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결혼식』
산적 놈들을 쓰러트리고 유입민들을 구해내 젊은 여자의 처녀를 받아가고 라펜까지 배웅한다.
제법 영주로서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아돌프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직접 무기를 들고 도적들을 사냥하러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세리아는 걱정이 많구나.
“아니, 훌륭해! 이것이야말로 영주의 귀감, 스스로 무기를 휘둘러 시민들을 지켜내는 것. 이게 바로 귀족의 본모습이다!”
이리지나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시민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놀라고 있잖냐.
어젯밤의 그 여자도 몸이 지쳐서 걸어오기가 힘들어졌는지 짐마차에 올려태운 상태다.
나랑 눈이 마주치니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미소 지어 주니 고개를 푹 숙이면서 손을 젓기 시작했다.
“에헴.”
내 시야 사이에 세리아가 끼어들었다.
방해를 한 벌로 시민들 앞에서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펜, 영주관(임시)
“호오, 바로 시작됐나 보군요.”
“유입된 민중들을 도적한테서 구해냈으니 나머진 어떻게든 해 봐.”
내가 데려온 시민들을 보고 아돌프는 이름과 가족 구성원, 나이를 기록한 뒤에 다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마을을 짓겠다고 대답했다.
“시골 마을일수록 지인 관계가 중요하니까 말이죠. 이미 있는 마을에 이 사람들을 보내도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을 겁니다. 반대로 새롭게 마을을 지으면 외부인이라고 할만한 것도 애초에 존재를 하지 않게 되죠.”
이미 귀환병과 유입민들 몇 명을 보내서 마을 설립 준비를 시키고 있다고 한다.
“새 마을은 일단 실제 수확이 나오기 전까지 인두세와 나머지 세금도 면세로 해두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 한복판에서 바로 수확세를 거두겠다고 말해봤자 낼 수 있는 것도 없겠지.
타당한 의견이긴 하지만 아무리 세금이 없다 해도 그들은 무일푼이다.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무언가가 없다.
“이들의 마을은 라펜에서 근처에 있는 곳에 지을 겁니다. 농작업 시기에 노역 일을 맡긴 뒤 현금을 주거나 현물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죠. 라펜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을 배치해 둠으로써 이 도시를 물류 거점지로 삼는 겁니다.”
오호라, 고생은 할 테지만 굶어죽을 일은 없을 거고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 하루 빨리 밭을 지어서 수확량을 늘리라 이건가.
꽤 좋은 생각이군.
“……여러분들은 이런 식으로 일해주시죠. 그리고 노역 말입니다만 남자는 관개 같은 토목 공사, 여자는 직조 관련으로~.”
아돌프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민중들한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 즈음, 어제 내가 안았던 여자가 아돌프한테 뭐라뭐라 귓속말로 속삭였다.
“안타깝지만 그 일은 제 관할이 아니라서 말이죠. 부관 분이나 본인한테 물어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부관이라는 단어에 세리아가 여자를 노려보자 그녀는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갔다.
대체 뭐였던 걸까?
세리아가 도시 상태를 둘러보러 간 사이 아돌프를 불러 슬쩍 물어보았다.
“그것이, 영주님한테 안길 수 있는 일은 있나요? 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말을 안 꺼내길 잘했군.
확실히 그런 역할도 있긴 하고 내 입장에서도 환영이긴 한데 말이지.
세리아는 어째서인지 어젯밤 일에 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간 아마 곧바로 날뛰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이 살아갈 길은 주어졌다.
찝찝한 결말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여자, 이름도 못 들은 게 좀 아쉽네.
“사병 희망자도 있더군! 물론 아직 10명 될까 말까한 수준이다만.”
이리지나는 아크랜드 시절에 100명 이상을 지휘하던 지휘관이다.
확실히 이건 숫자가 좀 적다.
“아돌프, 사병도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기 전까진 토목 공사 쪽에 배치해도 상관없다. ……그래, 50명을 넘기면 나한테 사자를 보내도록.”
역시 전쟁이 끝난 직후다 보니 인부 일도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위험한 병사일을 고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할 것이다.
