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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323화『운명의 만남』

323화『운명의 만남』

 


셀레스티나, 벌꿀 과자 먹어라.”

감사히 받겠노라.”

 

셀레스티나, 머리 쓰다듬어도 되니?”

오라버님의 손은 크구나―.”

 

나는 식사 자리에서 계속해서 셀레스티나를 신경 써주었다.

진귀한 재료를 쓴 요리도 갖다 주고, 과자를 나눠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기쁜 듯이 미소를 짓긴 했지만……솔직한 소녀 여왕은 끝내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라버님, 부탁이 있다……나를 잠깐만이라도 비아드에――.”

그건 안 돼. 알고 있잖아?”

 

몰트 놈들은 만에 하나라도 셀레스티나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이쪽에 보낸 것이다.

이쪽에서 그녀를 돌려보내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괜찮아, 언젠가 전부 좋아질 거니까. 아돌프가 생각해 내고 있을 거야. 그때까진 내 곁에서 지내도록 해.”

 

영지 내부에서 역병 수습이 끝난만큼 아돌프 쪽 일행은 몰트 역병 쪽에도 시선을 돌리는 중이다.

키사트와 라펜을 왕복하면서 여러모로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은 분명 약 말고 다른 물류 관련 문제를 정비하기 위해 라펜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

 

그때 생각지 못한 원군이 나타났다.

 

안녕…….”

 

휘청휘청 흔들리면서 걸어온 인물은 바로 나티아였다.

분명 자고 있었을 텐데 왜 이리 피곤해 보이지?

 

열심히 일해서 여분으로 150명 만들었거든. 이걸 몰트로 보내면 문제 없는 거 아니야?”

 

눈그늘이 짙은 눈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하려는 나티아.

나는 무심코 나티아한테 달려가 입술……은 거부당한 탓에 이마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 감사 다음엔 설교 시간이다. 무리는 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고마워, 나티아. 하지만――.”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무리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라고. ……애초에 나는 너보다 3배는 더 오랫동안 살았단 말이다! 잘난 척 설교하지 마!”

 

나티아는 키스당한 게 쑥스러워서 그런지 나를 투닥투닥 때렸다.

하하하, 아프잖아. 그리고 엄청난 위치에 키스 자국이 생겨버렸군.

말하지 않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다.

 

그런 거다. 셀레스티나, 이번엔 150명 더 많게 약을 보낼 수 있겠어.”

우와앙―! 고맙구나―!”

 

셀레스티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티아를 끌어안았다.

곧바로 나티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의 매력은 엘프에게도 통하는 모양이다.

그녀가 앞으로 매일 이런 식으로 무리하진 않을지 걱정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어째서인지 논나가 옆에 서 있었다.

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매너 위반 아니었나?

 

아내 앞에서 손님한테 키스를 하다니……이거나 먹으세요!”

 

딱콩, 하고 머리에 박치기를 맞고 말았다. 물론 아프진 않았고 오히려 팔에 거유가 느껴져서 기분이 좋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세리아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어쩔 수 없이 이마에 키스 자국을 남겨 주었다.

 

정말로 질투심 많은 여자는 어쩔 수가 없다니까.”

 

카라가 말하자 멜이 웃었다.

마리아와 멜리사도 미소를 지었고 미티와 그레텔도 온화하게 바라보았다.

이리지나는 호탕하게 웃는 거 그만두는 게 낫겠어. 케이시한테 이것저것 다 튀는 중이라.

 

, 확실히 그렇죠.”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던 마이라가 헛기침을 하며 고쳐 앉았다.

세리아가 히죽 시선을 돌리자 불쾌하다는 듯이 삶은 계란을 입에 던져 넣었다.

 

나는 논나의 박치기를 피하고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멋진 기분이다.

 

나랑 같이 사는 여자들이 행복하다는 건 남자로서 훌륭한 일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들이랑 다같이 난교를 하는 것도 좋겠군.

