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서부 평원 전투』
여름 끝무렵, 서부 평원 중앙부
아직 한참 더운 날이 이어지는 나날들, 경우에 따라선 후덥지근한 불쾌한 습도가 전체를 감싸는 경우도 있는 서부 평원이지만 오늘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센 덕분에 어느 정도 선선한 느낌이었다.
특히 철갑옷을 입고서 무더운 여름날 아래 활동하고 있는 병사들 입장에선 천사의 숨결과도 맞먹는 바람이리라.
“드디어 왔군…….”
조용히 중얼거리는 이 남자의 이름은 이완 갈첸코, 이 땅에 모여있는 오르가 연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나이는 50살이 살짝 넘었고 머리에선 백발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조용히 앉아있기만 해도 흘러넘치는 패기는 결코 인생에 찌든 노년 남성의 것이 아니었다.
역전의 군인으로서 주변에 서 있는 남성들보다 한층 더 빼어난 위엄을 뿜어대는 중이었다.
“예! 어리석은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서부 평원, 거리낄 것 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가득 메운 가랜드 제국군은 이미 모든 병사들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다.
“반격 준비는 이미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갈첸코 사령관 각하. 휘하병은 이미 방어전 준비를 끝내 두었습니다.”
“그래……잘 훈련된 병사들이군.”
연방의 군대는 정부 직속으로 왕도 근처에 있는 정예 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지방 주나 귀족들이 갖고 있는 병사들을 한 데 모아 형성된다.
일반적인 경우엔 제후군을 불러모아도 제대로 된 전력으로 써먹긴 힘들다.
하지만 연방 주의 군대와 제후군은 처음부터 연방군 소속, 전시 상황엔 통합시킬 걸 전제로 조직 및 훈련을 받는다.
단순한 어중이떠중이 집단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80만의 대병력……하지만 여기서 보기에 적은 좀 더 많군.”
서부 평원 한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초원을 가득 채우듯이 진을 친 연방군은 총 80만. 하지만 천천히 이쪽으로 진군해 오는 적은 딱 보기에도 그것보다 많다.
“간첩의 보고에 따르면 이번 원정에는 200만명 이상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갈첸코도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
“200만이 한 번에 덤벼든단 건가……어리석긴.”
“가랜드 놈들은 품행이 거친 야만인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전쟁에서 숫자는 때로 질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무한한 식량과 물, 약과 깨끗한 화장실을 확보할 수 있다면 당연히 200만의 대군은 어마어마한 강력함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을 준비하는 건 불가능.
연방군조차 이 땅에 모인 80만과 각 측면에 내보낸 10만의 별동대 두 개……합계 100만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의 마차와 인부를 동원하고 산처럼 쌓인 보급을 준비해 두었다.
“심지어 놈들은 침공군이기에 공격 측, 물자를 쌓아둘 수도 없지.”
“원래는 10만 단위로 분할한 여러 개의 군단으로 편성하는 게 정석입니다.”
갈첸코의 부하도 제각각 군대를 이끌기에 충분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급을 완전히 무시한 그 편성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서부 평원 서쪽부터 동쪽까지 분산해서 진격해 올 경우엔 약간은 성가셨을지도 모르겠군.”
제국군이 한 개의 집단으로 뭉뚱그려 접근해 왔기에 더더욱 갈첸코도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만약 뿔뿔이 흩어져서 진격해 왔더라면 숫자가 많은만큼 뒤쪽으로 침투당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기에 더 성가셨으리라.
“하지만 어쨌거나 숫자만큼은 많군. 압력에 밀리는 경우도 있긴 할 테지만 그럴 경우엔 주변 인원과 연계하면서 걱정 말고 후퇴하도록. 뒤쪽에 펼쳐진 것 또한 평원, 벽에 가로막혀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규율을 유지한 상태로 후퇴한 뒤 계속 싸우다 보면 먼저 지쳐 떨어지는 건 틀림없이 제국 쪽이다.
숫자 문제, 보급 물자 문제, 모든 게 연방에 유리했다.
“우리한테는 *해로 수송도 있으니 말입니다.”
(*해로: 바닷길)
“그래, 나도 해전은 문외한이다만 제국의 함대는 커다란 배를 내세우는 게 전부, 전술은 그야말로 해적과 다를 바 없다더군.”
지난번 제국과의 전쟁은 기습 공격을 당했던 탓에 육상전에선 일시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 위기를 헤쳐나간 게 바로 해상전에서 얻은 승리, 머릿수만 갖추면 어떻게든 굴러가는 육상전과는 다르게 함대전에선 승무원의 숙련도와 빼어난 전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마냥 커다라기만 한 배는 과녘과 다를 바 없다.
제국의 함대는 안에 적재된 대량의 병사와 물자와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지않아 육지에서도 그들은 패배하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최근엔 해군 놈들이 오만하기 짝이 없었지요. 이번엔 육지에서 먼저 박살을 내줍시다.”
“그래, 지난번과 다르게 우리는 준비를 해 왔다. 그리고…….”
갈첸코가 뒤쪽을 돌아보니 부하 중 한 명이 깔끔한 경례 자세를 보인 뒤 입을 열었다.
“고정 대형포 합계 80문, 야전포 각 병단 합계 500문, 문제없이 설치 완료했습니다.”
“흠……좋다.”
지금까지 한정된 상황을 제외하면 공성전에서밖에 사용한 적이 없던 대포를 야전에서 대대적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갈첸코가 먼저 나서 대포의 사정거리와 파괴력은 야전에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거라며 주장한 끝에 실현시킨 내용이다.
연방 육군이 보유한 포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있는 상황이다.
“사실은 2배 정도 더 끌고 오고 싶었다만. 해군한테 포를 빼앗기고 말았지.”
“어쩔 수 없습니다. 백도에선 아직까지 “대포는 공성전, 혹은 해전에서 사용하는 것.” 이라는 생각에 갇혀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갈첸코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간 50을 넘은 나보다 머리가 굳었다니……놈들의 머리는 대포탄조차 튕겨낼지도 모르겠는걸?”
사령부 전체 인원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적의 수는 많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륙에 제일의 연방군이 백만, 그 병력을 이끄는 역전의 명장. 불안,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끝내 두 군대의 거리가 좁혀지더니 적진 안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보였다.
제국군의 진군도 눈에 띄게 느려지는 중이다.
진형을 바꾸고 공격에 나서는 건 시간 문제라 할 수 있었다.
갈첸코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얘기했다.
“제군들, 이제부터 전쟁이다. 야만스러운 제국 놈들의 대가리를 박살내고 꽁무니에 불을 붙여주자꾸나!”
“““예!”””
제국군이 움직인다.