크리스토프와 맥이 나를 따라온다고 하니까 미리 이쪽으로 배치해 둬도 좋겠군.
맥의 괴력은 오히려 토목 공사에서 진가를 발휘할 것만 같다.
“그럼 하드릿 님은 왕도로 돌아가실 생각이신지?”
“그래,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해서 말이야. 원래는 너도 초대해야 할 입장이긴 하다만.”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축하의 말을 미리 전해두도록 하죠.”
이 중요한 시기에 잠깐이라도 아돌프가 이 자리를 비워두는 건 좋지 않다.
“사실 저도 하드릿 님은 돈만 주시고 왕도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편이 좀 더……아니, 이건 실언이군요.”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지하 감옥 안에서 좀비밥이 될 뻔한 거 아니냐.”
아돌프는 능력도 좋으니 영지 경영도 어떻게든 잘 해낼 것이다.
다음은 사랑하는 여자들을 기쁘게 만들어줄 차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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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후 왕도 고르도니아
아직 추위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는 계속 점점 따뜻해질 것이다.
내 옆에는 논나가 달라붙듯이 매달려 있고 한 발 뒤에는 카라와 멜이 있다.
그녀들은 모든 이들이 뒤를 돌아볼만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넷이서만 왕도 안에 있는 고대 신전……논나가 말하기로는 사랑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라고 한다.
그곳에 서 있는 동상 앞에서 맹세를 한다.
“나는 이 여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저는 이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키스를 하고서 논나가 한 발짝 물러나더니 카라가 앞으로 나왔다.
“나는 이 여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나는 이 남자의 아이를 마구마구 낳아줄 것을 맹세할게.”
논나가 풀썩 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신성한 의식 도중에 끼어들 수는 없기 때문에 버티는 중이다.
다음은 멜이다.
“나는 이 여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저는 이 남자를 영원히 사랑하고, 뭐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논나가 뿜었다.
결혼 의식이라는 것은 자유분방한 거였군.
이제 맹세는 전부 끝났다.
사랑의 신 앞에서 당사자들이 사랑을 맹세한다.
혼례 의식은 이게 전부다.
요즘에 나타난 유일신이니 뭐니 하는 놈은 좀 더 딱딱한 방식으로 혼약을 올린다고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뭐.
고작 이것밖에 없는 혼례 의식에 대체 뭘 그렇게 준비하고 돈을 많이 써야하는지가 의문일 테지만.
“자, 집으로 돌아가죠. 다들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사실은 집에 지인들을 초대하고 아름다운 신부들을 보여주면서 최고급 식재료와 술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신부들을 위해 건배!” “미녀들에게 건배!” “커다란 가슴에 건배!”
먼저 에이리히가, 그 다음은 브루노, 마지막은 크리스토프. 세리아는 크리스토프의 대사를 듣고서 녀석한테 로우킥을 먹였다.
오늘밤은 예절 차릴 것 없이 다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즐길 생각이다.
오늘 참가한 인물 중 귀족은 에이리히와 브루노뿐이다.
옛 부하, 아고르와 크리스토프, 그리고 맥.
익숙한 마스터, 안드레이와 그의 아내 나탈리.
나머지는 집안 사람들과 하인들, 이게 참가자의 전부다.
에이리히가 말하길 믿기 힘들 정도로 참가자 숫자가 적은 편으로 이 정도면 불명예 낙인이 찍힌 몰락 가문급 정도라고 한다.
귀족의 결혼식은 양가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 빚을 내서라도 성대하게 치러지고 되도록 고위 귀족 참가자를 불러모아 자기 권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우리는 양가라 해도 논나의 가족들은 전부 세상을 떠났고 카라와 멜 모두 우리 말고 달리 가족이 없다.
나도 전혀 아는 게 없는 귀족 아저씨한테 축하 받아봤자 기쁘지 않다.
“내가 참가했으니 신귀족들한테는 어찌저찌 변명은 될 테지만……무도회나 만찬회에선 제대로 소개해 두라고.”