멜리사는 임신 중이지만 가끔씩은 몸을 쓰다듬으면서 사랑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저기, 에이길이 난교라느니 뭐니 중얼거리고 있는데?”

정말이지……에이길 님의 여색은 병적이에요.”

 

후후후, 그래도 야한 게 없으면 에이길 씨가 아니잖아요. 아아, 배가 근질거려.”

엄마, 이제 나이도 많으니까 더 이상 아이를 만들면 위험――관자놀이에 주먹 돌리기는 안 돼애―!”

 

목걸이랑 꼬리를 준비해야겠네요.”

그레텔 짱도 변태란 말이지.”

나도 엉덩이 준비 해야겠다…….”

 

와하하하! 겨드랑이 털을 깎아야겠구나!”

퉷퉤! 나물 먹는 중에 겨드랑이 털 같은 얘기하지 마!”

꺄악― 얼굴에 엄청 튀었어―, , 저주해 주마―!’

 

엄마, 우리도 같이 해도 될까?”

그럼, 분명 괜찮아. 하드릿 님은 어머어마하게 절륜한 분이니까. 20명 정도는 태연하게 상대해 주실 거야.”

 

허흡! 허흐흡! 허흡!”

사모님, 가끔씩은 얘기에 참여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리고 너무 많이 드십니다. 또 살이 쪄서……의자가 부서질 것 같네요.”

 

온화한 분위기로 가득 찬 식당.

 

이대로 온화한 시간을 만끽할 생각이었는데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하다.

 

포르포 왕국에서 사자가 방문하셨습니다!”

 

난교는 밤까지 미뤄둬야 할 상황이다.

 

 

영주인 에이길 하드릿이다.”

 

정장 차림으로 갈아입은 나는 사자에게 착석을 권유했다.

 

옆에는 세리아와 마이라, 그리고 크리스토프에게 정장을 입혀 세워두고 있었다.

 

상대가 한 나라의 사자인 이상, 호위역과 시종이 여자만 있는 것보단 체격이 훤칠한 남자도 같이 있는 게 더 보기가 좋다고 논나가 말했기 때문이다.

 

기드를 내세워도 됐을 테지만 그 녀석은 체격이 살짝 부실하다.

결코 작은 건 아니지만 훤칠하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그리고 맥의 경우엔 사자가 오크 같은 마물과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놈도 그걸 신경 써서 특주로 제작한, 유행하는 복장을 입는 경우도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잘 꾸민 오크로밖에 안 보인다.

훤칠하게 보이는 것과 상대방을 위협하는 건 다르기 때문에 맥도 부적합했다.

 

그래서 선택받은 인물이 크리스토프다.

체격도 크고 정장을 입히면 딱 보기에도 강한 기사처럼 보인다.

 

호위 임무를 맡기긴 힘들지만 저희도 있으니 방패로 고려해 두시지요.”

너무해!”

 

라고 세리아도 말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방문임에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미소가 지어지는 게 느껴졌다.

사자의 대표처럼 보이는 인물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얼굴은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미녀라는 단어보다는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싱긋 미소 짓는 모습도 귀여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자만 아니라면 밤에 침대로 끌고 갈 수 없을지 유혹해 봤을 텐데.

 

매끄러운 기다란 흑발이 목을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려 좋은 냄새가 난다.

 

몸은 결코 풍만한 편이 아니지만 부푼 게 느껴지는 수준의 가슴과 쭉 뻗어나온 다리가 충분히 성욕을 자극한다.

 

아프군. 마이라가 상대방한테 안 보이게끔 등을 꼬집었다. 너무 몸을 빤히 보고 있던 모양이다.

 

사자들에게 차를 권했지만 대표인 여성 외엔 모든 이들이 굳어 있었다.

이 여자 말고는 뭔가 다들 크게 긴장 중이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만, 포르포 왕국이 제게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아니면 우리나라와 무언가 접촉하시길 원하십니까?”

