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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이르는 길

왕국에 이르는 길 제271화『마그라드 내전⑪ 계획대로의 결말』

271화『마그라드 내전⑪ 계획대로의 결말』

 

며칠 후

 

칼디아 함락으로 다른 거점에서 일어난 반란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조만간 정리가 끝날 겁니다.”

 

비트먼과 나는 시가전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칼디아 시내를 시찰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거 잘 됐군. 이곳에서 벌인 전투는 영 짜증나는 것들 뿐이거든.”

원래 같으면 왕국군의 역할은 이미 끝난 상황입나다만…….”

 

비트먼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미 주력 부대를 처리한 지금, 나머지 사소한 반란은 총독부군만 가지고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누아는 끝까지 칼디아에 집결 중인 총독파 영주와 왕국군이 합류하기를 강하게 요청했다.

 

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뒤누아 총독은 군사 쪽 지식은 어두운 것으로 보입니다. 하드릿 경께서 강권으로 명령하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트먼은 내가 뒤누아의 의견대로 왕국군을 칼디아에 대기시키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

 

내가 입을 다물자 그가 한층 더 말을 덧붙였다.

 

최소한 이동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공성 병기와 거대 석궁 같은 병기만이라도 항구로 옮기는 건 어떠십니까?”

안 된다.”

 

갑자기 내가 말을 자른 사실에 비트먼은 깜짝 놀란 듯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말할 수 없다.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지금은 내 말을 따라줬으면 해. 언젠가 알게 될 거다.”

……자중하겠습니다. 저는 군인으로서 책무를 다할 뿐이니까요.”

 

그 이후 비트먼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병사에게 풍기 유지 및 잔당 소탕 지시를 내렸다.

나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도시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집을 잃은 주민이 잔해를 그러모아 간이 오두막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고치는 걸 도와주고 싶긴 하지만 지금 해봤자 두 번 고생하는 꼴이 되니까 말이지.

 

 

어차피 한 번은 독립파를 따르던 반란 분자 놈들이니 지켜줄 필요도 없을 겁니다.”

 

뒤누아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남자는 그렇지만 여자는 불쌍하잖아. 미녀가 집도 없이 사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거든.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아군 영주들의 군대가 도시 근처까지 와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도착할 겁니다.”

 

뒤누아는 기분 나쁜 거짓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왕국군, 총독부군 모두 외부 경계를 맡기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해제하도록 명령해 두겠습니다.”

그래. 총독부군에는 네가 명령해 두도록. 비트먼한테는 내가 알려두지. 그 녀석은 너를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 하고 숨을 토하자 뒤누아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건 여전하지만 거짓 미소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시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이푼 백작으로부터 전령!! 하드릿 경께선 어디 계십니까!!”

나는 여기 있다.”

 

사자한테서 편지를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펼쳤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서면을 난잡하게 주머니 속으로 쑤셔넣었다.

 

내용을 여쭤봐도?”

 

뒤누아도 또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내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눈은 방금 전보다 살짝 더 커져 있었다.

 

본국의 수송선이 여울 부근에서 걸린 모양이다. 화살 보급이 조금 늦어지겠어. 이미 전투도 끝났으니 필요도 없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칼디아 함락 소식은 알고 있을 텐데, 무이푼 백작도 참 꼼꼼한 성격입니다.”

 

뒤누아는 한 차례 절을 하고 자리를 비켰다.

나는 비트먼을 다시 불러들였다.

 

명령이십니까?”

그래, 도시 외주 경계를 맡고 있는 왕국군을――엄중 경계 태세로 배치해라. 거대 석궁을 진에 고정시키고 모든 궁병에게 최대한 많은 화살을 보급해 두도록.”

 

명령 내용과는 정반대인, 내 작은 목소리를 듣고 비트먼이 한 순간 눈을 치켜떴다.

 

방금 전에 말하지 못했던 걸 얘기해 주지. 하지만 부하, 참모진한테도 얘기하지 마라. 새어나갔다간 큰일이니까 말이야.”