세로로 길게 늘어섰던 진형에서 분리되듯이 가로 대열이 빠져나와 일렬로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겉치레로도 훌륭하다 보기 힘든, 마치 어중이떠중이 집단이 움직이는 것마냥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리된 횡진 부대의 병력은 대략 20만, 그들의 발소리는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도 대지를 뒤흔들 정도였다.
이상한 건 그 안에 궁병이나 기병의 모습이 없다는 점이었다.
모든 이들이 잿빛 갑옷을 입고서 무언가에 쫓기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그에 맞서는 연방군도 순식간에 반격을 위해 횡진을 만들어 냈다.
이쪽은 코앞에서 지켜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깔끔한 대열, 숙련도와 사기 모두 우세하다는 점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으음…….”
하지만 갈첸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각하, 저것은……놈들도…….”
“제아무리 야만인이라 한들 같은 사람이라 이건가.”
제국군의 횡진 뒤쪽에서 마차가 끌고 있는 건 아무리 보아도 대포였다. 그것도 야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하지만 갈첸코의 참모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국의 기술은 우리의 기술력에 못 미치기에 사정거리와 정밀도 모두 우리 쪽이 우세합니다. 적의 사정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포격으로 박살을 내보이겠습니다.”
“보아하니 숫자도 기껏해야 100하고 얼추 조금 더, 우리 쪽에는 대형 고정포도 있습니다. 싸우기 시작하면 금세 결판이 날 겁니다.”
그 말에 두려움을 느낀 것처럼 제국의 대포가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갈첸코 주변 인물들이 실소를 흘렸다.
“하하하, 해군하고 똑같군. 모양만 흉내낼 줄 알고 내용물이 없어. 저 거리에선 아군한테밖에 사거리가 안 닿을 텐데 말이야.”
“대포는 그냥 구경거리 축포였던 모양입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전술에 연방 사령부의 분위기가 단숨에 누그러졌다.
이런 어리석은 연방을 상대로 질 리가 없다며 갈첸코 스스로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연방의 포병이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 할 거리까지 다가오자 갑자기 제국군이 일제히 함성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다.
“적……돌격 중입니다! 전면 돌격! 횡진의 모든 병력이 돌진해 오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갑자기 보병만 돌격을 한다고!?”
대열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병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질서를 지킨 돌격과는 거리가 먼, 20만명이 미친듯이 달려오는 광경이었다.
“놈들은 오랑캐인가!? 에잇, 당황하지 마라! 우리 쪽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는대로 포를 쏴라! 궁병대와 보병대도 준비를 시작해라!”
한 순간 동요한 연방 병사들도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포병이 불이 붙은 봉을 치켜세웠다.
“……발사!”
엄청난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 소음은 고함소리와 발소리를 없애버렸고 연방 쪽 병사조차 무심코 비명을 내지를 정도의 소리였다.
몇 초 후에 그것은 단말마로 바뀌었다.
쏟아지는 철로 된 비가 제국병을 고깃덩어리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직격을 맞은 자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그 파편에 얻어맞은 사람은 몸이 갈기갈기 찢겨 숨이 끊어졌다.
자기가 죽은 것도 이해하지 못한 수백명, 죽음의 고통을 맛보면서 숨이 끊어지는 자들은 그 숫자의 몇 배나 된다.
그야말로 지상 위에 펼쳐진 지옥이었다.
“대단하군요……대포 일제 사격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아쉬운 건 백도의 돌머리 놈들한테 이걸 보여주지 못한다는 거군. 이걸 봤으면 돌머리가 깨졌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포격 이후 한 순간 찾아온 정적, 이 정도의 파괴력을 목격하게 된 이상 사상자의 몇 배가 넘는 숫자의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
제국군의 고함소리는 잦아들었고 차례차례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건 전선 바로 직전에 멈춰있던 제국군의 대포였다.
“““으……으오오오오오――!!””””
“이 무슨! 놈들은 오랑캐……아니, 미친 건가!?”
제국병이 다시 돌진을 시작했다.
아군의 시체를 짓밟으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포병까진 거리가 멀다. 궁병, 마구 쏴라! 창병은 방어 진형을 무너트리지 마라!”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대포도 발사 준비가 완료된 것부터 사격을 시작했고 첫 사격 때와 똑같은 지옥을 만들어 냈다.
대응 사격 가능한 활도 단숨에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기병도 없는 제국병은 일방적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장은 쓰러진 제국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 차 지옥도가 만들어졌으나 놈들의 진격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그저 계속 소리지르면서 앞을 달려 거리를 좁힐 뿐이었다.
“……각하, 적은 우리 쪽 제3군단, 10만 병력의 정면에 집중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이런 이상한 일이……하는 짓이 야수와 다를 게 없지 않나!”
연방의 병력은 80만이지만 가로 일렬로 서는 어리석은 포진을 짜진 않는다.
바로 정면에 진을 치고 있는 건 2개 군단 총 20만 병력뿐, 적은 그 중 한쪽에 공격을 집중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그쪽을 돕기 위해 진형을 무너트리는 건 제국 본대와 대치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땐 아직 시기상조였다.
예전부터 제국은 병사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전투를 하기보단 숫자로 밀어붙이는 전술이 많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전투 방식을 고르진 않았다.
“어쨌건 해야 할 일은 변함없다. 대포랑 화살로 놈들을 혼란시키고 막아내라. 지금은 잘 싸우고 있지만 어느 정도 희생이 늘어나면 놈들도 제정신을 차릴 테지……그러면 도망치는 병사도 많아질 거다.”
갈첸코는 자신을 타이르듯이 힘차게 말했다.
동시에 챙, 하고 금속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 군대의 대열이 드디어 맞부딪친 것이다.
전투 초반, 이상한 압력에 짓눌려 중앙에서 우익과 좌익 전부 연방이 밀리기 시작했다.
“적은 그저 밀고 있는 게 전부다. 후퇴하면서 막아내라!”
그럼에도 연방군의 현장 지휘관은 당황하지 않는다.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는 제국병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한 채 반격을 날리는 중이다.
“제3중대 후퇴! 빈틈 사이로 보우건 부대 발사! 제2궁대는 곡사격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해라.”
“제2중대 돌진, 진형은 무너트리지 마라!”
홍수처럼 밀려드는 제국병을 상대로 연방군은 바위처럼 버텨냈다.
약간 후퇴하긴 했어도 그 기미는 조금씩 잦아들었고 점차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 나가라! 놈들은 방패랑 갑옷도 없는 병력들이다!”
아름답고 기능적인 연방병의 갑옷과 달리 제국병은 조잡한 사슬 갑옷이 대부분, 개중에는 더러운 가죽 갑옷을 장비하고 있는 자들까지 있었다.