지인들끼리만 모여서 결혼식을 여는 경우엔 귀족들과의 연줄이 좀 아슬아슬해진다고 한다.
뭐가 아슬아슬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이리히가 참가해 있으니 괜찮겠지.
“자, 귀족이니 파벌이니 하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마시면서 즐기면 그만 아니겠어?”
내가 그렇게 소리치자 에이리히도 웃음을 터트리곤 예전 무도회 때와는 다르게 본격적으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무례를 저질러선 안 되는 무도회와 달리 여기 있는 건 전부 지인들뿐, 취하고서 술주정을 부려도 아무 문제없다.
술의 질만 보면 무도회에도 뒤지지 않는 것들로 모아뒀으니 마음껏 마시라고.
잔치가 이어지는 와중, 에이리히가 결국 술에 취해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원래 너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놈이긴 했지. 결혼식도 제법 이상할 줄 알았더니 반대로 식은 멀쩡하고 신부가 셋.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원.”
에이리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안에도 여자가 잔뜩 있던데. 손 안 댄 여자가 있기는 하냐?”
웬일로 진짜 심하게 취해 술주정을 부리는 중이다.
어쩌면 좋을까 난처해하던 와중 리타가 내게 윙크를 하곤 에이리히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백작님, 백작님의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만, 꼭 한 번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그런데 들려주실 수 있겠나요?”
소파에 걸터앉은 에이리히 옆에 앉아 눈을 바라보는 리타.
리타의 복장은 하인의 그것으로 원래 손님 옆에 앉는 건 허락되지 않는 입장이다.
하지만 가슴께가 풀어지고 나를 유혹하기 위해 치맛자락은 짧게 개조되어 허벅지가 보이는 복장이다.
이런 여자가 옆에 앉는다고 화를 낼 남자가 있을 리 없지, 심지어 술까지 마셨으니.
“그……그래? 그럼 일단 여명의 날개 창설 이야기부터…….”
에이리히가 리타한테 이야기를 시작하고 리타는 나한테 한 번 더 윙크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질투심이 샘솟으니 나중에 포상 겸 실금할 때까지 괴롭혀 줘야겠군.
브루노도 웬일로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술을 마신 데다가 말이 많아졌고 말투도 거칠어졌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네가 이렇게 빨리 결혼을 한다고? 임신시킨 것도 아니지 않냐?”
멜은 임신시켰다기보단 이미 낳았는데.
“이것저것 있어서 말이야. 참고로 논나한테 결혼 신청을 한 건 그때 그 무도회날이야.”
“내가 고생하고 있는 사이에 넌 구혼하고 있었다고!?”
“제법 유익한 무도회였지.”
“나 같은 경우엔 화장 냄새나 잔뜩 나는 여자들한테 붙잡혀서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는 신세였는데…….”
“미인이었나?”
“반어인이 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면야 미인이었겠지.”
나와 브루노는 웃음을 터트리고 술을 나눠 마셨다.
그에게는 이미 아이까지 가진 애인이 있지만 평민 출신의 여자라 공적인 자리에는 내비칠 수 없다 보니 독신 귀족으로서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상황이다.
이게 귀족들 사이에선 일반적인 일이다.
배도 좀 꺼졌겠다 고기를 손에 쥐고 호탕하게 입으로 잡아 뜯었다.
향신료도 잘 배어서 절묘한 감촉으로 부드럽다.
상인이 말하길 이거 하나만 해도 평민 월급의 절반 정도 가격은 된다고 한다.
사람 수를 줄인만큼 이곳에 있는 식품은 전부 최고급, 왕의 식탁에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것들뿐이다.
금화 500닢은 드레스와 음식, 술, 그리고 어떤 물건 때문에 사라졌다.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우리가 다 같이 먹어도 무조건 남을만한 양을 주문했고, 내일 도로테아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한테 남은 음식을 주기로 했다.
가끔씩은 고기도 잔뜩 먹어줘야 성장할 수 있는 법이다.
특히 여자애의 성장은 중요하다.