 

비트먼을 데리고서 레오폴트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설명해 봤자 분명 혼란스러워할 뿐일 테니까.

, 이제 시작인가? 역시 책략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다음부터 전부 레오폴트랑 트리스탄한테 맡겨야겠어.

 

 

 

 

심야

 

정찰병, 도시 바깥에 불빛은 보이나?”

도시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이동하는 듯한 수많은 횃불이 보입니다. 합류 예정인 영주군의 것 아니겠습니까?”

 

정찰병이 그렇게 대답하자 나와 비트먼, 레오폴트는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는 세리아와 마이라까지 포함해서 전부 다 완전 무장이다.

 

칼디아 도착은 내일일 겁니다. 구태여 야간에 강행군을 할 의미는 없습니다.”

대열을 보니 길게 늘어선 행군 대열은 아닙니다. 재빠르게 공격으로 이행할 수 있는 횡진을 취하고 있군요.”

라는군. 뒤누아는 뭘 하고 있지?”

 

내 말에 곧장 세리아가 답했다.

 

저녁 때부터 소재지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총독부군은 성문 근처 구획에 집결해 있습니다.”

 

이제 틀림없겠군.

이후엔 상대방이 일을 저지르는 걸 기다리는 게 끝이다.

 

 

내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밀어넣고 두 손을 각각 세리아와 마이라의 가랑이 사이에 박아넣어 장난을 치르고 있다보니 결국 그 때가 찾아왔다.

 

적습――!! 적습――!!”

 

정찰병이 소리쳤고 단숨에 주변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천막을 뛰쳐나가니 밤하늘의 별을 감추듯이 수많은 불화살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적 숫자 확인 불가! 파괴된 도시벽을 통해 이미 도시 안으로 침입 중입니다!”

 

허둥대는 정찰병과 달리 레오폴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손실은?”

왕국군에게는 진에서 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기에 손실은 경미합니다.”

 

잘 됐군.

 

총독부군이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보낸 전령에도 반응 없음!”

 

다른 전령이 소리를 치면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각 대대에게 방어 태세를 취하라 일러라. 진 구축은 이미 끝났을 테니까.”

 

비트먼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 ……어라? 왜 다들 냉정하신 거지.”

 

전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갑작스러운 적습과 총독부군의 불손한 움직임, 우리도 허둥댈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전 부대를 두 개로 나눠서 전개하겠습니다. 하나는 도시벽 파괴 위치, 또 하나는 총독부군이 있는 성문 방향입니다.”

궁병대와 거대 석궁은 높은 곳에 배치하고 전체 양상을 지켜보며 돕도록 지시해라. 목표는 우리 쪽에서 지시를 내린다. 명령하기 전까지 활은 쏘지 마라.”

 

본부에는 아무런 혼란도, 초조감도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앉아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1대대와 교전 중입니다!”

총독부군, 아직 움직이지 않습니다!”

 

도시벽 안에서 전투가 시작된다.

적이 일제히 왕국군 진지를 향해 활을 쏘았다.

 

반격해라――!”

 

곧장 아군도 활을 쏘아 반격했다.

거대 석궁까지 포함된 반격은 오히려 적보다 더 잘 통솔되어 있었고 박력감이 느껴졌다.

 

, 뭔데 이거!” “전혀 당황한 티가 안 나잖아! 엄청난 속도로 반격하는 중이다!”

 

적은 어두운 시간대를 틈타 기습을 벌여 우리가 허둥대길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놈들이 맞이하게 된 강렬한 반격 탓에 반대로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화살은 잔뜩 남아있다. 봐줄 필요는 없다!”

 

비트먼의 지시와 함께 화살이 미친듯이 날아간다.

우리 쪽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안으로 쳐들어오려던 적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한 데 멈춰 사격전을 시작하면 숙련도가 더 높은 우리쪽이 유리하다.

