면 종이 편지 한 장으로 충분하다.
나머지 49장은 쓸데없이 길고 휘황찬란한 칭찬세례가 적혀 있던 건가?
가끔씩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던 걸 생각해 보면 음란한 언어도 적혀 있던 것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쪽으로 오는 건가.”
하지만 백도에서 고르도니아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심지어 귀족 부인이 여행을 떠난 것이니 이동 속도만 보면 우리가 갔을 때의 몇 분의 일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연방의 추위는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서 겨울에 여행을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출발할 수 없을 거야. 연방의 늦은 봄을 기다리고 나서 출발……대충 2달 정도 걸릴 테니 도착하는 건 한여름쯤이겠군.”
이렇게 계산해 봤다.
“그 여자를 너무 낮잡아 보시네요.” “그럴 리는 없어.”
논나와 멜리사가 내 말을 곧바로 부정했다.
“이 편지를 봐 주세요. 이런 거, 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확실히 말씀드려서 이상하다구요! 이런 걸 보내는 사람이 순순히 봄까지 기다리실 것 같나요? 이미, 아니, 이 편지를 적은 순간부터 이미 여행길에 나선 상황이었을지도 모르죠.”
논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연방에서 겨울에 여행을 시작했을 땐 정말 말도 안 되게 추웠다.
다른 나라 왕가에 인사를 오는 상황이라 시중 드는 사람과 하인들도 따라왔을 테니 속도도 느려질 수밖에 없다.
정말 그 추위를 견딜 수 있다고?
“내가 백도에서 본 기억으로는 에이길 씨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것 같은데. 방금 전 얘기에서 자기 딸도 원하면 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여행길 도중에 하인이 죽는 것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전속력으로 올 게 분명해.”
멜리사도 논나와 같은 의견인 모양이다.
내 생각이 너무 짧은 건가?
며칠 후, 동방 독립군 설립식 자리에서 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하드릿 경, 잘 부탁하느니라.”
“예. 폐하께서 내려주신 병력, 황솔할 따름이옵니다.”
설립식이 끝나고 2000명의 병사는 내 지휘권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이틀 정도 준비를 한 후, 라펜으로 떠날 예정이다.
“그래, 그리고 경에는 한 가지 더 얘기할 것이 있노라. 오르가 연방의 귀족, 말로도르 후작 가문한테서 사자가 왔더구나. 나에게 인사를 하러 온다고 하였느니라. 즉위 이후, 혼란 상태가 계속된 탓에 늦어졌다고 하노라.”
알고 있다.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후작 본인은 몇 달 동안이나 영지를 떠날 수 없는 탓에 그의 부인이 온다하였느니라.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연방과의 관계는 최우선 사항. 그리고 말로도르 후작 가문은 연방 안에서도 전통 있는 가문이니라.”
그것도 알고 있다.
물론 말하진 않는다.
“과거에 우리 왕가하고도 혈연 관계를 맺은 적 있는 가문이지. 일개 귀족 가문이라 해도 소홀히 할 순 없는 노릇. 그리고 부인은 지난 전쟁 때 경의 무용담을 듣고서 흥미를 내비치고 있다 하였노라.”
연방 고급 귀족이 중앙 평원 소국의 분쟁에 흥미를 비칠 것 같진 않다.
분명 이 짧은 시간 안에 내가 편지에 적은 성씨를 통해 조사한 것이리라.
상당한 수준의 집념과 행동력이다.
“따라서 경은 부인의 접대역을 맡아 흥을 돋워주도록 하라. 명문 귀족의 부인이니만큼 자극적인 이야기에 굶주려 있을 터. 전쟁 이야기라도 해 주면 만족할 것이야.”
절대로 만족할 리 없다.
그녀는 자극적인 행위를 바라는 중이다.
“경은 여색에 심취해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제는 결혼했다 들었노라. 말로도르 후작도 걱정하지 않을 테지.”
아마 둘이 된 순간 부인은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내게 안길 게 분명하다.
내기해도 좋다.
“그래, 도착 시기는……백도와는 다른 장소에 있었던 모양이로고. 3주 정도, 봄 즈음에는 도착한다는구나.”
새삼 그녀의 집념을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왕가 쪽 사자가 온 시기는 내게 편지가 도착한 날보다 느렸다.
섬뜩한 무언가가 느껴지긴 했지만 나도 클라우디아를 안았을 때보다 여러모로 성장했다.
집착, 집념이라 해도 쉽게 말해 내게 반한 여자가 내게 안기로 찾아오고 있을 뿐이다.
얼마든지 올 테면 오라지, 나는 내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걸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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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0살(세는 나이) 겨울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자작 동방 독립군 사령관
아크랜드 남동부 영주
재산: 금화 80닢 (은화 이하 생략)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특주 거대창
장비: 검은 망토(저주받음) 가죽제 간이 갑옷
가족: 논나(아내) 카라(측실) 멜(측실) 스우(딸)
멜리사 마리아 리타 루우 쿠우 카트린느(애인)
하인: 세바스찬(집사) 미티 알마 크롤 니나
부하: 세리아(부관 겸 수양딸) 이리지나(사군 지휘관) 레오폴트(군 지휘관) 슈바르츠(말) 아돌프(내정관)
경험 인수: 40명
자식: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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