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남쪽의 이변』
포르포 왕국 왕도 포론 궁정 한 방
“잘 왔다, 벨헬미나. 너랑 둘이서만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어요. 헬브란트 오라버님.”
빌헬미나는 검은 상복 치맛자락을 들춰올리며 경례를 했다.
헬브란트――전 포르포 왕국 장남이자 제1 왕위 계승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중이라 환대하긴 힘들지만 차 정도는 마시고 가거라.”
“감사합니다. 저도 조금이긴 하지만 다과자를 갖고 왔답니다.”
같은 왕족임에도 황태자로서 무척이나 바빴던 헬브란트와 막내딸로서 일부 의식에 출석하는 게 전부였던 빌헬미나의 관계는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나이 차이가 크다.
선왕은 만년에 접어들 때까지 아이를 가지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흔이 넘던 왕의 장남인 헬브란트는 이미 50살을 넘어 노년기에 접어들어가는 중이었다.
한편 빌헬미나는 올해로 스무 살, 거의 아버지와 딸뻘 수준이었다.
“아버지의 사후 네가 방 안에 틀어박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했다. 너는 아버지에게 예쁨을 받던 녀석이니까 말이야.”
“네……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왕족 된 몸으로서 국가를 미래로 이끌어가야 하니까요.”
빌헬미나는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 상황에 어리석은 동생 놈들이……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무언가 여기저기서 꾸미고 있는 것 같더구나.”
헬브란트는 혀를 차더니 차기 왕이 입에 담기엔 부적절한 말을 내뱉었다.
“오해일 가능성은 없나요? 그럴 일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빌헬미나가 깜짝 놀란 것처럼 말하자 헬브란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순진한 너라면 모를 수도 있겠구나. 나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하다만…….”
헬브란트는 과자를 하나 입에 던져넣은 다음 나이 차이가 상당한 여동생 옆에 걸터앉고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빌헬미나, 나랑 같이 포르포를 부흥시켜 보는 건 어떻겠느냐? 네 사정은 소문을 통해 듣긴 했지만 이제 아버지도 계시지 않으니. 왕족끼리 우리가 힘을 합치면 동생들을 견제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얼굴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들이댔다.
헬브란트의 시선은 빌헬미나의 목덜미와 부푼 가슴께 쪽으로 쏠려 있었다.
“오라버님…….”
빌헬미나의 나이는 20살, 선왕이 70을 넘긴 뒤에 아이인지가 부자연스럽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젊은 측실이었는데 그 어머니가 출산 직후 곧바로 병사했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궁정 안에선 그녀가 상간남의 씨를 통해 갖게 된 아이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실제로 빌헬미나의 용모는 선왕과도, 다른 형제 중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선왕도 막내딸을 애완 동물처럼 예뻐하긴 했지만 그녀의 재능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특별히 의미가 있는 일을 주는 경우도 없었다.
“내 것이 되거라. 그러면 짙은 왕족의 피를 나눠줄 테니.”
헬브란트는 빌헬미나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문질렀다.
그 눈에는 명백한 색욕이 깃들어 있었다.
“전하……헬브란트 전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헬브란트는 황급히 빌헬미나한테서 몸을 떼어놓았다.
큰 소리를 내어선 안 되는 상중이기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초조감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빌헬미나의 반대편에 다시 자리를 잡은 헬브란트가 입실을 허가했다.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빌헬미나를 보고 살짝 놀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헬브란트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댔다.
“뭐라고? 요엘이 암살당했다고!?”
헬브란트는 상중 금기도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
요엘이라는 건 제2 왕자를 말한다.
“예……영주들이 모여있던 여관에서 돌아오는 도중 크로스 보우로…….”
“멍청한 놈, 뭘 어슬렁대다가……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헬브란트는 빌헬미나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입에 손을 맞댄 채 깜짝 놀란 듯,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놈이 죽어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건 계승권 3위인 마우릴인가? 아니, 그놈은 요엘이랑 사이가 좋았어. 손을 잡는다면 모를까 암살은 말이 안 돼! 사이가 험악했던 건 계승권 4위인 발팡――하지만 그런 겁쟁이가 암살이라니…….”
“오라버님――.”
“너는 조용히 하고 있거라. 일단 발팡을 이곳에 불러서 심문을 할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하인들 주변을 샅샅이 뒤져야겠어. 요엘을 죽일 거라면 이 나도 노릴 게 분명하니.”
하지만 그 명령이 실행되기 전에 다음 남자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전하, 큰일입니다.”