 

심지어 상대방은 도시벽이 붕괴한 곳을 통해 횃불을 들고 침입 중이기에 어둠 속에서도 노리기 쉽다.

반면 아군은 여러 군데에 퍼진 채 진지 속에 숨어있다. 불만 꺼버리면 적들은 우리 쪽을 확인하기 힘들다.

심지어 방패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 화살도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중이다.

 

적의 진격이 완전히 정지! 몰아세웠습니다!”

 

부하 중 한 명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 기회를 틈타 단숨에 반격하고 싶은 것이리라.

 

반격은 최소한으로 해도 된다. 우리가 먼저 백병전을 나서는 건 삼가고, 활만 쏴서 반격한다.”

 

하지만 비트먼은 그렇게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전부 순조롭습니다. 남은 장기말은 앞으로 하나뿐입니다.”

 

레오폴트가 나를 보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 장기말이 움직였다.

 

 

총독부군 배신!! 뒤누아 총독 모반――!!”

 

드디어 올 게 왔군.

여기까지 예상대로라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레오폴트는 바글레란이 서면장을 꺼내기 전부터 트리스탄과 함께 무언가를 꾸미고 있던 모양이다.

놈이 말하길 뒤누아가 무언가를 저지를 것이라는 건 첫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왜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자칫 실수로 입 밖에 내뱉을 것 같아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고 자빠졌다.

그 순간 뒷구멍을 따먹어버릴까 싶은 생각이 치솟았으나 남자라서 참았다.

 

 

뒤누아는 역시 군사 쪽에 소질이 없는 듯 합니다. 기습을 가할 예정이었던 영주군이 막힌 탓에 여기서 더한 추가 병력 배치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요. 배반을 할 거였으면 공격 개시 직전, 혹은 두 군대가 팽팽하게 맞붙어 지친 틈을 노려야 했을 겁니다.”

 

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세리아가 메모를 적는 중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게 만들어 주거라.

 

아고르 부대가 출격합니다.”

 

예상했었다고는 해도 두 방향에서 오는 공격에 비트먼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적과 충돌한 아고르 대대는 총독부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 제기랄! 안 뚫려!” “고르도니아 왕국군이 이렇게 강하단 말이야!?”

배신자 놈들! 밀어붙여라!” “결국엔 허접 집단들이다. 차분히 싸우면 처리할 수 있어!”

 

 

이중 기습이지만 우리 쪽 진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총독부군의 배신 직후엔 확실히 아군 측 병력에도 동요심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방어진을 잘 구축 중인 왕국군은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숨 고를 시간만 있으면 숙련도에서 밀리는 9000명의 병력 따위 별다른 위협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영주군이 통째로 적이 되었다는 걸 고려해 보면 총독부군과 합쳐 약 3만……우리 쪽의 2배 이상입니다. 해가 뜨면 고전을 면치 못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그것 때문에 그 게으름뱅이를 보낸 거니까.”

 

 

안으로 밀려드는 영주군 사이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 세 개의 파랗게 불타는 신호 화살이 하늘을 향해 발사됐다.

그와 동시에 적진 한가운데에 불화살이 피어오르더니……순식간체 총독부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뭐냐! 대체 왜 영주군이 우리를 쏘는 거지!?” “우리는 아군이라고! 뭐하는 거냐!”

 

공간을 메우는 노성과 비명 소리 탓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도 나누지 못한 적들은 하염없이 불화살을 맞을 뿐이었다.

끝내 총독부군에서도 화살이 영주군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트리스탄이 하고 있던 짓인가?”

아니오, 아직 있습니다.”

 

 

레오폴트의 말과 함께 이번엔 적진 한가운데에서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역시 공격하기 시작했군! 옆에 있는 에일 경의 군대를 공격해라! 놈들은 고르도니아와 한통속이다!”

세레이 경의 군대가 우리 쪽을 공격했다고!? 놈들이 고르도니아 쪽 인간이라는 밀서는 사실이었던 건가!”