손에는 검과 메이스 등등 제각각 다양한 무기를 갖고 있었으나 방패를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랑캐를 내쫓아버릴 생각으로 나아가라! 돌진!”
난전 중에서도 대열을 고친 창병이 일제히 창날을 내밀었다.
“우와아악!” “끄악―!”
얼굴과 갑옷 빈틈이 아니고서라도 낡은 갑옷은 날카로운 창날을 막아내지 못했고 제국병은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튀어나온 창의 진형이 두려웠던 나머지 후퇴하기 시작한 자에겐 가차없이 보우건의 볼트가 날아와 꽂혔다.
“거리를 좁혀라! 난전으로 끌고 가지 못하면 검은 닿지 않는다!”
제국 쪽 지휘관의 비명과도 같은 명령에 따라 다시 거리를 좁혔으나 이미 연방 쪽은 방어를 끝마친 상태였다.
도달하기도 전에 보우건과 창에 맞고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한 제국병들. 뒤이어 완전 무장한 중보병이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제기랄! 이 새끼, 받아라!”
“제1중보병단 전진! 적을 다시 밀어붙인다!”
제국병의 공격은 육중한 갑옷과 방패로 수비력을 높인 연방병을 쉽사리 쓰러트리지 못했다.
한편 연방병은 창과 검, 보우건으로 빈약한 장비의 보병을 계속해서 쓰러트렸다.
연방병 하나를 상대로 제국병이 10명 가까이 쓰러지는 중이다.
처음 분위기와는 완전히 뒤바뀐 지금, 연방은 모든 장소에서 우세하게 싸우고 있었다.
“냉정하게 대처해라! 적은 그냥 소리지르는 게 끝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오오――!!””
이번엔 연방 쪽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고 우익 쪽 병사가 맹렬히 반격을 시작했다.
맨 처음 충격이 사라지고 정면 충돌을 시작하면 장비와 숙련도 모두 연방 쪽이 더 강하다.
기껏 살린 숫자 우위도 전선에서 한 데 뭉쳐진 탓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병사가 늘어났고 실제로 싸우고 있는 건 비슷한 숫자의 병력뿐이었다.
버티지 못하게 된 좌익의 제국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처음 돌격했던 위치보다 더 뒤쪽으로 밀려나갔다.
동요하기 시작한 중앙과 우익도 걸음걸이를 맞추듯이 뒤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흥, 전투는 억지를 부린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거늘. 기병 부대를 우회시켜라. 궁병대는 적 후방에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어라.”
갈첸코도 전황을 지켜보면서 이 적이 붕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원숭이가 기세에 몸을 맡긴다 한들 가만히 서 있는 사자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뒤쪽으로 우회한 기병이 측면을 위협하자 제국군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됐다.
“적의 좌익이 붕괴됐습니다!!”
정찰탑 위에서 정찰병이 소리쳤다.
가장 깊이 밀려있던 우익 쪽, 다시 말해 제국의 좌익 쪽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한쪽 방향이 무너졌다는 건 부대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미 전선 부대 중 일부가 추격전을 개시하고 있었다.
“놈들을 쫓아라! 이대로 전위를 박살내야 한다!”
연방병 중 한 사람이 도망치는 적의 등을 깊숙이 베어냈다.
“꺄아아아악!!”
“뭐지!?”
터져나온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무심코 병사의 손이 멈췄다.
피를 흘리는 등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제국병, 그때 벗겨진 투구 아래에서 거무스름한 피부와 검은 장발이 겉으로 드러났다.
“여자라고……크헉!”
멍하니 서 버린 병사의 옆구리에 검이 박히더니 곧바로 여자 옆에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아직 진형 안에 남아있는 적이 있다! 철저하게 짓밟아라!”
제국군의 좌익은 완전히 붕괴되어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굉음이 울려퍼졌다.
틀림없이 대포 발사음이다.
“말도 안 돼! 난전에서 대포를 쏜 멍청이는 대체 누구냐!”
참모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적과 아군이 섞여있는 백병전 상황, 이런 때 대포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찰병은 아니라며 당혹스러워하며 보고했다.
“적……적 진영의 포병이……적의 좌익을 포격했다고……?”
“뭣이? 오사인가!?”
“이 말도 안 되는 적의 상태를 보면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정찰병의 대답은 달랐다.
“아닙니다! 제국군은……아군을……패주하는 아군을 포격 중입니다!”
“무슨 소리를……아군을……쐈다고……?”
갈첸코와 참모 모두 할말을 잃었다.
아군을 고의적으로 쏘다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 좌익……패주가 멈췄습니다. 다시 우리 쪽으로 돌진 중입니다!”
말도 안 된다며 갈첸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에 서린 것은 당혹스러움이 아니라 분노, 오랫동안 군인으로서 살아왔던 그에겐 나라를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아군은 일개 졸병이라 한들 아군, 필요하다면 작전상 버림말로 쓰는 경우도 있고 전멸할 걸 알고 있음에도 전장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군을 고의적으로 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것은 군인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금기다.
“놈들의 대포가 앞으로 나오지 않았던 건 처음부터 이걸 위해서였나……처음부터 아군을 노리고 있던 건가!”
이미 이긴 줄로만 알았던 연방군 우익은 갑자기 미친듯이 달려드는 돌진 공격에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 본진에서 움직임 발견! 새로운 부대가 출진 중입니다……장비와 대열 모두 다릅니다!”
갈첸코는 말 위에 올라타 소리쳤다.
“지금 부대는 버림말이다! 적의 본대가 올 거다, 비윤리적 전술에 당하지 마라!! 연방의 긍지를 놈들에게 보여줘라!”
그의 고함소리는 병사들이 느끼고 있던 동요심과 당혹스러움을 날려버렸다.
연방 본대도 예비 부대를 내보내 제국의 새 병력과 맞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전쟁의 흐름은 어느새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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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랜드 제국군 본진
“전노병 20만, 밀리는 중입니다.”
눈앞에 엎드린 남자가 자기 안색을 살피는 듯이 보고를 하자 다프네스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테지. 설마 전노를 내보내고서 격파하리라곤 생각한 적 없다.”
부하의 표정에 약간의 안도감이 떠오른 걸 보고 그는 커다란 몸뚱어리에 걸맞은 거대한 호령을 내렸다.
“전노 놈들이 계속 공격하게 만들어라! 마지막 한 놈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
전노라는 것은 제국의 속령에서 징용된 병사의 명칭이다.
단, 단순한 속령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제국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역은 속령으로 취급한다 한들 그 지배를 잘 따르는 한 최소한 사람 대우를 받게 된다.