“발팡이 죽었다고!? 식사 중에 졸도라니……독살인가!?”
넋이 나간 헬브란트에게 다음 보고가 날아왔다.
“차, 창문을 봐주십시오! 마우릴 전하의 저택에서 불이 나고 있습니다! 전하의 안부는 불명입니다!”
황급히 창문을 열어보니 맑은 여름 하늘 아래 뭉게뭉게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저택은 이미 새빨간 화염 속에 휩쓸려 있었다.
이미 상중 금기도 머릿속에서 사라진 듯, 모든 이들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마우릴 전하의 저택에 제5 왕자 다피트 전하도 계셨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헬브란트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후계 쟁탈전을 벌일 각오였던 네 형제가 하루 아침에 전부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빌헬미나는 어느새 입가를 가리는 걸 멈추고 감정이 없는 눈길로 불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군대를 소집해라! 이제 상을 치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부하들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궁정 안에 계셔야 할 와라굿 근위단장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데다가 린누즈 장군님도…….”
“그럼 부단장도 상관없다! 머리를 쓸 줄 모르는 거냐!!”
끝내 헬브란트가 호통을 치자 모든 이들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문을 닫은 헬브란트는 이중 자물쇠를 단단히 잠궜다.
두꺼운 문과 튼튼한 자물쇠는 침입자가 들어온다 한들 간단히 뚫고 올 순 없는 장치였다.
방 안에는 다시 둘만이 남겨졌다.
“이게 대체 무슨……누가 이런 짓을……대신인가? 아니면 대영주인 그 녀석……아니, 자기가 왕도에 와 있는 지금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수 있나? 하지만 동시에 네 사람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병든 곰처럼 휘적휘적 방 안을 걸어다니는 50세 남자. 그때 빌헬미나가 뜬금없이 얘기했다.
“전부 다 동시에 죽이지 않으면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헬브란트는 깜짝 놀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바라봤다.
“헬브란트 오라버님은 정말로 멍청하고 둔하시군요.”
그녀는――미소 짓고 있었다.
“빌헬미나?”
태연하게 다리를 꼰 그녀는 찻잔을 기울이면서 말을 이었다.
“후후, 그러니까 다른 오라버님들께서 왕위 찬탈을 노릴 리가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미 전부 다 죽었으니까.”
그 말투에선 즐거움마저 느껴졌다.
“설마 네가!? 아니, 말도 안 돼. 이 따위 꼬맹이한테 왕족이 넷이나!”
빌헬미나는 이미 다 마신 찻잔을 조용히 탁자 위에 돌려두었다.
“그 외에도 또 있었던가? 근위단장은 늪지대 안에, 린누즈 장군은 교외 밭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시선을 치켜든 순간, 헬브란트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꼬맹이의 눈을 보고서 50살 남자의 허리 힘이 풀리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작은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온 빌헬미나는 50살 남자 앞에서 몸을 굽혔다.
“오라버님들께선 다들 평범하세요. 나라를 이끌고 나갈만한 그릇이 아니지요. 따라서 잡아먹어 드렸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귀를 가볍게 깨물었다.
“너, 너 같은 꼬맹이가 포르포의 왕을――끄악!”
그 말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이빨, 깨물고 있던 귓불을 깨물어 찢어버린 것이다.
“포르포의 왕 같은 자리에는 관심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좀 더 커다란 나라……중앙 평원의 모든 것…….”
빌헬미나는 헬브란트 집무실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거의 포르포 왕국밖에 그려져 있지 않은 지도였기 때문이다.
“역시 작은 남자, 왕좌는 당신한테 너무 과하군요.”
지도를 찢어버린 그녀는 경쾌하게 방 안을 걸어갔다.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으나 기밀을 엄수하기 위해 지어진 두꺼운 문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에서 형용하기 힘든 박력감을 느끼며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약육강식은 이 세상의 섭리, 기왕 태어난 거 강자로서 살아가고 싶답니다.”
마치 초원을 껑충 뛰며 돌아다니듯이 걸으며 그녀가 얘기했다.
“그리고 그건 이 나라 또한 마찬가지. 연약한 생쥐처럼 알테일에게 겁을 먹고, 제국에게 겁을 먹고……그런 인생은 시시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제가 바꿔 드리겠어요. 국민도, 민중도, 모든 것을.”
빌헬미나는 꿈을 얘기하는 소녀처럼 즐겁게 얘기했다.