 

나와 포르포는 아예 관계가 없는 수준이기에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 고르도니아 왕국에 대한 중개처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뇨, 이번엔 고르도니아 왕국이 아니라 하드릿 경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답니다――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한 번 말을 끊고서 내 눈을 바라봤다.

물론 여자가 날 본다 해서 기분이 나빠질 이유는 없기에 나 또한 바라봤다.

 

실은 저는 사자가 아닙니다. 속이게 된 점, 사죄 드리겠어요.”

 

그 말과 동시에 세리아와 마이라가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에 맞서듯이 상대방의 호위역도 튀어나왔다.

 

자객이라는 분위기도 아니니까 진정 좀 해.

그리고 크리스토프를 방패처럼 내세우는 건 안 하는 게 나을걸.

 

그만둬.”

그만두세요.”

 

서로 호위역을 뒤로 물린 찰나,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얘기했다.

 

제 이름은 빌헬미나. 미력하나마 포르포 왕국에서 여왕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 “!?” “우와아아아앗!”

 

세리아와 마이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로 물러났다. 나도 제법 놀랐다.

 

사자라고 속인 건 쓸데없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쨌거나 1 1초가 중요한 용건이다 보니.”

 

빌헬미나는 한 번 더 꾸벅 하고 고개를 숙였다.

 

왕이라는 사실을 밝힌 뒤에도 오만하게 행동하긴 커녕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한층 더 호감을 가지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실 거라 봅니다만.”

 

전혀 모르는겠는데. 세리아를 바라보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모르는 건 나 하나뿐인가?

레오폴트 자식, 그런 걸 전달하는 것도 네 역할이잖아.

 

그녀는 아무리 봐도 20, 혹은 그 이하로 보인다. 그런 인물이 여왕이라니……뭐, 셀레스티나는 좀 더 어리지만.

아무튼 상대방이 왕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응이 필요해진다.

 

여왕 폐하라는 말을 들은 이상 이런 대우로는 부족하겠군요. 잠시 기다려 주시면――.”

 

빌헬미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사자라고 속인 다음 방문한 거거든요. 웬만하면 바로 얘기로 들어갔으면 하네요. 용건은 그래요――가증스러운 병, 염두병에 관해서입니다. 우리나라는 운 좋게도 악마의 역병은 면했습니다만 이웃나라 알테일에서 유행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그것도 시간 문제. 하드릿 경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죠…….”

 

빌헬미나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왕의 위엄보다는 귀여움이 눈에 띄고 오만방자한 태도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본 순간, 미약한 전율이 느껴진 듯했다.

 

“? 왜 그러시나요?”

 

한 번 눈을 깜빡이며 다시 바라보자 빌헬미나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잘못 느낀 거겠지. 설마 이런 귀여운 여자를 보고 전율을 느낄 리가 없다.

 

나는 대기 중이던 메이드에게 레오폴트와 아돌프를 불러오도록 말했다.

 

그녀가 형식보다는 실무적인 이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게 명백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빌헬미나의 이름을 듣고서 놀란 듯 보이긴 했으나 고작 몇 초도 안 돼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역시 이 녀석들은 이 정도로 놀라지 않는군.

 

어디 사는 영주님께서 매번 예상 밖의 일을 저질러 주시니까 말이지. 익숙해진 거야.”

 

시끄러워 트리스탄. 넌 부른 적 없어.

 

그리고 레오폴트한테 포르포의 정변을 알려주지 않았던데, 하고 책망하자 내게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포르포 정변에 관한 보고서로 내가 이미 보았다는 서명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빤히 들여다 봐도 거꾸로 봐도 내 글자다.

 

끄응…….”

 

내가 신음하는 사이에 이야기가 진행됐다.

 

빌헬미나가 귀족이 아닌 레오폴트와 아돌프를 상대해 줄지 걱정이었는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오히려 실무를 맡고 있는 게 이 녀석들이란 걸 눈치 챘는지 내 쪽은 봐주지도 않았다.

 

염두병 대책에 관한 말입니다만, 우리와 여왕 폐하의 나라와는 거리도 꽤 떨어져 있고 사이에 알테일 신국도 있습니다. 협력은 현실적이지 않은 듯 보입니다만?”