징용되는 병사들도 속령군 취급을 받아 본국군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전과에 따라서 포상이나 출세도 가능하다.
반대로 전노는 마지막까지 제국에 대항하여 싸우다 힘에 굴복하여 맞이하게 된 자들의 말로다.
자세한 편성과 진형은 전무, 그저 숫자에 몸을 맡겨 적과 부딪치는 게 끝인 존재.
당연히 죽어나가는 숫자도 대단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이들은 병사가 아니라 단순히 버림말로 내다버릴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싸우게 놔두는 게 끝이 아니라 후방에는 속령과 본국에서 파견된 *독전대가 눈을 빛내고 있으며 명령 위반 혹은 도주를 시도할 시엔 뒤에서 전노를 공격한다.
(*독전대: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고 전장에서의 군인 도피를 방지하며 방해 공작원 및 탈영병을 막는 부대)
“전노놈들이여. 사람보다 못한 네놈들과 그 가족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라!”
이들은 전장뿐 아니라 평소에도 피지배 계층으로 괴로운 삶을 강요받는다.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통치는 다른 곳과 비할 바가 안 되며 위병과 영주 대관의 횡포도 묵인된다.
그러한 입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전노병이 되어 싸운 뒤 살아남는 것이다.
전노는 마치 버림말처럼 사용되지만 두 번 싸우고서 살아남으면 본인과 그 가족은 속령민 취급을 받게 된다.
단, 도망 혹은 반역을 꾀할 경우엔 가족은 전부 몰살 혹은 노예가 되어 한층 더 가혹한 대우를 받게 된다.
포격음이 울려퍼지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던 전노병이 다시 연방의 대열 쪽으로 돌진했다.
다프네스는 높이 설치된 간이 정찰탑 위에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연방 놈들은 전노에 정신이 팔렸군.”
“대장군 각하, 하지만 이미 대국은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반나절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알고 있다. 바다 쪽과 산 쪽으로 미리 보낸 별동대는 어떤가?”
“연방 쪽도 별동대를 내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각각 교전 중이긴 합니다만 아직까지 결판이 난 곳은 없습니다.”
다프네스는 옅게 미소를 짓고서 숨을 내쉬었다.
“간단히 쓰러트리진 못할 거다. 수비에 전념한 연방은 버거운 상대지. 역시 중앙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어 보이는군.”
“그럼…….”
“그래, 전노가 괴멸하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제2군부터 제6군을 내보내라. 제7군인 스테시나 장군한테는 유격을 명령, 독자적 판단에 맡기겠다……연방 대포는 우리 쪽보다 강력한 모양이니 단숨에 난전으로 끌고 간다.”
다프네스의 이 한 마디에 100만에 가까운 병사가 우글거리듯이 진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화려한 갑옷과 잘 연마된 무기와 방패……전노들의 장비와는 전혀 다른 이것이 진정한 제국병이었다.
“부관……드디어 시작이다. 속령을 확대할 때는 원래부터 불 보듯 뻔했던전장이었을 뿐……지금부터가 진짜 전쟁이라 할 수 있지.”
지난번의 굴욕적인 후퇴 이후 대제의 명령 아래 계속해서 증강된 군대, 모든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뒤떨어져있던 숙련도를 끌어올리고 장비를 갖췄다.
자잘한 국가를 지배하는 건 단순한 여흥, 모든 것은 오르가 연방을 쓰러트리기 위한 준비였다.
“예, 이 전투에 승리하고 백도로 침공하면 위대하신 다프네스 각하의 이름은 역사 속에 새겨질 겁니다.”
“그리 되면 자서전 안에 우수한 부관이 있었다고 적어두도록 하지.”
다프네스는 웃으면서 적진을 노려보았다.
지평선 끝에서 저 끝까지 펼쳐진 전장.
총사령관인 그가 지휘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이제 남은 건 각 장군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하지만 이 전투의 승패에 별다른 의미는 없지만 말이야. ……그렇지 않나, 세크리트.”
다프네스는 서쪽에 펼쳐진 바다 쪽을 보고서 전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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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군
20만의 전노병은 대부분이 사망, 혹은 부대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괴멸했다.
연방 쪽 병사가 환호성을 내지른 그때, 제국의 5개 군단, 약 100만명의 모습이 모든 이들의 시야 속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승리와 동시에 다음 전투에 들어가야 한다는 동요심은 거의 내비치지 않은 채 연방군은 다시 태세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대열이 훌륭하군. 걸음걸이도 잘 맞는 중이고. 지금까지 나왔던 놈들과는 다르다!”
“이놈들이 소문으로만 들어본 전노병이었던 건가……다음에 올 놈들을 똑같다고 여기지 마라, 버거울 거다!”
대형 포가 천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병을 내세웠나? 우리 쪽이 제대로 포격을 시작하기 전에 안쪽으로 파고들 심산인가 보군.”
“포격을 미리 봐 뒀으니 말입니다.”
이걸 위해 버림말을 내세운 건가, 하고 갈첸코는 탄식했다.
하지만 포의 가치가 사라진 건 아니다.
자유롭게 포격을 해도 된다고 명령해 둔 포격대가 사격 신호를 내릴 때마다 대형포가 불을 뿜고 적 진영 한가운데에 육중한 철구를 날려버렸다.
궁병도 부대마다 제각각 화살비를 날리는 중이었다.
몇십발 정도 날아가 말과 사람을 완전히 고깃덩어리로 바꿔버린 그때, 제국군의 진형이 단숨에 탁 트였다.
기병이 일제히 흩어져 포격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 한 것이다.
“……무작정 달려들 리가 없지. 제대로 대책을 세워뒀군.”
적이 산개해 버리면 대포는 생각만큼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심지어 선봉이 기병이니 두, 세 번 발포하기도 전에 전위 병력이 먼저 맞붙게 되리라.
“하지만……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단 말이지.”
갈첸코와 부관, 그리고 사령부 쪽 참모들이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끊임없이 불을 뿜는 고정포와 대조적으로 사정 거리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전혀 사격을 시작하지 않는 500문의 야전포가 펼쳐져 있었다.
“적, 접근 중입니다!”
“후후후, 장군들도 잘 알고 있군. 역시 연방의 장수들이야.”
가랜드의 기병은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흩어진 기병 돌격으로 연방의 방어력을 격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밀착 상태로 난전을 벌이면 대포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보병이 힘으로 밀어붙여 숫자로 압도하는 작전이다.
“돌격―――!!”
가랜드 기병이 끝내 검을 뽑아들고 고함을 내지르면서 마지막 돌격 태세에 들어갔다.
“발사!!”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연방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
사실상 바로 코앞, 대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길만한 지근거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것은 죽음의 폭풍. 제국 기병들이 피와 내장을 흩뿌리면서 말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다.