“반드레아가 역병 때문에 혼란에 빠진 지금 군비를 정비해야 해요. 되도록이면 혼란을 틈타 침공까지 노리고 싶긴 하지만, 이쪽에 역병이 퍼졌다간 본말전도. 특효약이라도 있으면 좀 더 손쉽게 전개를 바꿀 수 있는데 아쉽네요…….”
“헛소리를…….”
헬브란트는 압도당하는 와중에도 허리를 꿈틀대 호신용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빌헬미나가 시선을 피한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그것을 들이댔다.
“네놈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악마의 씨를 받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네 마음대로 하게 놔둘 순 없다. 이 나라와 민중을 악마한테 넘겨줄 순 없다!”
빌헬미나는 키 150cm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에 무술 경험도 없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날붙이를 든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어머, 놀랍네요.”
빌헬미나는 입에 손을 맞대고 과장스럽게 얘기했다.
“나불나불 떠들어대기 전에 나를 먼저 죽여뒀어야지. 자랑 얘기는 내 시체한테 얘기해도 충분했을 것을.”
헬브란트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려 했다.
“오라버님도 그 정도는 알고 계시는군요. 완벽히 동의한답니다. ……하지만.”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처음부터 죽은 사람을 상대로 얘기한 것 뿐인데요.”
떵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헬브란트는 다시 주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오라버님, 후계 쟁탈전 도중에 다른 왕족에게서 받은 과자를 먹어선 안 되지 않겠나요?”
빌헬미나는 남은 다과자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네……네노……도, 독……그그극…….”
“그냥 마비약이에요. 독으로 죽으면 제가 범인이 되지 않겠나요?”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쓸데없는 얘기에 어울려 줘서 감사합니다. 한 번 마음껏 제 얘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살아있는 분을 상대로 하기엔 창피해서.”
단검은 망설임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컥……큭……그극…….”
약 때문에 성대까지 마비된 건지 비명은 터져나오지 않았다.
“이 나라와 민중들은 제가 이끌어 가겠어요. 오라버님은 아무쪼록 평안히 잠들어 계시길.”
다시 칼날이 떨어지며 심장을 꿰뚫었다.
움찔, 하고 한 번 경련한 헬브란트는 그대로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됐다.
“……너무 깔끔한가?”
그녀는 심장 외에도 온몸에 상처를 낸 다음 탁자를 뒤집어 엎고 꽃병을 문 쪽으로 내던져 박살냈다.
“지금 그 소리는 뭡니까? 전하!?”
그 소리는 감출 수 없었는지 위병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빌헬미나는 한층 더 소리를 내면서 방을 어지럽혔다.
“전하! 전하, 문을 열어주십시오! 어이, 뚫고 들어간다!”
빌헬미나는 재빠르게 문을 열어젖히고 단검을 다시 오빠의 심장에 꽂아넣었다.
그 직후, 망치로 문을 부순 위병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 돼애애애애애 오라버님!! 오라버니이이임!!”
오빠의 시체를 붙잡은 채 울고 있는 막내딸이 그곳에 있었다.
“저, 전하!? 이것은 대체!”
“빌헬미나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침입자가 갑자기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오라버님은 저를 지키려 싸우셨는데 도중에 검을 빼앗기셔서……아아, 어쩌다 이런 일이!”
위병은 헬브란트의 숨을 확인해 보았으나 당연히 이미 끊어져 있었다.
“창문 밖이다, 쫓아라! 절대로 놓치지 마라!”
“후계자가 전부 다 죽다니……이제 포르포는 끝장이다…….”
소란스러운 와중, 빌헬미나는 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저보다 오라버님의 원수를 쫓아가 주세요! 설마 계승권도 없는 꼬마애를 노릴 리도 없잖아요.”
“하지만 공주 전하를 혼자 놔둘 수는…….”
떨떠름해 하던 위병 옆에 거구의 남성이 섰다.
“전하의 호위는 사병인 우리가 맡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분부를 다 하러 가시죠.”
다프네스는 다른 남자 몇 사람과 함께 빌헬미나를 에워싸듯이 섰다.
딱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남자들을 보고 위병들도 납득한 건지 그 자리를 떠났다.
“효과가 약하군. 아슬아슬했다.”
빌헬미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과자를 다프네스에게 던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사러 간 게 전부고 독은 아는 게 없다고.”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다리를 꼬았다.
남자의 시선이 다리 쪽으로 오자 눈을 가늘게 뜨며 위협했다.
“그래서, 계획은?”