 

영주군과 총독부군이 갑자기 아군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아군끼리 전투를 벌이며 난동을 벌이는 중이다.

 

이건 대체…….”

배신에 야습에 아군 오사까지, 바쁘기도 하군.”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한 세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면서 레오폴트를 쳐다봤다.

 

트리스탄은 총독부군의 불손한 움직임을 칼디아 공격 이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리 관계가 나쁜 지휘관을 조사하여 서로가 고르도니아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는 밀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이후엔 내부로 잠입시킨 자에게 장난질을 하도록 시키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만약 놈들이 배신을 염두에 구도 있지 않았다면 고르도니아에 충성을 맹세하는 건 당연한 일, 들킨다 해도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비트먼도 감탄한 듯하다.

나도 세리아의 부드러운 뺨 감촉에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만지는 감촉이 기분 좋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영주군도 서로 싸우는 중이잖아. 저쪽은 어떻게 된 거지?”

영주군은 트리스탄을 보내뒀습니다. 뒤누아 총독이 보낸 사자로 가장한 뒤 마찬가지로 『그 영주는 고르도니아와 한통속이다』, 라고 말이지요.”

그걸 믿었다는 건가?”

배신하기 직전인 이상『그 계획에 대해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만』, 이라는 말로 시작하면 뒤누아 총독 쪽 사람이라 속이는 건 간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 공격에도 잔재주를 부린 게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 궁병대 공격은 상당히 편중되어 있었다.

적의 우익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중앙부부터 왼쪽에 공격을 퍼붓던 기분이 든다.

아군 오사는 적의 좌익이 우익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일부러 의혹을 더 키우는 전법을 썼습니다. 그리고 배신자는 배신에는 민감한 법이지요.”

 

어찌 되었건 적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고 지금 반격에 나서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듯하다.

 

비트먼, 총 반격을 실시한다. 놈들을 칼디아에서 내쫓아라.”

!”

 

, 과하게 쫓을 필요는 없다. 도시에서 쫓아낸 후엔 방어 태세를 정비해라.”

 

이거면 되겠지? 하고 레오폴트에게 시선을 보내니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격이 시작되자마자 배신자들은 순식간에 붕괴하여 도시벽 바깥으로 후퇴했다.

얼추 2배 정도 되는 적이 순식간에 썰려나가는 광경은 보고 있자니 우습게 보였다.

 

적을 괴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태세를 가다듬으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게 어렵단 말이지.”

 

말로 하긴 쉽지만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기회가 있으면 되도록 적을 쓰러트리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왕국군은 뛰어난 통제력과 명령을 지키려 하는 태도를 고수한 덕에 놈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낸 이후 쫓아가지 않고 얌전히 공격을 중지하고서 도시 안으로 돌아왔다.

 

일단 끝이군. 계속 경계 태세를 유지하도록. 나는 잠시 쉬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근처에 있던 기드에게 말을 건넸다.

 

치중부대에 있는 여자를 불러와라. 지금부터 내게 안기고 싶은 자는 와 달라고 말이야.”

그랬다간 25명이 올 것 같습니다만?”

 

그럼 네 취향으로 셋 골라서 보내.”

, 저 말입니까!? , 으음…….”

 

난처해하는 기드를 보고 웃으면서 나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무이푼 백작의 편지를 생각해 보면 슬슬 시작될 텐데……얼른 와 줬으면 하는군.

 

 

 

이미 도시는 완전히 포위했소. 우리에겐 계속 원군이 올 것이오. 그에 비해 당신들은 고립된 채 원군도 기대할 수 없소. 어서 이 문을 열면 목숨은 보장하겠소!”

항복 권고라니, 뚫린 입이라고 감히!”

 

다음날 아침, 혼란을 수습한 총독부군……정확히는 새로운 반란군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소리치는 자의 뒤쪽, 화살이 닿지 않는 위치에는 뒤누아의 모습도 보였다.