“좋겠다, 좋겠어……나도 드레스 입어보고 싶었는데…….”
논나의 드레스를 보고 마리아가 울음을 터트려 주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중이다.
역시 마음 속으론 내 결혼에 납득하지 못한 줄로만 알았는데…….
“맛있다, 맛있어……이 애플 파이……어떻게 만든 걸까…….”
파이를 먹으면서 우는 중이다.
그냥 우는 게 술주정일 뿐이었다.
“엄마! 에이길 씨랑 교미는 어떤가요!!? 커다란 자지로 쑤컹쑤컹 당해서 남자즙이 븃 하고 나오는 거예요?”
“얘, 쿠우!? 귀족 분들도 계시잖아. 아무리 예의 차릴 필요 없다지만 그런 천박한 말을!!”
“자X――!! X지, 자X――!! XX로 XX를 XX해버리는 거야!!”
인생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된 쿠우의 입에선 듣기 힘든 천박한 이야기……음담패설조차 되지 못하는, 단순히 천박한 단어를 남발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술을 마시도록 시킨 건……카라군. 커다란 잔으로 와인 한 병을 다 마시도록 부추긴 모양이다.
쿠우는 마시면 이런 식으로 바뀌나보군. 평소엔 흥미없는 척했으면서 머릿속엔 야한 내용으로 한가득이었나 보다.
결국 쿠우는 인사불성이 된 채 퇴장, 루우는 술을 할짝거리며 행복하다는 듯이 몸을 흔드는 중이다.
“에이길 님, 이쪽으로 와주시지 않으면 외로워요.”
“음식도 전부 우리가 먹여줄게.”
“…………논나의 술을 받으시죠.”
내 양옆에 멜과 카라가 다가왔다.
그리고 논나는 무려 자기 가슴을 모아 계곡 사이에 술을 부어둔 상태였다.
이 세 사람도 얼굴이 새빨간 걸 보아 상당히 취한 모양이다.
다른 손님들 앞에서 갑작스레 들이닥친 논나의 돌발 행동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자.
“이거 봐, 역시 가슴보다 가랑이로 하는 게 더 좋다고 했잖아!”
“그런 변태 같은 짓을 어떻게 해요! 가슴이야말로 최고라구요! 가슴이 큰 여자가 승리하는 법이에요!”
“논나 씨 같은 경우엔 가슴이 너무 커서 와인병째로 들어갈 것 같네요.”
지리멸렬한 대화 끝에 세 사람은 논나의 가슴이 어느 정도 크기의 물건까지 넣을 수 있을지 장난치기 시작하길래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내끼리 사이가 좋은 건 보기 좋군.
“부탁할게! 제발!!”
“안 돼요! 저,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단 말이에요!”
이쪽에선 크리스토프가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미티한테 애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이 멍청이는 미티한테 구혼을 한 모양이다.
뭐든지 시키는대로 할 테니 자기 아내가 되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안 될까? 축하하는 자리에서 내쫓기에도 좀 그러니까…….”
난처한 표정으로 멜리사가 내게 말했다.
아마 미티가 도와달라고 한 모양이군. 평소에 잘 따르던 마리아는 와인을 마시면서 울고 있으니까 말이야.
“좋아, 크리스토프. 너한테 기회를 주도록 하지. 만약 이리지나랑 술마시기 대결에서 이기면 미티를 내어주도록 하겠어.”
“그럴 수가! 주인님, 너무하세요!”
미티가 항의하듯 말했지만 멜리사가 웃으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진짜로!? 여자랑 술 마시기 대결에서 이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이기면 침대 위로 데려간다?”
“술 마시기 대결 말인가? 좋다!”
이리지나가 두 손에 쥔 고기를 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라 크리스토프, 이건 전부 네 어리석음이 불러온 결과다.
“잠깐만, 왜 잔이 아니라 통에 술을 붓는 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잔 크기로 승부를 내려다간 아침까지 마셔야 하지 않나.”
이리지나는 끝없이 마실 수 있는 술고래 + 엄청난 애주가다.