폐하와 우리는 군사적인 문제도 없고 정전 협정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두 사람은 에둘러 뭘 하러 여기로 온 거냐고 빌헬미나한테 물었다.

 

어쩌면 레오폴트가 내 사인을 가짜로 작성한 걸지도 몰라. 이 무슨 괘씸한 놈인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 옆에 찍힌 내 도장을 설명할 수가 없다. 으음, 놈이 무슨 수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군.

 

예로부터 병자가 무슨 짓을 해서든 바라는 것……그것은 약이 아닐까요?”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 왜 그래?”

 

오늘 날씨도 더운데 잘들 얼어붙는군.

왜 다들 나를 노려보는 거지?

 

빌헬미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드릿 경께서 염두병 특효약을 갖고 계신다고 들었답니다. 아무쪼록 몇 개――.”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을 끝마치기 전에 나는 단언했다.

 

……물론,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그에 걸맞는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약은 우리 영지만 해도 전혀 부족한 상황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귀국에 제공할 여유는 없습니다.”

 

그녀는 미녀이기도 하고 왕이라는 자리에 있음에도 쓸데없이 거만하게 굴지 않아서 호감상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약을 나눠줄 수는 없다.

포르포에 나눠줄 몫이 있으면 몰트에 훨씬 더 많이 제공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돌프와 레오폴트도 그러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세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설마 내가 여자한테 혹해서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던 건가?

나는 그렇게 어설픈 사람이 아니라고. 오히려 최근엔 내가 이성적이라는 단어로 구성된 사람이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 빌헬미나가 어떻게 나올까 싶어 시선을 돌려보니 그녀는 화를 내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이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겠지요……염두병 약 하나는 목숨 한 개와 동등한 값어치. 돈으로 사들일 수 없다는 건 이해하겠어요.”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니 마음이 아프다.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답할 뻔했다.

 

하지만 빌헬미나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진 않았다.

귀엽게 기합을 다잡은 다음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약을 제공하는 건 하드릿 경을 위한 일이기도 하답니다.”

 

흐음, 무슨 논지인 거지?

 

남부의 2대 대국 알테일과 반드레아는 지난번의 재해 타격으로 인해 제대로 된 역병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죠.”

 

레오폴트를 바라보자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다는 뜻이다.

 

현 상황에선 두 나라에서 유행이 종식될 조짐이 보이지 않아요. 만약 이대로 역병이 퍼져서 국가의 근간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난민으로 변한 민중이 대거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을까요? 물론 역병을 갖고 있는 자들도 포함해서 말이죠.”

 

아돌프를 바라봤다.

 

확실히 국가가 붕괴하면 대량의 난민이 발생할 겁니다. 하지만 북으로 올라가는 사람을 대부분이 리버티스나 도시 국가 쪽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하지만 빌헬미나는 아돌프의 반론을 곧바로 부정했다.

 

글쎄요, 리버티스가 난민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국경을 삼엄하게 정찰하며 발견하는대로 섬멸하고 있답니다. 각 도시 국가군도 마찬가지 대응, 애초에 다른 나라의 민중을 도시벽 안으로 들이지 않습니다.”

 

레오폴트를 바라보니 스윽 눈을 감았다.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역시 우리보단 같은 남쪽 지역에 있는 포르포 쪽이 그런 정보에 관해선 더 빠른 모양이다.

 

하드릿 경의 영지는 넓지요……본격적으로 난민이 밀려오면 완벽히 통제하긴 불가능하진 않나요? 게다가 키사트 부근에 베셀링크라는 치료소까지 세워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병에 걸린 난민이 희망을 찾아 끊임없이 몰려오리란 건 상상하기 힘들지 않네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내 영지인 남부 국경과 몰트 부근까지 합치면 리버티스, 알테일의 국경선과 별 차이 없다.