거리가 있어서 표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공허한 눈동자로 이쪽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계속해서 원군이 모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군요.”

 

확실히 반란군 진영 쪽으로 창을 든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드, 어떠냐?”

창이 아니라 나무 막대기, 입고 있는 장비도 갑옷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산의 민족은 믿기지 않을만큼 눈이 좋다. 이 정도 거리라면 사소한 부분까지 볼 수 있다.

 

주변 민중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만든 허풍일 테지요. 실제 병력이 그리 쉽사리 늘어날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 저 도전을 받아들여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승리를 원한 거였으면 어젯밤에 쫓아갔겠지. 놈들이 후퇴하는 게 제일 곤란해.”

 

그리고 조만간 올 것이다.

 

나는 도시벽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 뒤누아를 노려다보았다.

나도 뒤누아도 기드만큼 눈이 좋지 않으니까 얼굴은 안 보이지만.

 

뒤누아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배짱이 있는 건지, 광기에 휩쓸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지…….

 

나를 향해 화살 몇 개가 날아왔다.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궁병이 멋대로 쏜 모양이다.

이런 통제력도 없다니, 역시 어중이떠중이 집단이로군.

 

에이길 님! 위험합니다!”

 

세리아가 소리쳤지만 문제는 없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화살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이쪽으로 떨어지는 화살을 날려버렸다.

마지막 한 자루는 맨손으로 붙잡아 버려줬더니 적 궁병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만한 숫자의 화살을 손쉽게…….” “말도 안 돼……우리가 저놈이랑 싸워야 한단 말이야?”

 

어느새 레오폴트가 옆에 와 있었다.

네가 정면으로 나서는 건 보기 힘든데.

 

혹시 날 걱정한 거냐?”

 

씨익 웃으며 물어봤다.

 

그런 게 아닙니다. 도착했습니다.”

 

레오폴트의 목을 조르려다가 놈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군기……왕국군의 깃발이 줄줄이 오고 있는 광경이 있었다.

 

원군! 원군이 왔습니다!!”

 

정찰병이 소리치자 병사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비트먼도 도시벽 위로 타고 올라왔다.

 

저건……제2병단과 제3병단……제6병단도 있는 건가!”

 

3개 병단, 4 5천명의 아군이 기나긴 행렬을 만든 채 진군하고 있었다.

칼디아에서 거리를 두면서 도시를 포위하는 반란군을 다시 포위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얼추 예정대로군.”

 

나는 무이푼 백작이 보낸, 역할을 다한 편지를 그 자리에 놔두었다.

그곳에 적혀 있던 건 보급이 늦어졌다는 내용이 아니라 원군의 상륙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원군 요청은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3개 병단이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이번 원정 목적은 반란군 진압과……뒤누아를 처리하는 것. 일부러 반란을 부추기고 있었단 건가.”

 

총독을 갑자기 처단했다간 혼란이 발생한다.

하지만 통치에 실패하여 대규모 반란이 터진 데다가 왕국군에게 반기를 들기까지 한다면 만점이다.

이 모든 악행을 놈에게 뒤집어 씌운 뒤 제거할 수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많은 적과 아군의 증오를 받고 있으면 놈의 후임으로 들어올 사람은 죄인이라 한들 성인처럼 보일 것이다.

 

처음부터 전부 계획대로였나.”

 

어쩌면 뒤누아한테도 왕이 무언가 언질을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반란군이 무너집니다! 각 영주들이 도망을 치려고 부대를 뿔뿔이 흐트러트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완전히 포위당하는 건 시간 문제로 더 이상 놈들에게 승산은 없다.

우리가 구태여 놈들을 박살내지 않았던 건 뒤누아를 포함한 중요 인물들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성문을 열고 쫓아가라. 놈들의 도주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미 포위망은 쳐졌다.

더 이상 참을 필요는 없다.