네가 의식이 날아갈 때까지 상대해 줄 거다.
“세리아? 너도 괜찮으냐?”
“그험효.”
“잘 알겠다. 어서 자러 가라.”
“하흐, 술 더 주세효.”
세리아는 술에 약한 주제에 틈만 나면 마시려고 하니까 말이지.
내가 끌어안아주자 금세 새근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자기 방까지 옮겨다 두는 수밖에.
다른 남자도 있는 상황에서 너무 무방비하군.
조금 장난을 쳐보도록 할까.
침대에 눕혀두고 옷을 전부 벗긴 다음 머리맡에 컵 두 개를 올려두었다.
내 글씨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왼손으로 종이에 글을 적는다.
「어젯밤엔 최고였어. 사랑스러운 당신이랑 언젠가 한 번 더 만날 수 있기를」
완벽하군.
세리아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가던 도중 알마와 마주쳤다.
스우를 돌봐주고 있던 모양이다.
오늘만큼은 멜도 스우를 맡겨뒀던 모양이다.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이는 알마.
그러고 보니 아까 요리를 부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지.
하인이 입에 댈 수 있는 요리는 다 식었거나 잔치가 끝나고 나서 남은 것들뿐이다.
평소엔 그냥 적당히 같이 먹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은 손님들도 있다 보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잔칫상에서 아직 식지 않은 고기가 잔뜩 남아있는 그릇을 하나 들고 와 알마한테 가지고 가도록 시켰다.
“이건 이미 식었으니까 새로운 걸로 바꿔 두거라.”
알마는 내 말뜻을 이해한 건지 고개를 숙이고 기쁜 표정으로 접시를 들고 달려나갔다.
크롤이랑 미티와 함께 먹을 생각인 것이리라.
“상냥하시군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세바스찬이 서 있었다.
그는 무예에 소질은 없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기척이 없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집사라는 것은 그곳에 있는 것조차 주인한테 들키지 않는 것이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가?”
나 스스로도 상냥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누군가가 상냥하다고 말해 준 적도 없다.
“주인님 주변에 여성 분들이 모이는 이유도 알겠습니다.”
“여자한테 상냥한 건 흑심이 있어서 그런 건데.”
“그런 마음만 가지고선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시선 끝에선 논나와 카라가 투닥대고 있고 멜도 웃고 있다.
“사모님과 측실 분들이 서로 딱딱하게 굴지 않고 저렇게 편하게 마음을 터놓는 모습. 분명 주인님의 그릇이 큰 덕분일 테지요.”
칭찬받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는 술을 잔에 따른 다음 세바스찬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도 좀 오래됐거든. 들고 가 줘.”
“알겠습니다. 받아가지요.”
세바스찬 때문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됐으니 이리지나의 엉덩이를 쓰다듬도록 하자.
하지만 술에 푹 빠져서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엄청난 여자군.
참고로 크리스토프는 이미 완전히 술에 쩔어서 구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고르가 정원 밖으로 내던진 상태다.
“저 녀석은 아직까지도 멍청이군요.”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식이니까 뭐 아무렴, 어때.”
아고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부인이 세 분이라니……그것도 다들 미녀, 특히 사모님의 미모는 빛나는 듯합니다.”
아고르가 이런 식으로 아부를 해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너도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는 못 될 텐데.
“너도 여자 두 명을 데리고서 즐기는 입장 아닌가?”
아고르가 술을 뿜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메이드가 따라왔다면서?”
“사실은 그 후로 좀 소동이 있었던지라.”
아고르는 옷을 들춰 옆구리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소형 나이프가 입힌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흉터가 있었다.
“찔렸냐?”
“네, 미망인 쪽이 푹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제법 많은 여자들이 칼로 찌른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지?”
“둘 다 집에는 있지만 사이는 좋지 않습니다. 혼약 이야기 같은 걸 입 밖으로 냈다간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죠.”
“상식적으로는 그렇겠지.”
나도 논나랑 결혼한다고 얘기를 꺼냈을 땐 좀 다퉜다.