야포에서 발사한 건 거대한 철구가 아니었다.
포신에 한가득 쌓아둔 작은 철탄,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그것이 조약돌마냥 이리저리 흩어져 날아간 것이다.
위력도 낮고 사정거리도 매우 짧지만 전장을 가득 메우는 그 공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대한 철구에 상반신이 날아가는 것과 작은 철탄에 머리가 박살나는 것 모두 결과는 마찬가지다.
“뭐, 뭐냐! 지금 그건 뭐냐!”
“대포!? 하지만 알맹이는 없었는데!”
“아무튼 대열을 재정비해라, 다시 돌격을……!”
혼란에 빠진 제국병, 하지만 갈첸코와 연방 장군들 모두 그것을 가만 보고 있을만큼 만만하진 않다.
“놈들을 짓밟아라!!” “지금이 기회다!”
대열 빈틈 사이로 뛰쳐나온 연방의 기병들이 공격 중간에 멈춰서버린 제국 기병한테 역으로 돌격했다.
한층 더 커다란 혼란 상태에 빠진 기병 부대뿐 아니라 뒤쪽에서 접근 중이던 제국 보병들 대열에도 혼란이 치닫았다.
“적의 기병이 왜 역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거냐!”
“전방은 어떻게 된 거지!? 우리 쪽 기병은!?”
“흙먼지가 엄청나서 앞쪽이…….”
제국 기병이 힘차게 돌진한 탓에 흙먼지가 피어올라 뒤쪽에 있던 보병들은 앞쪽 상황을 잘 알 수 없었다.
그때, 나팔을 불면서 하얀 갑옷을 입은 연방 기병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대기병 방어진! 어서 짜라!”
“그, 그런 시간이……우와――!!”
공격할 생각으로 달려가고 있던 도중 반대로 돌격을 받아 대혼란에 빠진 병사들,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정통으로 돌격을 맞고 말았다.
말 위에서 날아오는 창과 보우건이 혼란에 빠진 제국병을 차례차례 흙으로 돌려보냈다.
전투는 전노병과 싸울 때와 비슷할 정도로 일방적인 판도로 바뀌었다.
“적진 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이대로 단숨에…….”
“안 된다! 진로를 바꾸고 경로에서 이탈하면서 다시 돌격해라!”
하지만 기병이 아무리 잘 싸운다 한들 대세가 정해지진 않는다.
제국의 공격에 참가한 군단은 5개, 제각각 십만명이 넘는 인원을 보유 중이다.
따라서 안으로 파고들어도 끝이 없기에 1만 정도 되는 기병이 단숨에 승부를 낼 수 있을만큼 만만한 진형이 아니었다.
억지로 파고든 일부 부대는 포위당해 섬멸당하기 시작했다.
“결정타가 없군……후속 제국 기병도 슬슬 혼란 상태에서 벗어날 거다. 포위당하기 전에 이탈하는 게 좋겠어.”
기병 사령관은 재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각 지휘관들에게 돌격을 중지시켰다.
그때,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적 기병……섬멸! 아군입니다! 아군의 전 군단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기병 사령관은 눈을 둥그렇게 뜬 후 사납게 미소 지었다.
“이제 전쟁이 막 시작된 참이다만……갈첸코 각하께선 용맹하신 분이지. 승부를 내시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기병대는 후퇴를 그만두고 적의 측면으로 파고들어 움직임을 봉쇄했다.
지금이 승부처, 연방의 장군부터 일개 졸병까지 모든 이들이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갈첸코 각하! 지금이 승부를 낼 때입니다!”
“알고 있다. ……말을 아끼겠다. 장군들한테 연락해라, 총 공격이라고.”
대포를 이용한 돌격 분쇄부터 반대로 시작된 기병의 돌파 작전, 생각보다 훨씬 더 잘 굴러간 그 계획은 적 기병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기습 공격으로 먹혀들어 후방에 있는 적의 군대까지도 교란시키고 있었다.
싸우기 시작한지 아직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총공격 타이밍으로 이보다 더한 상황은 그리 쉽게 생기지 않는다.
100만에 가까운 대군은 설령 한 데 모여있다 한들 전체 행동과 연락이 들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 부분에서 숙련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총공격과 그에 대응하는 방어는 전부 전군을 움직이는 커다란 움직임을 보일 필요가 있다.
“제국병은 지난번보다 숙련도가 오르긴 한 것 같다만……아직 병사의 질로는 우리가 더 유리하군.”
“물론입니다. 대륙 최강은 우리니까요.”
준비를 끝마친 연방 전군은 제각각 군단마다 전진, 기병에게 유린당하고 있던 제국군 100만명을 향해 다가갔다.
광대한 영역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전투는 격렬하기 그지없었으나, 점차 연방쪽이 전선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물론 제국 측에는 아직 100만에 가까운 예비 병력이 남아있으나 난전 속에 돌멩이를 던져봤자 혼란만 가속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몇백만명의 병력을 운용할수록 복잡한 명령은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결국 더욱 작은 단위의 지휘관이 제각각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데, 그러한 지휘관의 질은 연방 쪽이 아직까지 더 우세했다.
전투는 낮밤 없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첫 이틀 동안엔 연방이 총공격에 나선 덕에 우세하게 전투를 진행시켰다.
제국 쪽은 붕괴한 진영 자체는 없었으나 침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방어에 전념, 점차 조금씩 밀려나가고 있었다.
전황이 바뀐 것은 사흘째 아침, 제국 본국군이자 최정예 제1군이 전선에 투입된 것이었다.
제1군 20만은 연방군을 상대로 장비, 숙련도 모두 호각 이상으로 버텨냈고 전선을 단단히 유지시켰다.
이러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면 제국 측은 다시 태세를 가다듬을 수 있다.
이러한 전개는 곧 병력 차이에 우위를 가져다준다.
전황은 대치 상태에서 제국 측의 유리로 이어졌고 이번엔 연방 쪽이 점차 후퇴하기 시작했다.
나흘째 낮부터 연방은 불리하다 판단, 후퇴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패배를 의미하진 않았다.
제국군의 최대 강점은 거대한 병력이지만 동시에 약점 또한 거대한 병력. 보급에 문제가 있을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연방군은 싸우면서 천천히 후퇴를 시도해 놈들이 피로하길 기다리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연방 쪽은 뒤로 후퇴하면서 각 지점에 놔둔 물자를 회수하러 가기만 하면 되는 것에 비해, 제국 쪽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서부 평원은 과거 역사상 몇 번이나 난전의 무대로 쓰인 적이 있기 때문에 거대한 도시와 곡창 지대 또한 전무, 물자는 거의 조달할 수 없다.