 

“““오오오오오오오오!!”””

 

병사들도 배신자를 처리하지 못한 감정에 울분이 쌓여있던 건지 환호성을 미칠듯이 내지르며 함께 달려나갔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났다.

 

 

 

 

 

일주일 뒤  중심 도시  오드로스

 

뭔가 남길 말은 있나?”

 

마그라드의 옛 수도 오드로스에서 뒤누아는 기둥에 묶인 채 발밑에는 대량의 장작이 놓여있었다.

 

…….”

 

뒤누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은 겁먹지 않고서 눈앞에 있는 대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꽁꽁 묶인 뒤누아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한데 모인 민중과 옛 총독파, 옛 독립파 귀족들을 향해 선언했다.

 

이놈들이 바로 악행의 근원! 이 땅이 전쟁에 휩쓸리고 민중이 고통을 받은 건 이 더러운 남자 때문이다!”

 

인파 사이에서 『쓰레기』, 『살인자』라는 매도가 들렸다.

 

이 악마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

 

나는 무심코 소리가 날 정도로 웃음을 터트렸고 마이라가 그걸 감추듯이 커다랗게 헛기침을 했다.

재상에서 광인, 총독에서 배반자, 끝내는 악마인가.

 

남자는 한 순간 이쪽을 봤으나 레오폴트가 웃음을 터트리는 나와 남자 사이에 서서 시선을 가로막았다.

 

알렉산드로 폐하께선 새로이 유능하고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총독을 파견하셨다. 그리프 질그레이 각하시다!”

 

질그레이라고 하는 남자는 멋진 금발을 나부끼며 당당한 풍채를 보여주듯이 성큼걸이로 걸어왔다.

한 순간 나를 노려본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방금 그 광경을 본 건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총독은 외견과 어울리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제군들! 내가 새 총독 질그레이다.”

 

별로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민중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을지 난처해 했고, 나는 하품을 했다.

 

이번 내전은 제군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드로 폐하께선 뒤누아를 임명하신 것을 후회하시고, 제군들에게 온정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셨다.”

 

질그레이는 커다란 목소리로 몇 가지 우대 정책을 얘기했다.

전부 다 민중한테 있어선 기쁜 내용이지만 엄청난 변화라고 보긴 힘들다.

 

그렇다 해도 냉대를 받고 있던 자들 입장에선 천국, 우대받고 있던 자들 입장에서도 그리 큰 불만이 나오지 않을만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환영받을 겁니다.”

분명 마그라드를 점령하자마자 이 정책을 실행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지.”

 

레오폴트와 트리스탄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참고로 트리스탄은 여러모로 머리를 썼다며 잔뜩 게으름을 피우겠다고 선언한 뒤 오늘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포상으로 창부를 두 명 보내줬더니 진심으로 싫어했다.

상당한 미녀였는데……여자를 싫어할 줄이야, 트리스탄이 정말로 남자인지 의심스러워졌다.

다음에 욕탕에서 확인해 봐야겠군.

 

뭔가 오한이 느껴지는데…….”

 

우리의 쓸데없는 소리를 지워버린 건 민중들에게서 쏟아지는 질그레이에 대한 박수 갈채였다.

놈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크게 손을 흔든 뒤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 얘기가 들렸을 것 같진 않은데……뭐, 아무렴.

 

애초에 나는 신 총독의 취임식 같은 데에 관심은 없었다.

있기에 참가했을 뿐, 사실은 바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대중들의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악마를 배제하고 정화의 불로 씻어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통치, 모든 자들이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죽여라』『불을 지펴라』 라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방금 전부터 선두에서 소리치고 있는 사람이 똑같은 목소리인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처형인이 불이 붙은 횃불을 질그레이에게 건넸다.

놈은 그걸 크게 높이 치켜든 뒤 묶여있던 뒤누아의 발밑에 내던졌다.

 

아마 기름이 발려있던 건지 후욱,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화염이 피어올랐다.