“하드릿 님은 어떻게 여자들을 납득시켰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설명할 수 있을만한 그런 느낌은 아닌데.
기세라고나 할까……으음, 어렵군.
“아무튼 침대 위로 끌고 가면 어떻게든 돼. 두 사람을 한 번에 상대해 보라고.”
아고르도 실제로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는 중이니 그런 경험도 있기는 할 테지.
“그게 부끄럽게도, 저는 여자들을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 있을만한 남자가 아닌 모양인지라……특히 메이드 쪽은 제가 옷을 벗으면 항상 뭔가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군요. 마치 옛 남자와 무언가를 비교하는 듯한…….”
아고르는 술 때문인지 평소엔 이야기하지 않는 야한 주제의 대화에도 술술 털어놓았다.
미안, 메이드의 옛 남자는 아마 나일 거다.
격렬한 행위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매번 금방 실신했던 그 처녀일 것이다.
커다래, 커다래, 하고 소리치면서 남근을 쓰다듬고 기뻐하던 그 메이드 입장에서 아고르의 물건은 만점 수준까진 아니었던 모양이다.
힘으로 한 번 밀어붙여봐! 난폭한 것도 사랑이야!
이렇게 조언하고서 아고르를 뒤로 했다.
진실은 때로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레오폴트는 첫 건배사 이후로는 니나를 데리고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중이다.
본인들은 그걸로 만족 중인 듯한데, 특히 소녀 쪽은 행복한 표정으로 술을 따르는 중이다.
심지어 니나가 취한 척까지 하며 레오폴트한테 몸을 기대었는데, 놈은 니나를 떨쳐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해선 안 되지.
자, 진짜 문제는 여기다.
안드레이와 나탈리 부부.
나탈리는 돌보미한테 아기를 맡기고 왔다는 모양이다.
그만큼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주고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나란히 앉아 있기는 해도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둘 사이엔 사람 한 명은 들어갈 수 있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사실 오늘은 안드레이가 임신시킨 소녀도 초대했었는데 조만간 출산 시기다 보니 외출은 힘들다며 나오지 않았다.
“모처럼 초대해 주셨는데 거절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워낙 「몸집이 작은」사람이다 보니 출산도 힘들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안정시키고 있거든요.”
나탈리는 일부러 안드레이한테 들리도록 내게 설명했다.
“그 작은 몸에 욕정하고 임신까지 시킬 남자가 이 세상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여보.”
지금 그녀는 마치 냉혹한 마녀와도 같은 느낌이다.
“모든 건 이미 끝난 일이야.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면서 살아가야지. 그게 인생 아닌가?”
이제 하드 보일드는 됐다고.
네 평가는 아동 성취향 변태 하나로 낙인 찍혔고, 더 이상 바뀔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입은 은혜도 있다.
조금 도와주기는 해야지.
“안드레이도 취미가 독특할 뿐이지 나쁜 남자는 아니잖아. 너무 못되게 굴진 말라고.”
“……11살의 소녀와 몸을 섞고 임신시키는 게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게 들으니 답하기 힘들긴 하지만, 사실 나탈리도 어린애로밖에 안 보인다.
30대 후반의 남성이 구혼해 온 시점에서 눈치챌만도 했는데 말이지.
“옛날 일에 집착하기보단 미래를 따져야지. 너랑 그 아이 둘 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 문제없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앞으로 안드레이는 그 아이랑 아내 두 사람만을 소중히 여길 거야. 내 말 맞지? 마스터.”
어떻게든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군.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대체 왜 이 상황을 망치는 거냐고! 이런 자리에선 거짓말이래도 평생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하면 될 것을.
“사실은 도로테아 고아원에 있는 올레리아와 관계를 맺고 말았거든. 세 사람 모두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탈리의 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지 기억 난다. 분명 안드레이를 잘 따르던, 나이 치고는 어리게 보이던 마치 어린아이 같은 느낌의 여자였지.
“그녀는 나를 아버지처럼 따라 주었어. 하지만 나는 그녀를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사랑하고 말았지. 내가 그녀한테 내 마음을 전하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몸을 허락해 줘서…….”