그리고 그들과 다르게 나는 홀로 몇 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준비해서 국경을 지킬 수 없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아주 큰일이겠군요. 하지만 그것이 귀국에게 약을 제공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레오폴트가 말하는대로다. 비참한 상상과 약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약을 받으면 우리나라를 역병에서 지킬 수 있죠. 아무리 대책을 짠다 한들 책임자가 역병에 당해 쓰러지면 단숨에 무너지지만 약이 있으면 그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어째서 포르포를 지키기 위해 약을 제공해야 한단 건가?

 

그렇군요……분산이라는 겁니까.”

 

아돌프가 납득하길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툭툭 발로 차주었다.

나한테도 이해가 가도록 말해.

 

포르포 왕국이 만전 상태로 남는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죠. 최소한 난민이 향하게 될 위치가 분산될 거고 남부 지역 입장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드릿 경보단 예부터 있던 포르포 왕국을 향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랬다간 다른 문제가 남는다.

 

그러면 말이 안 되잖아. 약을 입수해도 몇만명이나 되는 병자가 쳐들어 오면 의미가 없어. 오히려 재해를 불러들이겠다는 말이랑 동급이지. 이렇게 힘들게 약을 얻으러 올만한 이유가 되진 않아.”

 

트리스탄이 나보다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러자 빌헬미나는 가슴팍 앞에서 손을 맞잡더니 눈을 감고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괴로워하는 민중을 구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그 어떤 나라와도 전쟁을 벌이지 않았기에, 남부 민중들은 전부 형제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에요. 악몽과도 같은 역병에서 조금이라도……아주 조금이라도 지켜주고 싶습니다. 약이 있으면 치료소도 세울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목숨을 구해낼 수 있겠죠.”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이 얼마나 민중을 가여삐 여기는 여왕이란 말인가. 자국민뿐 아니라 타국 민중까지 생각해 주다니.

 

…….”

 

레오폴트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마치 사기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간 이 녀석은 정말로 모든 걸 비꼬듯 본다니까.

 

나도 남자가 똑같은 짓을 했으면 수상쩍게 여기고 바로 내쫓았을 테지만 미녀니까 믿을 거다.

 

빌헬미나는 레오폴트가 의심하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나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저는 민중을 구할 수 있게 되고 하드릿 경은 난민을 분산할 수 있겠죠.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거래 아닌가요?”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크게 보면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 내키지가 않는다.

아돌프도 같은 생각인지 레오폴트만큼은 아니지만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빌헬미나는 그런 우리의 얼굴을 쳐다본 다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돈만 가지고 안 된다면 이 조건이라면 어떠신가요?”

 

그녀는 사자――사실은 시종일 테지만――한테서 서면을 받았다.

 

그 중 한 장을 우선 아돌프 앞에 놔두었다.

 

하드릿 경은 무역로 개척에도 열심이라 들었습니다.”

 

그녀가 내민 서류를 보고 아돌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리나라가 국가 도시 중 하나와 계약해서 대여 중인 항구와 우리나라 항구 측의 최귀빈국 대우――우리나라의 배와 똑같은 대우로 입항을 허락하겠습니다. 또한 제국의 상인을 소개해서 무역로 개척 쪽도 중개해 드리죠. 제국은 전쟁 때문에 국력이 많이 소모된 상황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산업이 파괴된 탓에 필수품 수입량은 늘어나고 있어요.”

 

뒤이어 빌헬미나는 레오폴트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레오폴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내 경험으로 보아 살짝 놀란 듯했다.

 

아무래도 알테일과 도시 국가군, 리버티스에 관해선 제가 더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 정보를 어느 정도, 하드릿 경에게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진위 확인은 하실 테지만, 밑바탕이 되는 정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크지 않나요?”

 

아돌프와 레오폴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레오폴트가 군무, 아돌프가 내정이라 판단하고 정확하게 얘기를 걸었다.

나는 설명해 준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하드릿 경.”

 

다음은 나인 모양이다. 귓가에 입이 다가오자 그녀한테서 좋은 냄새가 난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무튼 귓가에 숨결이 느껴진다. 이런, 서버리겠어.