연방은 싸우면서도 질서를 계속 유지한 채 사흘 동안 거북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계속해서 후퇴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아침, 치명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지금부터 군사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다들, 잘 해주고 있다.”
갈첸코는 한 데 모인 장군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쏘는 화살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싸우면 아마 2, 3일 안에는 적이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질 거다. 조금만 더 참도록 하라.”
“예! 하나 각하, 적은 생각보다 더 버거웠습니다.”
갈첸코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히 적의 붉은 군대…….”
“간첩의 보고에 따르면 그것이 적의 최정예, 제1군단이라 합니다.”
한 군단장이 가증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우리 군단이 입은 손해 중 8할은 놈들 때문입니다. 돌격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만하라, 설마 100명 단위의 마법사를 모으고 있으리라 생각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 사실만 알고 있으면 마법사 따위 대포 1문과 별반 차이는 없지. 다음은 그렇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갈첸코는 주변 이들을 둘러보고 크게 외쳤다.
“예상보다 힘든 전투가 벌어졌으나 승리의 길은 눈앞에 있다. 이대로 내구전을 계속하다 적의 피로가 쌓이면 반격에 나선다! 걱정 마라, 앞으로 지금처럼 계속 후퇴한다면 1달이 지나도 서부 평원의 북쪽일 테니. 천천히 상대하면 그만이다.”
장군들도 그 말에 동의했고 미소까지 지을만큼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해군이 먼저 선수를 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해군이 적의 왕도를 포격하고 항복해버리면 우리는 광대와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그 말이 맞다. 가랜드 대제가 용감한 사람이면 좋겠군 그래.”
모든 이들의 미소가 웃음소리가 바뀌었다.
그때 한 병사가 소리치면서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한 장군이 노성을 내질렀다.
“네이놈! 이곳은 군단장 이상의 계급만이 들어올 수 있는…….”
“긴급 전령! 도르피에스 발!”
하지만 전령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소리쳤다. 긴급 전령은 어떠한 장소라 한들 최고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도르피에스……?” “흐음, 해양 함대가 근거지로 삼은 도시 아닌가……대체 무슨 일이냐?”
전령은 숨을 고르듯이 두 번 심호흡하고서 입을 뗐다.
“도르피에스 해양 함대 사령부로부터 보고! 오늘로부터 5일 전에 치러진 가랜드 함대와의 해전으로 인해 해양 함대는 막대한 손해를 입고서 북부항으로 후퇴. 서부 평원의 제해권은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해로 보급은 완전히 차단, 적 함대는 평원 북부에 군대를 상륙시키는 중! 현재 그쪽이 있는 서쪽 총력군이 포위당할 위기 있음! 즉시 후퇴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길 바람!”
사령부 중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의자에 앉으려 했던 장군은 도중에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해군이……패배했다고……어째서 진 거냐……얼마나 진 거냐!?”
갈첸코는 병사의 멱살을 잡았다.
“저, 저는 보고 외의 일은 아는 게 없습니다!”
갈첸코는 힘없이 손을 떼어놓았다.
당연한 일이다. 전령이 보고 말고 다른 걸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가, 각하…….”
“후속 보고를 기다리겠다. 이 정도로 큰 소식인데 한 번밖에 오질 않으면 반대로 적의 계책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장군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렇게 말한 갈첸코 자신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다.
연방의 연락망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령이 진짜인 이상, 보고도 진짜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전략 전체를, 자칫하면 국가의 근간까지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는 갈첸코조차 곧바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일단이다. 병사에게 이동 준비를 시켜둬라. 별동대한테도 연락을 넣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북부 해안에 척후병을 내보내라, 되도록 많이.”
“알겠습니다 각하, 그럼 곧바로 후퇴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동 명령을 후퇴 명령이라 소리친 오보에도 지적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두 가지를 구별할 의미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밤 뒤이어 들어온 보고는 한층 더 비관적인 사실을 알렸다.
“전함 20에 대형 전투함이 200!? 한번에 그렇게 많은 수를 잃었단 말이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전령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해양 함대는 잠시 북부로 후퇴하여 전력을 증강하겠다고…….”
“증강!? 다시 만들지 않았나!? 그만한 숫자를 잃은 이상 해양 함대는 사실상 괴멸이다……! 대양이 적의 손에 떨어졌단 말이다!”
갈첸코는 곧바로 참모 전원을 불러모았다.
심야이긴 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수면을 취하는 멍청이는 한 명도 없다.
“제군들, 유감스럽게도 서부 평원에서 계속 싸울 순 없게 되었다.
바다가 제압된 이상 내일부터 보급이 끊기는 건 제국이 아니라 서부 총력군 쪽이다.
그뿐 아니라 제국은 뒤쪽에서 자유롭게 부대를 추가로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후퇴하고……연방 본국에서 적과 맞서싸우게 될 것이다.”
참모들은 다들 머리를 쥐어싸맸다.
후퇴로 인해 오랫동안 불가침 영역이었던 신성한 오르가 연방의 영토에 외적이 침입하게 된 것이다.
군인으로서 이보다 더 심한 불명예와 굴욕은 없다.
“제군들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나 또한……이 책상을 뒤집어 엎고 천막에 불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연방군은 서부 총력군 100만 외엔 아직까지 편성과 훈련 도중, 지금 여기서 우리가 전멸이라도 했다간……조국의 운명이 끝나고 말 것이다.”
갈첸코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들고 책상에 쾅 하고 내리꽂았다.
“전 군단에게 알려라! 모든 병사를 당장 깨우고 지금부터 북쪽으로 후퇴한다! 적도 이 정보를 알아채면 전력으로 쫓아올 것이다. 속도가 느린 포는 화약을 채워서 파괴시키고 짐마차와 기병은 되도록 많은 짐을 들고 가라!”
새까맸던 야영지에 차례차례 불빛이 들어오고 병사들은 횃불 빛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바쁘게 후퇴 준비를 시작했다.
“지휘관님! 대체 무슨……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총사령관님의 명령이시다, 말대꾸하지 마라!”
“하, 하지만……이보다 더 물러나면 본국으로…….”
“시끄럽다 하지 않았나!”
갈첸코가 이끄는 서부 총력군은 북쪽으로 후퇴했다.
제국군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마냥 맹렬한 추격전을 개시했고 뛰어난 연방의 지휘관들은 죽을 힘을 다해 분전했다. 결과적으로 간신히 전멸은 면했으나 그리 가볍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이었다.
일련의 전투로 연방이 입은 피해는 30만 정도, 한편 제국군은 50만의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은 버림말로 내세워진 전노병이었으나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연방은 충분, 아니 그 이상으로 싸웠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연방은 패배했다.