 

악은 사라졌다! 화해의 시기다!!”

 

불에 휩쓸린 뒤누아 앞에서 옛 독립파와 총독파 영주들이 악수를 했다.

그걸 본 민중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민간 지붕에서는 축하의 꽃잎이 흩날렸다.

아무리 봐도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던 거란 말이지.

 

평화 만세!” “새 총독 만세!” “해방 만세!”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나도 만세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냐?”

말씀하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레오폴트가 그렇게 말하길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마셨다.

의식은 끝났다. 이제 자리를 비워도 되겠군.

 

또다시 질그레이가 나를 노려보는 중이다.

설마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 지금까지 혀가 잘려있던 것처럼 말을 안하고 있던 뒤누아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하하하하하하하!”

 

갑작스러운 폭소에 이끌려 나도 놈을 웃으며 바라봤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뒤누아의 하반신은 이미 불에 휩싸여 있었다.

단말마가 터져나와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 그의 음색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쓰레기. 뭐가 훌륭하다는 것이냐? 네놈의 처형이 말이냐?”

 

질그레이와 뒤누아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의 말로는 사소한 것. 훌륭한 것이란 바로 이 세계, 배신과 살육, 그리고 사기! 이제야 알겠구나! 이 세상의 본질을!”

그것은 네놈이 살아온 일생일 테지. 얌전히 지옥으로 떨어져라!”

 

얘기하는 두 사람, 하지만 뒤누아의 눈길은 질그레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놈의 시선은 명백히 내 쪽으로 향해 있었다.

 

보인다……보이는구나! 네놈이 걸어갈 길이 보이는구나! 으하하하하하, 정말 유쾌하군! 이렇게 되는 건가!”

꼴사납구나, 뒤누아! 얼른 불타 죽어라!”

 

격하게 매도하는 질그레이와 나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뒤누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타 죽어가는 뒤누아를 계속 바라보았다.

 

결국 온몸이 불에 타버린 뒤누아는 묶여있던 밧줄이 끊어진 건지 두 손을 민중에게 벌렸다.

민중에게서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 세상이야말로 지옥이거늘, 지옥에 떨어진다 한들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하나 단 한 가지.”

 

온몸이 불타면서 뒤누아는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성대까지 불탄 건지, 지금과는 다른……마치 정말로 악마 같은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기의 왕, 야만적인 영주, 무지한 민중이여. 모든 자들에게 공평하게 지옥 있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신이여 악마여! 내 저주를 듣고 응답하라―――――.”

 

지옥에서 들끓는 듯한 커다란 목소리에 민중의 매도가 그쳤다.

잘 보니 영주들도 얼어붙어 있었고 질그레이도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놈의 저주는 상당히 강력한 모양이다.

의식의 절정 부분인데 아무도 입을 안 떼잖아.

 

뒤누아는 그렇게 숨이 끊어진 건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불타버렸다.

화염에 휩쓸린 입가가 살짝 위로 치켜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네 말로인가. 잘 가라.”

 

일단 모르는 사이가 아니기도 하고, 나는 놈에게 가볍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작은 목소리이긴 했으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괜히 더 크게 들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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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4살 겨울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 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용살의 영웅

엘프의 중개자

 

영주민 175000명 난민 1600

중요 도시 라펜 26000 린트브룸 5000 반드레아 특별 도시 9000

 

동행

레오폴트(참모) 트리스탄(참모) 세리아(부관) 마이라(지휘관) 이리지나(지휘관)

기드(호위대원) 크리스토프(호위대원) 비트먼(왕국군 병단장) 아고르(대대 지휘관)

뒤누아(마그라드 총독)

휘하군

왕국군 제4병단 13000명 총독부군 8700명 선행 부대 2000

호위대 95 3인조 최측근 85

 

임명: 포르테(난민 관리인)

재산: 금화 19470 난민 대책(30)

경험 인수: 426명 자식: 55+555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