 

하드릿 경은 수많은 무용담을 지닌 영웅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제 임의로 얘기를 듣고 싶다는 사람을 몇 사람 데리고 왔습니다.”

설마 여성입니까?”

다들 젊은 처자지요.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얘기를 나눠 보시죠……다같이 한꺼번에……잔뜩.”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색기 넘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자 나는 의자 위에서 슬쩍 고쳐 앉았다.

성기가 완전히 서버린 탓에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이지 않으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약정이 맺어지면……150개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들어올 자금과 정보를 유효하게 사용하면 약간의 약보다도 효과적으로 역병을 통제할 수 있을 겁니다.”

 

레오폴트와 아돌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만큼 좋은 조건을 내주는 의도 자체는 알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선 지리적으로도 국력적으로도 포르포는 우리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아닙니다.”

저 여자가 정말로 민중을 구하고 싶은지는 의문입니다만……우리가 손해를 볼만한 요소는 없겠네요.”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젊은 아가씨들은 상관이 없다. 결코.

 

으음…….”

 

트리스탄은 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빌헬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헬미나는 시선을 눈치 채고서 싱긋 미소 지었다.

 

,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려나.”

 

그 말만 남기고 트리스탄은 형식적인 인사를 한 다음 시선을 피했다.

 

그럼 이번 회담은 비밀이라는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이제 막 여왕의 자리를 오른 참이라 너무 시끄럽게 움직이면 국내 반응이 걱정되거든요.”

, 알겠습니다.”

 

내 쪽도 약을 외국에 팔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반감을 느끼는 민중도 있을 테니 비밀로 해두고 싶은 상황이다.

 

이렇게 무역로 확보 및 남부 간첩 정보 제공을 조건으로 약을 판매하기로 결정되었다.

몰트를 제쳐두고 약을 팔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악감은 있었지만…….

 

이미 환자가 많이 발생 중인 몰트에게 100, 200 정도 되는 약을 갖다 준다 한들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 이번에 얻은 자금을 통해 대책을 짜는 게 틀림없이 더 많은 사망자를 줄일 수 있습니다.”

 

라고 아돌프가 말하길래 납득하기로 했다.

 

포르포는 남부에 위치한 별볼일 없는 소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정보 수집 능력은 확실한 듯 보입니다.”

 

레오폴트도 이 거래에 만족한 듯했다.

 

단 한 사람, 트리스탄만큼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에 관한 얘기는 나도 두 사람이랑 같은 의견이야. 그 여자의 의도가 어찌 됐건 이 거래는 우리한테도 유리한 편이지.”

 

그렇게 말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근데 있지, 빌헬미나 여왕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거짓말을 한다든지 신용할 수 없다든지 그런 문제가 아니야. 눈을 보니까 솔직히 떨리더라……눈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라는 표현을 책에서 종종 보곤 하는데 그게 그런 건가? 아무튼 그 사람은 적으로 안 돌리는 게 좋아. 물론 포르포랑 교역이 아닌 일로 엮일 일도 없긴 하겠지만.”

 

나도 이상한 기척을 느낀 듯한 기분도 들지만 분명 착각일 것이다.

그녀는 이상을 좇는 소국의 어린 여왕.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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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그만큼 좋은 조건을 내걸으셨는데 대체 무어냐, 그 태도는!”

심지어 작위도 없는 놈들을 면전에 내세우다니 우리나라가 소국이라며 무시하고 있는 것이오!”

 

부하들이 불평을 토해내는 와중 빌헬미나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다들 그녀가 입도 떼지 못할만큼 화를 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 중이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그러한 불평등 조약은 파기하시지요!”

 

빌헬미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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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에이길 하드릿   24살 여름

지위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용살의 영웅

엘프의 중개자 백도의 성왕

 

재산금화 54990 역병 대책+몰트(3000) 약 대금 첫 번째 50명 분량(2000)

경험 인수: 552명 자식: 66+555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