“잘 됐지. 모여있던 영주들에겐 습격 소문을 퍼트렸다. 왕국군에는 반대로 영주들의 반란 소식을 퍼트려 뒀고.”
왕위 계승권자가 몰살됐다는 이상 사태가 닥친 지금, 군과 영주들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도달해 있다.
무슨 계기가 있으면 폭발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계기 또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 서라! 수상쩍은 놈이 도망쳤다!”
“검을 갖고 있는 놈이다!”
“그놈이 하수인이다, 쫓아라!”
창 밖에서 위병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계획대로 저놈은 영주들이 있는 여관 쪽으로 들어가 자살할 거다.”
피로 물든 검을 손에 쥔 남자가 궁정에서 도망치면 의심할 여지는 없다.
“바라는 게 가족의 행복이었던가? 잘 일해주면 이뤄주도록 하지.”
빌헬미나는 조용히 창을 닫았다.
“전부 네 계획대로인가?”
“여기까진 말이지.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안녕을 즐길만한 여유는 없어.”
책상 위에서 팔짱을 끼는 그녀의 눈에선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일주일 뒤.
“새 왕 폐하 만세!” “빌헬미나 여왕 폐하 만세!” “여왕님께 영광 있으라!”
왕도 광장 안에 빌헬미나를 칭송하는 민중들의 갈채소리가 울려퍼진다.
“기분은 어떻지?”
“나쁘진 않지만 좋지도 않군. 예정대로 된 결과에 춤을 추는 것도 우습지 않나?”
빌헬미나는 민중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뒤쪽에 서 있는 다프네스와 대화했다.
“악독한 영주들은 왕국을 빼앗기 위해 암약하여 왕족을 몰살했다. 유일하게 남겨진 막내 공주가 군을 이끌고 악덕 영주들을 퇴치했다……라. 감동적인 이야기로군.”
“좀 닥쳐라, 연설을 시작할 테니.”
민중들이 조용해진 걸 보고 빌헬미나가 조용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어둡고 침울한 목소리부터 시작된다.
“포르포는 이끌어갈 이들을 잃고, 저는 일족을 전부 잃었습니다.”
광장이 침묵으로 뒤덮였다.
“용감한 병사들의 활약 덕분에 악은 멸했지만, 남은 건 불안감에 짓눌릴 것만 같은 20살 꼬맹이일 뿐이죠.”
술렁거리는 소리가 퍼진다.
“그런 상황에서 포르포는 소국입니다. 힘도 약하고, 국토도 적습니다.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우글대고, 언제 쳐들어 올지도 모르죠…….”
대관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비관적인 말이 계속되자 민중들의 술렁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다프네스도 의아한 표정으로 연설 중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 단결력이 필요합니다. 귀족, 병사, 민중, 모든 이들이 집결해서 국가를 지탱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라는 순식간에 다른 나라에게 집어삼켜지고 말 테지요.”
뜸들이지 않고 빌헬미나는 말을 이었다.
“알테일 신국처럼 모든 것을 신에게 지배당하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믿을 신 정도는 스스로 믿겠어!”
“광인놈들이랑 같은 꼬라지가 되는 건 사양이야!”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럼 제국의 별볼일없는 변경민으로서 살아가시겠습니까?”
“엄청나게 쥐어짜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전노 같은 취급을 어떻게 견뎌!”
“야만인 놈들 집단 주제에, 뭐가 제국이라는 거냐!”
다시 부정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럼 우리는 단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빌헬미나의 말투와 함께 공간의 분위기 또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저 같은 꼬마가 왕위에 즉위했단 사실에 불만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테지요. 혼란스러운 와중이니 더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우선 그 감정은 가슴에 집어넣어 주십시오. 집에 불이 번지기 직전입니다. 집안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큭큭…….”
빌헬미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병사들과 민중을 바라봤다.
다프네스가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어린 여왕을 보필하라!”
“우리의 여왕을 도웁시다!”
빌헬미나는 눈물을 화려한 의복 소매로 훔쳤다.
“여러분……정말로 감사해요……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갈채가 터져나오는 와중, 대신들 중에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제각각 왕자들과 친분이 있던 자들이다.
“……어째서 이런.”
“……으음.”
측근으로서 권력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순간 벌어진 소란으로 그러한 계산은 날아가고, 누군지도 모를 꼬맹이가 왕위에 앉았다. 불만이 없을 리가 없다.
“오오오오오――!! 여왕님 만세! 어린 우리의 여왕님 만세!!”
“아름다운 여왕님 만세!!”
한편 민중과 일반 병사는 박수 갈채로 맞이하는 중이다.