전장은 오르가 연방 내부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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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
“영주님 결혼 만세―!”
“4, 5, 6번째 아내 만세!”
“거근 만세!”
“으으……6명째라 하니 뭔가 복잡하네요.”
“아하하……그러게.”
“나는 기뻐. 드디어 하나가 됐잖아. 미티가 먼저 말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나는 미티와 마리아를 두 손에 끌어안고 카트린느를 품 속에 담은 채 중앙 광장에 서 있었다.
카트린느는 원래 반란 귀족의 딸로 죽은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너무 얼굴을 내비치는 건 좋지 않다.
따라서 내 망토 안에 집어넣고 끌어안는 중이다. 이러면 얼굴은 안 보일 것이다.
주변에는 내 결혼을 위해 모여있는 민중들……은 아니다.
오늘은 수확제 최종일, 중앙 광장 주변엔 딱히 아무 짓을 안 해도 도시 사람들이 모여있는 상황이다.
내가 한 건 갑자기 나타나 길거리 곡예가들의 장소를 빼앗은 게 끝이다.
민중들은 술도 들어가서 그런지 상당히 과장스럽게 내 결혼을 축하해 주는 중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거라 오늘은 피로연뿐이다만 나중에 반지를 만들어서……간단한 식도 올려야겠어.”
세 사람은 딱히 필요없다고 말했으나 분명 원하고 있을 것이다.
반지와 신전에서 간단한 맹약 정도는 하게 해 줘야지.
“결혼 축하인 것이니라―!”
“아내가 여섯 분이나 계시니 이제 바람기도 자중을……꺄악!”
체류 중인 셀레스티나와 모니카도 축하해 주었다.
이런이런,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모니카의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잖아.
“하여튼, 새롭게 맞이한 아내의 등 너머로 다른 여자의 엉덩이를 쓰다듬다니…….”
“너무 호색한이라 반대로 웃겨요.”
미티와 마리아가 웃으면서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조금 화난 모양이다.
“미안미안, 그럼 오늘은 그럴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잔뜩 귀여워해주지.”
여자들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카트린느는 혼자서 숨이 거칠어진 걸 보아 붉어진 이유가 다른 거겠지?
“그럼 나는 지금부터 아내 셋을 마구 안으러 가야겠어. 너희는 수확제 마지막 날을 마음껏 즐기라고.”
민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린다, 셋을 동시에 상대한다니.”
“멍청아, 영주님은 20명도 동시에 안는 호걸이라고.”
“근데 영주님 대단하다며? 저렇게 몸이 작은 여자가 있는데 괜찮은 건가?”
“지금까지 계속 같이 다니던 거 아니야? 그럼 이미 다 늘어났겠지. 어쩌면 엉덩이 구멍까지 말이야.”
“나도 영주님한테 안겨서 부서지고 싶다아. 분명 엄청 기분 좋을 텐데…….”
“그건 연인인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의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자들을 끌어안고 걸어간다.
후후후, 아침에 연방이 졌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내가 여자를 따먹는 데엔 아무런 영향을 못 주지.
지금부터 하루동안 온종일 진심으로 아내 세 명을 안을 것이다.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 덕분에 내 물건도 상당히 흥분한 상태다.
미티와 마리아는 몇 번이나 실신할 것이다.
카트린느는 끝까지 따라올 것 같긴 하지만 요즘엔 내 정력도 한층 더 올라갔으니 울면서 용서를 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 명을 일렬로 눕혀서 안는 게 더 나으려나?
아니면 위에 셋을 다 쌓고서 안는 것도 좋지.”
아니, 품에 안은 채 박으면서 다른 두 사람한테 내 엉덩이 구멍과 불알을 빨도록 시키는 것도 좋겠어.”
“흐하하하하하하! 꿈과 남근이 부푸는군!”
“호오, 어떤 꿈이지?”
“물론 여자지! 사랑하는 여자들과 마음껏 난교를 하는 것……그게 바로 남자의 꿈!”
“그렇게 여자가 좋은 거냐?”
“당연한 소리를, 여자한테 육봉을 박아넣고 씨를 싸지르는 것, 이게 남자가 살아가는 의미라 할 수 있지.”
“그런 짓을 하면 아이가 생길 텐데 말이야.”
“아이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고 사랑해 줘야지. 아무런 문제는 없어.”
“그게 귀족 자녀……심지어 왕립 학교에 있는 여학생이라도 말이지?”
“당연한 소리를. 하지만 잘 익은 교관도 버리긴 아까운걸. 젊든 나이를 먹었든 여자는 훌륭해.”
거기까지 말하다 이게 내 마음속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랍쇼, 이 낯익은 목소리는 누구지?
“상당히 고상한 철학을 얘기해 주긴 했다만 나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말이야.”
이 목소리의 주인은 왕도에 있어야 할 에이리히의 것이었다.
눈을 문지르고 한 번 더 살펴봤지만 에이리히였다.
“여기요.”
미티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다시 한 번 살펴봐도 에이리히였다.
얼굴에 푸른 힘줄이 솟아 있었다.
“아니, 왜 갑자기 제 영지로 오셨죠?”
“모르겠나?”
전혀 모르겠다.
“왕립 학교 건 때문에 찾아온 거다.”
“또다시 교관 역할입니까? 저도 어쨌든 영지 쪽을 관리해야 하다보니…….”
에이리히는 무표정 상태로 커다랗게 소리를 쥐어짜냈다.
“멍청한 놈! 이제 두 번 다시 너한테 교관을 맡길 것 같냐! 할 얘기가 있으니 네 저택으로 안내해라!”
아무래도 화난 모양이다.
왜지? 좀 이것저것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오늘은 이 여자 세 명을 아내로 삼은 날이라 지금부터 아이 만들기에 힘쓸 생각이었습니다만…….”
에이리히의 머리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이 색정광 놈이! 여학생을 열 명, 아니 스무 명을 넘게 임신시켜두고서 아직도 부족하단 거냐!? 닥치고 얼른 안내나 해!”
말투가 완전히 용병 시절……아니, 그것보다 더 심하다.
이렇게 욕설을 퍼부은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화를 내고 있는 건 왕립 학교 건 때문인가. 다행이다, 그거라면 아직 괜찮은 편이니까.
어느새 카트린느가 빠져나가 있었다.
에이리히도 카트린느의 얼굴은 모를 텐데 말이야.
아무래도 돌아가자마자 바로 아이를 만드는 건 좀 미뤄둬야 할 모양이다.
계속 사과하다 보면 밤에는 돌아가겠지.
달을 보면서 난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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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장미 정원
“하아…….”