이미 모든 건 늦어버렸다.
약속은 배신당했고, 평화는 박살났다. 폭풍우와 함께 암흑의 시대가 찾아오리라.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탈리는 몸 상태가 나쁘다는 이유로 안드레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했다.
“돌아가기 전에 호두까기 도구를 좀 빌려갈 수 있을까요?”
나탈리가 미티한테 그런 질문을 던지길래 내가 두 사람의 등을 떠밀듯이 현관 밖으로 내보냈다.
남자의 호두를 까버릴 거라면 그냥 아예 죽여버리는 게 낫지.
두 사람을 배웅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현관 옆에 낯익은 새빨간 손수건이 보였다.
“왔잖아. 그럼 왜 내 초대를 거절한 거지?”
고개를 내민 건 카트린느였다.
초대해도 무시했었으면서.
“그냥……마음이 내켜서.”
그녀가「마음이 내켰다」정도의 이유로 아이를 두고 나올 리가 없다.
“축하해 주는 건가?”
“그래, 축하해. 논나 씨가 정실이라니 모유를 좋아하는 당신답네.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부인을 빼앗기지 않길 빌게.”
카트린느가 비꼬듯이 꺼낸 말은 무시한다.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나 없인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조만간 마음까지 내게 함락될 것이다.
“들어와, 아직 요리랑 술 둘 다 남아있으니까.”
“필요없어. 논나 씨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줘.”
“그래, 세 명한테 전해 둘게.”
“세 명……성욕 덩어리한테 붙잡힌 불쌍한 사람들.”
카르린느는 까치발로 서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30초 정도 이어진 키스, 그녀는 내게서 몸을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말만 하면 돌봐줄 텐데 말이지.”
나는 카트린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고, 배가 조금 부풀어 올랐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내게 직접 말하기 전까진 눈치채지 못한다.
여자가 숨길 생각인 사실은 눈치 채지 못한 척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슬슬 잔치도 끝물, 다들 이미 과일이나 요구르트 같은 것들에 손을 뻗는 중이다.
아직까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있는 건 이리지나와 맥 정도뿐이다.
에이리히가 꺼낸 「이제 슬슬」 하는 말에 손님들이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다.
이 다음엔 브루노가 도시에 있는 창관에서 쏜다고 한다.
에이리히는 얼굴이 다 알려진 유명인이다보니 그런 데서 놀기엔 힘들다고 하지만, 그 녀석의 영웅담에 푹 빠진 여자들 숫자가 제법 된다.
말을 걸면 따라와 줄 여자 정도는 있을 것이다.
“맥, 너는 몸도 크니까 힘조절 잘해라. 다치게 만들지 말고, 알았냐?”
“…….”
맥은 아무 말없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완전히 더러워진 거실은 하인들이 몽땅 몰려와 청소를 시작했다.
집안 사람들도 다들 잠에 들 예정이다.
이제 남은 건 나와 논나, 카라, 그리고 멜.
여자들이 드레스를 고쳐 입고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가볼까.”
“네.” “응.” “기꺼이.”
당연히 가는 곳은 내 침실이다.
결혼 당일, 즐거운 첫날밤의 시작이다.
◇◇◇◇◇◇◇◇◇◇◇◇◇◇◇◇◇◇◇◇◇◇◇◇
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0살(세는 나이) 겨울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자작 동방 독립군 사령관
아크랜드 남동부 영주
재산: 금화 90닢 (은화 이하 생략)
무기: 듀얼 크레이터(대검) 특주 거대창
장비: 검은 망토(저주받음) 가죽제 간이 갑옷
가족: 논나(아내) 카라(측실) 멜(측실) 스우(딸)
멜리사 마리아 리타 루우 쿠우 카트린느(애인)
하인: 세바스찬(집사)_ 미티 알마 크롤 니나
부하: 세리아(부관 겸 수양딸) 이리지나(사군 지휘관) 레오폴트(군 지휘관) 슈바르츠(말) 아돌프(내정관)
경험 인수: 40명
자식: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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