애초부터 권력 다툼에서 멀던 이들은 막내딸이 왕위에 오른다 한들 실질적인 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까지 위에 있던 기득권들이 뒤집어진 상황이니 절호의 기회라 볼 수도 있었다.
오빠들의 원수를 갚았다는 무용담도 있고 무엇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이기에 인기가 좋다.
미녀가 눈물을 훔치면서 연설을 하는 것과 잘난 체 하는 노인이 뜸을 들이면서 연설을 하는 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인원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불만이 있는 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이 나라를 굳세고 훌륭한 나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여러분, 같이 힘냅시다!”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대중에게 호응하면서 빌헬미나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커다란 환호성이 왕도 속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에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녀의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는 색이 바랬고 흐르고 있던 눈물은 메말랐다.
“훌륭하십니다, 여왕 폐하.”
“…….”
빌헬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관을 다프네스에게 내던졌다.
황급히 그걸 받으며 정중하게 놔두는 거구의 남성.
“이제 얼추 민중의 지지는 휘어잡았겠군. 열기가 식기 전에 결실을 낼 거다. 영주 놈들에게서 몰수한 재산 절반을 민중에게 나눠줘라.”
“그래도 되나?”
다프네스가 놀란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돈은 아깝지만 한동안 민중에겐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야. 놈들이 흥분하는 사이엔 귀족 놈들도 못 움직일 테지. 그 사이에 체제를 가다듬는다.”
“그야말로 민중을 도구 취급하는군.”
빌헬미나는 다리를 다시 꼬면서 슬며시 웃고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우선 군 증강부터 시작이다. 민중이 도취해 있는 사이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낼 필요가 있어.”
“알겠습니다, 폐하. 저 열기를 보아하니 모병제에도 금세 많이 모이겠어.”
빌헬미나는 자기 방이 된 왕의 개인실에 중앙 평원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정보다. 전부 다 간첩을 보내야겠어. 알테일 신국은 물론이고, 리버티스, 반드레아, 몰트……그리고 고르도니아까지. 남부 영주 하드릿 경의 근거지, 라펜에 보낸다.”
포르포의 정변은 널리 알려졌으나 알테일조차 아무런 대응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라펜
“아아아아아――!! 손을! 손 잡아줘어어어어!”
“이러면……되나!”
손을 붙잡고 푹 하고 강하게 밀어넣자 라미의 뱀 몸통이 쭉 늘어났다.
“히이이이익!! 아으으으으! 아아아…….”
그대로 의식을 잃은 라미에게 키스를 하고서 성기를 뽑아냈다.
사실은 안에서 싸고 싶었지만 참아야 한다.
“얼굴에 쌀게.”
뽑아낸 성기를 얼굴 바로 앞에 갖다대고 라미의 아름다운 얼굴을 백탁액으로 물들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실신한 라미한테서 뿜어져나오는 애액을 조수 여자가 통에 담았다.
이 여자는 나와 나티아에게 고용된 약 제조 조수다.
염두병 특효약의 최적 제조법은 얼추 정립되었다.
알라우네의 꽃가루와 라미의 애액을 많이 넣는다. 어인의 구슬은 끓여서 다시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멍멍이의 피는 아주 조금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래도 부족해질 때마다 엉덩이에서 피를 뽑아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알라우네는 잔뜩 자라고 있는만큼 꽃가루를 얼마든지 받을 수 있지만, 라미의 애액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으로 안아서 미안하다.”
라미를 무슨 재료처럼 다루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외람되는 말씀이지만, 무척이나 기분 좋아보이니 괜찮은 게 아닐까요?”
조수 여자가 통에 쌓인 애액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매일 쾌락을 맛보며 정신을 잃을 때까지 예쁨을 받을 수 있다면 여자로서 기쁜 거 아닐까요? 최소한 저라면 기쁠 것 같네요. ……엄청난 거근이기도 하구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거근을 좋아하나 보지?”
“거근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시선이 맞았다.
“네 방은 별채 2층 안쪽이었지. 오늘밤, 문을 열어둘 수 있겠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약 제조는 순조롭다.
참고로 조수 여자는 내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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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4살 여름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 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용살의 영웅
엘프의 중개자 백도의 성왕
영주민 186000 난민 26000명
중요 도시: 라펜 32000명 린트브룸 5000명 반드레아 특별 개척지 지구 13000명
재산: 금화 57000 역병 대책 추가(2000)
경험 인수: 543명 자식: 66명+555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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