전 트리에아 왕비 말스린느와 그녀의 딸 세 사람은 저택 한 지부에 살고서 별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밖이라 해도 바로 옆에 지어진 장미 정원을 가는 게 끝이긴 하지만 딱히 감금되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목숨을 구한 남자는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 “도시를 구경하러 가자.” 둥둥 여러모로 초대를 권하는 중이다.
말스린느는 그 대부분의 권유를 거절하고 있었다.
딱히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과 딸들의 목숨은 그 남자에 달려있다는 걸 생각하면 고자세로 나갈 수도 없다.
문제는 주변에 들끓는 적의였다.
라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보통 트리에아 국민이다.
정확히 따지고 들어가면 옛 아크랜드 국민, 그 인원이 트리에아의 점령을 받고 가혹한 통치 끝에 도망친 자들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 연인, 혹은 친구를 잃은 자들도 많다.
증오와 분노는 전 트리에아 왕비인 말스린느와 그녀의 딸들에게 퍼부어진다.
저택 하인들조차 내비치는 노골적인 적의, 저택의 주인이 배려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완전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도시 밖으로 나갔다간 어떤 욕설을 듣게 될지 알 수 없다.
인생 대부분을 궁정 안에서 살고 있던 자신과 딸들이 그 말에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지만 라펜에 온 게 불운하다는 건 또 아니었다.
이곳의 영주가 거둬들이지 않았더라면 남편과 함께 딸들이 모두 교수대에서 스러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를 여자로 삼고 싶겠다는 욕망이 그득한 내용이었으나.
필연적으로 여기서 대화를 나누는 건 대부분 이곳 저택의 주인 하나뿐이다.
남자는 말스린느와 딸들에게 여러모로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달리 가볍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남자에게 그녀는 점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인질 수용이라는 말 그대로 딸들의 목적을 희롱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 거였다면 첫날에 더럽혀졌으리라.
자신들은 저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 남자가 희대의 호색한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 자신 또한 뒷골목이나 빈 방에서 애첩 혹은 하인과 몸을 섞는 그의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었고 애초에 여자를 몇십명 넘게 당당히 데리고 다니는 중이다.
“그 누구도 싫어하는 것 같질 않았단 말이죠.”
식량 창고에서 몸을 섞던 메이드, 정원에서 선 채로 따먹히는 도시 처녀, 은근슬쩍 불려나가 빈 방에서 교성을 내지르는, 아마도 창부. 다들 기쁘다는 듯이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권력 때문에 굴복한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올해로 46살인 나까지 바라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남자는 말스린느 자신한테까지 곧잘 손을 대곤 했다.
키스는 물론이고 빈틈이 보이면 가슴과 엉덩이를 만져댄다.
쓰다듬는 손놀림에서 점점 강도가 올라가더니 끝내는 속옷 안으로 헤집을 기세로 몸을 만져대는 것이다.
“하지만 싫다고 하면……아니, 싫은 표정을 짓기만 해도 딱 멈춰주신단 말이죠.”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고는 미안, 당신이 매력적이라 그만, 하고 미소 짓는다.
말스린느는 이미 46, 육욕에 젖을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여자. 자기 몸을 탐내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진 않는다.
요즘 들어선 점점 멈추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곤 했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게 바로 어젯밤 보았던 소동.
“44살을 임신시켰다니……하드릿 경은 23, 어머니 뻘 나이잖아요. 진심으로 40살이 넘는 여자한테 씨를 뿌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기 배 위로 손을 두었다.
“44살이랑 46살……23살인 남자 입장에선 별다른 차이도 없겠죠? 저도 여자로 완전 끝난 건 아니고 나이에 비해선 젊다는 자부심도 있어요. 젊은 남자라 한들 조금 불장난을 치는 것 정도는……헉! 저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요!”
말스린느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확실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딸들도 차녀 브리짓을 제외하면 이미 마음을 터놓은 상황이다.
특히 셋째 펠리시가 남자를 보는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의 그것이었다.
“만약……만약이지만, 그 손놀림에 저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스린느는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상상 속에서 근육질에 듬직한 육체가 자신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었다.
전 왕비는 천박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머님? 대체 뭘하고 계신 건가요?”
“브, 브리짓!?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멍하니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런가요? 오늘 식사 말인데, 그 채소가 입에 안 맞는다고 요리사한테 불평하려구요.”
차녀 브리짓은 끝까지 전 여왕으로서 위엄을 유지하려 하는 중이다.
하인들의 적의 앞에서 무릎을 후들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세게 나가는 것이다.
“어미가 가겠습니다!”
“예? 하지만 어머님께 그런…….”
“괜찮으니 브리짓 당신은 여기 앉아있으세요. 날씨가 좋으니 일광욕이라도 즐기고 있어요.”
“예에…….”
말스린느는 빠르게 자리를 떠나갔으나, 곧바로 생각을 고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평소 사용하던 속옷을 조심스레 벗기곤 최대한 면적이 없는 물건으로 고쳐 입은 것이다.
“오, 오늘 그 분은 결혼을 발표하셨는데 저는 대체 무슨 짓을!”
말스린느는 어쩜 좋아, 어쩜 좋아, 하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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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이길 하드릿 23살 가을
지위: 고르도니아 왕국 변경백, 동부 대영주 산의 왕 드워프의 친구 아레스 왕의 친구
영주민 162000 중심 도시 라펜 24000 린트브룸 4000
사군: 5300명
보병: 3000 기병:900 궁병: 900 궁기병: 500
대포: 19문
예비역: 3000
가족
논나(정실 개과천선) 카라(측실) 멜(측실) 쿠우(애첩) 루우(애첩) 밀레(애첩) 레아(애첩) 미티(혼약) 마리아(혼약) 카트린느(혼약) 케이시(요괴) 리타(메이드장) 요구리(극작가) 피피(애첩) 앨리스(엉덩이)
세바스찬(집사) 도로테아(애첩, 왕도) 멜리사(애첩 왕도) 알마(왕도)
아이
스우 미우 예카테리나 아마타 아나스타샤(딸) 안토니오 클로드 길버트 라이너 바르톨로메이(아들) 로즈(수양딸)
부하
세리아(부관 질투) 기드(호위대) 크롤(절망 고자) 이리지나(지휘관) 루나(지휘관) 루비
마이라(치안관) 포르테(학생 감독) 그레텔(강아지)
레오폴트(참모) 아돌프(내정관) 트리스탄(군사?)
클레어&롤리(전용 상인) 슈바르츠(말) 릴리안느(여배우)
어머니 말스린느(반함) 딸 스테파니(좋아함) 브리짓(츤츤) 펠리시(반함)(인질 수용)
재산: 금화 10000닢
경험 인수: 209명 자식: 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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